‘소녀상은 귀가 아프다’…왜?

입력 2022.06.29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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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수요일, 서울 종로구 일본대사관 앞. 항상 수요시위가 열립니다. 31년째 단 한 번도 거르지 않았습니다. 오늘(29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수요시위 현장에는 '평화의 소녀상'이 있습니다. 2011년 12월 수요시위 1,000회를 기념해 세워진 뒤 지금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하지만, '평화의 소녀상' 주변은 평화와는 매우 거리가 멉니다. 서울에서, 어쩌면 대한민국에서 가장 평화롭지 않은 곳일 수 있습니다. 대체 무슨 일이 진행되고 있는 걸까요?

■ "수요일은 시끄러운 날"

2년여 만에 다시 취재하게 된 수요시위는 종전과 너무 달랐습니다. 무엇보다 시끄러웠습니다. 실제로 길을 지나는 시민들은 너나없이 귀를 막았습니다. 함께 현장에 나온 동료 취재진과의 정상적인 대화도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현장에서 만난 직장인 A 씨는 "수요일만 되면 '시끄러운 날이구나'하는 생각에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말했습니다. 또 다른 직장인도 "수요일만 되면 소음으로 일하기 어렵다"고 호소했습니다.

취재진이 현장을 찾았던 지난주, 150m 정도의 일본대사관 앞 도로에서는 시위 4건이 동시에 진행 중이었습니다. '소녀상을 지키자'는 단체 2곳, '소녀상을 철거하라'는 단체 2곳이 힘겨루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수단은 '소음 전쟁'이었습니다. 상대 집회를 방해하려 스피커를 의도적으로 돌려두고, 불필요하게 많은 스피커를 동원했습니다. 그러면 상대는 소음을 뚫고 집회를 진행하려 더 소리를 높이고, 상대는 더 스피커 볼륨을 올리는 악순환.

지난달 초에는 보기 드문 장면도 확인됐습니다. 소녀상에 반대하는 보수 성향 단체가 소음을 증폭시키려 알루미늄 파이프까지 동원했습니다. 상대 집회 방향으로 돌린 스피커에 1m 길이의 파이프를 씌워 음량을 더욱 키운 겁니다.

소리 크기뿐 아니라 내용도 문제입니다. 상대 집회에 대한 모욕적 표현, 기사에 옮겨 담기 힘든 말들도 심심찮게 들려왔습니다.

낮 시간대 집회의 소음은 평균 5분 동안 75dB(데시벨)을 넘으면 안 되지만, 경찰도 속수무책입니다. 워낙 좁은 장소에서 소음이 뒤섞이다 보니, 기준치 초과가 누구의 잘못인지 가려낼 방법도 없습니다.

평화와는 거리가 멀어진 '평화의 소녀상', 언제부터 이렇게 된 걸까요? 데이터로 추적해봤습니다.

수요시위 타임라인수요시위 타임라인

■ 2019년 12월 "소녀상 철거" 구호 등장

취재진은 2017년 1월부터 2022년 5월까지 최근 5년 치의 집회 신고 자료를 정보공개청구를 통해 받아 분석해봤습니다.

2017년 1월부터 2019년 12월까지 소녀상 인근에 집회 신고를 한 곳은 수요시위 주최 측인 '정의기억연대' 뿐이었습니다. 그러다 2020년 1월부터 '반일동상진실규명공대위'라는 단체가 '반일 동상', 그러니까 소녀상에 반대하는 집회를 신고하기 시작했습니다.

갑자기 이 집회가 나타난 이유, 2019년 12월에 힌트가 있습니다. '반일종족주의'의 공동 저자인 이우연 낙성대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이 주도한 기자회견이 열렸던 날입니다. 기자회견에 참석한 이 연구위원은 '위안부' 피해 사실에 대한 증언이 허무맹랑하고 역사를 왜곡하는 이야기라고 주장했습니다. 이 기자회견이 있고 난 뒤 2020년 1월부터 4월까지는 정의연과 반일동상공대위가 나란히 집회 신고를 했습니다.

상황이 더 격화된 건 2020년 5월부터입니다. 당시 정의연 후원금과 관련한 의혹이 불거졌습니다. 보수단체 한 곳과 소녀상을 지켜야 한다는 대학생 단체 한 곳을 포함해 모두 4곳이 집회 신고를 했습니다.

소녀상 인근 서울 종로경찰서에 신고된 집회·시위 통계. 지난해 11월 집회 제한이 완화된 뒤 신고된 집회 수는 최대 8건까지 늘었다소녀상 인근 서울 종로경찰서에 신고된 집회·시위 통계. 지난해 11월 집회 제한이 완화된 뒤 신고된 집회 수는 최대 8건까지 늘었다

■ 수요시위,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고…

이즈음, 수요시위는 28년간 지켜온 소녀상 옆에서 밀려납니다. 선착순 신고 원칙 탓이었습니다. 현행 집회·시위법은 집회·시위를 하기 전 관할 경찰서에 미리 신고하도록 하고 있는데, 이 신고는 선착순으로 접수됩니다. 다른 단체가 수요일 정오 소녀상 옆을 선점하면 그 이후에 신고한 단체는 인근의 다른 장소에서 집회해야 하는 식입니다.

수요시위 반대 단체들은 관할 경찰서에서 밤샘 대기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수요시위가 열렸던 장소를 선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결국, 2020년 6월 수요시위는 소녀상 옆에서 10여 m 떨어진 한 언론사 사옥 앞에서 열렸습니다.

2020년 6월까지 소녀상 앞에서 진행했던 수요시위는, 이후 인근 빌딩과 언론사, 주유소 앞 등으로 자리를 옮겼다.2020년 6월까지 소녀상 앞에서 진행했던 수요시위는, 이후 인근 빌딩과 언론사, 주유소 앞 등으로 자리를 옮겼다.

■ 집회 금지 풀리니 갈등 심화

지난해 11월, 코로나19로 한동안 금지됐던 시위가 1년여 만에 재개됐습니다. 한동안의 휴지기를 가졌으니 갈등이 좀 덜해지지 않았을까 했는데, 정반대였습니다.

지난해 12월 말에는 수요시위를 옹호하는 측 2곳과 반대하는 측 3곳 등 모두 5곳이 집회 신고를 했고 올해 5월 말에는 모두 9곳이 집회 신고를 했습니다. 수요시위는 소녀상 인근 빌딩 앞, 주유소 앞, 빌딩 앞차로 등으로 연이어 밀려났습니다.

갈등이 격화되자 올해 1월 수요시위 관련 단체들은 국가인권위원회에 긴급구제 신청을 냈습니다. 인권위도 이를 받아들였습니다. 경찰이 더 적극적으로 갈등을 중재하고 수요시위의 정상적 진행을 보장하라고 권고했습니다.

인권위는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자행된 반인도적 범죄에 대해 시민사회가 책임을 묻는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운동이며, 30년간 매주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이뤄진 세계 최장 집회를 적극적으로 보호해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하지만 인권위의 긴급구제 권고 조치에도 불구하고 변한 건 없었습니다.

수요시위 반대 측은 시위 장소를 해외로 옮기기도 했습니다. 이우연 낙성대경제연구소 연구위원과 주옥순 엄마부대 대표 등은 지난 26일(현지 시간) 독일 베를린을 방문해 미테구에 세워진 소녀상을 철거하라며 시위를 벌였습니다.

그래픽 : 권세라 김서린 배동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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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녀상은 귀가 아프다’…왜?
    • 입력 2022-06-29 06:00:21
    취재K

매주 수요일, 서울 종로구 일본대사관 앞. 항상 수요시위가 열립니다. 31년째 단 한 번도 거르지 않았습니다. 오늘(29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수요시위 현장에는 '평화의 소녀상'이 있습니다. 2011년 12월 수요시위 1,000회를 기념해 세워진 뒤 지금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하지만, '평화의 소녀상' 주변은 평화와는 매우 거리가 멉니다. 서울에서, 어쩌면 대한민국에서 가장 평화롭지 않은 곳일 수 있습니다. 대체 무슨 일이 진행되고 있는 걸까요?

■ "수요일은 시끄러운 날"

2년여 만에 다시 취재하게 된 수요시위는 종전과 너무 달랐습니다. 무엇보다 시끄러웠습니다. 실제로 길을 지나는 시민들은 너나없이 귀를 막았습니다. 함께 현장에 나온 동료 취재진과의 정상적인 대화도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현장에서 만난 직장인 A 씨는 "수요일만 되면 '시끄러운 날이구나'하는 생각에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말했습니다. 또 다른 직장인도 "수요일만 되면 소음으로 일하기 어렵다"고 호소했습니다.

취재진이 현장을 찾았던 지난주, 150m 정도의 일본대사관 앞 도로에서는 시위 4건이 동시에 진행 중이었습니다. '소녀상을 지키자'는 단체 2곳, '소녀상을 철거하라'는 단체 2곳이 힘겨루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수단은 '소음 전쟁'이었습니다. 상대 집회를 방해하려 스피커를 의도적으로 돌려두고, 불필요하게 많은 스피커를 동원했습니다. 그러면 상대는 소음을 뚫고 집회를 진행하려 더 소리를 높이고, 상대는 더 스피커 볼륨을 올리는 악순환.

지난달 초에는 보기 드문 장면도 확인됐습니다. 소녀상에 반대하는 보수 성향 단체가 소음을 증폭시키려 알루미늄 파이프까지 동원했습니다. 상대 집회 방향으로 돌린 스피커에 1m 길이의 파이프를 씌워 음량을 더욱 키운 겁니다.

소리 크기뿐 아니라 내용도 문제입니다. 상대 집회에 대한 모욕적 표현, 기사에 옮겨 담기 힘든 말들도 심심찮게 들려왔습니다.

낮 시간대 집회의 소음은 평균 5분 동안 75dB(데시벨)을 넘으면 안 되지만, 경찰도 속수무책입니다. 워낙 좁은 장소에서 소음이 뒤섞이다 보니, 기준치 초과가 누구의 잘못인지 가려낼 방법도 없습니다.

평화와는 거리가 멀어진 '평화의 소녀상', 언제부터 이렇게 된 걸까요? 데이터로 추적해봤습니다.

수요시위 타임라인
■ 2019년 12월 "소녀상 철거" 구호 등장

취재진은 2017년 1월부터 2022년 5월까지 최근 5년 치의 집회 신고 자료를 정보공개청구를 통해 받아 분석해봤습니다.

2017년 1월부터 2019년 12월까지 소녀상 인근에 집회 신고를 한 곳은 수요시위 주최 측인 '정의기억연대' 뿐이었습니다. 그러다 2020년 1월부터 '반일동상진실규명공대위'라는 단체가 '반일 동상', 그러니까 소녀상에 반대하는 집회를 신고하기 시작했습니다.

갑자기 이 집회가 나타난 이유, 2019년 12월에 힌트가 있습니다. '반일종족주의'의 공동 저자인 이우연 낙성대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이 주도한 기자회견이 열렸던 날입니다. 기자회견에 참석한 이 연구위원은 '위안부' 피해 사실에 대한 증언이 허무맹랑하고 역사를 왜곡하는 이야기라고 주장했습니다. 이 기자회견이 있고 난 뒤 2020년 1월부터 4월까지는 정의연과 반일동상공대위가 나란히 집회 신고를 했습니다.

상황이 더 격화된 건 2020년 5월부터입니다. 당시 정의연 후원금과 관련한 의혹이 불거졌습니다. 보수단체 한 곳과 소녀상을 지켜야 한다는 대학생 단체 한 곳을 포함해 모두 4곳이 집회 신고를 했습니다.

소녀상 인근 서울 종로경찰서에 신고된 집회·시위 통계. 지난해 11월 집회 제한이 완화된 뒤 신고된 집회 수는 최대 8건까지 늘었다
■ 수요시위,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고…

이즈음, 수요시위는 28년간 지켜온 소녀상 옆에서 밀려납니다. 선착순 신고 원칙 탓이었습니다. 현행 집회·시위법은 집회·시위를 하기 전 관할 경찰서에 미리 신고하도록 하고 있는데, 이 신고는 선착순으로 접수됩니다. 다른 단체가 수요일 정오 소녀상 옆을 선점하면 그 이후에 신고한 단체는 인근의 다른 장소에서 집회해야 하는 식입니다.

수요시위 반대 단체들은 관할 경찰서에서 밤샘 대기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수요시위가 열렸던 장소를 선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결국, 2020년 6월 수요시위는 소녀상 옆에서 10여 m 떨어진 한 언론사 사옥 앞에서 열렸습니다.

2020년 6월까지 소녀상 앞에서 진행했던 수요시위는, 이후 인근 빌딩과 언론사, 주유소 앞 등으로 자리를 옮겼다.
■ 집회 금지 풀리니 갈등 심화

지난해 11월, 코로나19로 한동안 금지됐던 시위가 1년여 만에 재개됐습니다. 한동안의 휴지기를 가졌으니 갈등이 좀 덜해지지 않았을까 했는데, 정반대였습니다.

지난해 12월 말에는 수요시위를 옹호하는 측 2곳과 반대하는 측 3곳 등 모두 5곳이 집회 신고를 했고 올해 5월 말에는 모두 9곳이 집회 신고를 했습니다. 수요시위는 소녀상 인근 빌딩 앞, 주유소 앞, 빌딩 앞차로 등으로 연이어 밀려났습니다.

갈등이 격화되자 올해 1월 수요시위 관련 단체들은 국가인권위원회에 긴급구제 신청을 냈습니다. 인권위도 이를 받아들였습니다. 경찰이 더 적극적으로 갈등을 중재하고 수요시위의 정상적 진행을 보장하라고 권고했습니다.

인권위는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자행된 반인도적 범죄에 대해 시민사회가 책임을 묻는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운동이며, 30년간 매주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이뤄진 세계 최장 집회를 적극적으로 보호해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하지만 인권위의 긴급구제 권고 조치에도 불구하고 변한 건 없었습니다.

수요시위 반대 측은 시위 장소를 해외로 옮기기도 했습니다. 이우연 낙성대경제연구소 연구위원과 주옥순 엄마부대 대표 등은 지난 26일(현지 시간) 독일 베를린을 방문해 미테구에 세워진 소녀상을 철거하라며 시위를 벌였습니다.

그래픽 : 권세라 김서린 배동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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