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마진국] 데미 무어는 왜 대바늘을 들었나…뒤집힌 美 ‘임신중지권’

입력 2022.07.03 (11:03) 수정 2022.12.26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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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더 월’(1996년)의 한 장면. 출처 네이버 영화.영화 ‘더 월’(1996년)의 한 장면. 출처 네이버 영화.

영화 '더 월'의 주인공 베키(데미 무어)는 병원에서 일하는 간호사다. 군인이던 남편을 신혼 생활 몇 달 만에 잃었다. 우울증에 시달리던 어느 날 밤, 딱 한 번 저지른 실수로 임신이 됐다. 베키는 아이를 낳지 않기로 결심하지만, 영화의 배경은 낙태가 불법이던 1952년이다. 베키가 어렵게 조언을 구한 병원 의사는 처방전을 써주지 않겠다고 잘라 말한다. "난 당신 시어머니하고도 오래 알고 지냈소. 일단 낳은 뒤 입양 보내요." 당장 직장을 잃을까 걱정하는 베키에게 그러게 좀 더 신중하지 그랬느냐는 의사의 대답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결국, 절박해진 베키는 뜨개질하는 데 쓰는 커다란 대바늘을 꺼내 든다.

베키는 대바늘을 골랐지만, 일반적으로 불법 낙태 시술을 상징하는 도구는 철제 옷걸이다. 옷걸이와 대바늘, 막대기, 머리핀 등이 실제 자가 시술에 사용됐다. 낙태를 처벌한다는 건 곧 안전하고 전문적인 의료 시술을 받을 권리를 박탈한다는 뜻이기에, 임신 중단을 원하는 여성들은 이처럼 가재 도구에 의존해 목숨을 건 시술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일부러 임신부 복용 금지 약물이나 독극물을 삼키는 일도 흔했다. 과거형으로 쓰고 있지만, 지금도 낙태가 불법인 수많은 나라에서는 비슷한 일이 반복되고 있을 터다.

영화 속 베키 역시 대바늘을 사용한 시도에 실패한 뒤 돌팔이 의사를 찾았다가 죽음을 맞는다. 마취도 소독도 없이 부엌 식탁에서 이뤄지는 불법 시술 장면은 길고 끔찍하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베키에게 돌팔이 의사는 복통과 출혈이 예상되니 심하면 병원을 가라는 말을 남기고 떠난다. 다음 장면에서 카메라는 피범벅이 돼 죽어가는 베키를 멀리서 비춘다. 전 세계에서 얼마나 많은 여성이 이런 위험천만한 시술로 목숨을 잃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지난달 27일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낙태권 옹호 시위 현장.  불법 낙태 시술을 상징하는 철제 옷걸이가 손팻말에 그려져 있다.지난달 27일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낙태권 옹호 시위 현장. 불법 낙태 시술을 상징하는 철제 옷걸이가 손팻말에 그려져 있다.

지난달 24일, 미 연방대법원이 낙태를 헌법상 권리로 인정한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뒤집으면서, 대략 3천6백만 명에 이르는 미국 여성들은 1950년대를 살던 베키와 다를 바 없는 처지가 됐다. 당장 스마트폰 생리 주기 기록 어플리케이션을 탈퇴하는 사람들이 늘었다. 앱에 기록된 개인 정보가 나중에 법정에서 낙태죄 기소 증거로 사용되는 것 아니냐는 공포 때문이다. 낙태가 합법인 주를 찾아가 시술을 받을 시간적·금전적 여유가 없는 경우가 많은 저소득층, 유색 인종일수록 공포는 더욱 심하다. 선택권이 사라진 여성들은 다시 대바늘과 옷걸이의 시대로 돌아가야 할지도 모른다.

1996년 미국 HBO 방송국이 제작한 텔레비전 영화 '더 월(원제 If These Walls Could Talk
)'은 세월이 흐른 지금도 낙태 문제를 다룬 영화를 얘기할 때 빠지지 않고 거론되는 수작이다. 1952년대와 1974년, 1996년이라는 서로 다른 시대를 배경으로 원치 않은 임신을 겪은 세 여성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베키처럼 아이를 지우려는 인물도 등장하지만, 어려운 처지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낳기로 선택하는 여성도 있다. 한 가지 답을 정해놓지 않고 여성들의 사연에 귀 기울이는 영화의 태도는 명확하다. 임신 중단이든 임신 유지든, 선택은 오롯이 당사자의 숙고에 맡길 일이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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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씨네마진국] 데미 무어는 왜 대바늘을 들었나…뒤집힌 美 ‘임신중지권’
    • 입력 2022-07-03 11:03:58
    • 수정2022-12-26 09:39:20
    씨네마진국
영화 ‘더 월’(1996년)의 한 장면. 출처 네이버 영화.
영화 '더 월'의 주인공 베키(데미 무어)는 병원에서 일하는 간호사다. 군인이던 남편을 신혼 생활 몇 달 만에 잃었다. 우울증에 시달리던 어느 날 밤, 딱 한 번 저지른 실수로 임신이 됐다. 베키는 아이를 낳지 않기로 결심하지만, 영화의 배경은 낙태가 불법이던 1952년이다. 베키가 어렵게 조언을 구한 병원 의사는 처방전을 써주지 않겠다고 잘라 말한다. "난 당신 시어머니하고도 오래 알고 지냈소. 일단 낳은 뒤 입양 보내요." 당장 직장을 잃을까 걱정하는 베키에게 그러게 좀 더 신중하지 그랬느냐는 의사의 대답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결국, 절박해진 베키는 뜨개질하는 데 쓰는 커다란 대바늘을 꺼내 든다.

베키는 대바늘을 골랐지만, 일반적으로 불법 낙태 시술을 상징하는 도구는 철제 옷걸이다. 옷걸이와 대바늘, 막대기, 머리핀 등이 실제 자가 시술에 사용됐다. 낙태를 처벌한다는 건 곧 안전하고 전문적인 의료 시술을 받을 권리를 박탈한다는 뜻이기에, 임신 중단을 원하는 여성들은 이처럼 가재 도구에 의존해 목숨을 건 시술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일부러 임신부 복용 금지 약물이나 독극물을 삼키는 일도 흔했다. 과거형으로 쓰고 있지만, 지금도 낙태가 불법인 수많은 나라에서는 비슷한 일이 반복되고 있을 터다.

영화 속 베키 역시 대바늘을 사용한 시도에 실패한 뒤 돌팔이 의사를 찾았다가 죽음을 맞는다. 마취도 소독도 없이 부엌 식탁에서 이뤄지는 불법 시술 장면은 길고 끔찍하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베키에게 돌팔이 의사는 복통과 출혈이 예상되니 심하면 병원을 가라는 말을 남기고 떠난다. 다음 장면에서 카메라는 피범벅이 돼 죽어가는 베키를 멀리서 비춘다. 전 세계에서 얼마나 많은 여성이 이런 위험천만한 시술로 목숨을 잃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지난달 27일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낙태권 옹호 시위 현장.  불법 낙태 시술을 상징하는 철제 옷걸이가 손팻말에 그려져 있다.
지난달 24일, 미 연방대법원이 낙태를 헌법상 권리로 인정한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뒤집으면서, 대략 3천6백만 명에 이르는 미국 여성들은 1950년대를 살던 베키와 다를 바 없는 처지가 됐다. 당장 스마트폰 생리 주기 기록 어플리케이션을 탈퇴하는 사람들이 늘었다. 앱에 기록된 개인 정보가 나중에 법정에서 낙태죄 기소 증거로 사용되는 것 아니냐는 공포 때문이다. 낙태가 합법인 주를 찾아가 시술을 받을 시간적·금전적 여유가 없는 경우가 많은 저소득층, 유색 인종일수록 공포는 더욱 심하다. 선택권이 사라진 여성들은 다시 대바늘과 옷걸이의 시대로 돌아가야 할지도 모른다.

1996년 미국 HBO 방송국이 제작한 텔레비전 영화 '더 월(원제 If These Walls Could Talk
)'은 세월이 흐른 지금도 낙태 문제를 다룬 영화를 얘기할 때 빠지지 않고 거론되는 수작이다. 1952년대와 1974년, 1996년이라는 서로 다른 시대를 배경으로 원치 않은 임신을 겪은 세 여성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베키처럼 아이를 지우려는 인물도 등장하지만, 어려운 처지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낳기로 선택하는 여성도 있다. 한 가지 답을 정해놓지 않고 여성들의 사연에 귀 기울이는 영화의 태도는 명확하다. 임신 중단이든 임신 유지든, 선택은 오롯이 당사자의 숙고에 맡길 일이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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