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결남] 침수된 터널 들어갔다 숨진 ‘치매 노인’…누구 책임일까?

입력 2022.07.07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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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까지 올라가는 사건은 많지 않습니다. 우리 주변의 사건들은 대부분 1, 2심에서 해결되지만 특별한 사건이 아니면 잘 알려지지 않는 게 현실이죠. 재판부의 고민 끝에 나온 생생한 하급심 최신 판례, 눈길을 끄는 판결들을 소개합니다.

갑작스런 비가 잦아진 요즘입니다. 폭우로 시설이 침수되는 사고가 없어야 할 텐데요.

완전히 침수된 지하차도 터널 내부로 지역 주민이 걸어 들어가다 미끄러져 숨졌다면, 누가 그 책임을 져야 할까요? 지하차도를 관리하는 구청일까요? 아니면 해당 주민의 책임일까요?

만약 맨눈으로 보기에도 지하차도가 완전히 물에 잠긴 상태였다면 또 어떨까요. 폭우가 내린 후 시설 침수 관련 사고와 관련해 최신 판례를 소개해 드립니다.

■ 집중 호우에 침수된 터널…미끄러져 익사

2020년 7월 29일부터 30일 사이, 대전 지역에는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졌습니다. 최대 강우량 292mm의 많은 비가 내렸고, 특히 30일 새벽 4시부터 6시까지는 시간당 최대 79mm의 집중 호우가 쏟아졌습니다.

당시 대전의 한 지하차도에는 빗물을 빼내는 용도의 배수 펌프가 3대 설치돼 있었습니다.

이 펌프들은 비가 내리기 시작했을 땐 정상적으로 작동했지만, 집중 폭우로 지하차도 전기실까지 침수되면서 동작을 멈췄습니다. 지하차도는 곧 침수됐고, 수위가 높아지기 시작했습니다.

대전광역시 동구청은 29일 오전부터 30일 오전 8시까지 9차례에 걸쳐 대전 시민들을 상대로 "외출을 자제하고 지하차도를 우회하라"는 내용의 재난문자를 발송했습니다.

또 30일 오전에는 지하차도의 양쪽 입구에 진입을 막는 통제선과 안전고깔(라바콘)을 설치했고, 주거지역 쪽 입구엔 구청 직원을 배치해 진입을 통제했습니다.

사건은 30일 오후 4시쯤 벌어졌습니다. A 씨는 구청 직원이 배치된 지하차도 입구의 반대편 입구를 통해 지하차도 내부로 들어갔습니다. 당시 지하차도 내부는 높이 2m 이상 침수되고 부유물들이 떠다니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A 씨는 지하차도 내부로 계속 걸어가다 미끄러지는 바람에 물에 빠져 숨졌습니다. A 씨는 치매로 장기요양등급을 받았고, 의사소통이 불가능하고 판단력에 장애가 있었습니다.

A 씨의 유족들은 터널을 관리하는 대전광역시 동구를 상대로 1억 1천여만 원의 손해를 배상하라며 소송을 냈습니다.


■ "터널 관리상 하자" Vs "관리 책임 다했다"

제5조(공공시설 등의 하자로 인한 책임)
① 도로ㆍ하천, 그 밖의 공공의 영조물(營造物)의 설치나 관리에 하자(瑕疵)가 있기 때문에 타인에게 손해를 발생하게 하였을 때에는 국가나 지방자치단체는 그 손해를 배상하여야 한다.

쟁점은 지방자치단체가 사고를 막기 위한 노력을 다했는지 여부였습니다.

국가배상법은 "도로·하천, 그 밖의 공공의 영조물(공공 목적으로 쓰이는 시설)의 설치·관리 하자로 타인에게 손해를 발생하게 했을 때 국가나 지방자치단체는 그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제5조)"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판례상 '관리 하자'란 '그 용도에 따라 통상 갖춰야 할 안전성을 갖추지 못한 상태'를 뜻합니다. 관리자가 그 시설의 위험성에 비례해 사회 통념상 일반적으로 요구되는 정도의 방호조치 의무를 다했는지가 그 기준입니다.

유족들은 "사고 당시 지하차도는 주변 지대보다 낮은 위치에 설치돼 있던 전기실이 침수돼 배수펌프에 전기 공급이 되지 않았고, 배수펌프 4대 중 3대가 고장 나 있었는데 이는 시설의 설치·관리상 하자"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면서 "구청 공무원들이 지하차도의 진입로에 바리케이드를 설치하고 안전요원을 배치하여 출입을 통제하는 등 재해 상황에 필요한 조치를 다하지 않았다"고도 주장했습니다.

■ 법원 "관리상 하자 없어…사고와 인과관계 인정 부족"

법원은 하지만 유족 측 주장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1심 대전지방법원은 "유족이 제출한 증거만으로는 지하차도의 설치 관리상 하자가 있다거나, 공무원들이 사고의 발생을 예견할 수 있었음에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한 조치를 취해야 할 의무를 위반한 과실이 있다고 보기 어렵다"며 청구를 기각했습니다.

법원은 "당시 내린 비는 우리나라의 평균적인 장마 강우량을 감안하더라도 예측하기 어려운 기록적인 폭우였던 것으로 보인다"면서 "사고 무렵 지하차도 전기실이 침수되어 전기 공급이 끊기기 전까진 배수펌프 3대가 모두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어, 지하차도 배수시설이 통상 갖추어야 할 안전성을 갖추지 못한 상태에 있었다고 단정할 수 없다"고 지적했습니다.

이어 구청이 재난문자를 보내고 직원을 배치한 점을 들어 "당시 기록적 폭우로 대전 전 지역에 걸쳐 다수의 침수 피해가 발생한 상황에서 피고의 가용 인력이나 물적 자원의 한계 등을 고려하면, 구청이 취한 조치가 불충분했다고 보기 어렵다"고도 밝혔습니다.

법원은 일부 관리상 하자나 공무원들의 잘못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A 씨 사망과 인과관계를 인정하기 어렵다고도 했습니다.

법원은 "사고 당시 지하차도 내부는 높이 2m 이상 침수되고 부유물들이 떠다니고 있어 육안으로 보더라도 사고 위험이 매우 높다는 것을 알 수 있었고, 입구에는 통제선과 안전고깔로 진입이 금지된다는 표시가 돼 있었다"라며 "구청으로서는 A 씨가 통제선을 걷어 올린 후 지하차도 내부로 걸어 들어갈 것이라고 예상할 수 없었다고 볼 수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이 사건은 1심에서 확정됐습니다.

백인성 법조전문기자·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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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판결남] 침수된 터널 들어갔다 숨진 ‘치매 노인’…누구 책임일까?
    • 입력 2022-07-07 17:50:45
    취재후·사건후

대법원까지 올라가는 사건은 많지 않습니다. 우리 주변의 사건들은 대부분 1, 2심에서 해결되지만 특별한 사건이 아니면 잘 알려지지 않는 게 현실이죠. 재판부의 고민 끝에 나온 생생한 하급심 최신 판례, 눈길을 끄는 판결들을 소개합니다.

갑작스런 비가 잦아진 요즘입니다. 폭우로 시설이 침수되는 사고가 없어야 할 텐데요.

완전히 침수된 지하차도 터널 내부로 지역 주민이 걸어 들어가다 미끄러져 숨졌다면, 누가 그 책임을 져야 할까요? 지하차도를 관리하는 구청일까요? 아니면 해당 주민의 책임일까요?

만약 맨눈으로 보기에도 지하차도가 완전히 물에 잠긴 상태였다면 또 어떨까요. 폭우가 내린 후 시설 침수 관련 사고와 관련해 최신 판례를 소개해 드립니다.

■ 집중 호우에 침수된 터널…미끄러져 익사

2020년 7월 29일부터 30일 사이, 대전 지역에는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졌습니다. 최대 강우량 292mm의 많은 비가 내렸고, 특히 30일 새벽 4시부터 6시까지는 시간당 최대 79mm의 집중 호우가 쏟아졌습니다.

당시 대전의 한 지하차도에는 빗물을 빼내는 용도의 배수 펌프가 3대 설치돼 있었습니다.

이 펌프들은 비가 내리기 시작했을 땐 정상적으로 작동했지만, 집중 폭우로 지하차도 전기실까지 침수되면서 동작을 멈췄습니다. 지하차도는 곧 침수됐고, 수위가 높아지기 시작했습니다.

대전광역시 동구청은 29일 오전부터 30일 오전 8시까지 9차례에 걸쳐 대전 시민들을 상대로 "외출을 자제하고 지하차도를 우회하라"는 내용의 재난문자를 발송했습니다.

또 30일 오전에는 지하차도의 양쪽 입구에 진입을 막는 통제선과 안전고깔(라바콘)을 설치했고, 주거지역 쪽 입구엔 구청 직원을 배치해 진입을 통제했습니다.

사건은 30일 오후 4시쯤 벌어졌습니다. A 씨는 구청 직원이 배치된 지하차도 입구의 반대편 입구를 통해 지하차도 내부로 들어갔습니다. 당시 지하차도 내부는 높이 2m 이상 침수되고 부유물들이 떠다니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A 씨는 지하차도 내부로 계속 걸어가다 미끄러지는 바람에 물에 빠져 숨졌습니다. A 씨는 치매로 장기요양등급을 받았고, 의사소통이 불가능하고 판단력에 장애가 있었습니다.

A 씨의 유족들은 터널을 관리하는 대전광역시 동구를 상대로 1억 1천여만 원의 손해를 배상하라며 소송을 냈습니다.


■ "터널 관리상 하자" Vs "관리 책임 다했다"

제5조(공공시설 등의 하자로 인한 책임)
① 도로ㆍ하천, 그 밖의 공공의 영조물(營造物)의 설치나 관리에 하자(瑕疵)가 있기 때문에 타인에게 손해를 발생하게 하였을 때에는 국가나 지방자치단체는 그 손해를 배상하여야 한다.

쟁점은 지방자치단체가 사고를 막기 위한 노력을 다했는지 여부였습니다.

국가배상법은 "도로·하천, 그 밖의 공공의 영조물(공공 목적으로 쓰이는 시설)의 설치·관리 하자로 타인에게 손해를 발생하게 했을 때 국가나 지방자치단체는 그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제5조)"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판례상 '관리 하자'란 '그 용도에 따라 통상 갖춰야 할 안전성을 갖추지 못한 상태'를 뜻합니다. 관리자가 그 시설의 위험성에 비례해 사회 통념상 일반적으로 요구되는 정도의 방호조치 의무를 다했는지가 그 기준입니다.

유족들은 "사고 당시 지하차도는 주변 지대보다 낮은 위치에 설치돼 있던 전기실이 침수돼 배수펌프에 전기 공급이 되지 않았고, 배수펌프 4대 중 3대가 고장 나 있었는데 이는 시설의 설치·관리상 하자"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면서 "구청 공무원들이 지하차도의 진입로에 바리케이드를 설치하고 안전요원을 배치하여 출입을 통제하는 등 재해 상황에 필요한 조치를 다하지 않았다"고도 주장했습니다.

■ 법원 "관리상 하자 없어…사고와 인과관계 인정 부족"

법원은 하지만 유족 측 주장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1심 대전지방법원은 "유족이 제출한 증거만으로는 지하차도의 설치 관리상 하자가 있다거나, 공무원들이 사고의 발생을 예견할 수 있었음에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한 조치를 취해야 할 의무를 위반한 과실이 있다고 보기 어렵다"며 청구를 기각했습니다.

법원은 "당시 내린 비는 우리나라의 평균적인 장마 강우량을 감안하더라도 예측하기 어려운 기록적인 폭우였던 것으로 보인다"면서 "사고 무렵 지하차도 전기실이 침수되어 전기 공급이 끊기기 전까진 배수펌프 3대가 모두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어, 지하차도 배수시설이 통상 갖추어야 할 안전성을 갖추지 못한 상태에 있었다고 단정할 수 없다"고 지적했습니다.

이어 구청이 재난문자를 보내고 직원을 배치한 점을 들어 "당시 기록적 폭우로 대전 전 지역에 걸쳐 다수의 침수 피해가 발생한 상황에서 피고의 가용 인력이나 물적 자원의 한계 등을 고려하면, 구청이 취한 조치가 불충분했다고 보기 어렵다"고도 밝혔습니다.

법원은 일부 관리상 하자나 공무원들의 잘못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A 씨 사망과 인과관계를 인정하기 어렵다고도 했습니다.

법원은 "사고 당시 지하차도 내부는 높이 2m 이상 침수되고 부유물들이 떠다니고 있어 육안으로 보더라도 사고 위험이 매우 높다는 것을 알 수 있었고, 입구에는 통제선과 안전고깔로 진입이 금지된다는 표시가 돼 있었다"라며 "구청으로서는 A 씨가 통제선을 걷어 올린 후 지하차도 내부로 걸어 들어갈 것이라고 예상할 수 없었다고 볼 수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이 사건은 1심에서 확정됐습니다.

백인성 법조전문기자·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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