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다시 찾은 국회…“또 누가 죽어야 일할 건가요?”

입력 2022.07.17 (10:06) 수정 2022.07.25 (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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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 본회의장에서 ‘윤창호 법’ 표결 모습을 지켜보는 친구 이영광 씨(2018년 11월)국회 본회의장에서 ‘윤창호 법’ 표결 모습을 지켜보는 친구 이영광 씨(2018년 11월)

2018년 11월 29일, 국회 본회의장 중계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청년 한 명이 있었습니다. 도로교통법 개정안, '윤창호 법'이 통과되는 모습을 본 뒤에야 자리를 뜬 이 청년, 당시 취재진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형제처럼 사랑했던 창호를 비롯한 수많은 음주운전으로 목숨을 잃은 분들의 목숨값으로 제정된 법안입니다." - 이영광(故 윤창호 씨 친구)

74주년 제헌절을 사흘 앞둔 지난 14일, 이영광 씨는 4년 만에 다시 국회를 찾았습니다. 의원들을 만나 '윤창호법' 대체 입법을 요구할 거라고 했습니다. 이 씨가 4년 만에 다시 국회에서 입법 얘기를 꺼내게 된 건 무슨 사연에서일까요?

[연관기사] “감형받을 수 있나요?”…입법 공백이 부른 혼란 (KBS 뉴스9, 2022.07.15)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5510685

■ 입법은 71일만, 보완은 8개월간 지지부진

윤창호 법은 2번 이상 음주운전으로 적발된 사람에게 처벌을 가중하도록 하는 법입니다. 2018년, 군에서 휴가를 나왔다가 음주운전 사고로 숨진 고(故) 윤창호 씨의 죽음을 계기로 입법 논의가 시작됐습니다. 윤 씨 가족과 친구들이 적극적으로 공론화한 결과, 71일 만에 법안이 국회를 통과했습니다.

지난해 11월과 올해 5월, 헌법재판소는 윤창호 법에 두 차례 위헌 결정을 내렸습니다. 음주운전을 두 번 이상 했더라도, 아주 오래전 범죄까지 합산해서 가중 처벌하는 건 위헌이라는 겁니다. 더 구체적인 기준이 담긴 대체입법이 시급한 상황이지만, 법안 6건은 아직 상임위 단계에 멈춰있습니다.

이영광 씨는 "헌법재판관들도 윤창호 법에 대한 기술적인 문제를 지적한 것이지, 법 자체를 부정한 게 아니어서 후속조치에 기대를 걸었다"며 "4년 전보다 국민적 관심이 떨어져서인지 8개월이 지나는 동안 국회에서 보완 입법에 속도를 내지 않아 안타까운 마음이 크다"고 말했습니다.

■ 국회에 막힌 대안…'입법 공백' 40건

헌재 결정 이후, 국회 입법조사처는 윤창호 법 후속 법안에 음주운전을 막을 사전 대책까지 담겨야 한다고 제언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미국 등에서 활용 중인 '음주 시동 잠금장치'를 꼽았는데, 운전자에게 알코올이 감지되면 시동을 걸지 못하게 막는 장치입니다.

경찰청은 올해부터 음주 전력이 있는 운전자의 차량에 이런 장치를 설치하는 시범사업을 시작할 계획이었지만, 국회에서 관련 법이 통과되지 않아 예산을 받지 못했습니다. 대체 입법이 미뤄지는 것과 동시에, 현실에서 상습 음주운전을 규제할 대안까지 함께 막혀 있는 겁니다.

윤창호 법처럼 헌재에서 위헌 결정이 내려졌거나, 헌법불합치 결정이 난 사례 중 아직 보완 입법이 되지 않은 법안은 모두 40건입니다. 66년 만에 폐지됐지만 3년간 입법 공백 상태인 낙태죄, 오는 9월 법 자체가 사라질 처지가 됐는데 후속 입법 논의조차 제대로 못 한 국적법 등이 여기에 포함됩니다.

지난 14일, 국회 앞마당에서 취재진과 인터뷰 중인 이영광 씨지난 14일, 국회 앞마당에서 취재진과 인터뷰 중인 이영광 씨

■ 제헌절까지 교착상태…"또 누가 죽어야 일하나"

인터뷰가 진행되는 동안 이영광 씨와 국회 앞마당을 걸었습니다. 이 씨는 4년 만에 본 국회가 달라진 게 없고, 현실도 바뀐 게 없어 씁쓸하다고 했습니다. 가장 안타까운 건 "또 다른 누군가가 다치고, 또 다른 누군가가 죽어야 현실에서 추진력을 얻고, 국회가 일하는 현실"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날 이 씨는 국회 인근에서 윤창호 법 대체 법안을 발의한 모 의원을 만났습니다. 보완 입법을 서둘러달라는 이 씨의 요청에 해당 의원은 "원 구성이 되면 1호 법안으로 처리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여야는 당초 제헌절인 오늘까지 국회를 정상화하겠다 약속했지만 '원 구성' 협상은 여전히 교착상태에 머물고 있습니다. 개점 휴업 상태인 국회에서는 오늘 74주년 제헌절 경축식이 열립니다.

헌법재판소 연구관 출신인 노희범 변호사는 "입법자인 국회가 효력이 다한 법률을 개정하지 않은 경우엔, 법에 의해 보호받던 국민의 권리가 보장받지 못하는 피해가 생긴다"며 국회가 제 역할을 다할 것을 주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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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취재후] 다시 찾은 국회…“또 누가 죽어야 일할 건가요?”
    • 입력 2022-07-17 10:06:30
    • 수정2022-07-25 08:16:20
    취재후·사건후
국회 본회의장에서 ‘윤창호 법’ 표결 모습을 지켜보는 친구 이영광 씨(2018년 11월)
2018년 11월 29일, 국회 본회의장 중계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청년 한 명이 있었습니다. 도로교통법 개정안, '윤창호 법'이 통과되는 모습을 본 뒤에야 자리를 뜬 이 청년, 당시 취재진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형제처럼 사랑했던 창호를 비롯한 수많은 음주운전으로 목숨을 잃은 분들의 목숨값으로 제정된 법안입니다." - 이영광(故 윤창호 씨 친구)

74주년 제헌절을 사흘 앞둔 지난 14일, 이영광 씨는 4년 만에 다시 국회를 찾았습니다. 의원들을 만나 '윤창호법' 대체 입법을 요구할 거라고 했습니다. 이 씨가 4년 만에 다시 국회에서 입법 얘기를 꺼내게 된 건 무슨 사연에서일까요?

[연관기사] “감형받을 수 있나요?”…입법 공백이 부른 혼란 (KBS 뉴스9, 2022.07.15)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5510685

■ 입법은 71일만, 보완은 8개월간 지지부진

윤창호 법은 2번 이상 음주운전으로 적발된 사람에게 처벌을 가중하도록 하는 법입니다. 2018년, 군에서 휴가를 나왔다가 음주운전 사고로 숨진 고(故) 윤창호 씨의 죽음을 계기로 입법 논의가 시작됐습니다. 윤 씨 가족과 친구들이 적극적으로 공론화한 결과, 71일 만에 법안이 국회를 통과했습니다.

지난해 11월과 올해 5월, 헌법재판소는 윤창호 법에 두 차례 위헌 결정을 내렸습니다. 음주운전을 두 번 이상 했더라도, 아주 오래전 범죄까지 합산해서 가중 처벌하는 건 위헌이라는 겁니다. 더 구체적인 기준이 담긴 대체입법이 시급한 상황이지만, 법안 6건은 아직 상임위 단계에 멈춰있습니다.

이영광 씨는 "헌법재판관들도 윤창호 법에 대한 기술적인 문제를 지적한 것이지, 법 자체를 부정한 게 아니어서 후속조치에 기대를 걸었다"며 "4년 전보다 국민적 관심이 떨어져서인지 8개월이 지나는 동안 국회에서 보완 입법에 속도를 내지 않아 안타까운 마음이 크다"고 말했습니다.

■ 국회에 막힌 대안…'입법 공백' 40건

헌재 결정 이후, 국회 입법조사처는 윤창호 법 후속 법안에 음주운전을 막을 사전 대책까지 담겨야 한다고 제언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미국 등에서 활용 중인 '음주 시동 잠금장치'를 꼽았는데, 운전자에게 알코올이 감지되면 시동을 걸지 못하게 막는 장치입니다.

경찰청은 올해부터 음주 전력이 있는 운전자의 차량에 이런 장치를 설치하는 시범사업을 시작할 계획이었지만, 국회에서 관련 법이 통과되지 않아 예산을 받지 못했습니다. 대체 입법이 미뤄지는 것과 동시에, 현실에서 상습 음주운전을 규제할 대안까지 함께 막혀 있는 겁니다.

윤창호 법처럼 헌재에서 위헌 결정이 내려졌거나, 헌법불합치 결정이 난 사례 중 아직 보완 입법이 되지 않은 법안은 모두 40건입니다. 66년 만에 폐지됐지만 3년간 입법 공백 상태인 낙태죄, 오는 9월 법 자체가 사라질 처지가 됐는데 후속 입법 논의조차 제대로 못 한 국적법 등이 여기에 포함됩니다.

지난 14일, 국회 앞마당에서 취재진과 인터뷰 중인 이영광 씨
■ 제헌절까지 교착상태…"또 누가 죽어야 일하나"

인터뷰가 진행되는 동안 이영광 씨와 국회 앞마당을 걸었습니다. 이 씨는 4년 만에 본 국회가 달라진 게 없고, 현실도 바뀐 게 없어 씁쓸하다고 했습니다. 가장 안타까운 건 "또 다른 누군가가 다치고, 또 다른 누군가가 죽어야 현실에서 추진력을 얻고, 국회가 일하는 현실"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날 이 씨는 국회 인근에서 윤창호 법 대체 법안을 발의한 모 의원을 만났습니다. 보완 입법을 서둘러달라는 이 씨의 요청에 해당 의원은 "원 구성이 되면 1호 법안으로 처리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여야는 당초 제헌절인 오늘까지 국회를 정상화하겠다 약속했지만 '원 구성' 협상은 여전히 교착상태에 머물고 있습니다. 개점 휴업 상태인 국회에서는 오늘 74주년 제헌절 경축식이 열립니다.

헌법재판소 연구관 출신인 노희범 변호사는 "입법자인 국회가 효력이 다한 법률을 개정하지 않은 경우엔, 법에 의해 보호받던 국민의 권리가 보장받지 못하는 피해가 생긴다"며 국회가 제 역할을 다할 것을 주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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