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납치돼 눈 떠보니 남한”…66년 만에 드러난 진실

입력 2022.08.10 (13:40) 수정 2022.08.10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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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의 상흔이 가시지 않은 1956년 10월 10일.

북한 황해도 용연읍에 살던 19살 김주삼 씨 집에 우리 공군 제25 첩보부대 대원 3명이 들어왔습니다.

이들은 총으로 위협해 잠자던 김 씨를 서해 해변으로 끌고 가 강제로 목선에 태웠습니다.

김 씨가 눈을 떠 보니, 남쪽 땅 백령도. 이후 김 씨는 서울 구로구에 있던 공군 첩보대 기지로 이송됐습니다.

그렇게 낯선 남쪽 군 부대에서의 생활이 시작됐습니다. 군은 수시로 김 씨를 신문하며, 북한군의 정보를 꼬치꼬치 물었습니다. 김 씨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상합니다.

"고향에 군부대가 어디 있는지 묻고, 중요 시설은 어디 있는지 묻고. 답하고 나면 다음날 불러서 또 같은 것을 묻고. 그렇게 세월이 다 갔지."
- 김주삼 씨

1년 정도 계속된 신문이 끝나자, 김 씨는 군부대에서 각종 노역을 하며 살아갔습니다. 물론 보수는 한 푼도 없었습니다.

어린 동생들이 남겨진, 북쪽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단 말도 꺼내기 힘든 엄혹한 상황.

같은 부대에 있던 우리 군 병사들도 김 씨의 고초를, 지금까지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한밤 중에 자다 일어나서 우연히 보면, (김주삼 씨가) 매일 북쪽의 철책을 붙잡고 울었어.
북에서 끌려와서 군번도 없이 우리 부대에서 막내 생활을 한 것이지. 같은 인간인데, 너무 연민이 들고..."
- 목격자, 임중철 씨

그렇게 4년이 흘러서야, 군은 김 씨를 풀어줬습니다.

하지만 고향 땅은 돌아갈 수 없었고, 연고도 없는 남쪽 땅에서 살아가야 했습니다.

하루하루 생활도 여의치 않았지만, 더 힘든 건 경찰의 조직적 사찰이었다고 김 씨는 말합니다.

경찰관이 불시에 신발도 벗지 않고 방안까지 들어와서, 북한과 접촉하고 있느냐 위압적으로 묻곤 했다는 겁니다.

남한으로 강제로 이송되고, 군에서 위협과 신문을 당하고, 경찰의 일상적 사찰까지….

김 씨는 국가에 대한 극도의 공포를 느꼈고, 북에 두고 온 가족을 다시 찾을 엄두조차 내지 못했습니다.

"이산 가족 상봉이 있어도 신청할 생각도 못했어. 어차피 난 안 될 것 같았어.
어머니는 이미 돌아가셨을 것 같지? 동생들이 살아 있어 어디 사는지 알 수 있다면
편지 한 통이라도 쓸 수 있다면 좋겠어."
-김주삼 씨


어느새 여든이 넘은 한 많은 삶.

김 씨는 자신의 기구한 삶을 인정받으려고 2기 진실과화해위원회에 진실 규명 신청을 했습니다. 진화위는 국방부 등을 확인해, 김 씨 진술이 사실임을 밝혀냈습니다.

그리고 김 씨를 납치하고 억류한 건, 신체의 자유· 거주 이전의 자유를 침해한 중대한 인권침해라고 판단했습니다.

진화위는 김 씨의 명예 회복을 위한 적절한 조치와 진심 어린 사과, 북한의 가족과 상봉할 기회를 제공하라고 정부에 권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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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납치돼 눈 떠보니 남한”…66년 만에 드러난 진실
    • 입력 2022-08-10 13:40:25
    • 수정2022-08-10 14:01:53
    취재K

한국전쟁의 상흔이 가시지 않은 1956년 10월 10일.

북한 황해도 용연읍에 살던 19살 김주삼 씨 집에 우리 공군 제25 첩보부대 대원 3명이 들어왔습니다.

이들은 총으로 위협해 잠자던 김 씨를 서해 해변으로 끌고 가 강제로 목선에 태웠습니다.

김 씨가 눈을 떠 보니, 남쪽 땅 백령도. 이후 김 씨는 서울 구로구에 있던 공군 첩보대 기지로 이송됐습니다.

그렇게 낯선 남쪽 군 부대에서의 생활이 시작됐습니다. 군은 수시로 김 씨를 신문하며, 북한군의 정보를 꼬치꼬치 물었습니다. 김 씨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상합니다.

"고향에 군부대가 어디 있는지 묻고, 중요 시설은 어디 있는지 묻고. 답하고 나면 다음날 불러서 또 같은 것을 묻고. 그렇게 세월이 다 갔지."
- 김주삼 씨

1년 정도 계속된 신문이 끝나자, 김 씨는 군부대에서 각종 노역을 하며 살아갔습니다. 물론 보수는 한 푼도 없었습니다.

어린 동생들이 남겨진, 북쪽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단 말도 꺼내기 힘든 엄혹한 상황.

같은 부대에 있던 우리 군 병사들도 김 씨의 고초를, 지금까지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한밤 중에 자다 일어나서 우연히 보면, (김주삼 씨가) 매일 북쪽의 철책을 붙잡고 울었어.
북에서 끌려와서 군번도 없이 우리 부대에서 막내 생활을 한 것이지. 같은 인간인데, 너무 연민이 들고..."
- 목격자, 임중철 씨

그렇게 4년이 흘러서야, 군은 김 씨를 풀어줬습니다.

하지만 고향 땅은 돌아갈 수 없었고, 연고도 없는 남쪽 땅에서 살아가야 했습니다.

하루하루 생활도 여의치 않았지만, 더 힘든 건 경찰의 조직적 사찰이었다고 김 씨는 말합니다.

경찰관이 불시에 신발도 벗지 않고 방안까지 들어와서, 북한과 접촉하고 있느냐 위압적으로 묻곤 했다는 겁니다.

남한으로 강제로 이송되고, 군에서 위협과 신문을 당하고, 경찰의 일상적 사찰까지….

김 씨는 국가에 대한 극도의 공포를 느꼈고, 북에 두고 온 가족을 다시 찾을 엄두조차 내지 못했습니다.

"이산 가족 상봉이 있어도 신청할 생각도 못했어. 어차피 난 안 될 것 같았어.
어머니는 이미 돌아가셨을 것 같지? 동생들이 살아 있어 어디 사는지 알 수 있다면
편지 한 통이라도 쓸 수 있다면 좋겠어."
-김주삼 씨


어느새 여든이 넘은 한 많은 삶.

김 씨는 자신의 기구한 삶을 인정받으려고 2기 진실과화해위원회에 진실 규명 신청을 했습니다. 진화위는 국방부 등을 확인해, 김 씨 진술이 사실임을 밝혀냈습니다.

그리고 김 씨를 납치하고 억류한 건, 신체의 자유· 거주 이전의 자유를 침해한 중대한 인권침해라고 판단했습니다.

진화위는 김 씨의 명예 회복을 위한 적절한 조치와 진심 어린 사과, 북한의 가족과 상봉할 기회를 제공하라고 정부에 권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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