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 살린 고종의 전화 한 통…‘덕률풍’으로 걸었다

입력 2022.08.16 (17:43) 수정 2022.08.16 (1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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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년 10월, 인천 형무소에 다급한 전화 한 통이 걸려옵니다. 발신자는 다름 아닌 고종 황제. 당시 인천형무소에는 일본군에 살해된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기 위해 격투를 벌이다 일본인을 살해한 청년 김창수의 사형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각 죄수의 심문서를 보고받던 고종이 김창수의 '국모보수(國母報讐:국모의 원수를 갚다)'라는 죄목을 발견했고, 형무소에 전화를 걸어 죄를 한 단계 감하도록 명했습니다. 서울과 인천 사이에 전화가 설치된 것은 사형일로부터 불과 사흘 전으로, 조금만 늦었더라도 김창수의 목숨을 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김창수는 김구 선생의 젊었을 적 이름입니다.

"대군주(고종)께서 친히 전화하신 것만은 사실이었다. 이상하게 생각되는 것은 그때 경성부 안에는 이미 전화가 가설된지 오래였으나, 인천까지의 전화 가설공사가 완공된 지 3일째 되는 병신년 8월 26일(양력 1896년 10월 2일)의 일이었다. 만에 하나 그때까지 전화 준공이 못 되었다면, 바로 사형이 집행되었을 거라고들 하였다"
- 백범일지 중에서(돌베개출판사)

KT가 오늘(16일) 민영화 20주년을 맞아 강원도 원주연수원 내 KT통신사료관을 처음으로 언론에 공개했습니다. 통신사료관은 1993년 9월 서울 용산에 문을 연 뒤 2015년 원주로 옮겨 운영되고 있습니다. 등록문화재를 8점을 포함해 6,000점 넘는 통신사료를 보관하고 있는 KT 원주 통신사료관을 둘러보며 역사와 함께 발전해온 통신 기기들을 살펴봤습니다.

1800년대 후반부터 1900년대 초반까지 사용된 최초의 전화기 ‘덕률풍’1800년대 후반부터 1900년대 초반까지 사용된 최초의 전화기 ‘덕률풍’

■ 전화 울리면 '큰절하고 무릎 꿇고'…우리나라 최초의 전화기

1896년 고종 황제가 머물던 덕수궁에 우리나라 최초로 설치된 전화기는 '덕률풍'입니다. 전화기의 영어 이름인 '텔레폰(telephone)'과 비슷한 한자음을 갖다 붙인 것인데, 이 덕률풍으로부터 우리나라 통신의 역사가 시작됐습니다.

당시 임금이 전화로 행정 업무를 지시했던 만큼 전화는 곧 임금을 의미했습니다. 전화가 오면 신하들은 전화 방향으로 큰 절을 네 번 올린 뒤 무릎을 꿇은 자세로 엎드려 받았다고 합니다.

1902년에는 공중전화가 개설되며 일반인도 전화기를 이용할 수 있게 됐습니다. 다만 이용요금은 5분 통화에 50전, 쌀 다섯 가마니 값에 해당할 정도로 비쌌습니다.

1900년대 초 사용된 전화 교환 설비1900년대 초 사용된 전화 교환 설비

■ '재산목록 1호'에서 '1가구 1전화'까지

초기의 전화기는 손으로 직접 발신자와 수신자의 전화회선을 이어주는 교환원을 통해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교환기에 연결할 수 있는 회선 수는 한정돼 있었고, 이런 수동 방식으로는 급증하는 전화 수요를 감당하기 어려웠습니다.

1970년대에 들어서자 만성적인 전화 적체가 사회 문제로 떠올랐습니다. 천정부지로 뛰는 전화기 값에 전화기를 사고 팔거나 전·월세를 놔주는 '전화상'이 서울에만 600여 곳이나 성업했을 정도였습니다.

전화 한 대가 270만 원까지 치솟기도 했는데, 당시 서울 시내 50평짜리 집값이 230만 원 안팎이었던 걸 감안하면 터무니없이 높은 가격이었습니다.

1986년 상용화된 우리나라 독자기술로 만든 전자교환기 ‘TDX-1’1986년 상용화된 우리나라 독자기술로 만든 전자교환기 ‘TDX-1’

1986년 우리나라가 독자 개발한 전자 교환기 'TDX-1'가 상용화되며 통신 역사는 새로운 국면을 맞습니다. 외국산 교환기를 사용하던 이전까지는 유지 보수의 어려움 등으로 수요에 맞게 전화를 공급할 수 없었다면, 자체 기술로 만든 새로운 전자 교환기를 통해 전국 각지에 전화 시설을 보급하고, 지역·거리 간 불평등을 해소할 수 있게 된 겁니다.

'TDX-1'의 도움으로 전화기가 집안의 '재산목록 1호'였던 시기를 지나, 1987년에는 전국 1,000만 회선을 구축하며 '1가구 1전화' 시대를 맞았습니다.

1990년대 후반 인기를 끈 무선호출기 ‘삐삐’1990년대 후반 인기를 끈 무선호출기 ‘삐삐’

■ '8282' 삐삐에서 핸드폰까지

사료관에서는 이동통신의 변천사도 엿볼 수 있었습니다. 1982년 230여 명에 불과했던 '삐삐' 가입자는 10년 만에 145만 2,000명, 1997년에는 1,500만 명 이상으로 늘어 3명당 1명꼴로 삐삐를 사용했습니다.

'8282(빨리빨리)', '1004(천사)'와 같은 숫자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었던 시기였습니다.


삐삐가 대중화되며 공중전화 보급도 가속화해, 1997년엔 423,000여 대까지 늘었습니다.

아날로그가 아닌 디지털 방식을 택한 2세대(2G) 이동통신 기술 CDMA(코드분할다중접속)가 상용화되며 이동전화도 본격적으로 보급됐고, 음성뿐 아니라 문자를 전송할 수 있다는 장점에 이동전화는 날개를 단 듯 확산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1999년엔 이동전화 가입자 수가 유선전화를 앞질렀습니다.

이날 해설을 맡은 이인학 정보통신연구소장은 "원주 사료관에 보관된 통신 사료들은 우리나라 정보통신 흐름에 따른 시대상과 국민의 생활상을 한눈에 볼 수 있어 역사적 가치가 매우 높다"고 평가했습니다.

KT 홍보실 변환 차장은 "기술 발달에 따라 통신시설들이 소형화, 간소화되면서 철거되는 곳들이 있어 지금도 그런 사료들을 축적하고 있다"며 "학생 등 교육 목적으로 사료들을 공개하기 위한 적절한 전시 기회를 찾을 예정"이라고 설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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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구 살린 고종의 전화 한 통…‘덕률풍’으로 걸었다
    • 입력 2022-08-16 17:43:02
    • 수정2022-08-16 18:59:27
    취재K

1896년 10월, 인천 형무소에 다급한 전화 한 통이 걸려옵니다. 발신자는 다름 아닌 고종 황제. 당시 인천형무소에는 일본군에 살해된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기 위해 격투를 벌이다 일본인을 살해한 청년 김창수의 사형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각 죄수의 심문서를 보고받던 고종이 김창수의 '국모보수(國母報讐:국모의 원수를 갚다)'라는 죄목을 발견했고, 형무소에 전화를 걸어 죄를 한 단계 감하도록 명했습니다. 서울과 인천 사이에 전화가 설치된 것은 사형일로부터 불과 사흘 전으로, 조금만 늦었더라도 김창수의 목숨을 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김창수는 김구 선생의 젊었을 적 이름입니다.

"대군주(고종)께서 친히 전화하신 것만은 사실이었다. 이상하게 생각되는 것은 그때 경성부 안에는 이미 전화가 가설된지 오래였으나, 인천까지의 전화 가설공사가 완공된 지 3일째 되는 병신년 8월 26일(양력 1896년 10월 2일)의 일이었다. 만에 하나 그때까지 전화 준공이 못 되었다면, 바로 사형이 집행되었을 거라고들 하였다"
- 백범일지 중에서(돌베개출판사)

KT가 오늘(16일) 민영화 20주년을 맞아 강원도 원주연수원 내 KT통신사료관을 처음으로 언론에 공개했습니다. 통신사료관은 1993년 9월 서울 용산에 문을 연 뒤 2015년 원주로 옮겨 운영되고 있습니다. 등록문화재를 8점을 포함해 6,000점 넘는 통신사료를 보관하고 있는 KT 원주 통신사료관을 둘러보며 역사와 함께 발전해온 통신 기기들을 살펴봤습니다.

1800년대 후반부터 1900년대 초반까지 사용된 최초의 전화기 ‘덕률풍’
■ 전화 울리면 '큰절하고 무릎 꿇고'…우리나라 최초의 전화기

1896년 고종 황제가 머물던 덕수궁에 우리나라 최초로 설치된 전화기는 '덕률풍'입니다. 전화기의 영어 이름인 '텔레폰(telephone)'과 비슷한 한자음을 갖다 붙인 것인데, 이 덕률풍으로부터 우리나라 통신의 역사가 시작됐습니다.

당시 임금이 전화로 행정 업무를 지시했던 만큼 전화는 곧 임금을 의미했습니다. 전화가 오면 신하들은 전화 방향으로 큰 절을 네 번 올린 뒤 무릎을 꿇은 자세로 엎드려 받았다고 합니다.

1902년에는 공중전화가 개설되며 일반인도 전화기를 이용할 수 있게 됐습니다. 다만 이용요금은 5분 통화에 50전, 쌀 다섯 가마니 값에 해당할 정도로 비쌌습니다.

1900년대 초 사용된 전화 교환 설비
■ '재산목록 1호'에서 '1가구 1전화'까지

초기의 전화기는 손으로 직접 발신자와 수신자의 전화회선을 이어주는 교환원을 통해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교환기에 연결할 수 있는 회선 수는 한정돼 있었고, 이런 수동 방식으로는 급증하는 전화 수요를 감당하기 어려웠습니다.

1970년대에 들어서자 만성적인 전화 적체가 사회 문제로 떠올랐습니다. 천정부지로 뛰는 전화기 값에 전화기를 사고 팔거나 전·월세를 놔주는 '전화상'이 서울에만 600여 곳이나 성업했을 정도였습니다.

전화 한 대가 270만 원까지 치솟기도 했는데, 당시 서울 시내 50평짜리 집값이 230만 원 안팎이었던 걸 감안하면 터무니없이 높은 가격이었습니다.

1986년 상용화된 우리나라 독자기술로 만든 전자교환기 ‘TDX-1’
1986년 우리나라가 독자 개발한 전자 교환기 'TDX-1'가 상용화되며 통신 역사는 새로운 국면을 맞습니다. 외국산 교환기를 사용하던 이전까지는 유지 보수의 어려움 등으로 수요에 맞게 전화를 공급할 수 없었다면, 자체 기술로 만든 새로운 전자 교환기를 통해 전국 각지에 전화 시설을 보급하고, 지역·거리 간 불평등을 해소할 수 있게 된 겁니다.

'TDX-1'의 도움으로 전화기가 집안의 '재산목록 1호'였던 시기를 지나, 1987년에는 전국 1,000만 회선을 구축하며 '1가구 1전화' 시대를 맞았습니다.

1990년대 후반 인기를 끈 무선호출기 ‘삐삐’
■ '8282' 삐삐에서 핸드폰까지

사료관에서는 이동통신의 변천사도 엿볼 수 있었습니다. 1982년 230여 명에 불과했던 '삐삐' 가입자는 10년 만에 145만 2,000명, 1997년에는 1,500만 명 이상으로 늘어 3명당 1명꼴로 삐삐를 사용했습니다.

'8282(빨리빨리)', '1004(천사)'와 같은 숫자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었던 시기였습니다.


삐삐가 대중화되며 공중전화 보급도 가속화해, 1997년엔 423,000여 대까지 늘었습니다.

아날로그가 아닌 디지털 방식을 택한 2세대(2G) 이동통신 기술 CDMA(코드분할다중접속)가 상용화되며 이동전화도 본격적으로 보급됐고, 음성뿐 아니라 문자를 전송할 수 있다는 장점에 이동전화는 날개를 단 듯 확산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1999년엔 이동전화 가입자 수가 유선전화를 앞질렀습니다.

이날 해설을 맡은 이인학 정보통신연구소장은 "원주 사료관에 보관된 통신 사료들은 우리나라 정보통신 흐름에 따른 시대상과 국민의 생활상을 한눈에 볼 수 있어 역사적 가치가 매우 높다"고 평가했습니다.

KT 홍보실 변환 차장은 "기술 발달에 따라 통신시설들이 소형화, 간소화되면서 철거되는 곳들이 있어 지금도 그런 사료들을 축적하고 있다"며 "학생 등 교육 목적으로 사료들을 공개하기 위한 적절한 전시 기회를 찾을 예정"이라고 설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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