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견서’ 파장 어디까지…“외교부가 강제동원 피해자 손발 묶어”

입력 2022.08.17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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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일 오후 광주시의회에서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이 기자회견을 열고 미쓰비시중공업 자산 현금화와 관련해 대법원의 신속한 판결을 촉구하고 있다.지난 11일 오후 광주시의회에서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이 기자회견을 열고 미쓰비시중공업 자산 현금화와 관련해 대법원의 신속한 판결을 촉구하고 있다.

지난달 26일, 외교부는 강제동원 기업인 미쓰비시중공업 자산 현금화 사건을 심리 중인 대법원에 '의견서'를 제출했습니다. 외교부가 민관협의회를 통해 해법을 찾는 중이고, 일본과도 협상 중이라는 상황을 고려해 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대법원 결정이 임박한 현재, 이 '의견서'는 정부와 피해자 측의 간극을 더욱 벌리고 있습니다. 피해자 측은 외교부가 일본기업과 직접 협상하고 싶다는 피해자 뜻은 외면한 채, 일본기업 자산 매각을 막으려 한다고 의심하고 있습니다. 민·관협의회 회의에 2차례 들어갔던 일본제철 피해자 소송 대리인들도 외교부의 의견서 제출에 "배신감을 느꼈다"면서 이후 참여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어제(16일) 국회에서 열린 긴급 토론회에서 피해자 측은 자신들이 왜 분노했고, 무엇을 원하는지를 분명히 설명했습니다.

■ "외교부 의견서, 피해자 손발 묶어"…금명 간 공개

피해자 측은 외교부가 의견서를 제출한 근거로 제시한 법 조항 자체에 강한 불신을 드러냈습니다.

대법원 민사소송규칙 제134조의2(참고인 의견서 제출)
① 국가기관과 지방자치단체는 공익과 관련된 사항에 관하여 대법원에 재판에 관한 의견서를 제출할 수 있고, 대법원은 이들에게 의견서를 제출하게 할 수 있다.
② 대법원은 소송관계를 분명하게 하기 위하여 공공단체 등 그 밖의 참고인에게 의견서를 제출하게 할 수 있다.

이 조항은 2015년 박근혜 정부가 신설했습니다. 외교부는 정해진 절차에 따라 "외교적 노력을 경주하는 차원"에서 의견서를 냈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피해자 측은 해당 조항 자체가 당시 강제동원 재판을 늦추려는 의도로 만들어졌다면서 이를 근거로 한 의견서 제출 자체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입니다.

미쓰비시중공업 근로정신대 피해자를 돕는 이국언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 이사장은 "정부는 그동안 참담할 만큼 강제동원 피해자 문제를 내팽개쳐왔다"면서 "그렇게 싸늘하던 정부가, (2012년) 일본 기업에 배상책임이 있다는 판결이 나오자 갑자기 국익을 이유로 규칙을 신설해 자신들과 무관한 사건에도 의견서를 제출할 수 있도록 했던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조항 신설 직후인 2016년 10월, 외교부는 사법부 요청에 따라 "일본 기업의 배상 책임을 인정하면 한일관계가 파국으로 치달을 것"이라는 내용으로 처음 의견서를 냈습니다. 이번이 두 번째 제출입니다.

외교부의 의견서는 피해자들의 권리와 노력을 부정하는 것이란 발언도 나왔습니다.

이국언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 이사장
"외교부가 대법원에 의견서를 제출한 것은 묶여있던 전범 기업의 숨통을 틔워주는 것이고, 피고 기업을 대신해 강제집행이 아니고서는 더 이상의 방법이 없는 피해자들의 손발을 묶고 팔목을 꺾은 것입니다. 전범 기업 명예는 세워주고 피해자는 짓밟은 것입니다. 일본의 고통으로부터 해방돼야 하는 피해자들이 아니라, 자산이 압류됐던 전범 기업을 해방시키는 것입니다."

일본제철 피해자 소송을 대리하는 임재성 변호사는 "(매각) 집행을 사실상 늦춰달라는 내용의 의견서 제출은 외교부로서도 엄청난 정치적 위험을 진 것"이라며 "민사소송규칙 조항에 따랐다고 하지만, 외교부도 당당하지 않고 민망한 행동이라는 것을 안다"고 지적했습니다. 외교부가 피해자 측에 사전 통보나 동의 없이 의견서를 낸 것 자체가 떳떳하지 않다는 증거라는 겁니다.

임 변호사는 "행정부가 피해자 측의 반발을 감수하고 사법부에 의사 표현까지 했다는 걸 통해서 일본의 반응을 나름대로 이끌어내려는 전략"이었을 수 있다면서도 "일본의 성의 있는 호응이 없었기에 8·15 경축사에 (강제동원 관련 표현이) 아무것도 들어가지 않았을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대법원은 지난 12일 피해자 측 대리인에 한해 의견서 열람을 허용했습니다.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은 금명 간 변호사를 통해 열람 결과를 언론에 알릴 예정입니다.

도쿄 마루노우치에 있는 미쓰비시중공업 본사 건물 간판도쿄 마루노우치에 있는 미쓰비시중공업 본사 건물 간판

■ "피해자 동의 없이는 어떤 조치도 불가…공탁도 안 돼"

또한, 임 변호사는 정부가 피해자 동의 없이 어떤 조치도 할 수 없다는 법률 해석을 뒤늦게 내린 것 같다면서 현재 대위변제 등 정부가 검토하는 방안들은 사실상 '일본이 원하는 방식'이라고 비판했습니다.

임재성 법무법인 해마루 변호사(일본제철 피해자 소송 대리인)
"피해자 동의가 없는 방식으로 정부가 채권을 소멸시키고, 일본이 원하는 방식으로 이 문제를 국내적으로 해결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지난 9일 열린 3차 민·관협의회에서 언급된 '공탁' 역시 해결책이 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현행법상 피해자 주민등록번호가 있어야 공탁이 가능한데, 외교부가 피해자 개인정보를 무단으로 수집할 수 없으므로 공탁은 애초에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결국, 일본 기업과 피해자 측의 직접 협상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게 피해자 측 입장입니다. 임 변호사는 "일본기업과 직접 협상하는 과정에서 피해자 측 전원의 동의를 구하는 절차가 진행될 것"이라며 "정부가 피해자 동의 없는 방식으로 채권을 소멸하고, 이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일본 기업과 피해자 간 협상은 일본 정부의 의지와도 관련돼 있습니다. 외교부의 노력은 이 지점에 집중돼야 한다고 토론 참석자 다수는 지적했습니다.

■ 피해자 측도 의견서 제출…"현금화 절차 빨리"

외교부 의견서에 맞서 미쓰비시 피해자들도 재판부에 "현금화 절차를 빨리 진행해달라"는 준비서면을 제출했습니다. 일본과도 교섭하고 각계각층과 해법을 찾는 노력을 하는 중이라는, 즉 문제 해결을 행정부에 맡겨 달라는 취지의 외교부 의견서와는 정 반대 내용입니다.

민·관협의회 역시 피해자 측이 불참한 상태로 지속될 것으로 보입니다. 최영삼 외교부 대변인은 어제(16일) 정례브리핑에서 "민관협의회는 강제징용 관련 한일 양국의 공동 이익에 부합하는 합리적 해결 방안 모색을 위해 국내 각계각층 전문가들의 의견 수렴의 장"이라며 "향후 일정과 형식에 관해서는 앞으로 계속 검토해 나가겠다"고 했습니다. 외교부 고위당국자가 피해자들을 직접 설득하는 방안도 검토되고 있지만, 지금 상황으로는 좋은 결과를 기대하기가 어려워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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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의견서’ 파장 어디까지…“외교부가 강제동원 피해자 손발 묶어”
    • 입력 2022-08-17 06:01:36
    취재K
지난 11일 오후 광주시의회에서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이 기자회견을 열고 미쓰비시중공업 자산 현금화와 관련해 대법원의 신속한 판결을 촉구하고 있다.
지난달 26일, 외교부는 강제동원 기업인 미쓰비시중공업 자산 현금화 사건을 심리 중인 대법원에 '의견서'를 제출했습니다. 외교부가 민관협의회를 통해 해법을 찾는 중이고, 일본과도 협상 중이라는 상황을 고려해 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대법원 결정이 임박한 현재, 이 '의견서'는 정부와 피해자 측의 간극을 더욱 벌리고 있습니다. 피해자 측은 외교부가 일본기업과 직접 협상하고 싶다는 피해자 뜻은 외면한 채, 일본기업 자산 매각을 막으려 한다고 의심하고 있습니다. 민·관협의회 회의에 2차례 들어갔던 일본제철 피해자 소송 대리인들도 외교부의 의견서 제출에 "배신감을 느꼈다"면서 이후 참여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어제(16일) 국회에서 열린 긴급 토론회에서 피해자 측은 자신들이 왜 분노했고, 무엇을 원하는지를 분명히 설명했습니다.

■ "외교부 의견서, 피해자 손발 묶어"…금명 간 공개

피해자 측은 외교부가 의견서를 제출한 근거로 제시한 법 조항 자체에 강한 불신을 드러냈습니다.

대법원 민사소송규칙 제134조의2(참고인 의견서 제출)
① 국가기관과 지방자치단체는 공익과 관련된 사항에 관하여 대법원에 재판에 관한 의견서를 제출할 수 있고, 대법원은 이들에게 의견서를 제출하게 할 수 있다.
② 대법원은 소송관계를 분명하게 하기 위하여 공공단체 등 그 밖의 참고인에게 의견서를 제출하게 할 수 있다.

이 조항은 2015년 박근혜 정부가 신설했습니다. 외교부는 정해진 절차에 따라 "외교적 노력을 경주하는 차원"에서 의견서를 냈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피해자 측은 해당 조항 자체가 당시 강제동원 재판을 늦추려는 의도로 만들어졌다면서 이를 근거로 한 의견서 제출 자체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입니다.

미쓰비시중공업 근로정신대 피해자를 돕는 이국언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 이사장은 "정부는 그동안 참담할 만큼 강제동원 피해자 문제를 내팽개쳐왔다"면서 "그렇게 싸늘하던 정부가, (2012년) 일본 기업에 배상책임이 있다는 판결이 나오자 갑자기 국익을 이유로 규칙을 신설해 자신들과 무관한 사건에도 의견서를 제출할 수 있도록 했던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조항 신설 직후인 2016년 10월, 외교부는 사법부 요청에 따라 "일본 기업의 배상 책임을 인정하면 한일관계가 파국으로 치달을 것"이라는 내용으로 처음 의견서를 냈습니다. 이번이 두 번째 제출입니다.

외교부의 의견서는 피해자들의 권리와 노력을 부정하는 것이란 발언도 나왔습니다.

이국언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 이사장
"외교부가 대법원에 의견서를 제출한 것은 묶여있던 전범 기업의 숨통을 틔워주는 것이고, 피고 기업을 대신해 강제집행이 아니고서는 더 이상의 방법이 없는 피해자들의 손발을 묶고 팔목을 꺾은 것입니다. 전범 기업 명예는 세워주고 피해자는 짓밟은 것입니다. 일본의 고통으로부터 해방돼야 하는 피해자들이 아니라, 자산이 압류됐던 전범 기업을 해방시키는 것입니다."

일본제철 피해자 소송을 대리하는 임재성 변호사는 "(매각) 집행을 사실상 늦춰달라는 내용의 의견서 제출은 외교부로서도 엄청난 정치적 위험을 진 것"이라며 "민사소송규칙 조항에 따랐다고 하지만, 외교부도 당당하지 않고 민망한 행동이라는 것을 안다"고 지적했습니다. 외교부가 피해자 측에 사전 통보나 동의 없이 의견서를 낸 것 자체가 떳떳하지 않다는 증거라는 겁니다.

임 변호사는 "행정부가 피해자 측의 반발을 감수하고 사법부에 의사 표현까지 했다는 걸 통해서 일본의 반응을 나름대로 이끌어내려는 전략"이었을 수 있다면서도 "일본의 성의 있는 호응이 없었기에 8·15 경축사에 (강제동원 관련 표현이) 아무것도 들어가지 않았을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대법원은 지난 12일 피해자 측 대리인에 한해 의견서 열람을 허용했습니다.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은 금명 간 변호사를 통해 열람 결과를 언론에 알릴 예정입니다.

도쿄 마루노우치에 있는 미쓰비시중공업 본사 건물 간판
■ "피해자 동의 없이는 어떤 조치도 불가…공탁도 안 돼"

또한, 임 변호사는 정부가 피해자 동의 없이 어떤 조치도 할 수 없다는 법률 해석을 뒤늦게 내린 것 같다면서 현재 대위변제 등 정부가 검토하는 방안들은 사실상 '일본이 원하는 방식'이라고 비판했습니다.

임재성 법무법인 해마루 변호사(일본제철 피해자 소송 대리인)
"피해자 동의가 없는 방식으로 정부가 채권을 소멸시키고, 일본이 원하는 방식으로 이 문제를 국내적으로 해결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지난 9일 열린 3차 민·관협의회에서 언급된 '공탁' 역시 해결책이 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현행법상 피해자 주민등록번호가 있어야 공탁이 가능한데, 외교부가 피해자 개인정보를 무단으로 수집할 수 없으므로 공탁은 애초에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결국, 일본 기업과 피해자 측의 직접 협상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게 피해자 측 입장입니다. 임 변호사는 "일본기업과 직접 협상하는 과정에서 피해자 측 전원의 동의를 구하는 절차가 진행될 것"이라며 "정부가 피해자 동의 없는 방식으로 채권을 소멸하고, 이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일본 기업과 피해자 간 협상은 일본 정부의 의지와도 관련돼 있습니다. 외교부의 노력은 이 지점에 집중돼야 한다고 토론 참석자 다수는 지적했습니다.

■ 피해자 측도 의견서 제출…"현금화 절차 빨리"

외교부 의견서에 맞서 미쓰비시 피해자들도 재판부에 "현금화 절차를 빨리 진행해달라"는 준비서면을 제출했습니다. 일본과도 교섭하고 각계각층과 해법을 찾는 노력을 하는 중이라는, 즉 문제 해결을 행정부에 맡겨 달라는 취지의 외교부 의견서와는 정 반대 내용입니다.

민·관협의회 역시 피해자 측이 불참한 상태로 지속될 것으로 보입니다. 최영삼 외교부 대변인은 어제(16일) 정례브리핑에서 "민관협의회는 강제징용 관련 한일 양국의 공동 이익에 부합하는 합리적 해결 방안 모색을 위해 국내 각계각층 전문가들의 의견 수렴의 장"이라며 "향후 일정과 형식에 관해서는 앞으로 계속 검토해 나가겠다"고 했습니다. 외교부 고위당국자가 피해자들을 직접 설득하는 방안도 검토되고 있지만, 지금 상황으로는 좋은 결과를 기대하기가 어려워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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