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출소에서 신분증까지 보여줬는데…‘전화금융사기’ 또 당했다

입력 2022.08.17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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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대 A 씨가 전화금융사기 현금 수거책 B 씨와 함께 찾아간 경남 산청군의 한 파출소.50대 A 씨가 전화금융사기 현금 수거책 B 씨와 함께 찾아간 경남 산청군의 한 파출소.

지난 5월 27일 오전, 경남 산청군에 사는 50대 남성 A 씨는 한 남성으로부터 전화를 받습니다. 자신을 ○○은행 상담원이라고 밝힌 이 남성은 A씨가 솔깃할 만한 제안을 합니다. XX캐피탈에서 빌린 대출금 2,500만 원을 훨씬 싼 이자의 대출로 바꿔주겠다는 겁니다.

■○○은행->XX캐피탈->금융감독원까지…"알고 보니 한통속"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에는 자신을 'XX캐피탈' 상담원이라고 사칭하는 여성에게서 전화가 옵니다. 왜 자신들과 한마디 상의도 없이 ○○은행과 대출 전환 상담을 했느냐며 추궁했습니다.

다시 전화를 걸어온 ○○은행 상담원은 "XX캐피탈이 대출 전환을 막고 있다"며 금융감독원과 상의해 보라고 말했습니다. A 씨는 실제로 1332로 전화했고, 전화를 받은 남성은 한 가지 방법을 알려 주겠다고 말합니다. 금융감독원 직원을 현장에 직접 보낼 테니 현금으로 직접 XX 캐피탈 대출금을 갚으면 된다는 설명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이 방법을 누구에게도 말하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했습니다.

A 씨의 휴대폰에 악성 앱을 심어 전화를 가로채기하는 수법이 쓰였다.A 씨의 휴대폰에 악성 앱을 심어 전화를 가로채기하는 수법이 쓰였다.

같은 날 오후 A 씨는 자신의 계좌에서 현금 2,500만 원을 인출한 뒤 경남 산청군 시천면사무소 앞에서 자신을 금융감독원 직원이라고 주장하는 B 씨를 만났습니다. 거액의 현금다발을 건네기 전 A씨가 범죄 가능성에 대해 의심을 하지 않았던 건 아닙니다.

■ 파출소 가자는 제안 순순히 승낙…"의심 못 해"

택시기사인 A 씨는 B 씨에게 인근 파출소로 가자고 제안했습니다. 진짜 사기범이라면 그 자리에서 도주할 거라고 예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B 씨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고 순순히 제안을 따랐습니다. 의심은 다소 누그러졌습니다.

A 씨는 파출소에 도착하자마자 경찰관들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습니다. "내가 이 사람에게 현금을 전달해야 하는 상황인데, 이 사람이 진짜로 금융감독권 직원이 맞는지 확인해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경찰이 B 씨에게 어디서 왔냐고 물었습니다. B 씨는 자신이 "현대캐피탈 직원이며, 채권 추심 중"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러자 경찰은 "개인 간 채무에 경찰이 개입할 수 없다"며 신분 확인 요구를 거절했습니다.

■ "개인정보보호법 위반"이라며 경찰이 신분증 촬영 저지

그러자 A 씨는 B 씨에게 신분증을 보여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이번에도 B 씨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순순히 신분증을 꺼내 들었습니다. A 씨는 촬영을 시도했지만 이번엔 경찰이 촬영을 저지했습니다. 신분증을 촬영하는 건 개인정보 보호법 위반이라는 게 경찰의 설명이었습니다. 파출소를 나온 A 씨는 B 씨에게 준비해 온 현금 2,500만 원을 건넸습니다.

경찰이 뒤늦게 전화금융사기 현금 수거책 추적에 나섰지만, 당시 CCTV 영상 기록은 이미 모두 삭제됐다.경찰이 뒤늦게 전화금융사기 현금 수거책 추적에 나섰지만, 당시 CCTV 영상 기록은 이미 모두 삭제됐다.

A 씨는 사흘 뒤 B 씨를 또 만나 현금 1,500만 원을 추가로 건넸습니다. 이번에는 파출소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이었습니다. 이날 A 씨는 사흘 전 갑자기 파출소로 데려가 신분 확인을 요구한 일에 대해 B 씨에게 사과까지 해야 했습니다.

■ 오죽 불안했으면 파출소까지…"경찰 대처 아쉬워"

경찰은 뒤늦게 달아난 전화금융사기 현금 수거책 B 씨의 행방을 쫓고 있습니다. 하지만 시일이 한참이나 지나면서 당시 택시에 남겨진 블랙박스와 파출소 CCTV 영상은 모두 삭제됐습니다.

A 씨는 그날 이후 수차례 자신의 행동을 자책하고 있습니다. 거액의 돈다발을 들고 너무 정신이 없어 제대로 된 판단을 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날 파출소 경찰관들의 대처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습니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한테 2,500만 원을 건네는데 무슨 마음으로 파출소까지 갔겠냐"며, 경찰이 조금만 더 적극적으로 대처했더라면 하는 상황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을 토로합니다.

이렇게까지 해서 고금리 대출에서 벗어나겠다는 절박한 마음과 또 한편에는 전화금융 사기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까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A 씨는 "경찰서가 아니면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느냐"고 반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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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출소에서 신분증까지 보여줬는데…‘전화금융사기’ 또 당했다
    • 입력 2022-08-17 08:00:04
    취재K
50대 A 씨가 전화금융사기 현금 수거책 B 씨와 함께 찾아간 경남 산청군의 한 파출소.
지난 5월 27일 오전, 경남 산청군에 사는 50대 남성 A 씨는 한 남성으로부터 전화를 받습니다. 자신을 ○○은행 상담원이라고 밝힌 이 남성은 A씨가 솔깃할 만한 제안을 합니다. XX캐피탈에서 빌린 대출금 2,500만 원을 훨씬 싼 이자의 대출로 바꿔주겠다는 겁니다.

■○○은행->XX캐피탈->금융감독원까지…"알고 보니 한통속"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에는 자신을 'XX캐피탈' 상담원이라고 사칭하는 여성에게서 전화가 옵니다. 왜 자신들과 한마디 상의도 없이 ○○은행과 대출 전환 상담을 했느냐며 추궁했습니다.

다시 전화를 걸어온 ○○은행 상담원은 "XX캐피탈이 대출 전환을 막고 있다"며 금융감독원과 상의해 보라고 말했습니다. A 씨는 실제로 1332로 전화했고, 전화를 받은 남성은 한 가지 방법을 알려 주겠다고 말합니다. 금융감독원 직원을 현장에 직접 보낼 테니 현금으로 직접 XX 캐피탈 대출금을 갚으면 된다는 설명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이 방법을 누구에게도 말하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했습니다.

A 씨의 휴대폰에 악성 앱을 심어 전화를 가로채기하는 수법이 쓰였다.
같은 날 오후 A 씨는 자신의 계좌에서 현금 2,500만 원을 인출한 뒤 경남 산청군 시천면사무소 앞에서 자신을 금융감독원 직원이라고 주장하는 B 씨를 만났습니다. 거액의 현금다발을 건네기 전 A씨가 범죄 가능성에 대해 의심을 하지 않았던 건 아닙니다.

■ 파출소 가자는 제안 순순히 승낙…"의심 못 해"

택시기사인 A 씨는 B 씨에게 인근 파출소로 가자고 제안했습니다. 진짜 사기범이라면 그 자리에서 도주할 거라고 예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B 씨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고 순순히 제안을 따랐습니다. 의심은 다소 누그러졌습니다.

A 씨는 파출소에 도착하자마자 경찰관들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습니다. "내가 이 사람에게 현금을 전달해야 하는 상황인데, 이 사람이 진짜로 금융감독권 직원이 맞는지 확인해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경찰이 B 씨에게 어디서 왔냐고 물었습니다. B 씨는 자신이 "현대캐피탈 직원이며, 채권 추심 중"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러자 경찰은 "개인 간 채무에 경찰이 개입할 수 없다"며 신분 확인 요구를 거절했습니다.

■ "개인정보보호법 위반"이라며 경찰이 신분증 촬영 저지

그러자 A 씨는 B 씨에게 신분증을 보여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이번에도 B 씨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순순히 신분증을 꺼내 들었습니다. A 씨는 촬영을 시도했지만 이번엔 경찰이 촬영을 저지했습니다. 신분증을 촬영하는 건 개인정보 보호법 위반이라는 게 경찰의 설명이었습니다. 파출소를 나온 A 씨는 B 씨에게 준비해 온 현금 2,500만 원을 건넸습니다.

경찰이 뒤늦게 전화금융사기 현금 수거책 추적에 나섰지만, 당시 CCTV 영상 기록은 이미 모두 삭제됐다.
A 씨는 사흘 뒤 B 씨를 또 만나 현금 1,500만 원을 추가로 건넸습니다. 이번에는 파출소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이었습니다. 이날 A 씨는 사흘 전 갑자기 파출소로 데려가 신분 확인을 요구한 일에 대해 B 씨에게 사과까지 해야 했습니다.

■ 오죽 불안했으면 파출소까지…"경찰 대처 아쉬워"

경찰은 뒤늦게 달아난 전화금융사기 현금 수거책 B 씨의 행방을 쫓고 있습니다. 하지만 시일이 한참이나 지나면서 당시 택시에 남겨진 블랙박스와 파출소 CCTV 영상은 모두 삭제됐습니다.

A 씨는 그날 이후 수차례 자신의 행동을 자책하고 있습니다. 거액의 돈다발을 들고 너무 정신이 없어 제대로 된 판단을 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날 파출소 경찰관들의 대처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습니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한테 2,500만 원을 건네는데 무슨 마음으로 파출소까지 갔겠냐"며, 경찰이 조금만 더 적극적으로 대처했더라면 하는 상황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을 토로합니다.

이렇게까지 해서 고금리 대출에서 벗어나겠다는 절박한 마음과 또 한편에는 전화금융 사기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까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A 씨는 "경찰서가 아니면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느냐"고 반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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