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기 옆에 냉장고가?…갈길 먼 경비원 노동인권

입력 2022.08.25 (06:00) 수정 2022.08.25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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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북구의 한 아파트 경비원 휴게시설광주광역시 북구의 한 아파트 경비원 휴게시설

충격적이었습니다. 경비실 안 화장실에 냉장고와 전기밥솥이 놓여 있었습니다. 변기 바로 옆 자리입니다.

아파트 경비원 A 씨는 날마다 화장실에 있는 이 밥솥과 냉장고를 사용해 끼니를 해결합니다. 내키지 않는 일이지만 근무시간에 자리를 비울 수 없어, 경비실에서 식사를 해결해야 하는데, 경비실 공간이 비좁아 냉장고와 밥솥을 화장실 안에 둘 수밖에 없습니다.

A씨가 휴게시설이라며 취재진을 지하실로 안내했습니다. 문을 여는 순간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악취가 났습니다. 불을 켜니 미로 같은 콘크리트 벽이 나타났습니다. 머리 위로 노출된 배수관이 그대로 보이고, 환기시설이라고는 작은 창문이 전부였습니다. 제대로 된 냉난방시설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편안하게 쉴 수 있는 공간이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웠습니다.

취재진이 찾은 광주광역시 북구의 한 아파트 상시근로자 휴게시설의 모습입니다.

휴게시설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경비원 A 씨.휴게시설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경비원 A 씨.

A 씨는 "오랜 기간 경비원으로 일하며 다른 경비실도 봤지만, 이곳뿐 아니라 다른 곳들도 사정은 마찬가지다"고 말합니다. 주로 지어진 지 오래된 낡은 아파트들입니다.

노동자의 휴게시설을 보장하기 위한 법이 마련되고, 시행령까지 만들어졌지만 이런 열악한 상황이 그대로인 이유, 무엇일까요?

■ '휴게시설 의무설치' 법 강화에도...빈틈은 여전?


휴게시설 설치는 법에 규정된 사업주의 의무입니다. 작년 8월 신설된 산업안전보건법에 따라, 사업주는 고용노동부령 기준을 준수해 휴게시설을 설치해야 합니다. 하지만 법적 제재와 단속 체계도 없어 실제 상황에 적용되기는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정부는 이달 들어 휴게시설 의무설치 시행령을 신설했습니다. 경비원과 청소미화원 등의 상시근로자가 2명 이상 포함된 10명 이상 20명 미만 사업장에서는 의무적으로 휴게실을 만들어야 합니다. 위반 시에는 최대 1,500만 원의 과태료가 부과됩니다.

산업안전보건법 시행령 제96조의2
(휴게시설 설치ㆍ관리기준 준수 대상 사업장의 사업주)

...청소원 및 환경미화원, 아파트 경비원, 건물 경비원 등 상시근로자가 2명 이상인 사업장으로서 상시근로자 10명 이상 20명 미만을 사용하는 사업장

하지만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건 아닙니다. 시행령에 신설된 '상시근로자 기준'이 문제가 됐습니다. 아파트에는 경비원, 청소부 등 여러 노동자가 있습니다. 이들을 직접 고용하는 아파트도 있지만, 용역업체에 위탁해 고용하는 아파트도 있습니다.

또 같은 아파트더라도 경비원은 용역업체에서, 청소부는 아파트에서 고용하는 곳도 있습니다. 이럴 경우 문제가 생깁니다. 법에서 말하는 '상시근로자' 가 고용형태와 관련 없이 아파트에서 일하는 모든 노동자를 뜻하는 것인지 애매모호 하다는 것이죠.

■ '시설 개선 사업' 한 해 평균 40건 안팎..."실효성 낮다"

콘크리트 건물 한편 커튼으로 만들어놓은 간이 샤워실. 수도시설이 없어 외부에서 호스로 물을 끌어온다.콘크리트 건물 한편 커튼으로 만들어놓은 간이 샤워실. 수도시설이 없어 외부에서 호스로 물을 끌어온다.

광주시는 휴게시설 지원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경비원들의 휴게시설을 개선하기 위한 비용을 지원하는 사업입니다. 비용은 광주시와 자치구, 아파트 입주민이 나눠서 부담합니다. 시가 비용의 절반을 부담하고, 자치구가 30%, 아파트 입주민들이 20%를 부담하는 식입니다.

하지만 신청 수가 저조합니다. 우선 20년 이상 된 노후 공동주택들만 지원받을 수 있고, 아파트에서도 20%를 부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지원 사업이 시작된 지난 2018년은 37건, 2019년 42건, 2020년 31건, 2021년 43건으로 총 153건에 불과합니다. 광주시 아파트 수에 비하면, 턱없이 적은 숫자입니다. 아파트 주민들이 20%의 시설개선비 부담을 꺼려하는 것도 한 저조한 신청의 한 이유입니다.

■"수년째 되풀이되는 문제"...정부·자치단체 적극 나서야

간이 싱크대조차 없는 휴게실 안의 취사시설간이 싱크대조차 없는 휴게실 안의 취사시설

경비원들의 열악한 노동환경은 수년째 제자리걸음입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법도 개정되고, 또 자치단체에서도 여러 사업을 추진하고 있지만, 한계도 분명한 실정입니다. 결국, 정부와 지자체가 조금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됩니다.

광주광역시 공동주택 관리노동자 인권보호를 위한 상생협약(2020년)광주광역시 공동주택 관리노동자 인권보호를 위한 상생협약(2020년)

광주시는 2020년 인권 사각지대에 있는 공동주택 노동자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한 '행복 아파트 상생협약'을 체결했습니다. 하지만 현장에서는 달라진 게 없다고 호소합니다. 2년이 지난 지금 취재를 하며 만난 또 다른 경비원 B 씨는 개선방안이 나와도 어차피 되풀이될 거라며 더는 기대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고질적인 문제로 자리 잡은 경비원 노동인권이 확실하게 보장될 수 있도록 정부와 자치단체, 입주민 공동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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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변기 옆에 냉장고가?…갈길 먼 경비원 노동인권
    • 입력 2022-08-25 06:00:24
    • 수정2022-08-25 10:22:26
    취재K
광주광역시 북구의 한 아파트 경비원 휴게시설
충격적이었습니다. 경비실 안 화장실에 냉장고와 전기밥솥이 놓여 있었습니다. 변기 바로 옆 자리입니다.

아파트 경비원 A 씨는 날마다 화장실에 있는 이 밥솥과 냉장고를 사용해 끼니를 해결합니다. 내키지 않는 일이지만 근무시간에 자리를 비울 수 없어, 경비실에서 식사를 해결해야 하는데, 경비실 공간이 비좁아 냉장고와 밥솥을 화장실 안에 둘 수밖에 없습니다.

A씨가 휴게시설이라며 취재진을 지하실로 안내했습니다. 문을 여는 순간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악취가 났습니다. 불을 켜니 미로 같은 콘크리트 벽이 나타났습니다. 머리 위로 노출된 배수관이 그대로 보이고, 환기시설이라고는 작은 창문이 전부였습니다. 제대로 된 냉난방시설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편안하게 쉴 수 있는 공간이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웠습니다.

취재진이 찾은 광주광역시 북구의 한 아파트 상시근로자 휴게시설의 모습입니다.

휴게시설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경비원 A 씨.
A 씨는 "오랜 기간 경비원으로 일하며 다른 경비실도 봤지만, 이곳뿐 아니라 다른 곳들도 사정은 마찬가지다"고 말합니다. 주로 지어진 지 오래된 낡은 아파트들입니다.

노동자의 휴게시설을 보장하기 위한 법이 마련되고, 시행령까지 만들어졌지만 이런 열악한 상황이 그대로인 이유, 무엇일까요?

■ '휴게시설 의무설치' 법 강화에도...빈틈은 여전?


휴게시설 설치는 법에 규정된 사업주의 의무입니다. 작년 8월 신설된 산업안전보건법에 따라, 사업주는 고용노동부령 기준을 준수해 휴게시설을 설치해야 합니다. 하지만 법적 제재와 단속 체계도 없어 실제 상황에 적용되기는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정부는 이달 들어 휴게시설 의무설치 시행령을 신설했습니다. 경비원과 청소미화원 등의 상시근로자가 2명 이상 포함된 10명 이상 20명 미만 사업장에서는 의무적으로 휴게실을 만들어야 합니다. 위반 시에는 최대 1,500만 원의 과태료가 부과됩니다.

산업안전보건법 시행령 제96조의2
(휴게시설 설치ㆍ관리기준 준수 대상 사업장의 사업주)

...청소원 및 환경미화원, 아파트 경비원, 건물 경비원 등 상시근로자가 2명 이상인 사업장으로서 상시근로자 10명 이상 20명 미만을 사용하는 사업장

하지만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건 아닙니다. 시행령에 신설된 '상시근로자 기준'이 문제가 됐습니다. 아파트에는 경비원, 청소부 등 여러 노동자가 있습니다. 이들을 직접 고용하는 아파트도 있지만, 용역업체에 위탁해 고용하는 아파트도 있습니다.

또 같은 아파트더라도 경비원은 용역업체에서, 청소부는 아파트에서 고용하는 곳도 있습니다. 이럴 경우 문제가 생깁니다. 법에서 말하는 '상시근로자' 가 고용형태와 관련 없이 아파트에서 일하는 모든 노동자를 뜻하는 것인지 애매모호 하다는 것이죠.

■ '시설 개선 사업' 한 해 평균 40건 안팎..."실효성 낮다"

콘크리트 건물 한편 커튼으로 만들어놓은 간이 샤워실. 수도시설이 없어 외부에서 호스로 물을 끌어온다.
광주시는 휴게시설 지원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경비원들의 휴게시설을 개선하기 위한 비용을 지원하는 사업입니다. 비용은 광주시와 자치구, 아파트 입주민이 나눠서 부담합니다. 시가 비용의 절반을 부담하고, 자치구가 30%, 아파트 입주민들이 20%를 부담하는 식입니다.

하지만 신청 수가 저조합니다. 우선 20년 이상 된 노후 공동주택들만 지원받을 수 있고, 아파트에서도 20%를 부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지원 사업이 시작된 지난 2018년은 37건, 2019년 42건, 2020년 31건, 2021년 43건으로 총 153건에 불과합니다. 광주시 아파트 수에 비하면, 턱없이 적은 숫자입니다. 아파트 주민들이 20%의 시설개선비 부담을 꺼려하는 것도 한 저조한 신청의 한 이유입니다.

■"수년째 되풀이되는 문제"...정부·자치단체 적극 나서야

간이 싱크대조차 없는 휴게실 안의 취사시설
경비원들의 열악한 노동환경은 수년째 제자리걸음입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법도 개정되고, 또 자치단체에서도 여러 사업을 추진하고 있지만, 한계도 분명한 실정입니다. 결국, 정부와 지자체가 조금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됩니다.

광주광역시 공동주택 관리노동자 인권보호를 위한 상생협약(2020년)
광주시는 2020년 인권 사각지대에 있는 공동주택 노동자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한 '행복 아파트 상생협약'을 체결했습니다. 하지만 현장에서는 달라진 게 없다고 호소합니다. 2년이 지난 지금 취재를 하며 만난 또 다른 경비원 B 씨는 개선방안이 나와도 어차피 되풀이될 거라며 더는 기대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고질적인 문제로 자리 잡은 경비원 노동인권이 확실하게 보장될 수 있도록 정부와 자치단체, 입주민 공동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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