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KADIZ 진입, ‘경제몰입 시대’ 끝났단 상징

입력 2022.08.25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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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ADIZ-한국방공식별구역 사태

러시아의 전략폭격기 Tu-95MS 2대가 한국방공식별구역(KADIZ)에 진입했으나, 놀라운 뉴스가 되지는 못한다. 올해 5월에는 중국과 러시아가 함께 진입했다. 1월 이후 진입 횟수는 10 차례가 넘는다. 지난해 중·러 양국의 진입 횟수는 80회 안팎이다.

군은 "우발 상황에 대비해 정상 조치를 했다"며 F-16 전투기 출격 사실만 짧게 알렸다.


2019년 7월 23일에는 달랐다. 중·러가 함께 KADIZ에 진입한 자체가 처음이었거니와, 러시아 군용기는 영공도 7분간 침범했다. 우리 군 대응 사격 소식까지 함께 전해지며 온 나라가 들썩거렸다.

전 국민이 학습도 했다. KADIZ가 영공 바깥에 설정한 영공의 외곽지역이고, 따라서 이 구역을 지나갈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진입 때 당사국에 통보하는 것이 관례란 사실을. 그리고 중·러가 훈련 차원에서 의도적으로 벌인 일이며, 사실 러시아는 이 KADIZ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단 사실도 함께.

앞으로 한반도 주변이 미·일 대 중·러 간 무력시위의 공간으로 이용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왔다.

■아시아 전략적 질서 붕괴의 상징

당시 영국 파이낸셜타임스의 기명 칼럼니스트 기디온 래커만은 이 KADIZ 진입을 소재로 '아시아 전략적 질서가 죽어가고 있다(The Asian strategic order is dying)(2019.8.5)'는 칼럼을 게재했다. KADIZ 진입과 한국의 대응을 당시 '일본의 한국 수출 규제', 북한의 미사일 시험발사 재개와 이어서 흐름을 읽어냈다.


표면적으로 보면 독립적인 사건들이나, 지역에 40년간 자리 잡았던 질서에 일어난 균열이란 점에서는 한 맥락 위에 있단 얘기다. 이 질서는 1972년 극비리에 중국을 방문한 키신저에 의해 제도화 된 미·중 화해와 수교가 큰 축인 평화체제다. 중일 수교(1973년), 한중수교(1992년)로 얽혀 동아시아 평화체제로 제도화되었다.

래커만은 이에 '키신저 질서'란 이름을 붙였다. 내용은 단순하다. 미국은 중국의 부상을 묵인 혹은 촉진하고 중국은 역내 미국의 우위를 인정한다. 그리하여 평화 속에서 상호 간의 경제 이익을 극대화한다. 정치와 경제적 안정과 번영이 함께 제도화됐다.

이 질서에 대해 한중관계를 다룬 책 <짱깨주의의 탄생(김희교, 2022)>은 '키신저 협약이 구소련 견제 전략인 동시에 전 지구를 단일시장으로 묶은 미국의 경제적 세계전략 중 하나'였다고 봤다. 중국은 국가 간 분업체계에 적합한 저임금 노동력과 거대한 시장을 가지고 있기에 닉슨이 “이 작은 지구 위에 10억 명이나 되는 잠재적 유용한 사람들이 분노의 고립상태에서 살아갈 공간은 없다”며 '지구 단일시장'으로 초청했다는 것이다.

그 질서가 죽어가는 징후가 나타났다. 경제력을 기준으로 글로벌 G2로 성장한 중국은 이제 앞마당인 동아시아에서 부차적 역할에 만족하지 않는다. 그에 따른 러시아와의 밀착이 한국의 KADIZ와 영공 테스트로 나타났다. 남중국해에서는 베트남, 필리핀과 갈등을 빚었다. 캄보디아에는 국외 군사 기지 건설을 추진했다. 홍콩의 일국양제는 군사적으로 진압한다.


일본과 한국의 다툼은 또 다른 징후다. 양국은 지역에서 미국의 가장 강력한 두 동맹국이다. 미국은 그동안 역내 패권 질서를 바탕으로 양국의 협력을 촉진했다. 역사 문제로 인한 대립과 갈등을 힘으로 막고 중재했다. 해결은 못 했어도 동결시킬 수는 있었는데, 이젠 불가능해졌다. 미국이 아무리 중재를 해도 일본과 한국이 듣지 않고 전례 없는 수준으로 갈등 수위를 끌어올린다. 그 사이 북한은 기회의 영역을 더 자유롭게 탐험한다.

■ 바이든 시대에도 달라지지 않았다

키신저 질서는 안보 차원에서 성립됐지만, 궁극적으로는 경제 질서로서 그 의미가 극대화됐다. 동아시아의 하늘과 바다가 '평화의 공간'이 되자 '경제 몰입'의 시대가 열렸기 때문이다. 평화는 미국이 이미 제도화해주었으니까. 미국도 이 질서가 좋았다. 성장의 한계를 10억 인구의 거대 국가를 새롭게 시장에 편입시킴으로써 해소할 수 있었으니까.

실제로 한·중·일은 국가 역량을 모두 경제 개발에 쏟아부었다. 평화의 공간 안에서 고속성장 궤도에 올랐다. 2차대전 후 80년대까지 일본이 먼저 성장했고, 그 다음은 한국, 그 다음은 중국이었다. 동아시아 지역만큼 빠르고 지속적인 경제성장에 성공한 지역은 없을 정도였다. 모두 '경제에만 몰입'해서 번영에 당도했다.

2019년 당시에는 트럼프 변수가 이 질서 균열의 중요한 원인 가운데 하나로 지목됐다. 동맹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고, 중국과의 상호이익이 존재할 수 없다고 믿는 미국 지도자 출현을 우려했다. '트럼프가 한 일의 상처는 트럼프 이후로도 남을 것’이라고 표현했다.


그런데 바이든 시대가 되었어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미국은 여전히 중국을 압박하고, 코로나 이후로는 더더욱 공급망 분리에까지 박차를 가한다. 반도체 공급망은 물론 차세대 전기차 공급망까지 떼려 한다. 그 과정에서 동맹의 이익이 훼손되어도 멈추지 않는다.

반도체 지원법 CHIPS나 전기차보조금 법안이 포함된 인플레 감축법 IRA는 그 미국 의지의 최신 버전이다. 미국은 해외의 기업들에 '자국에서 반도체를 팔려거든 공장도 미국에 지으라'고 말하고, '전기차 보조금은 미국에서 만든 차만 준다'고 선언한다. 중국이 쓰던 그 산업정책과 시장개입 정책을 그대로 반복한다.

트럼프는 변수가 아닌 거대한 변환의 일환이었다. 키신저 질서가 정말 죽어가고 있다.

■ 한쪽을 선택하면 다시 '경제몰입'이 가능한 시대가 될까

한국에게 지역 상황은 점점 더 복잡한 방정식이 되어가고 있다. 러시아의 이번 KADIZ 진입은 한미연합훈련 중에 벌어진 일이다. 한중수교 30주년을 기념하는 중에 벌어진 일이기도 하다. 일본은 여전히 '한국이 먼저 풀어야 할 일이 있다'며 한국과의 관계 개선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중국도 한국을 향해 '사드 3불에 1한이 더 있다'고 주장하며 여전히 압력 수위를 낮추려 하지 않는다. 미국도 한국의 경제 이익을 주의 깊게 사고하지 않는다.


'키신저 질서'가 죽어가자, 한국에게 주어졌던 '경제 몰입'의 시간도 함께 저물고 있다. 수출로 먹고사는 한국의 경제가 위기를 맞았다. 최대 교역국인 중국 방향으로 들어선 장애물은 점점 더 높아지고 있고, 미국 방향으로는 새 장애물이 생겨난다. 미국은 중국 방향 교역의 문을 자발적으로 좁히라고 권유도 한다.

그동안은 '수능 앞둔 수험생이 공부에만 몰두'하듯 경제에만 몰두할 수 있었다. 국제 정세 같은 정치 외교 문제는 잡생각 치부하고 엄마에게 맡겨두면 되었으니까. 상황이 달라졌다.

다시 한쪽을 선택하면 다시 '경제 몰입'을 할 수 있을까. 한쪽을 선택하면 안보가 '키신저 질서'가 살아있을 때처럼 보장되고, 평화의 공간이 열릴까. 그런 시간이 다시 돌아올까?

중국과 러시아의 군용기가 상시적으로 우리 KADIZ에 진입하는 지금, 우리가 경제를 위해 묻고 답해야 할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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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러시아의 KADIZ 진입, ‘경제몰입 시대’ 끝났단 상징
    • 입력 2022-08-25 07:00:19
    취재K

■ KADIZ-한국방공식별구역 사태

러시아의 전략폭격기 Tu-95MS 2대가 한국방공식별구역(KADIZ)에 진입했으나, 놀라운 뉴스가 되지는 못한다. 올해 5월에는 중국과 러시아가 함께 진입했다. 1월 이후 진입 횟수는 10 차례가 넘는다. 지난해 중·러 양국의 진입 횟수는 80회 안팎이다.

군은 "우발 상황에 대비해 정상 조치를 했다"며 F-16 전투기 출격 사실만 짧게 알렸다.


2019년 7월 23일에는 달랐다. 중·러가 함께 KADIZ에 진입한 자체가 처음이었거니와, 러시아 군용기는 영공도 7분간 침범했다. 우리 군 대응 사격 소식까지 함께 전해지며 온 나라가 들썩거렸다.

전 국민이 학습도 했다. KADIZ가 영공 바깥에 설정한 영공의 외곽지역이고, 따라서 이 구역을 지나갈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진입 때 당사국에 통보하는 것이 관례란 사실을. 그리고 중·러가 훈련 차원에서 의도적으로 벌인 일이며, 사실 러시아는 이 KADIZ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단 사실도 함께.

앞으로 한반도 주변이 미·일 대 중·러 간 무력시위의 공간으로 이용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왔다.

■아시아 전략적 질서 붕괴의 상징

당시 영국 파이낸셜타임스의 기명 칼럼니스트 기디온 래커만은 이 KADIZ 진입을 소재로 '아시아 전략적 질서가 죽어가고 있다(The Asian strategic order is dying)(2019.8.5)'는 칼럼을 게재했다. KADIZ 진입과 한국의 대응을 당시 '일본의 한국 수출 규제', 북한의 미사일 시험발사 재개와 이어서 흐름을 읽어냈다.


표면적으로 보면 독립적인 사건들이나, 지역에 40년간 자리 잡았던 질서에 일어난 균열이란 점에서는 한 맥락 위에 있단 얘기다. 이 질서는 1972년 극비리에 중국을 방문한 키신저에 의해 제도화 된 미·중 화해와 수교가 큰 축인 평화체제다. 중일 수교(1973년), 한중수교(1992년)로 얽혀 동아시아 평화체제로 제도화되었다.

래커만은 이에 '키신저 질서'란 이름을 붙였다. 내용은 단순하다. 미국은 중국의 부상을 묵인 혹은 촉진하고 중국은 역내 미국의 우위를 인정한다. 그리하여 평화 속에서 상호 간의 경제 이익을 극대화한다. 정치와 경제적 안정과 번영이 함께 제도화됐다.

이 질서에 대해 한중관계를 다룬 책 <짱깨주의의 탄생(김희교, 2022)>은 '키신저 협약이 구소련 견제 전략인 동시에 전 지구를 단일시장으로 묶은 미국의 경제적 세계전략 중 하나'였다고 봤다. 중국은 국가 간 분업체계에 적합한 저임금 노동력과 거대한 시장을 가지고 있기에 닉슨이 “이 작은 지구 위에 10억 명이나 되는 잠재적 유용한 사람들이 분노의 고립상태에서 살아갈 공간은 없다”며 '지구 단일시장'으로 초청했다는 것이다.

그 질서가 죽어가는 징후가 나타났다. 경제력을 기준으로 글로벌 G2로 성장한 중국은 이제 앞마당인 동아시아에서 부차적 역할에 만족하지 않는다. 그에 따른 러시아와의 밀착이 한국의 KADIZ와 영공 테스트로 나타났다. 남중국해에서는 베트남, 필리핀과 갈등을 빚었다. 캄보디아에는 국외 군사 기지 건설을 추진했다. 홍콩의 일국양제는 군사적으로 진압한다.


일본과 한국의 다툼은 또 다른 징후다. 양국은 지역에서 미국의 가장 강력한 두 동맹국이다. 미국은 그동안 역내 패권 질서를 바탕으로 양국의 협력을 촉진했다. 역사 문제로 인한 대립과 갈등을 힘으로 막고 중재했다. 해결은 못 했어도 동결시킬 수는 있었는데, 이젠 불가능해졌다. 미국이 아무리 중재를 해도 일본과 한국이 듣지 않고 전례 없는 수준으로 갈등 수위를 끌어올린다. 그 사이 북한은 기회의 영역을 더 자유롭게 탐험한다.

■ 바이든 시대에도 달라지지 않았다

키신저 질서는 안보 차원에서 성립됐지만, 궁극적으로는 경제 질서로서 그 의미가 극대화됐다. 동아시아의 하늘과 바다가 '평화의 공간'이 되자 '경제 몰입'의 시대가 열렸기 때문이다. 평화는 미국이 이미 제도화해주었으니까. 미국도 이 질서가 좋았다. 성장의 한계를 10억 인구의 거대 국가를 새롭게 시장에 편입시킴으로써 해소할 수 있었으니까.

실제로 한·중·일은 국가 역량을 모두 경제 개발에 쏟아부었다. 평화의 공간 안에서 고속성장 궤도에 올랐다. 2차대전 후 80년대까지 일본이 먼저 성장했고, 그 다음은 한국, 그 다음은 중국이었다. 동아시아 지역만큼 빠르고 지속적인 경제성장에 성공한 지역은 없을 정도였다. 모두 '경제에만 몰입'해서 번영에 당도했다.

2019년 당시에는 트럼프 변수가 이 질서 균열의 중요한 원인 가운데 하나로 지목됐다. 동맹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고, 중국과의 상호이익이 존재할 수 없다고 믿는 미국 지도자 출현을 우려했다. '트럼프가 한 일의 상처는 트럼프 이후로도 남을 것’이라고 표현했다.


그런데 바이든 시대가 되었어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미국은 여전히 중국을 압박하고, 코로나 이후로는 더더욱 공급망 분리에까지 박차를 가한다. 반도체 공급망은 물론 차세대 전기차 공급망까지 떼려 한다. 그 과정에서 동맹의 이익이 훼손되어도 멈추지 않는다.

반도체 지원법 CHIPS나 전기차보조금 법안이 포함된 인플레 감축법 IRA는 그 미국 의지의 최신 버전이다. 미국은 해외의 기업들에 '자국에서 반도체를 팔려거든 공장도 미국에 지으라'고 말하고, '전기차 보조금은 미국에서 만든 차만 준다'고 선언한다. 중국이 쓰던 그 산업정책과 시장개입 정책을 그대로 반복한다.

트럼프는 변수가 아닌 거대한 변환의 일환이었다. 키신저 질서가 정말 죽어가고 있다.

■ 한쪽을 선택하면 다시 '경제몰입'이 가능한 시대가 될까

한국에게 지역 상황은 점점 더 복잡한 방정식이 되어가고 있다. 러시아의 이번 KADIZ 진입은 한미연합훈련 중에 벌어진 일이다. 한중수교 30주년을 기념하는 중에 벌어진 일이기도 하다. 일본은 여전히 '한국이 먼저 풀어야 할 일이 있다'며 한국과의 관계 개선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중국도 한국을 향해 '사드 3불에 1한이 더 있다'고 주장하며 여전히 압력 수위를 낮추려 하지 않는다. 미국도 한국의 경제 이익을 주의 깊게 사고하지 않는다.


'키신저 질서'가 죽어가자, 한국에게 주어졌던 '경제 몰입'의 시간도 함께 저물고 있다. 수출로 먹고사는 한국의 경제가 위기를 맞았다. 최대 교역국인 중국 방향으로 들어선 장애물은 점점 더 높아지고 있고, 미국 방향으로는 새 장애물이 생겨난다. 미국은 중국 방향 교역의 문을 자발적으로 좁히라고 권유도 한다.

그동안은 '수능 앞둔 수험생이 공부에만 몰두'하듯 경제에만 몰두할 수 있었다. 국제 정세 같은 정치 외교 문제는 잡생각 치부하고 엄마에게 맡겨두면 되었으니까. 상황이 달라졌다.

다시 한쪽을 선택하면 다시 '경제 몰입'을 할 수 있을까. 한쪽을 선택하면 안보가 '키신저 질서'가 살아있을 때처럼 보장되고, 평화의 공간이 열릴까. 그런 시간이 다시 돌아올까?

중국과 러시아의 군용기가 상시적으로 우리 KADIZ에 진입하는 지금, 우리가 경제를 위해 묻고 답해야 할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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