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예감] 퇴계 이황이 한국의 워런 버핏으로 불리는 이유 - 이한 작가 (『우리는 투기의 민족입니다』)

입력 2022.09.04 (0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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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로그램명 : 성공예감 김방희입니다
■ 방송시간 : 9월 2일(금) 09:05-10:53 KBS1R FM 97.3 MHz
■ 진행 : 김방희 소장 (생활경제연구소)
■ 출연 : 이한 작가 (『우리는 투기의 민족입니다』)

- 선비의 나라 조선시대, 실제로는 왕부터 천민까지 모두 돈 벌기 위해 고군분투
- 정조 7년, 염해전 사건... 왕부터 대사성, 양민, 노비까지 연루된 이권 다툼
- 퇴계 이황, 조선시대 재테크 달인... 땅 사고팔고, 농사일 관리하고 농업에 투자하는 등 관리
- 조선시대 쌀 매점매석, 독과점으로 쌀가게 문 닫기도... 사람들 폭동 일으키고 경강상인들은 처형당해
- 개인이 가장 큰돈을 버는 방법은 밀수... 중국이나 일본 사신을 따라갔던 역관을 위주로 이뤄져
- 조선 최고 거부 임상옥은 인삼 불태우며 가격 높였다는 이야기도 전해
- 농민들은 이앙법에 뛰어들어... 모내기 덕에 잡초 뽑을 시간에 다른 생산활동
- 조선말 철도 들어오며, 항구 후보지 결정 과정에서 부동산 투기도 일어나
- 조선시대도 망한 사람들이 많아... 남들보다 잘 살고픈 욕망이 투기와 절망으로




◇김방희> 주식과 부동산 시장 모두 하락세가 이어지다 보니까 그때 살 걸, 팔 걸, 아예 뺄 걸 하면서 과거 후회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진짜 시간을 돌려서 한 500년 전 조선시대로 돌아가면 어떨까요. 그렇다면 우리는 떼돈 벌 수 있을까요. 많은 분이 오해하시는데 그 허생전에서 매점매석을 통해서 허생이 말총을 가지고 돈을 버는 걸 가지고 지금 할 수 없으니까 그때와는 좀 다를 거라고 생각하실 수 있겠습니다마는. 글쎄요. 지금도 플랫폼 기업들은 수수료 올리는 방식의 독점 폭리를 취하니까 방법은 매한가지 아닐까 싶습니다. 조선시대 역시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았던 거죠. 그때 그분들도 한양의 자가. 집 한 채 마련하는 걸 꿈꿨고 집값이 오른다는 소문에 대박을 노리면서 영끌을 하기도 했습니다. 임금부터 양반, 상인, 천민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부자가 되기 위해서 고군분투했는데요. 조선시대에 재테크의 역사를 취재하신 분이 계십니다. 책 제목이 또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우리는 투기의 민족입니다를 쓴 역사 커뮤니케이터 이한 작가와 함께 조선시대 원조 개미들의 투자 얘기를 들어보겠습니다. 이 작가님 어서 오십시오.

◆이한> 안녕하세요. 이한입니다.

◇김방희> 이거 배달의 민족까지는 어떻게 참겠는데 투기의 민족이라고 자료 조사를 거친 후에 하셨으니 조선시대도 투기가 만만치 않았다. 그런 뜻입니까?

◆이한> 그렇죠. 어떤 사람이건 사실 사람은 언제 어디서건 돈을 많이 벌고 싶어요. 특히 남보다 훨씬 더 많이 벌고 싶어 하죠. 그렇기 때문에 사실 투기가 없었던 때가 없지 않았을까요?

◇김방희> 그렇죠. 조선시대라면 투기의 대상이 주로 뭐가 됐을까요. 그러니까 자본주의 개념이 있었던 건 아니고 돈 버는 것에 대해서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그러니까 겉으로는 이렇게 높이 평가했던 건 아니지 않습니까, 지금처럼.

◆이한> 사실 저도 자료를 조사하기 전에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선비의 나라. 돈을 좋아하지 않고 옛날에는 양반들은 돈을 손에 들고 다니지도 않았다라는 생각을 어렸을 때 했었는데요. 자료를 찾아보니까 돈 문제에 관련되면 위로서부터는 왕부터 아래로부터는 노비까지 모든 사람들이 돈을 더 가지기 위해서 몰려들어서 아귀다툼이 벌어진 적이 많았습니다.

◇김방희> 지금과 별로 다를 바 없었다.

◆이한> 그렇죠. 한 가지 얘기를 들자면 정조 7년에 염해전 사건이 있었거든요.

◇김방희> 그건 뭡니까.

◆이한> 염해전은 소금이나 젓갈을 파는 가게였는데 옛날에는 소금이 되게 중요한 반찬이었죠. 구하기 힘든. 그런데 그 염해전이 마포에 있었습니다. 마포에서 염해전을 소금하고 젓갈을 가지고 서울로 보내는 거예요. 그러니까 당연히 돈이 많이 벌리는 가게였죠. 그런데 정조 7년에 마포 사람들이 왕한테 하소연을 해요. 그 염해전이 300년 동안 우리 거였는데 혜화동에 사는 반인들이 얘를 빌려가서 안 돌려주고 있다. 그런데 혜화동에 있는 반인들은 지금으로 생각하자면 성균관이 있었던 자리죠. 성균관은 지금으로 따지면 서울대학교. 서울대학교고 반인들은 양반도 그리고 양민도 아니고 굳이 말하면 노비 쪽인데 그 교직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반인들이 그 가게를 빌려가서 안 돌려준다, 그래서 우리가 300년 동안 가졌던 가게니까 돌려달라고 하는 거예요. 맨 처음에 영조가 정조가 그걸 듣고 그러면 그 가게 다시 마포 사람한테 돌려줘라 라고 했더니 그러면 반인들이 반발을 해서 누가 나섰느냐, 서울대학교 총장. 즉, 성균관에 제일 높은 사람이었다는 대사성이 나서서 이 가게는 성균관을 위해서 성균관에 있는 미래의 인재들을 키우기 위해서 필요하니까 돌려주세요라는 말도 안 되는 주장을 정조 앞에서 딱 한 거예요. 그러니까 정조가 그러면 다시 반인들한테 돌려줘라고 했거든요. 그러니까 또 이번에 마포 사람들이 또 우리 억울해요. 그 가게 돌려주세요라고 해서 6년간은 싸워댑니다.

◇김방희> 아, 6년이나 싸웠습니까?

◆이한> 그래서 정조가. 그 정조가 너무나도 곤란해서 하소연을 해요. 어느 쪽 말이 맞는지 모르겠다. 서로 하는 말이 또 다 달라요. 우리는 우리 쪽이 옳다. 이쪽이 옳다고 해서 그래서 이걸 듣고 정조의 하소연을 듣고 해결해 준 사람이 그 유명한 재상인 채제공입니다. 채제공이 이거는 마포 사람들이 맞다 그래서 마포 사람들의 가게를 돌려주고 마포 사람들이 졌던 빚을 나라가 대신 갚아줬어요. 물론 마포 사람들이 나중에 천천히 갚게 했지만. 그러니까 이 가게 하나의 수익이 엄청나게 나는 알짜 가게를 놓고 위로는 왕 그다음에 대사성 그다음에 양민들 그리고 반인들인 노비들까지 다 합쳐서 치열하게 싸운, 그런 사건이 있었을 정도로.

◇김방희> 마포의 염해전 운영권을 둔 분쟁 하나를 보면 조선시대라고 이런 돈이 걸린 이해관계 갈등이 없었던 건 아니다. 그리고 누구나 다 노골적으로 자신들의 이해를 내세웠다. 소금이 큰돈이 됐다는 것도 흥미롭고요. 사실 서양에서도 소금은 셀러리라는 말이 거기서 나왔을 정도로 곧 돈이니까. 당시에는 오죽했겠습니까, 흥미롭네요. 아까 모든 계층이 사실은 돈을 갈구 했고 그런 갈등이 표출됐다, 이런 말씀도 해 주셨는데. 자료 찾아내서 책에 쓰신 것 중에서 제가 흥미로웠던 건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사실은 동양에서 유명했던 유학자 퇴계 이황 선생 천원권 지폐 모델이니까 요즘이야 돈과 관련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당시는 전혀 관련 없었을 것 같은데 생각보다 투자를 잘한. 이런 표현을 써도 될지 모르겠습니다마는 한국의 워렌 버핏이었던 투자의 달인이었어요?

◆이한> 사실 이게 퇴계 이황을 연구하는 분들한테는 꽤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논문도 많이 나왔고. 그 퇴계 이황 분이 워낙에 이제 7형제 중에 마지막으로 태어나고 그다음에 어렸을 때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어요. 홀어머니가 키우면서 굉장히 가난하게 살았거든요. 그런데 이분이 똑똑하시잖아요. 그래서 과거에 급제하고 나서 장가를 잘 가십니다. 그래서 결혼을 두 번을 하셨는데 그 부인이 일찍 돌아가서 한 번은 김해허 씨 그다음에 안동권 씨하고 결혼을 하셨는데 결혼하면서 부인들이 가져온 지참금이 꽤 많이 됐어요. 그래서 그 부인들이 가져온 재산이 따지면 지금 이 논밭이 대략 1500마지기 정도였는데.

◇김방희> 굉장한 건데요.

◆이한> 그렇죠. 그랬는데 이분이 이황 선생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그 자식들이 또 재산들을 모아다가 나누기 위해서 분재기라는 걸 작성했거든요. 분재기를 보면 재산이 한 3000마지기로 늘어나 있고요. 노비도 한 300명 정도로 늘어나 있어서 굉장히 큰 부자가 됐죠. 따지고 보면 아시겠지만 재산은 쓰면 쓰면 줄어들지 절대로 저절로 늘어나지는 않잖아요. 그런데 그걸 쓰면서 또 퇴계 이황 선생님은 큰 사업도 벌이셨어요. 바로 도산서원이라고. 그렇죠. 그런 걸 하면서도 재산이 거의 2배로 불어났으니까 아주 이거는 투자를 재산을 아주 잘 굴리신 거죠.

◇김방희> 뭐 해서 그렇게 벌었을까요. 갑자기 궁금증이 생기네요.

◆이한> 그렇죠. 그래서 저도 그랬는데 퇴계 이황 선생님이 벼슬을 또 오래 하신 건 아니에요. 벼슬을 하다가 지방에 내려가고 지방에 내려가고 그러셨는데. 이분이 남긴 글이 물론 도산전서 같은 거 보면 편지 같은 거 많이 남아 있기는 한데. 또한 가서라고 해서 가족들과 주고받은 편지가 남아 있습니다. 특히 그 아들인 준에게 보낸 편지가 많이 남아 있는데 그 내용 대부분이 농사지었니, 씨는 뿌렸니, 피는 뽑았니 그리고 추수한 건 얼마나 되니. 그다음에 어디 가서 무슨 땅 샀니. 그래서 계속 살림을 챙깁니다. 그러니까 굉장히 농사일을 잘 아세요. 그리고, 그러니까 농사일 이때에 뭐해야 된다는 것도 다 아시고, 그다음에 그 당시에 유망한,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농업에 투자도 하세요.

◇김방희> 작물도 잘 골랐군요.

◆이한> 네. 목화, 그 당시에 목화가 귀하죠. 그런데 목화를 심는데 목화를 그냥 심으면 사람들이 훔쳐가거든요. 그러니까 미리 목화를 심을 만큼 비옥한 땅을 만들어 놓고, 그래서 거기다 씨를 뿌리게 하고 그다음에 하인들 시켜서 지키게 하고, 다 거둔 다음에 얼마나 되니, 그 양도 전부 다 체크를 합니다.

◇김방희> 꼼꼼한 사업가이기도 하셨군요.

◆이한> 정작 그분의 그런 철학에 대한 글을 보면 정말로 정갈하고 아랫사람들한테 참 상냥하고 그렇게 참 고아한 유학자이셨는데요. 그러니까 아들들한테 보낸 편지로 보면 이제 그냥 정갈한데. 만약에 본인이 안동에 직접 계셨으면 아마 이 일을 다 하고 다녔겠죠. 왜냐하면 그 당시에 농사라는 게 양반이 그냥 앉아서 보내주는 걸 기다리는 게 아니라, 자기가 직접 돌아다니면서 하인들, 노비들 시키고 잘하는지 감시하고 그런 것도 다 해야 되니까요. 그렇게 했는데 또 돈 버는 데만 열심히 하는 게 아니라, 서울에 있는 중요한 물자들, 중요한 귀중한 물건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나눠줘요. 자기 친척들은 물론이거니와 노비들한테도 쌀, 곡식 얼마나 보냈니. 그걸 또 다 편지로 써서 보내서 자식한테 누구한테 보내고 누구한테 보내고 이렇게 굉장히 많은 물건들을 사 와서 사람들한테 선물도 해주고.

◇김방희>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퇴계 이황 선생은 농사를 통해서 아주 성실하게 축적을 한 거니까 이거는 오히려 본 받을 일인데, 조선시대를 보면 아까 제가 말씀드린 허생의 예는 매점매석을 통해서 돈을 버는 건 소설이니까 허구적인 거고, 실제로 좀 악랄한 수법 같은 걸 통해서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돈 번 사람들은 없어요?

◆이한> 사실 매점매석 얘기 나왔으니까, 매점매석으로 조선시대 때도 돈을 악랄하게 번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김방희> 꽤 있죠. 그때는 더 쉬웠을 테니까.

◆이한> 조선시대 때 그 순조 때 순조 33년에 큰일이 벌어졌는데 한양 도성 내에 쌀가게들이 전부 다 문을 닫았어요.

◇김방희> 왜요?

◆이한> 그건 바로 그게 바로 매점매석, 독과점이었죠. 당시 조선의 쌀을 실어 나르는 게 이게 어떻게 보면 조선 국가가 하는 게 아니라, 경강상인이라는 상인들이 하고 있었거든요.

◇김방희> 그 얘기는 소설에도 많이 나왔어요. 황석영 소설 이런데.

◆이한> 그렇죠. 그런데 경강상인들이 쌀을 실어 날라서 그다음에 이 도성에 있는 쌀가게로 배분을 해 주는데. 34년 2월 정도에 경강상인들이 이제 춘분기니까 쌀 가격이 많이 비싸지겠지라고 생각해서 쌀을 많이 사서 창고에 넣어놨는데. 생각했던 것만큼 쌀 가격이 많이 안 높아진 거예요. 쌀 가격이 쌌어요. 그러니까 경강상인들이 우리가 손해를 보겠다라고 싶으니까, 아예 쌀을 한 톨도 한양에 보내지 말자.

◇김방희> 시중에 안 내놓은 거죠.

◆이한> 네, 그렇게 한 거죠. 그러니까 한 2주에 걸쳐서 쌀이 쌀가게가 하나, 둘 문을 닫더니, 마침내 모든 쌀가게가 문을 닫혀버려요. 그렇게 되니까 쌀 가격이 천정부지로 뛰죠. 그렇게 되니까 경강상인들은 생각했을 거예요. 우리가 큰돈을 벌겠다. 하지만 그 전에 3월 8일 정도에 사람들이 폭동을 일으킵니다. 쌀 없어진 거는 전부 저 경강상인들이 숨겨놔서 그렇다. 정확하게 알았죠. 그래서 그 사람들이 쌀가게에 들어가서 불을 지르고, 그다음에 용산 근처에 세워둔 그 쌀 창고를 습격하고, 그렇게 했는데 워낙 이 폭동의 기세가 맹렬했기 때문에 왕의 친위대인 금이형부터 시작해서 포도대장이니 뭐니 어영대장까지 전부 다 총출동해서 막았지만 굉장히 가라앉히는데 쉽지 않았고요. 수많은 사람들이 그 자리에서 처형당하고, 그래서 간신히 진압된 일이 있었는데, 결국 이 일로 경강상인들도 처형을 당하긴 했습니다.

◇김방희> 상당히 큰 매점매석 사건들이 있었군요. 그 매점매석의 역사가 오래된 건 우리뿐만 아니라 서양 역사 보면 우리가 잘 아는 아르키메데스라는 사람이 올리브가 흉작이니까 올리브 짜는 기계를 다 사들여서 매점매석해서 돈을 벌었다는 기록도 있는데. 참 조선시대 얘기지만 남의 일 같지도 않고, 과거 일에 국한된 얘기 같지도 않습니다. 곽정은 님이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었던 선조분들 얘기를 듣고 있으니까 흥미롭습니다 해 주셨는데. 아까 경강상인회 이거는 개인이 아니라 일종의 단체죠. 공급업자 쪽 단체인데 개인으로 이렇게 허생처럼 대규모 돈을 번 사람은 없습니까. 아니 흥미가 생겨서.

◆이한> 사실 개인이 돈을 벌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은 밀수였습니다.

◇김방희> 그 당시에는 그랬겠네요. 밀수였겠군요.

◆이한> 왜냐하면 그 당시 국가대 국가별로 공식적인 무역이 성립하지 않았고요. 개인이 나라의 바깥으로 나가는 것도 원칙적으로 허용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할 수 있는 방법은 딱 하나 . 사신이 갈 때 그 옆에 따라가는 거였습니다. 그래서 중국에 사신이 갈 때, 그리고 일본의 사신이 갈 때 같이 따라갔던 사람이 바로 통역가인 역관이었거든요. 역관은 지금으로 따지면 통역가인데. 중인들이 할 수 있었고, 그러니까 지금으로 따지자면 전문직이었습니다. 시험 봐서 통과해야 되는. 하지만 신분이 중인이었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좋은 대우를 받지 못했지만. 하지만 이 사람들은 아까 얘기했듯이 밀수를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아주 떼돈을 벌었습니다. 그래서 조선시대 때 그 갑부인 역관들이 굉장히 많이 나와요. 아까 얘기한 허생전 얘기에서, 허생전에서 맨 처음에 허생한테 종잣돈을 빌려준 사람이 바로 변부자지 않습니까.

◇김방희> 맞아요. 변부자죠.

◆이한> 이 사람의 모델이 있습니다. 바로 숙종 때의 유명한 역관이었던 변승업이라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굉장히 많은 돈을 밀수를 통해 벌어서, 또 이 돈을 고리대금업으로 돈놀이를 해서 그걸 불려서 아주 그냥 굉장히 유명한 부자가 됐고요. 또 이 변승업과 당대의 유명한 사람이 장현이라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사실 본인이 유명했다가 나중에 이 사람 조카가 더 유명해지는 바람에 한풀 꺾였는데. 바로 장희빈의 친척입니다. 그런데 장희빈이 유명하기 전에 이 사람은 젊은 시절에 역관을 수석으로 합격한 엘리트였는데, 병자호란이 터지고 그래서 그 당시, 그리고 지고. 그래서 소현세자하고 봉림대군. 나중에 효종이 되는 그 사람들이 중국에 끌려갈 때,

◇김방희> 초반에 끌려가죠.

◆이한> 그때 통역관으로 같이 갑니다. 그래서 한 9년 동안 그렇게 중국에서 고생을 하면서 소현세자와 봉림대군과 사이가 친해지고, 또 중국의 발도 넓어지죠. 그다음에 귀국해서 효종이 왕이 된 다음에, 그리고 수역이라고 해서 그 역관 중에 제일 높은 사람이 돼서 여러 번 중국을 왔다 갔다 하면서.

◇김방희> 그게 부의 원천이었군요.

◆이한> 네, 그리고 떼돈을 벌어들였습니다. 언젠가 이런 일도 있었어요. 사신들이 넘어가는데 이건 나라의 것이라고 쓰여진 바구니가 여러 개가 있는데 사람들이 이게 뭐지 하고 딱 열어보니 그 안에 인삼이 가득 들어있던 거예요. 이게 인삼 한 뿌리만 해도 굉장히 큰돈이 되는데 이게 한 50바구니 정도 되니까 이걸 가져가면 진짜,

◇김방희> 거대한 밀수죠.

◆이한> 어마어마한 일을 벌이는 건데. 그러니까 사람들이 얘기한 건 이거는 분명히 장현 짓이다. 그러니까 장현이 틀림없다고 하는데. 사람들이 전부 감싸요. 심지어 효종마저도 이건 오해야, 이건 장현의 일일 리가 없어라고 하면서 그래서 신하들이 이건 장현 짓이 틀림없다니까요라고 화를 내니까, 그제서야 효종이 어쩔 수 없지라고 해서 가까운 데 살짝 귀양을 보냈다가 다시 돌아오게 합니다. 그래서 이 장현은, 장현과 그 사람 동생인 장찬도 역관이었거든요. 돈이 얼마나 많았는지 별명이 국중거부였고요. 게다가 장찬 같은 경우에 너무 으리으리한 집을 세워서 다른 관리들이 저거는 부숴야 됩니다라고 해서 부수는 일도 있고. 심지어 숙종 때는 이 사람들이 뭔가를 밀수해오다가 걸렸는데 바로 청나라 대포하고 청나라 지도를 가져오다가 걸립니다.

◇김방희> 무기까지 밀수를 해요.

◆이한> 네. 이거는 이 사람들이 사려는 게 아니라, 사실 나라에 부탁을 받아서 한 거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이 사람들이 그 모든 책임을 지고 귀양을 갑니다만 솔직히 이 사람들이 가진 돈이 어마어마했기 때문에 청나라 관리들마저도 구워삶을 수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게 맞죠.

◇김방희> 사무역이 금지된 상황이었으니까, 조선시대 밀수를 통해서 부를 획득하는데 아무래도 우리가 중국 쪽으로 갖고 간 건 인삼 계통이었을 테고. 중국 쪽에서는 좀 나은 문물들을 갖고 들어온 걸 텐데.

◆이한> 네, 귀중품이나 책들.

◇김방희> 바로 인삼 얘기를 하셨으니까 임상옥 얘기를 안 할 수가 없죠. 뭐 드라마도 되고 조선시대 최고 거부로 알려진 분인데 인삼이 결정적이었습니까?

◆이한> 아무래도 인삼이 거의 중국과 일본, 일본에서도 굉장히 여겨지는 만병통치약이고 심지어 유럽까지도 건너가서 루소나 그런 사람이 이게 바로 동양에서 온 명약이다라고 인삼을 줄 정도로 유명했거든요. 그래서 한 16세기, 17세기 정도 되면 산삼이 씨가 마르면서 인삼 무역의 위기를 맞습니다만 인삼 재배에 성공합니다. 그리고 또 전설 임상옥의 전설이 인삼을 쪄서 홍삼으로 만들어냈다는 게 임상옥이라는 전설이 정확합니다. 진실인지는 알 수 없고요. 그래서 홍삼이라는 새로운 제품을 개발해내면서 인기가 더 높아져서 인삼이 거의 동아시아의 엄청난 돈을 끌어올 정도로 굉장히 인기를 끌었습니다.

◇김방희> 이한 작가와 함께 조선시대 재테크 얘기를 하고 있는데요. 6824번님 사람 사는 세상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비슷하군요. 그럼요. 지금은 대상이 좀 다를 뿐이죠. 상품이 다를 뿐이죠. 황현구님도 사람 사는 곳, 돈 있는 곳에는 어김없이 매점매석이 있었군요. 지금은 사라졌다고 믿으십니까? 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플랫폼 기업들이라는 곳들도 시장 점유율 50%를 넘기기 시작하면 수수료를 올려서 공짜 점심이 아니라는 걸 분명히 가르쳐주고 있죠. 김현우 님도 이런 얘기들이 좀 경험이 분명히 있겠죠. 역사는 반복되기에. 그럼요. 방식이나 대상이나 가격에서 반드시 변동성이 커지고 그런 역사는 반복되는 법이죠. 그 일각에서는 임상옥이 드라마 하이라이트에 해당됩니다마는 거부가 되는 순간을 어떤 진실의 순간을 지금 애플 같은 기업들이 자사주 소각하는 것에 비유를 많이 하거든요. 돈을 가지고 자기 회사 주식을 사서 이걸 태워버린다. 납득이 안 되는데 사실은 기업 가치는 더 뛰게 되거든요. 그러니까 인삼을 둘러싸고 임상옥이 그런 일종의 방법을 쓴 거죠.

◆이한> 사실 이게 굉장히 유명한 임상옥의 일화입니다마는 사실 아까 얘기한 대로 사무역은 금지되어 있었고 무역은 오로지 사신이 오고 가는 것에 따라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조선 상인들은 물건을 팔 수 있는 기한이 한정돼 있었습니다. 조선 사신들이 와서 떠나기 전까지 다 팔아야 돼요. 같이 가야 되기 때문에 뒤에 남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 상인들이 하는 수법은 일부러 가격을 너무 싸게 먹이는 거예요. 이 가격 아니면 안 산다. 그런데 어차피 조선 상인들은 날짜가 정해져서 이 날이면 떠나야 되니까 그럼 그때가 되면 울며 겨자 먹기로 싼 값에 팔고 떠나서 파산하는

◇김방희> 가격 결정권이 청나라 사신들한테 있었군요.

◆이한> 청나라 상인들이죠. 그랬는데 임상옥이 같은 수법을 당했는데 그러니까 내가 차라리 이 가격에 파느니 싹 다 태워버리고 만다 그래서 공터에다 몰아 놓고 인삼들을 다 불을 질러버립니다. 그러니까 그 소식을 들은 청나라 상인들이 아니 그 귀한 인삼이, 홍삼이 불타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혼비백상에서 달려 들어와서 불타고 있는 인삼들을 꺼내고 그다음에 사과하고 원래 가격의 10배로 샀다. 그런 이야기가 전해집니다만 왠지 그 사람이면 정말 하셨을 것 같습니다.

◇김방희> 전혀 맥락은 다릅니다마는 고 이건희 회장이 애니콜 화형식도 좀 생각나네요. 품질을 높이기 위해서 한 거고 임상옥은 가격을 높이기 위해서 한 건데 이 돈을 많이 번 사람들 아무래도 역관 중심의 밀수업을 통해서 많이 걸었다는 얘기까지 했는데 보통 사람들, 보통 농민이죠. 사실은 농민이 대부분이었으니까 농민들이 어떻게 살았을까? 어떤 재테크를 했을까가 궁금한데 조선 후반기가 되면 워낙 신분 제도에 대한 불만도 높아지고, 전봉준의 동학 혁명도 벌어지고 이 얘기는 거꾸로 농민들을 아주 착취하는 세력들, 탐관오리라고 지칭되기는 했습니다마는 있었다는 반증이겠죠.

◆이한> 그렇죠. 사실 탐관오리들은 어느 시대에나 있었다고 생각하는 게 맞을 것 같고요. 농민들은 사실 언제나 힘든 사람들이었는데 조선 후기로 가면서 좀 농민들도 항상 이 세상 사람들은 누구나 이익을 추구하잖아요. 농민들도 더 큰 돈을 벌고 싶어 해서 여러 가지 시도를 하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이 모내기 이앙법입니다. 왜냐하면 모내기를 하면 물이 가득 차기 때문에 잡초 뽑는 일이 줄어들어요. 잡초 뽑는 일이 줄어들면 이 잡초 뽑을 시간에 다른 거, 담배를 씹는다든가 투명 작물을 심는다든가 해서 더 많은 돈을 벌 수가 있는 거죠. 그리고 쌀의 생산량도 많이 올라가고요. 그래서 그 이앙법을 하기 위해서 필요한 건 물이죠. 그래서 물을 확보하기 위해서 보를 쌓는데 그런데 이 보를 쌓는 게 문제는 이 보를 쌓으려고 농민들을 착취하는 탐관오리가 있었는데 그 바로 그 대표적인 사람이 동학농민운동의 시발점이 됐던 바로 조병갑이었습니다. 이 조병갑이라는 사람은 아주 굉장한 탐관오리였는데요. 일단 백성들은 온갖 말도 안 되는 세금을 만들어서 착취합니다. 효도세라든지, 불효세라든지 자기 어머니 상 당했으니까 부의금 내라고 해서 백성들한테 또 한 번 돈을 주르륵 걷는다든지 그렇게 하고 그다음에 백성들이 좋은 쌀을 세금으로 바치면 이걸 나쁜 쌀로 바꿔서 나라에 바치고 좋은 쌀은 자기가 먹고 그리고 가장 유명한 게 바로 만석보였습니다. 사실 저도 어렸을 때 만석보를 배우면서 이 보를 왜 무너뜨리는 거야라고 생각했더니 사연이 있더라고요. 워낙 그 지역에 이미 보들이 많이 있었는데 조병갑이 만석보를 하나 더 새로 쌓아야겠다고 하면서 농민들을 억지로 동원한 거예요. 동원하면서 약속을 했죠. 이 보에 물을 받은 논은 첫 해에는 세금을 안 걷어줄게 농민들이 그걸 믿고 열심히 힘들게 보를 쌓았죠. 그런데 그 보가 만들어지고 농사를 거둘 때 되니까 당연히 조병갑은 입을 싹 씻고 세금 내놔, 많이 내놔 그렇게 되니까 사람들이 폭발할 수밖에 없었던 거 그리고 폭발하자마자 그 보를 무너뜨릴 수밖에 없었던 거더라고요.

◇김방희> 만석보라는 게 그런 사연이 있어서 최초 공격 대상이 된 거였군요.

◆이한> 그렇죠. 사연이, 원한이 있었던 거예요. 원한의 집결체였던 거죠.

◇김방희> 참 재미있는 스토리텔러시네요. 7655번님 너무 흥미로워서 차에서 못 내리겠습니다. 그렇군요. 6565번님 어느 시대나 돈벌이에 밝은 사람들이 있어요. 그런데 이지에 밝은 것과 정말 정당한 방법으로 돈 버는 건 좀 차이가 있으니까 그건 구분하자는 얘기는 우리 이 작가께서 늘 하시는 말씀이고 개인들은 아까 얘기한 어떤 환경 속에서 돈을 버는 방법들을 찾아나갔던 거고 기업이라고 할 만한 게 자본주의가 발전하지 않았으니까 그렇다 치더라도 기업에 준하는 조직들이 있었을 텐데 여기서 어떻게 부를 축적했습니까?

◆이한> 솔직히 기업을 얘기할 수 있는 게 아까 얘기했던 경강상인들이었습니다. 경강상인들은 지금 한강이 지금은 그냥 아파트 뷰로 쓰이고 있습니다만 원래는 한강의 모든 식자재와 그 필요한 것들을 날려주는 교통편이었죠.

◇김방희> 교통, 물류의 중심이었던 거죠.

◆이한> 저 쪽 위로 광나루서부터 아래 양화진까지 마포 근처까지 수많은 시장과 뱃나루가 있었고 거기에서 물건을 실어 날라서 한양 사람들을 먹여 살렸는데 바로 그 상인일을 했던 사람들이 경강상인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경강상인들이 돈에 눈을 까뒤집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항상 그 별명이 호송지민이었어요.

◇김방희> 무슨 뜻입니까?

◆이한> 맨날 소송 걸어. 제가 내 돈 뺏는다고 소송 걸고 아까 맨 처음에 얘기했던 그 마포의 염회전에 있는 마포 사람들도 경강상인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아까 얘기한 쌀 매점매석 한 사람들도 경강상인들이었고 그다음에 또 하나 마포하고 합정이 지금은 가깝지만 그 당시에 항구가 양쪽에 있었거든요. 그래서 저쪽 지방에서 올라온 배가 어디에 머무르느냐에 따라 그 지역에 있었던 여관들 주인이 벌이가 달라졌거든요.

◇김방희> 굉장히 큰 이권이었겠네요.

◆이한> 그렇죠. 그런데 맨 처음에는 사람들이 합정에서 머물다가 배들이 합정에서 멈추다가 점점점점점점 마포로 옮겨가거든요. 그러니까 합정 사람들이 소송을 걸어요. 마포 사람들 때문에 우리가 다 굶어 죽겠다. 그래서 그것 때문에 찌그락찌그락 열심히 싸우고서 하도 싸움이 많이 벌어지니까 조정에서는 아예 그 경강어사를 파견합니다. 경강 사람들 하도 싸움이 벌어지고 이권 다툼이 심지어 사람을 죽이고도 내가 안 죽였다고 사건을 은폐하는 일도 벌어졌기 때문에 경강어사를 한 7번인가 파견해서 이 사람들이 온갖 벌이는 사건 사고를 좀 막아보고자 했습니다만 그래도 여전히 경강상인들은 굉장히 많은 이익을 누리고 또 이게 어떠면 가끔은 정부의 개기고 심지어 이 세금을 나르는데 세금은 쌀이잖아요. 조선시대 쌀인 세금을 배에 실어 나르는데 이 배를 일부러 침몰시켜요. 그래서 워낙 그 안에 쌀이 열 섬이 있었다면 사실은 저 안에 백 섬이 넘게 들어 있었는데 내가 다 그 손해를 봤으니까 갚아주세요.

◇김방희> 보상해 달라.

◆이한> 네, 보상해 달라. 그런 식으로 온갖 소송과 돈과 관련된 소송.

◇김방희> 그게 지금으로 치면 이런 독점 기업들. 이런 데 비유될 수 있는 경우고 똑같은 사안에 대해서도 돈에 욕심을 내는 건 똑같은데 어떤 분들은 대박을 쳤을 테고 어떤 분들은 쪽박을 쳤을 텐데 비교하자면 요즘 1~2차 벤처 붐 당시에 초기에 큰돈을 버신 분들이 있는가 하면 뒤늦게 들어가서 그야말로 물리신 분들도 있는데 조선시대에 이런 일은 없습니까?

◆이한> 조선시대 때는 주로 이제 가장 유명한 게 바로 국토 종단항이라고 하는 나진항의 사태입니다. 그 당시에 기뢰선이라고 해서 길림성에서부터 회령까지 이어진 철도가 만들어지고 또 일본이 생각한 거예요. 저쪽이 조선통을 위로 해서 아래로 종단을 하고 있는 항구를 만들면 딱 좋겠다. 부산과 연결되는 위쪽의 항구를. 그래서 어디다 만드느냐 때문에 후보지가 3곳이 됐는데 그러니까 어딘가에 여기가 걸리면 그쪽 땅을 산 사람은 대박이 나는 거예요. 그래서 후보지가 세 곳이었어요. 청진, 웅주 그리고 맨 마지막이 지금은 나선이 된 나진. 그런데 그래서 사람들이 전부 여기가 유망해 여기가 유망해 여기가 유망해.

◇김방희> 베팅을 하는 거죠.

◆이한> 네, 각자 자기 주식을 열심히 샀습니다. 그리고 계속 오보가 나와요. 여기가 됐다. 여기가 됐다. 그래서 사람들이 벌렁벌렁하는 마음을 잡고 기다렸는데 결국 선정된 건 나진이었습니다. 나진이 갑자기 땅 가격이 300배, 1000배 그렇게 오를 정도로 마구 올라갔고 다른 쪽 산 사람들은 전부 망해서 그것 때문에 쓰러져서 죽은 사람이 있을 정도로 쪽박과 대박이 극과 극으로 나뉘어서요. 그리고 또 그걸로 끝난 게 아니라고 해서 이 나진은 맨 처음에 한 20~30가구가 살 정도로 아주 작은 어촌이었거든요. 그런데 갑자기 온 동아시아의 투기꾼들이 몰려들어와서 땅을 사기 시작해요. 그래서 원래 살던 사람들 그리고 여기다 싶어서 찍어서 샀던 사람들은 김가진 같은 사람들이 대박이 났고요. 김가진은 아니지만. 김기덕이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대박이 났고요. 그리고 투기꾼들이 몰려와서 하루에 땅 주인이 18번 바꿨다 할 정도로 웃돈 얹어서 계속 사고, 사고.

◇김방희> 계속 따라붙기 마련이죠.

◆이한> 네, 그래서 어마어마하게 올랐는데 그렇게 해서 3년을 그렇게 지내다가 땅 가격이 정말 하늘을 넘어서 저 성층권까지 갔다 싶을 때 일본 정부가 발표합니다. 3년 전 원가로 땅을 사겠다.

◇김방희> 수용해 버리는 거죠.

◆이한> 네, 그러니까 이게 뭐냐면 아니, 시장 가격인데 어떻게 그럴 수 있겠냐고 지금은 그렇게 얘기할 수 있겠지만 상대는 일본 제국주의 정부였습니다. 누가 감히 토를 달겠습니까. 그래서 3년 전 원가. 허술했던 어촌이었던 그때로 원가로 땅을 사버렸고 물론 그때 중요한 사람들 이미 한 몫 챙긴 사람은 다 빠졌고 맨 마지막 상투 붙들고 있던 개미들만 전부 망했다는 그런 슬픈 이야기가.

◇김방희> 그거는 지금이나 예전이랑 똑같은 거군요. 또 하나 저도 부모님한테 들은 얘기인데 일제강점기 전부터 만주를 많이 향했다는 거거든요. 한국 사람들 부동산 투기의 역사를 얘기할 때 만주 얘기를 아버님도 가끔 하셨는데. 만주로 몰려간 분들 중에서 물론 독립운동을 하러 가신 분들이야 본인의 의지 때문에 그렇지만 돈 때문에 가신 분들도 많았습니까?

◆이한> 사실 그거는 일본이 일단 잘못한 걸 먼저 얘기해야 되는데요. 일단 우리가 국사 교과서에서 배우는 토지조사 있었지 않습니까? 그 당시 일본은 자기들이 선진국이라는 생각에 딱 있어서 너희 같은 미개한 조선을 뿌리 끝까지 고쳐주겠어라는 생각을 하면서 너희들의 미개한 토지 제도를 바꿔주겠다 하면서 토지 조사를 하면서 신고를 하게 했거든요. 그런데 이미 조선시대에도 자기들만의 토지 제도가 있었죠. 그랬는데 이걸 갑자기 근대화하겠다. 서구하겠다고 했는데 일단 조선 사람들은 이게 뭐야라는 생각이었고 또 일본을 못 믿겠다. 세금 왕창 먹인다더라. 그래서 일부러 신고하지 않은 사람도 있었고 그리고 신고 기간도 짧았어요. 그래서 신고 조사가 끝난 다음에 신고한 사람들은 그래, 신고한 사람들은 너희들은 땅주인이고 신고 안 한 땅은 전부 우리 거라고 해서 갑자기 일본이 조선 땅의 50%를 차지하는 대지주가 됩니다. 그러니까 원래 땅을 가졌던 사람이 전부 소작농으로 굴러 떨어지고 소작료도 어마어마하게 비싸져요. 그렇게 되니까 사람들이 아무리 열심히 농사를 지어도 가난해질 수밖에 없는데 그때 갑자기 만주 이야기가 들려오는 거죠. 만주는 비옥한 땅이고 거기에 가서 5년만 농사지으면 너희 땅을 가질 수 있다.

◇김방희> 일종의 골드러시 같은 게 벌어진 거군요.

◆이한> 네, 그렇죠. 여기에도 또 일본 정부의 계획이랄까 그런 게 있었는데 사실 일본 정부라기보다는 일본 총독부였습니다만 왜냐하면 그렇게 소작농이 되니까 갑자기 실업자가 늘어나요. 실업자가 늘어나고 그런 사람들이 전부 난민들이 되니까 사회가 불안해지거든요. 그러니까 조선 총독부로서는 이 사람들을 만주에 보내서 자기 땅을 가지게 하자라는 마인드였습니다만 또 일본 정부가 반대해요. 만주는 우리 일본 사람들을 보내서 우리 일본 영토로 만들 거야. 조선인들이 들어오면 안 돼 그런 입장이었는데 결국에는 수용을 하게 되죠. 그래서 조선 사람들은 그런 사정은 꿈에도 모르고 저기 가서 5년만 열심히 농사지으면 우리 땅을 가질 수 있단다. 그 희망을 가지고 기차를 타고 만주로 가서 아주 크게 고생을 합니다.

◇김방희> 그렇죠. 그러니까 이 얘기는 사실 시대를 불문하고 떠도는 얘기로 하는 재테크가 얼마나 허망한가를 잘 보여주거든요. 떠도는 얘기는 누군가 의도를 가진 사람들이 고의적으로 만들어내기도 하고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너무 뒤늦은 얘기일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주의해야 되는데 저는 경성별곡이라는 책에 등장하는 반복창이라는 이름 저는 흥미롭게 읽었는데 이분은 그 당시 쌀 선물거래소죠. 쌀 인천에 있는 추인소라는 곳에서 선물 거래를 했는데 너무 돈을 많이 벌어서 조선 최고의 미녀와 그 당시 최고의 비용을 치르는 결혼식을 하기도 했는데 딱 2년 만에 거지가 되더군요. 기록을 보니까. 그걸 보면서 촉은 영원하지 않다. 조금 돈을 벌어본 분이 떠도는 얘기를 믿지 않고 자신만의 노하우로 성공을 한다 하더라도 촉이 영원하지 않습니다. 이제 반복창이라는 사람 성공담을 읽어보니까 자료 보니까 23일 연속 이 선물이라는 건 오를 건지 내일 건지를 맞추는 홀짝 게임인데 23일 연속으로 맞춰서 돈을 벌었다고 그러는데 그 후에는 이게 안 맞습니다. 촉이라는 건 영원하지 않다는 것도 오늘 조선시대 재테크를 통해서 우리가 또 얘기해둬야 할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어떠세요? 이게 조선시대 투자, 투기 다 자료를 들여다보신 건데 어떤 자세. 오늘의. 오늘날에 던지는 시사점 같은 걸 좀 느끼셨어요?

◆이한> 사실 제가 한 600년어치 자료를 찾아보니까 왜 이렇게 망한 사람들만 많고 도대체 돈을 벌어서 끝까지 잘 가진 사람보다는 그냥 망하고 망하고 망한 이야기를 보니까 굉장히 염세적이 되더라고요. 이거 돈 벌어서 그냥 다 망하는 거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었는데 결국 이거는 드는 생각이 두 가지였다고 봐요. 욕망과 그리고 절망. 남들보다 더 잘 살고 싶다는 욕망이죠. 이게 나쁜 건 아니에요. 그러니까 욕망이 있으니까 더 열심히 노력하고 더 성실하게 일하고 더 먼저 준비하고 그렇게.

◇김방희> 조선시대와 달리 또 자본주의는 그런 걸 토대로 성장하는 거고요.

◆이한> 조선시대 때도 열심히 한 사람이 거기에 그 사람들도 욕망이 넘쳐났던 사람들이고요. 또 하나는 절망인 것 같은 게 만주 같은 경우에 제가 느꼈던 건 사람들이 절망이거든요.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조선시대 때도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도저히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러면 투기로 가는 거예요. 한탕주의. 금을 캔다거나 만주로 간다거나 그 가능성이 되게 희박하다고 하더라도 나는 성공할 거야라는 어떻게 보면 근거 없는 믿음을 가지고도 뛰어드는 게 그게 그 사람들이 어리석은 것도 있지만 또 하나는 절망한 것도 있다는 거죠.

◇김방희> 절망에서 나온 선택들이었겠죠. 최근에 우리 재테크에는 과연 그런 게 없었는지 한번 돌아봐야겠네요. 절망 끝에 나온 재테크도 꽤 있었죠. 가상화폐를 보면서. 3123번 님이 예나 지금이나 경제는 사람의 이익과 탐욕의 줄타기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해 주셨는데 우리 이한 작가께서는 욕망과 절망이 어우러져서 추는 춤이 재테크다 이런 걸 느끼신 것 같아요. 앞으로 조선시대 얘기를 가끔씩 하려고 그럽니다. 이게 다 사람 사는 일이라 그래서 역사 커뮤니케이터 이한 작가께 저희가 조선시대 얘기를 앞으로도 종종 듣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이한> 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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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공예감] 퇴계 이황이 한국의 워런 버핏으로 불리는 이유 - 이한 작가 (『우리는 투기의 민족입니다』)
    • 입력 2022-09-04 06:58:14
    성공예감 김방희입니다
■ 인터뷰 자료의 저작권은 KBS라디오에 있습니다.
인용 보도 시 출처를 밝혀주시기를 바랍니다.
■ 프로그램명 : 성공예감 김방희입니다
■ 방송시간 : 9월 2일(금) 09:05-10:53 KBS1R FM 97.3 MHz
■ 진행 : 김방희 소장 (생활경제연구소)
■ 출연 : 이한 작가 (『우리는 투기의 민족입니다』)

- 선비의 나라 조선시대, 실제로는 왕부터 천민까지 모두 돈 벌기 위해 고군분투
- 정조 7년, 염해전 사건... 왕부터 대사성, 양민, 노비까지 연루된 이권 다툼
- 퇴계 이황, 조선시대 재테크 달인... 땅 사고팔고, 농사일 관리하고 농업에 투자하는 등 관리
- 조선시대 쌀 매점매석, 독과점으로 쌀가게 문 닫기도... 사람들 폭동 일으키고 경강상인들은 처형당해
- 개인이 가장 큰돈을 버는 방법은 밀수... 중국이나 일본 사신을 따라갔던 역관을 위주로 이뤄져
- 조선 최고 거부 임상옥은 인삼 불태우며 가격 높였다는 이야기도 전해
- 농민들은 이앙법에 뛰어들어... 모내기 덕에 잡초 뽑을 시간에 다른 생산활동
- 조선말 철도 들어오며, 항구 후보지 결정 과정에서 부동산 투기도 일어나
- 조선시대도 망한 사람들이 많아... 남들보다 잘 살고픈 욕망이 투기와 절망으로




◇김방희> 주식과 부동산 시장 모두 하락세가 이어지다 보니까 그때 살 걸, 팔 걸, 아예 뺄 걸 하면서 과거 후회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진짜 시간을 돌려서 한 500년 전 조선시대로 돌아가면 어떨까요. 그렇다면 우리는 떼돈 벌 수 있을까요. 많은 분이 오해하시는데 그 허생전에서 매점매석을 통해서 허생이 말총을 가지고 돈을 버는 걸 가지고 지금 할 수 없으니까 그때와는 좀 다를 거라고 생각하실 수 있겠습니다마는. 글쎄요. 지금도 플랫폼 기업들은 수수료 올리는 방식의 독점 폭리를 취하니까 방법은 매한가지 아닐까 싶습니다. 조선시대 역시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았던 거죠. 그때 그분들도 한양의 자가. 집 한 채 마련하는 걸 꿈꿨고 집값이 오른다는 소문에 대박을 노리면서 영끌을 하기도 했습니다. 임금부터 양반, 상인, 천민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부자가 되기 위해서 고군분투했는데요. 조선시대에 재테크의 역사를 취재하신 분이 계십니다. 책 제목이 또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우리는 투기의 민족입니다를 쓴 역사 커뮤니케이터 이한 작가와 함께 조선시대 원조 개미들의 투자 얘기를 들어보겠습니다. 이 작가님 어서 오십시오.

◆이한> 안녕하세요. 이한입니다.

◇김방희> 이거 배달의 민족까지는 어떻게 참겠는데 투기의 민족이라고 자료 조사를 거친 후에 하셨으니 조선시대도 투기가 만만치 않았다. 그런 뜻입니까?

◆이한> 그렇죠. 어떤 사람이건 사실 사람은 언제 어디서건 돈을 많이 벌고 싶어요. 특히 남보다 훨씬 더 많이 벌고 싶어 하죠. 그렇기 때문에 사실 투기가 없었던 때가 없지 않았을까요?

◇김방희> 그렇죠. 조선시대라면 투기의 대상이 주로 뭐가 됐을까요. 그러니까 자본주의 개념이 있었던 건 아니고 돈 버는 것에 대해서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그러니까 겉으로는 이렇게 높이 평가했던 건 아니지 않습니까, 지금처럼.

◆이한> 사실 저도 자료를 조사하기 전에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선비의 나라. 돈을 좋아하지 않고 옛날에는 양반들은 돈을 손에 들고 다니지도 않았다라는 생각을 어렸을 때 했었는데요. 자료를 찾아보니까 돈 문제에 관련되면 위로서부터는 왕부터 아래로부터는 노비까지 모든 사람들이 돈을 더 가지기 위해서 몰려들어서 아귀다툼이 벌어진 적이 많았습니다.

◇김방희> 지금과 별로 다를 바 없었다.

◆이한> 그렇죠. 한 가지 얘기를 들자면 정조 7년에 염해전 사건이 있었거든요.

◇김방희> 그건 뭡니까.

◆이한> 염해전은 소금이나 젓갈을 파는 가게였는데 옛날에는 소금이 되게 중요한 반찬이었죠. 구하기 힘든. 그런데 그 염해전이 마포에 있었습니다. 마포에서 염해전을 소금하고 젓갈을 가지고 서울로 보내는 거예요. 그러니까 당연히 돈이 많이 벌리는 가게였죠. 그런데 정조 7년에 마포 사람들이 왕한테 하소연을 해요. 그 염해전이 300년 동안 우리 거였는데 혜화동에 사는 반인들이 얘를 빌려가서 안 돌려주고 있다. 그런데 혜화동에 있는 반인들은 지금으로 생각하자면 성균관이 있었던 자리죠. 성균관은 지금으로 따지면 서울대학교. 서울대학교고 반인들은 양반도 그리고 양민도 아니고 굳이 말하면 노비 쪽인데 그 교직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반인들이 그 가게를 빌려가서 안 돌려준다, 그래서 우리가 300년 동안 가졌던 가게니까 돌려달라고 하는 거예요. 맨 처음에 영조가 정조가 그걸 듣고 그러면 그 가게 다시 마포 사람한테 돌려줘라 라고 했더니 그러면 반인들이 반발을 해서 누가 나섰느냐, 서울대학교 총장. 즉, 성균관에 제일 높은 사람이었다는 대사성이 나서서 이 가게는 성균관을 위해서 성균관에 있는 미래의 인재들을 키우기 위해서 필요하니까 돌려주세요라는 말도 안 되는 주장을 정조 앞에서 딱 한 거예요. 그러니까 정조가 그러면 다시 반인들한테 돌려줘라고 했거든요. 그러니까 또 이번에 마포 사람들이 또 우리 억울해요. 그 가게 돌려주세요라고 해서 6년간은 싸워댑니다.

◇김방희> 아, 6년이나 싸웠습니까?

◆이한> 그래서 정조가. 그 정조가 너무나도 곤란해서 하소연을 해요. 어느 쪽 말이 맞는지 모르겠다. 서로 하는 말이 또 다 달라요. 우리는 우리 쪽이 옳다. 이쪽이 옳다고 해서 그래서 이걸 듣고 정조의 하소연을 듣고 해결해 준 사람이 그 유명한 재상인 채제공입니다. 채제공이 이거는 마포 사람들이 맞다 그래서 마포 사람들의 가게를 돌려주고 마포 사람들이 졌던 빚을 나라가 대신 갚아줬어요. 물론 마포 사람들이 나중에 천천히 갚게 했지만. 그러니까 이 가게 하나의 수익이 엄청나게 나는 알짜 가게를 놓고 위로는 왕 그다음에 대사성 그다음에 양민들 그리고 반인들인 노비들까지 다 합쳐서 치열하게 싸운, 그런 사건이 있었을 정도로.

◇김방희> 마포의 염해전 운영권을 둔 분쟁 하나를 보면 조선시대라고 이런 돈이 걸린 이해관계 갈등이 없었던 건 아니다. 그리고 누구나 다 노골적으로 자신들의 이해를 내세웠다. 소금이 큰돈이 됐다는 것도 흥미롭고요. 사실 서양에서도 소금은 셀러리라는 말이 거기서 나왔을 정도로 곧 돈이니까. 당시에는 오죽했겠습니까, 흥미롭네요. 아까 모든 계층이 사실은 돈을 갈구 했고 그런 갈등이 표출됐다, 이런 말씀도 해 주셨는데. 자료 찾아내서 책에 쓰신 것 중에서 제가 흥미로웠던 건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사실은 동양에서 유명했던 유학자 퇴계 이황 선생 천원권 지폐 모델이니까 요즘이야 돈과 관련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당시는 전혀 관련 없었을 것 같은데 생각보다 투자를 잘한. 이런 표현을 써도 될지 모르겠습니다마는 한국의 워렌 버핏이었던 투자의 달인이었어요?

◆이한> 사실 이게 퇴계 이황을 연구하는 분들한테는 꽤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논문도 많이 나왔고. 그 퇴계 이황 분이 워낙에 이제 7형제 중에 마지막으로 태어나고 그다음에 어렸을 때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어요. 홀어머니가 키우면서 굉장히 가난하게 살았거든요. 그런데 이분이 똑똑하시잖아요. 그래서 과거에 급제하고 나서 장가를 잘 가십니다. 그래서 결혼을 두 번을 하셨는데 그 부인이 일찍 돌아가서 한 번은 김해허 씨 그다음에 안동권 씨하고 결혼을 하셨는데 결혼하면서 부인들이 가져온 지참금이 꽤 많이 됐어요. 그래서 그 부인들이 가져온 재산이 따지면 지금 이 논밭이 대략 1500마지기 정도였는데.

◇김방희> 굉장한 건데요.

◆이한> 그렇죠. 그랬는데 이분이 이황 선생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그 자식들이 또 재산들을 모아다가 나누기 위해서 분재기라는 걸 작성했거든요. 분재기를 보면 재산이 한 3000마지기로 늘어나 있고요. 노비도 한 300명 정도로 늘어나 있어서 굉장히 큰 부자가 됐죠. 따지고 보면 아시겠지만 재산은 쓰면 쓰면 줄어들지 절대로 저절로 늘어나지는 않잖아요. 그런데 그걸 쓰면서 또 퇴계 이황 선생님은 큰 사업도 벌이셨어요. 바로 도산서원이라고. 그렇죠. 그런 걸 하면서도 재산이 거의 2배로 불어났으니까 아주 이거는 투자를 재산을 아주 잘 굴리신 거죠.

◇김방희> 뭐 해서 그렇게 벌었을까요. 갑자기 궁금증이 생기네요.

◆이한> 그렇죠. 그래서 저도 그랬는데 퇴계 이황 선생님이 벼슬을 또 오래 하신 건 아니에요. 벼슬을 하다가 지방에 내려가고 지방에 내려가고 그러셨는데. 이분이 남긴 글이 물론 도산전서 같은 거 보면 편지 같은 거 많이 남아 있기는 한데. 또한 가서라고 해서 가족들과 주고받은 편지가 남아 있습니다. 특히 그 아들인 준에게 보낸 편지가 많이 남아 있는데 그 내용 대부분이 농사지었니, 씨는 뿌렸니, 피는 뽑았니 그리고 추수한 건 얼마나 되니. 그다음에 어디 가서 무슨 땅 샀니. 그래서 계속 살림을 챙깁니다. 그러니까 굉장히 농사일을 잘 아세요. 그리고, 그러니까 농사일 이때에 뭐해야 된다는 것도 다 아시고, 그다음에 그 당시에 유망한,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농업에 투자도 하세요.

◇김방희> 작물도 잘 골랐군요.

◆이한> 네. 목화, 그 당시에 목화가 귀하죠. 그런데 목화를 심는데 목화를 그냥 심으면 사람들이 훔쳐가거든요. 그러니까 미리 목화를 심을 만큼 비옥한 땅을 만들어 놓고, 그래서 거기다 씨를 뿌리게 하고 그다음에 하인들 시켜서 지키게 하고, 다 거둔 다음에 얼마나 되니, 그 양도 전부 다 체크를 합니다.

◇김방희> 꼼꼼한 사업가이기도 하셨군요.

◆이한> 정작 그분의 그런 철학에 대한 글을 보면 정말로 정갈하고 아랫사람들한테 참 상냥하고 그렇게 참 고아한 유학자이셨는데요. 그러니까 아들들한테 보낸 편지로 보면 이제 그냥 정갈한데. 만약에 본인이 안동에 직접 계셨으면 아마 이 일을 다 하고 다녔겠죠. 왜냐하면 그 당시에 농사라는 게 양반이 그냥 앉아서 보내주는 걸 기다리는 게 아니라, 자기가 직접 돌아다니면서 하인들, 노비들 시키고 잘하는지 감시하고 그런 것도 다 해야 되니까요. 그렇게 했는데 또 돈 버는 데만 열심히 하는 게 아니라, 서울에 있는 중요한 물자들, 중요한 귀중한 물건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나눠줘요. 자기 친척들은 물론이거니와 노비들한테도 쌀, 곡식 얼마나 보냈니. 그걸 또 다 편지로 써서 보내서 자식한테 누구한테 보내고 누구한테 보내고 이렇게 굉장히 많은 물건들을 사 와서 사람들한테 선물도 해주고.

◇김방희>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퇴계 이황 선생은 농사를 통해서 아주 성실하게 축적을 한 거니까 이거는 오히려 본 받을 일인데, 조선시대를 보면 아까 제가 말씀드린 허생의 예는 매점매석을 통해서 돈을 버는 건 소설이니까 허구적인 거고, 실제로 좀 악랄한 수법 같은 걸 통해서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돈 번 사람들은 없어요?

◆이한> 사실 매점매석 얘기 나왔으니까, 매점매석으로 조선시대 때도 돈을 악랄하게 번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김방희> 꽤 있죠. 그때는 더 쉬웠을 테니까.

◆이한> 조선시대 때 그 순조 때 순조 33년에 큰일이 벌어졌는데 한양 도성 내에 쌀가게들이 전부 다 문을 닫았어요.

◇김방희> 왜요?

◆이한> 그건 바로 그게 바로 매점매석, 독과점이었죠. 당시 조선의 쌀을 실어 나르는 게 이게 어떻게 보면 조선 국가가 하는 게 아니라, 경강상인이라는 상인들이 하고 있었거든요.

◇김방희> 그 얘기는 소설에도 많이 나왔어요. 황석영 소설 이런데.

◆이한> 그렇죠. 그런데 경강상인들이 쌀을 실어 날라서 그다음에 이 도성에 있는 쌀가게로 배분을 해 주는데. 34년 2월 정도에 경강상인들이 이제 춘분기니까 쌀 가격이 많이 비싸지겠지라고 생각해서 쌀을 많이 사서 창고에 넣어놨는데. 생각했던 것만큼 쌀 가격이 많이 안 높아진 거예요. 쌀 가격이 쌌어요. 그러니까 경강상인들이 우리가 손해를 보겠다라고 싶으니까, 아예 쌀을 한 톨도 한양에 보내지 말자.

◇김방희> 시중에 안 내놓은 거죠.

◆이한> 네, 그렇게 한 거죠. 그러니까 한 2주에 걸쳐서 쌀이 쌀가게가 하나, 둘 문을 닫더니, 마침내 모든 쌀가게가 문을 닫혀버려요. 그렇게 되니까 쌀 가격이 천정부지로 뛰죠. 그렇게 되니까 경강상인들은 생각했을 거예요. 우리가 큰돈을 벌겠다. 하지만 그 전에 3월 8일 정도에 사람들이 폭동을 일으킵니다. 쌀 없어진 거는 전부 저 경강상인들이 숨겨놔서 그렇다. 정확하게 알았죠. 그래서 그 사람들이 쌀가게에 들어가서 불을 지르고, 그다음에 용산 근처에 세워둔 그 쌀 창고를 습격하고, 그렇게 했는데 워낙 이 폭동의 기세가 맹렬했기 때문에 왕의 친위대인 금이형부터 시작해서 포도대장이니 뭐니 어영대장까지 전부 다 총출동해서 막았지만 굉장히 가라앉히는데 쉽지 않았고요. 수많은 사람들이 그 자리에서 처형당하고, 그래서 간신히 진압된 일이 있었는데, 결국 이 일로 경강상인들도 처형을 당하긴 했습니다.

◇김방희> 상당히 큰 매점매석 사건들이 있었군요. 그 매점매석의 역사가 오래된 건 우리뿐만 아니라 서양 역사 보면 우리가 잘 아는 아르키메데스라는 사람이 올리브가 흉작이니까 올리브 짜는 기계를 다 사들여서 매점매석해서 돈을 벌었다는 기록도 있는데. 참 조선시대 얘기지만 남의 일 같지도 않고, 과거 일에 국한된 얘기 같지도 않습니다. 곽정은 님이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었던 선조분들 얘기를 듣고 있으니까 흥미롭습니다 해 주셨는데. 아까 경강상인회 이거는 개인이 아니라 일종의 단체죠. 공급업자 쪽 단체인데 개인으로 이렇게 허생처럼 대규모 돈을 번 사람은 없습니까. 아니 흥미가 생겨서.

◆이한> 사실 개인이 돈을 벌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은 밀수였습니다.

◇김방희> 그 당시에는 그랬겠네요. 밀수였겠군요.

◆이한> 왜냐하면 그 당시 국가대 국가별로 공식적인 무역이 성립하지 않았고요. 개인이 나라의 바깥으로 나가는 것도 원칙적으로 허용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할 수 있는 방법은 딱 하나 . 사신이 갈 때 그 옆에 따라가는 거였습니다. 그래서 중국에 사신이 갈 때, 그리고 일본의 사신이 갈 때 같이 따라갔던 사람이 바로 통역가인 역관이었거든요. 역관은 지금으로 따지면 통역가인데. 중인들이 할 수 있었고, 그러니까 지금으로 따지자면 전문직이었습니다. 시험 봐서 통과해야 되는. 하지만 신분이 중인이었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좋은 대우를 받지 못했지만. 하지만 이 사람들은 아까 얘기했듯이 밀수를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아주 떼돈을 벌었습니다. 그래서 조선시대 때 그 갑부인 역관들이 굉장히 많이 나와요. 아까 얘기한 허생전 얘기에서, 허생전에서 맨 처음에 허생한테 종잣돈을 빌려준 사람이 바로 변부자지 않습니까.

◇김방희> 맞아요. 변부자죠.

◆이한> 이 사람의 모델이 있습니다. 바로 숙종 때의 유명한 역관이었던 변승업이라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굉장히 많은 돈을 밀수를 통해 벌어서, 또 이 돈을 고리대금업으로 돈놀이를 해서 그걸 불려서 아주 그냥 굉장히 유명한 부자가 됐고요. 또 이 변승업과 당대의 유명한 사람이 장현이라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사실 본인이 유명했다가 나중에 이 사람 조카가 더 유명해지는 바람에 한풀 꺾였는데. 바로 장희빈의 친척입니다. 그런데 장희빈이 유명하기 전에 이 사람은 젊은 시절에 역관을 수석으로 합격한 엘리트였는데, 병자호란이 터지고 그래서 그 당시, 그리고 지고. 그래서 소현세자하고 봉림대군. 나중에 효종이 되는 그 사람들이 중국에 끌려갈 때,

◇김방희> 초반에 끌려가죠.

◆이한> 그때 통역관으로 같이 갑니다. 그래서 한 9년 동안 그렇게 중국에서 고생을 하면서 소현세자와 봉림대군과 사이가 친해지고, 또 중국의 발도 넓어지죠. 그다음에 귀국해서 효종이 왕이 된 다음에, 그리고 수역이라고 해서 그 역관 중에 제일 높은 사람이 돼서 여러 번 중국을 왔다 갔다 하면서.

◇김방희> 그게 부의 원천이었군요.

◆이한> 네, 그리고 떼돈을 벌어들였습니다. 언젠가 이런 일도 있었어요. 사신들이 넘어가는데 이건 나라의 것이라고 쓰여진 바구니가 여러 개가 있는데 사람들이 이게 뭐지 하고 딱 열어보니 그 안에 인삼이 가득 들어있던 거예요. 이게 인삼 한 뿌리만 해도 굉장히 큰돈이 되는데 이게 한 50바구니 정도 되니까 이걸 가져가면 진짜,

◇김방희> 거대한 밀수죠.

◆이한> 어마어마한 일을 벌이는 건데. 그러니까 사람들이 얘기한 건 이거는 분명히 장현 짓이다. 그러니까 장현이 틀림없다고 하는데. 사람들이 전부 감싸요. 심지어 효종마저도 이건 오해야, 이건 장현의 일일 리가 없어라고 하면서 그래서 신하들이 이건 장현 짓이 틀림없다니까요라고 화를 내니까, 그제서야 효종이 어쩔 수 없지라고 해서 가까운 데 살짝 귀양을 보냈다가 다시 돌아오게 합니다. 그래서 이 장현은, 장현과 그 사람 동생인 장찬도 역관이었거든요. 돈이 얼마나 많았는지 별명이 국중거부였고요. 게다가 장찬 같은 경우에 너무 으리으리한 집을 세워서 다른 관리들이 저거는 부숴야 됩니다라고 해서 부수는 일도 있고. 심지어 숙종 때는 이 사람들이 뭔가를 밀수해오다가 걸렸는데 바로 청나라 대포하고 청나라 지도를 가져오다가 걸립니다.

◇김방희> 무기까지 밀수를 해요.

◆이한> 네. 이거는 이 사람들이 사려는 게 아니라, 사실 나라에 부탁을 받아서 한 거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이 사람들이 그 모든 책임을 지고 귀양을 갑니다만 솔직히 이 사람들이 가진 돈이 어마어마했기 때문에 청나라 관리들마저도 구워삶을 수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게 맞죠.

◇김방희> 사무역이 금지된 상황이었으니까, 조선시대 밀수를 통해서 부를 획득하는데 아무래도 우리가 중국 쪽으로 갖고 간 건 인삼 계통이었을 테고. 중국 쪽에서는 좀 나은 문물들을 갖고 들어온 걸 텐데.

◆이한> 네, 귀중품이나 책들.

◇김방희> 바로 인삼 얘기를 하셨으니까 임상옥 얘기를 안 할 수가 없죠. 뭐 드라마도 되고 조선시대 최고 거부로 알려진 분인데 인삼이 결정적이었습니까?

◆이한> 아무래도 인삼이 거의 중국과 일본, 일본에서도 굉장히 여겨지는 만병통치약이고 심지어 유럽까지도 건너가서 루소나 그런 사람이 이게 바로 동양에서 온 명약이다라고 인삼을 줄 정도로 유명했거든요. 그래서 한 16세기, 17세기 정도 되면 산삼이 씨가 마르면서 인삼 무역의 위기를 맞습니다만 인삼 재배에 성공합니다. 그리고 또 전설 임상옥의 전설이 인삼을 쪄서 홍삼으로 만들어냈다는 게 임상옥이라는 전설이 정확합니다. 진실인지는 알 수 없고요. 그래서 홍삼이라는 새로운 제품을 개발해내면서 인기가 더 높아져서 인삼이 거의 동아시아의 엄청난 돈을 끌어올 정도로 굉장히 인기를 끌었습니다.

◇김방희> 이한 작가와 함께 조선시대 재테크 얘기를 하고 있는데요. 6824번님 사람 사는 세상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비슷하군요. 그럼요. 지금은 대상이 좀 다를 뿐이죠. 상품이 다를 뿐이죠. 황현구님도 사람 사는 곳, 돈 있는 곳에는 어김없이 매점매석이 있었군요. 지금은 사라졌다고 믿으십니까? 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플랫폼 기업들이라는 곳들도 시장 점유율 50%를 넘기기 시작하면 수수료를 올려서 공짜 점심이 아니라는 걸 분명히 가르쳐주고 있죠. 김현우 님도 이런 얘기들이 좀 경험이 분명히 있겠죠. 역사는 반복되기에. 그럼요. 방식이나 대상이나 가격에서 반드시 변동성이 커지고 그런 역사는 반복되는 법이죠. 그 일각에서는 임상옥이 드라마 하이라이트에 해당됩니다마는 거부가 되는 순간을 어떤 진실의 순간을 지금 애플 같은 기업들이 자사주 소각하는 것에 비유를 많이 하거든요. 돈을 가지고 자기 회사 주식을 사서 이걸 태워버린다. 납득이 안 되는데 사실은 기업 가치는 더 뛰게 되거든요. 그러니까 인삼을 둘러싸고 임상옥이 그런 일종의 방법을 쓴 거죠.

◆이한> 사실 이게 굉장히 유명한 임상옥의 일화입니다마는 사실 아까 얘기한 대로 사무역은 금지되어 있었고 무역은 오로지 사신이 오고 가는 것에 따라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조선 상인들은 물건을 팔 수 있는 기한이 한정돼 있었습니다. 조선 사신들이 와서 떠나기 전까지 다 팔아야 돼요. 같이 가야 되기 때문에 뒤에 남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 상인들이 하는 수법은 일부러 가격을 너무 싸게 먹이는 거예요. 이 가격 아니면 안 산다. 그런데 어차피 조선 상인들은 날짜가 정해져서 이 날이면 떠나야 되니까 그럼 그때가 되면 울며 겨자 먹기로 싼 값에 팔고 떠나서 파산하는

◇김방희> 가격 결정권이 청나라 사신들한테 있었군요.

◆이한> 청나라 상인들이죠. 그랬는데 임상옥이 같은 수법을 당했는데 그러니까 내가 차라리 이 가격에 파느니 싹 다 태워버리고 만다 그래서 공터에다 몰아 놓고 인삼들을 다 불을 질러버립니다. 그러니까 그 소식을 들은 청나라 상인들이 아니 그 귀한 인삼이, 홍삼이 불타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혼비백상에서 달려 들어와서 불타고 있는 인삼들을 꺼내고 그다음에 사과하고 원래 가격의 10배로 샀다. 그런 이야기가 전해집니다만 왠지 그 사람이면 정말 하셨을 것 같습니다.

◇김방희> 전혀 맥락은 다릅니다마는 고 이건희 회장이 애니콜 화형식도 좀 생각나네요. 품질을 높이기 위해서 한 거고 임상옥은 가격을 높이기 위해서 한 건데 이 돈을 많이 번 사람들 아무래도 역관 중심의 밀수업을 통해서 많이 걸었다는 얘기까지 했는데 보통 사람들, 보통 농민이죠. 사실은 농민이 대부분이었으니까 농민들이 어떻게 살았을까? 어떤 재테크를 했을까가 궁금한데 조선 후반기가 되면 워낙 신분 제도에 대한 불만도 높아지고, 전봉준의 동학 혁명도 벌어지고 이 얘기는 거꾸로 농민들을 아주 착취하는 세력들, 탐관오리라고 지칭되기는 했습니다마는 있었다는 반증이겠죠.

◆이한> 그렇죠. 사실 탐관오리들은 어느 시대에나 있었다고 생각하는 게 맞을 것 같고요. 농민들은 사실 언제나 힘든 사람들이었는데 조선 후기로 가면서 좀 농민들도 항상 이 세상 사람들은 누구나 이익을 추구하잖아요. 농민들도 더 큰 돈을 벌고 싶어 해서 여러 가지 시도를 하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이 모내기 이앙법입니다. 왜냐하면 모내기를 하면 물이 가득 차기 때문에 잡초 뽑는 일이 줄어들어요. 잡초 뽑는 일이 줄어들면 이 잡초 뽑을 시간에 다른 거, 담배를 씹는다든가 투명 작물을 심는다든가 해서 더 많은 돈을 벌 수가 있는 거죠. 그리고 쌀의 생산량도 많이 올라가고요. 그래서 그 이앙법을 하기 위해서 필요한 건 물이죠. 그래서 물을 확보하기 위해서 보를 쌓는데 그런데 이 보를 쌓는 게 문제는 이 보를 쌓으려고 농민들을 착취하는 탐관오리가 있었는데 그 바로 그 대표적인 사람이 동학농민운동의 시발점이 됐던 바로 조병갑이었습니다. 이 조병갑이라는 사람은 아주 굉장한 탐관오리였는데요. 일단 백성들은 온갖 말도 안 되는 세금을 만들어서 착취합니다. 효도세라든지, 불효세라든지 자기 어머니 상 당했으니까 부의금 내라고 해서 백성들한테 또 한 번 돈을 주르륵 걷는다든지 그렇게 하고 그다음에 백성들이 좋은 쌀을 세금으로 바치면 이걸 나쁜 쌀로 바꿔서 나라에 바치고 좋은 쌀은 자기가 먹고 그리고 가장 유명한 게 바로 만석보였습니다. 사실 저도 어렸을 때 만석보를 배우면서 이 보를 왜 무너뜨리는 거야라고 생각했더니 사연이 있더라고요. 워낙 그 지역에 이미 보들이 많이 있었는데 조병갑이 만석보를 하나 더 새로 쌓아야겠다고 하면서 농민들을 억지로 동원한 거예요. 동원하면서 약속을 했죠. 이 보에 물을 받은 논은 첫 해에는 세금을 안 걷어줄게 농민들이 그걸 믿고 열심히 힘들게 보를 쌓았죠. 그런데 그 보가 만들어지고 농사를 거둘 때 되니까 당연히 조병갑은 입을 싹 씻고 세금 내놔, 많이 내놔 그렇게 되니까 사람들이 폭발할 수밖에 없었던 거 그리고 폭발하자마자 그 보를 무너뜨릴 수밖에 없었던 거더라고요.

◇김방희> 만석보라는 게 그런 사연이 있어서 최초 공격 대상이 된 거였군요.

◆이한> 그렇죠. 사연이, 원한이 있었던 거예요. 원한의 집결체였던 거죠.

◇김방희> 참 재미있는 스토리텔러시네요. 7655번님 너무 흥미로워서 차에서 못 내리겠습니다. 그렇군요. 6565번님 어느 시대나 돈벌이에 밝은 사람들이 있어요. 그런데 이지에 밝은 것과 정말 정당한 방법으로 돈 버는 건 좀 차이가 있으니까 그건 구분하자는 얘기는 우리 이 작가께서 늘 하시는 말씀이고 개인들은 아까 얘기한 어떤 환경 속에서 돈을 버는 방법들을 찾아나갔던 거고 기업이라고 할 만한 게 자본주의가 발전하지 않았으니까 그렇다 치더라도 기업에 준하는 조직들이 있었을 텐데 여기서 어떻게 부를 축적했습니까?

◆이한> 솔직히 기업을 얘기할 수 있는 게 아까 얘기했던 경강상인들이었습니다. 경강상인들은 지금 한강이 지금은 그냥 아파트 뷰로 쓰이고 있습니다만 원래는 한강의 모든 식자재와 그 필요한 것들을 날려주는 교통편이었죠.

◇김방희> 교통, 물류의 중심이었던 거죠.

◆이한> 저 쪽 위로 광나루서부터 아래 양화진까지 마포 근처까지 수많은 시장과 뱃나루가 있었고 거기에서 물건을 실어 날라서 한양 사람들을 먹여 살렸는데 바로 그 상인일을 했던 사람들이 경강상인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경강상인들이 돈에 눈을 까뒤집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항상 그 별명이 호송지민이었어요.

◇김방희> 무슨 뜻입니까?

◆이한> 맨날 소송 걸어. 제가 내 돈 뺏는다고 소송 걸고 아까 맨 처음에 얘기했던 그 마포의 염회전에 있는 마포 사람들도 경강상인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아까 얘기한 쌀 매점매석 한 사람들도 경강상인들이었고 그다음에 또 하나 마포하고 합정이 지금은 가깝지만 그 당시에 항구가 양쪽에 있었거든요. 그래서 저쪽 지방에서 올라온 배가 어디에 머무르느냐에 따라 그 지역에 있었던 여관들 주인이 벌이가 달라졌거든요.

◇김방희> 굉장히 큰 이권이었겠네요.

◆이한> 그렇죠. 그런데 맨 처음에는 사람들이 합정에서 머물다가 배들이 합정에서 멈추다가 점점점점점점 마포로 옮겨가거든요. 그러니까 합정 사람들이 소송을 걸어요. 마포 사람들 때문에 우리가 다 굶어 죽겠다. 그래서 그것 때문에 찌그락찌그락 열심히 싸우고서 하도 싸움이 많이 벌어지니까 조정에서는 아예 그 경강어사를 파견합니다. 경강 사람들 하도 싸움이 벌어지고 이권 다툼이 심지어 사람을 죽이고도 내가 안 죽였다고 사건을 은폐하는 일도 벌어졌기 때문에 경강어사를 한 7번인가 파견해서 이 사람들이 온갖 벌이는 사건 사고를 좀 막아보고자 했습니다만 그래도 여전히 경강상인들은 굉장히 많은 이익을 누리고 또 이게 어떠면 가끔은 정부의 개기고 심지어 이 세금을 나르는데 세금은 쌀이잖아요. 조선시대 쌀인 세금을 배에 실어 나르는데 이 배를 일부러 침몰시켜요. 그래서 워낙 그 안에 쌀이 열 섬이 있었다면 사실은 저 안에 백 섬이 넘게 들어 있었는데 내가 다 그 손해를 봤으니까 갚아주세요.

◇김방희> 보상해 달라.

◆이한> 네, 보상해 달라. 그런 식으로 온갖 소송과 돈과 관련된 소송.

◇김방희> 그게 지금으로 치면 이런 독점 기업들. 이런 데 비유될 수 있는 경우고 똑같은 사안에 대해서도 돈에 욕심을 내는 건 똑같은데 어떤 분들은 대박을 쳤을 테고 어떤 분들은 쪽박을 쳤을 텐데 비교하자면 요즘 1~2차 벤처 붐 당시에 초기에 큰돈을 버신 분들이 있는가 하면 뒤늦게 들어가서 그야말로 물리신 분들도 있는데 조선시대에 이런 일은 없습니까?

◆이한> 조선시대 때는 주로 이제 가장 유명한 게 바로 국토 종단항이라고 하는 나진항의 사태입니다. 그 당시에 기뢰선이라고 해서 길림성에서부터 회령까지 이어진 철도가 만들어지고 또 일본이 생각한 거예요. 저쪽이 조선통을 위로 해서 아래로 종단을 하고 있는 항구를 만들면 딱 좋겠다. 부산과 연결되는 위쪽의 항구를. 그래서 어디다 만드느냐 때문에 후보지가 3곳이 됐는데 그러니까 어딘가에 여기가 걸리면 그쪽 땅을 산 사람은 대박이 나는 거예요. 그래서 후보지가 세 곳이었어요. 청진, 웅주 그리고 맨 마지막이 지금은 나선이 된 나진. 그런데 그래서 사람들이 전부 여기가 유망해 여기가 유망해 여기가 유망해.

◇김방희> 베팅을 하는 거죠.

◆이한> 네, 각자 자기 주식을 열심히 샀습니다. 그리고 계속 오보가 나와요. 여기가 됐다. 여기가 됐다. 그래서 사람들이 벌렁벌렁하는 마음을 잡고 기다렸는데 결국 선정된 건 나진이었습니다. 나진이 갑자기 땅 가격이 300배, 1000배 그렇게 오를 정도로 마구 올라갔고 다른 쪽 산 사람들은 전부 망해서 그것 때문에 쓰러져서 죽은 사람이 있을 정도로 쪽박과 대박이 극과 극으로 나뉘어서요. 그리고 또 그걸로 끝난 게 아니라고 해서 이 나진은 맨 처음에 한 20~30가구가 살 정도로 아주 작은 어촌이었거든요. 그런데 갑자기 온 동아시아의 투기꾼들이 몰려들어와서 땅을 사기 시작해요. 그래서 원래 살던 사람들 그리고 여기다 싶어서 찍어서 샀던 사람들은 김가진 같은 사람들이 대박이 났고요. 김가진은 아니지만. 김기덕이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대박이 났고요. 그리고 투기꾼들이 몰려와서 하루에 땅 주인이 18번 바꿨다 할 정도로 웃돈 얹어서 계속 사고, 사고.

◇김방희> 계속 따라붙기 마련이죠.

◆이한> 네, 그래서 어마어마하게 올랐는데 그렇게 해서 3년을 그렇게 지내다가 땅 가격이 정말 하늘을 넘어서 저 성층권까지 갔다 싶을 때 일본 정부가 발표합니다. 3년 전 원가로 땅을 사겠다.

◇김방희> 수용해 버리는 거죠.

◆이한> 네, 그러니까 이게 뭐냐면 아니, 시장 가격인데 어떻게 그럴 수 있겠냐고 지금은 그렇게 얘기할 수 있겠지만 상대는 일본 제국주의 정부였습니다. 누가 감히 토를 달겠습니까. 그래서 3년 전 원가. 허술했던 어촌이었던 그때로 원가로 땅을 사버렸고 물론 그때 중요한 사람들 이미 한 몫 챙긴 사람은 다 빠졌고 맨 마지막 상투 붙들고 있던 개미들만 전부 망했다는 그런 슬픈 이야기가.

◇김방희> 그거는 지금이나 예전이랑 똑같은 거군요. 또 하나 저도 부모님한테 들은 얘기인데 일제강점기 전부터 만주를 많이 향했다는 거거든요. 한국 사람들 부동산 투기의 역사를 얘기할 때 만주 얘기를 아버님도 가끔 하셨는데. 만주로 몰려간 분들 중에서 물론 독립운동을 하러 가신 분들이야 본인의 의지 때문에 그렇지만 돈 때문에 가신 분들도 많았습니까?

◆이한> 사실 그거는 일본이 일단 잘못한 걸 먼저 얘기해야 되는데요. 일단 우리가 국사 교과서에서 배우는 토지조사 있었지 않습니까? 그 당시 일본은 자기들이 선진국이라는 생각에 딱 있어서 너희 같은 미개한 조선을 뿌리 끝까지 고쳐주겠어라는 생각을 하면서 너희들의 미개한 토지 제도를 바꿔주겠다 하면서 토지 조사를 하면서 신고를 하게 했거든요. 그런데 이미 조선시대에도 자기들만의 토지 제도가 있었죠. 그랬는데 이걸 갑자기 근대화하겠다. 서구하겠다고 했는데 일단 조선 사람들은 이게 뭐야라는 생각이었고 또 일본을 못 믿겠다. 세금 왕창 먹인다더라. 그래서 일부러 신고하지 않은 사람도 있었고 그리고 신고 기간도 짧았어요. 그래서 신고 조사가 끝난 다음에 신고한 사람들은 그래, 신고한 사람들은 너희들은 땅주인이고 신고 안 한 땅은 전부 우리 거라고 해서 갑자기 일본이 조선 땅의 50%를 차지하는 대지주가 됩니다. 그러니까 원래 땅을 가졌던 사람이 전부 소작농으로 굴러 떨어지고 소작료도 어마어마하게 비싸져요. 그렇게 되니까 사람들이 아무리 열심히 농사를 지어도 가난해질 수밖에 없는데 그때 갑자기 만주 이야기가 들려오는 거죠. 만주는 비옥한 땅이고 거기에 가서 5년만 농사지으면 너희 땅을 가질 수 있다.

◇김방희> 일종의 골드러시 같은 게 벌어진 거군요.

◆이한> 네, 그렇죠. 여기에도 또 일본 정부의 계획이랄까 그런 게 있었는데 사실 일본 정부라기보다는 일본 총독부였습니다만 왜냐하면 그렇게 소작농이 되니까 갑자기 실업자가 늘어나요. 실업자가 늘어나고 그런 사람들이 전부 난민들이 되니까 사회가 불안해지거든요. 그러니까 조선 총독부로서는 이 사람들을 만주에 보내서 자기 땅을 가지게 하자라는 마인드였습니다만 또 일본 정부가 반대해요. 만주는 우리 일본 사람들을 보내서 우리 일본 영토로 만들 거야. 조선인들이 들어오면 안 돼 그런 입장이었는데 결국에는 수용을 하게 되죠. 그래서 조선 사람들은 그런 사정은 꿈에도 모르고 저기 가서 5년만 열심히 농사지으면 우리 땅을 가질 수 있단다. 그 희망을 가지고 기차를 타고 만주로 가서 아주 크게 고생을 합니다.

◇김방희> 그렇죠. 그러니까 이 얘기는 사실 시대를 불문하고 떠도는 얘기로 하는 재테크가 얼마나 허망한가를 잘 보여주거든요. 떠도는 얘기는 누군가 의도를 가진 사람들이 고의적으로 만들어내기도 하고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너무 뒤늦은 얘기일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주의해야 되는데 저는 경성별곡이라는 책에 등장하는 반복창이라는 이름 저는 흥미롭게 읽었는데 이분은 그 당시 쌀 선물거래소죠. 쌀 인천에 있는 추인소라는 곳에서 선물 거래를 했는데 너무 돈을 많이 벌어서 조선 최고의 미녀와 그 당시 최고의 비용을 치르는 결혼식을 하기도 했는데 딱 2년 만에 거지가 되더군요. 기록을 보니까. 그걸 보면서 촉은 영원하지 않다. 조금 돈을 벌어본 분이 떠도는 얘기를 믿지 않고 자신만의 노하우로 성공을 한다 하더라도 촉이 영원하지 않습니다. 이제 반복창이라는 사람 성공담을 읽어보니까 자료 보니까 23일 연속 이 선물이라는 건 오를 건지 내일 건지를 맞추는 홀짝 게임인데 23일 연속으로 맞춰서 돈을 벌었다고 그러는데 그 후에는 이게 안 맞습니다. 촉이라는 건 영원하지 않다는 것도 오늘 조선시대 재테크를 통해서 우리가 또 얘기해둬야 할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어떠세요? 이게 조선시대 투자, 투기 다 자료를 들여다보신 건데 어떤 자세. 오늘의. 오늘날에 던지는 시사점 같은 걸 좀 느끼셨어요?

◆이한> 사실 제가 한 600년어치 자료를 찾아보니까 왜 이렇게 망한 사람들만 많고 도대체 돈을 벌어서 끝까지 잘 가진 사람보다는 그냥 망하고 망하고 망한 이야기를 보니까 굉장히 염세적이 되더라고요. 이거 돈 벌어서 그냥 다 망하는 거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었는데 결국 이거는 드는 생각이 두 가지였다고 봐요. 욕망과 그리고 절망. 남들보다 더 잘 살고 싶다는 욕망이죠. 이게 나쁜 건 아니에요. 그러니까 욕망이 있으니까 더 열심히 노력하고 더 성실하게 일하고 더 먼저 준비하고 그렇게.

◇김방희> 조선시대와 달리 또 자본주의는 그런 걸 토대로 성장하는 거고요.

◆이한> 조선시대 때도 열심히 한 사람이 거기에 그 사람들도 욕망이 넘쳐났던 사람들이고요. 또 하나는 절망인 것 같은 게 만주 같은 경우에 제가 느꼈던 건 사람들이 절망이거든요.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조선시대 때도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도저히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러면 투기로 가는 거예요. 한탕주의. 금을 캔다거나 만주로 간다거나 그 가능성이 되게 희박하다고 하더라도 나는 성공할 거야라는 어떻게 보면 근거 없는 믿음을 가지고도 뛰어드는 게 그게 그 사람들이 어리석은 것도 있지만 또 하나는 절망한 것도 있다는 거죠.

◇김방희> 절망에서 나온 선택들이었겠죠. 최근에 우리 재테크에는 과연 그런 게 없었는지 한번 돌아봐야겠네요. 절망 끝에 나온 재테크도 꽤 있었죠. 가상화폐를 보면서. 3123번 님이 예나 지금이나 경제는 사람의 이익과 탐욕의 줄타기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해 주셨는데 우리 이한 작가께서는 욕망과 절망이 어우러져서 추는 춤이 재테크다 이런 걸 느끼신 것 같아요. 앞으로 조선시대 얘기를 가끔씩 하려고 그럽니다. 이게 다 사람 사는 일이라 그래서 역사 커뮤니케이터 이한 작가께 저희가 조선시대 얘기를 앞으로도 종종 듣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이한> 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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