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엔 여기 어때?…집 나갔다 돌아온 보물 만나러~

입력 2022.09.08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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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밖에 있는 우리 문화재는 2022년 1월 1일 기준으로 아시아와 유럽, 아메리카 대륙 25개 나라 214,208점. 이 공식 통계가 말해주는 것이 있습니다. 첫째, 나라 밖 문화재 실태를 전문적으로 조사해서 공식 통계를 내는 정부 조직이 존재한다는 것.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그 일을 합니다. 둘째, 공식 통계에 포함되지 않은, 다시 말해 아직 존재가 확인되지 않은 나라 밖 문화재가 훨씬 더 많을 거란 점입니다.

우리 문화재가 해외로 나간 경로는 다양합니다. 먼저 합법적으로 나간 것들이 있겠죠. 선물했거나, 기증했거나, 수출했거나, 또는 누군가 돈 주고 사간 경우 등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반면, 불법적으로 반출된 것들도 있습니다. 훔치거나 빼앗아간 경우가 여기에 해당하죠. 나라가 혼란에 빠져 사람 목숨마저 위태로운 시기에는 어김없이 야만적인 도난과 약탈이 자행됐음을 우리는 지난 역사에서 똑똑히 배웠습니다.

■6·25전쟁 때 숱하게 잃어버린 왕실 문화재 '어보'

나라 밖으로 나간 우리 문화재를 죄다 되찾아오는 것은 현실적으로 가능하지도 않을뿐더러,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다만, 마땅히 되찾아와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왕실 문화재,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이 바로 왕실 도장인 어보(御寶)입니다.

(좌) 효종 추상존호 금보 (우) 현종 왕세자책봉 옥인(좌) 효종 추상존호 금보 (우) 현종 왕세자책봉 옥인

왼쪽은 1740년(영조 16년) 효종(재위 1649~1659) 임금에게 명의정덕(明義正德)이란 존호를 올리면서 만든 금보(金寶)입니다. 해외로 나간 경위가 확인되지 않은 이 유물은 1990년대에 어느 경매에서 거래된 이후 도난 문화재라는 사실을 나중에 안 재미교포 소장자가 다른 어보와 함께 기증하면서 국내로 돌아왔습니다.

오른쪽은 1651년(효종 2년) 현종(재위 1659~1674)을 왕세자로 책봉하면서 만든 옥인(玉印)입니다. 이 유물의 존재를 확인한 과정이 흥미로운데요. 2013년 KBS 다큐멘터리 <시사기획 창> 취재진이 미국 현지에서 끈질기게 수소문하고 추적한 끝에 미국의 한 개인이 유물을 소장한 사실을 밝혀냅니다. 그 뒤에 한미 양국이 공조 수사를 통해 불법 반출된 사실을 확인하고, 2017년 한미정상회담에 맞춰 미국 정부로부터 넘겨받아 환수합니다.

[다시보기] 해외문화재추적보고서 ‘미국에서 찾은 국보’ (KBS 시사기획 창 2013년 5월 28일 방송)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2666171


어보는 종묘에 봉안하는 왕실 문화유산으로 거래의 대상이 아닙니다. 하지만 6·25전쟁의 혼란기 속에서 주로 한국에 온 미군들이 가지고 나가 개인적으로 보관한 경우가 많았죠. 그 개인이 입을 굳게 다물면 찾을 도리가 없습니다. 불행 중 다행으로 경매에 내놓으면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으니, 아래 유물들도 그렇게 세상에 나왔습니다.

 (좌) 성종비 공혜왕후 어보 (우) 덕온공주 인장 (좌) 성종비 공혜왕후 어보 (우) 덕온공주 인장

왼쪽은 1498년(연산군 4년) 성종(재위 1469~1494년)의 왕비인 공혜왕후(恭惠王后, 1456~1474)에게 휘의신숙(徽懿愼肅)이란 존호를 올리면서 만든 금보입니다. 역시 6·25전쟁 시기에 미국으로 불법 반출된 이후 소재를 모르다가 1987년 미국의 한 경매에 나온 것을 국내의 한 소장가가 낙찰받아 국내로 가지고 들어옵니다.

■경매에 나오면 '신원 확인'…관건은 합법이냐, 불법이냐

만약 여기서 끝났다면 찾을 길이 없었겠지만, 소장자가 2011년 국내 경매에 다시 내놓으면서 드디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냅니다. 왕실 문화재가 국내 경매에 나왔다는 사실이 당시에 상당한 논란이 됐고, 저 또한 시민단체인 문화재제자리찾기의 혜문 대표와 함께 경매 전시장에 직접 찾아가서 유물을 찍고 뉴스를 통해 알렸습니다.

[다시보기] 500년 된 국보급 ‘조선왕실 도장’ 경매 논란 (KBS 뉴스9 2011년 6월 8일 방송)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2304465


오른쪽은 덕온공주(德溫公主, 1822~1844) 인장입니다. 덕온공주가 누군가요? 2016년 하반기를 뜨겁게 달군 화제의 드라마 <구르미 그린 달빛>에서 박보검 배우가 연기한 효명세자(孝明世子, 1809~1830)의 막내 여동생입니다. 덕온은 정실 왕후가 낳은 '조선의 마지막 공주'였습니다. (정실이 아닌 부인이 낳은 딸은 '옹주'라 불렀습니다.) 그런 덕온공주의 인장이 2018년 미국 뉴욕의 크리스티 경매에 나오자, 우리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낙찰받아 환수에 성공합니다.

 숙선옹주 인장 숙선옹주 인장

당시 이 문제를 취재하다가 혹 비슷한 다른 사례가 있나 싶어 크리스티 경매 기록을 찾아봤습니다. 그랬더니 그로부터 꼭 1년 전인 2017년 5월에 해태 모양 손잡이가 있는 또 다른 인장이 경매에 출품됐더군요. 확인해보니 정조(재위 1776~1800)가 후궁 수빈 박 씨와 사이에서 얻은 딸 숙선옹주(淑善翁主, 1793~1836)의 인장이었습니다. 숙선은 정조에 이어 임금이 된 순조의 여동생으로, 덕온공주의 고모가 됩니다.

숙선옹주의 인장은 경매에서 34만 3,500달러, 당시 환율로 계산하면 우리 돈 3억 8,500만 원이란 거액에 팔렸습니다. 하지만 이 소식은 당시 아무런 시선을 끌지 못했고, 당연히 언론에도 제대로 보도되지 않았습니다. 누가 낙찰받았을까. 어디에 있는 걸까. 그 행방이 몹시 궁금합니다.

호조태환권 원판호조태환권 원판

어보가 대표적이긴 하지만, 다른 왕실 문화재도 있습니다. 사진에 보이는 유물의 이름은 '호조태환권(戶曹兌換券)입니다. 1892년 고종(재위 1863~1907)은 근대적 화폐 제도를 도입하고자 신식화폐 조례를 공포하고, 호조 산하에 태환서를 신설해 구화폐를 신화폐로 바꾸는 계획을 세웁니다. 호조태환권은 당시 태환서에서 구화폐를 회수하기 위해 발행한 교환권이었죠.

[다시보기] 조선왕실 반출 유물, 美서 무더기 경매 (KBS 뉴스9 2010년 6월 28일 방송)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2119797


당시 액수별로 네 종류가 만들어졌지만, 실제로 유통되지는 않고 위와 같은 원판만 남았습니다. 그나마도 50냥짜리 원판과 열 냥짜리 뒷면뿐, 나머지는 행방을 몰랐죠. 그러던 2010년 미국 미시건 주의 한 소도시 경매에 위 유물이 나옵니다. 열 냥짜리 지폐 동판의 앞면입니다. 당시 경매 사이트에는 6·25전쟁에 참가했던 라이오넬 헤이즈라는 미군이 1951년 덕수궁에서 반출했다는 설명이 붙어 있었습니다. 불법 반출됐음이 명백한 이 유물은 이후 한미 공조 수사를 거쳐 고국으로 돌아옵니다.

분청사기 상감 ‘경태5년명’ 이선제 묘지분청사기 상감 ‘경태5년명’ 이선제 묘지

비단 왕실 문화재만 아니라 개인 유물 중에도 불법으로 반출된 사실이 명명백백한 것들이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사진에 보이는 유물입니다. <분청사기 상감 '경태5년명' 이선제 묘지>라는 제법 긴 이름이 붙은 이 유물은 조선 세종대의 집현전 관리를 지낸 이선제(李先齊, 1390~1453)라는 인물이 세상을 떠난 뒤 생전의 행적을 적은 기록물입니다. 시대가 변해도 묘의 주인이 누군지 밝힐 수 있도록 보존성이 좋은 도자기로 만들어 무덤에 함께 묻은 겁니다.

망자의 정확한 생몰년과 묘지 제작연대를 알려줄 뿐 아니라, 그 형태가 독특하고 조선 분청사기 제작기법까지 잘 보여주는 귀중한 유물로 평가됩니다. 그래서 환수된 이후 국가지정문화재 보물이 됐습니다. 원래 무덤 안에 있어야 하는데 밖으로 나온 건 도굴됐음을 짐작게 하죠. 아니나 다를까 이 유물은 1998년 어느 문화재 밀매범에 의해 일본으로 불법 반출됩니다.

■"조상의 분신과도 같은 소중한 것입니다!"

이후 유물의 존재를 2014년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일본사무소 직원이 발견했고, 다행히 1998년 당시 김해공항 문화재감정관이 반출을 불허하면서 작성한 보고서와 실측도가 남아 있어서 실물을 확인하고 불법 반출 경위를 밝혀낼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를 바탕으로 재단이 일본의 소장자를 설득한 끝에 2018년 무상 기증 형식으로 되찾아올 수 있었죠. 묘지가 단순히 오래된 미술품이 아니라, 후손에겐 조상의 분신과도 다름없는 소중한 유산이라는 인도적 차원의 간곡한 호소가 일본인 소장자의 마음을 움직인 결과입니다.

일영원구일영원구

가장 최근에 환수된 유물입니다. 지구본처럼 생긴 이 유물의 이름은 일영원구(日影圓球), 풀이하면 '해그림자로 시간을 재는 둥근 기구'라 할 수 있겠죠. 지금까지 이런 형태는 단 하나도 나온 적이 없는, 말 그대로 '갑툭튀(갑자기 툭 튀어나온)'한 희귀 유물입니다. 심지어 주요 포털사이트에서 용어 검색을 해도 아무 흔적이 없더군요. 국내 최고 권위의 전통 해시계 전문가조차 처음 봤다고 했습니다.

유물이 우리 것이라는 사실은 표면에 새겨진 글자로 확인됩니다. 고종 27년인 1890년 7월에 상직현(尙稷鉉)이란 사람이 만들었다고 돼 있죠. 조선왕조실록 등의 기록을 보면, 상직현은 일찍이 수신사 일행으로 일본에 가 근대 문물을 접한 무관이었습니다. 과학에 조예가 깊은 가문의 내력이 있었는지, 그 아들은 청나라에서 전화기를 처음 들여온 인물로 알려졌습니다.

[다시보기] 일찍이 없었던 희귀 유물…휴대용 해시계 ‘일영원구’ 공개 (KBS 뉴스9 2022년 8월 19일 방송)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5536642


이 유물은 일본에 주둔하던 미군 장교가 소장하다가 최근 미국 경매에 나온 걸 우리 정부가 낙찰받아 환수했습니다. 불법 반출된 유물인지 아닌지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우리나라 사람이 만든, 그것도 단 하나뿐인, 그러면서 워낙에 드물기로 유명한 과학 문화재라는 점에서 환수 가치가 더없이 큽니다.

이렇게 이런저런 이유로 집 나갔다가 고국으로 돌아온 문화재를 한자리에 모은 특별한 전시회가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리고 있습니다. 전시 공간은 소박할 정도로 아담하지만, 그 안에 깃든 유물들의 무게와 그 안에 담긴 사연들은 결코 작지도, 가볍지도 않습니다. 민족의 명절 한가위에 이보다 더 잘 어울리는 전시가 또 있을까요.


■전시 정보
제목: 나라 밖 문화재의 여정
기간: 9월 25일(일)까지
장소: 국립고궁박물관 1층 기획전시실
전시품: 전적, 서화, 어보, 도자기, 의복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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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명절엔 여기 어때?…집 나갔다 돌아온 보물 만나러~
    • 입력 2022-09-08 08:00:47
    취재K
나라 밖에 있는 우리 문화재는 2022년 1월 1일 기준으로 아시아와 유럽, 아메리카 대륙 25개 나라 214,208점. 이 공식 통계가 말해주는 것이 있습니다. 첫째, 나라 밖 문화재 실태를 전문적으로 조사해서 공식 통계를 내는 정부 조직이 존재한다는 것.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그 일을 합니다. 둘째, 공식 통계에 포함되지 않은, 다시 말해 아직 존재가 확인되지 않은 나라 밖 문화재가 훨씬 더 많을 거란 점입니다.

우리 문화재가 해외로 나간 경로는 다양합니다. 먼저 합법적으로 나간 것들이 있겠죠. 선물했거나, 기증했거나, 수출했거나, 또는 누군가 돈 주고 사간 경우 등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반면, 불법적으로 반출된 것들도 있습니다. 훔치거나 빼앗아간 경우가 여기에 해당하죠. 나라가 혼란에 빠져 사람 목숨마저 위태로운 시기에는 어김없이 야만적인 도난과 약탈이 자행됐음을 우리는 지난 역사에서 똑똑히 배웠습니다.

■6·25전쟁 때 숱하게 잃어버린 왕실 문화재 '어보'

나라 밖으로 나간 우리 문화재를 죄다 되찾아오는 것은 현실적으로 가능하지도 않을뿐더러,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다만, 마땅히 되찾아와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왕실 문화재,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이 바로 왕실 도장인 어보(御寶)입니다.

(좌) 효종 추상존호 금보 (우) 현종 왕세자책봉 옥인
왼쪽은 1740년(영조 16년) 효종(재위 1649~1659) 임금에게 명의정덕(明義正德)이란 존호를 올리면서 만든 금보(金寶)입니다. 해외로 나간 경위가 확인되지 않은 이 유물은 1990년대에 어느 경매에서 거래된 이후 도난 문화재라는 사실을 나중에 안 재미교포 소장자가 다른 어보와 함께 기증하면서 국내로 돌아왔습니다.

오른쪽은 1651년(효종 2년) 현종(재위 1659~1674)을 왕세자로 책봉하면서 만든 옥인(玉印)입니다. 이 유물의 존재를 확인한 과정이 흥미로운데요. 2013년 KBS 다큐멘터리 <시사기획 창> 취재진이 미국 현지에서 끈질기게 수소문하고 추적한 끝에 미국의 한 개인이 유물을 소장한 사실을 밝혀냅니다. 그 뒤에 한미 양국이 공조 수사를 통해 불법 반출된 사실을 확인하고, 2017년 한미정상회담에 맞춰 미국 정부로부터 넘겨받아 환수합니다.

[다시보기] 해외문화재추적보고서 ‘미국에서 찾은 국보’ (KBS 시사기획 창 2013년 5월 28일 방송)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2666171


어보는 종묘에 봉안하는 왕실 문화유산으로 거래의 대상이 아닙니다. 하지만 6·25전쟁의 혼란기 속에서 주로 한국에 온 미군들이 가지고 나가 개인적으로 보관한 경우가 많았죠. 그 개인이 입을 굳게 다물면 찾을 도리가 없습니다. 불행 중 다행으로 경매에 내놓으면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으니, 아래 유물들도 그렇게 세상에 나왔습니다.

 (좌) 성종비 공혜왕후 어보 (우) 덕온공주 인장
왼쪽은 1498년(연산군 4년) 성종(재위 1469~1494년)의 왕비인 공혜왕후(恭惠王后, 1456~1474)에게 휘의신숙(徽懿愼肅)이란 존호를 올리면서 만든 금보입니다. 역시 6·25전쟁 시기에 미국으로 불법 반출된 이후 소재를 모르다가 1987년 미국의 한 경매에 나온 것을 국내의 한 소장가가 낙찰받아 국내로 가지고 들어옵니다.

■경매에 나오면 '신원 확인'…관건은 합법이냐, 불법이냐

만약 여기서 끝났다면 찾을 길이 없었겠지만, 소장자가 2011년 국내 경매에 다시 내놓으면서 드디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냅니다. 왕실 문화재가 국내 경매에 나왔다는 사실이 당시에 상당한 논란이 됐고, 저 또한 시민단체인 문화재제자리찾기의 혜문 대표와 함께 경매 전시장에 직접 찾아가서 유물을 찍고 뉴스를 통해 알렸습니다.

[다시보기] 500년 된 국보급 ‘조선왕실 도장’ 경매 논란 (KBS 뉴스9 2011년 6월 8일 방송)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2304465


오른쪽은 덕온공주(德溫公主, 1822~1844) 인장입니다. 덕온공주가 누군가요? 2016년 하반기를 뜨겁게 달군 화제의 드라마 <구르미 그린 달빛>에서 박보검 배우가 연기한 효명세자(孝明世子, 1809~1830)의 막내 여동생입니다. 덕온은 정실 왕후가 낳은 '조선의 마지막 공주'였습니다. (정실이 아닌 부인이 낳은 딸은 '옹주'라 불렀습니다.) 그런 덕온공주의 인장이 2018년 미국 뉴욕의 크리스티 경매에 나오자, 우리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낙찰받아 환수에 성공합니다.

 숙선옹주 인장
당시 이 문제를 취재하다가 혹 비슷한 다른 사례가 있나 싶어 크리스티 경매 기록을 찾아봤습니다. 그랬더니 그로부터 꼭 1년 전인 2017년 5월에 해태 모양 손잡이가 있는 또 다른 인장이 경매에 출품됐더군요. 확인해보니 정조(재위 1776~1800)가 후궁 수빈 박 씨와 사이에서 얻은 딸 숙선옹주(淑善翁主, 1793~1836)의 인장이었습니다. 숙선은 정조에 이어 임금이 된 순조의 여동생으로, 덕온공주의 고모가 됩니다.

숙선옹주의 인장은 경매에서 34만 3,500달러, 당시 환율로 계산하면 우리 돈 3억 8,500만 원이란 거액에 팔렸습니다. 하지만 이 소식은 당시 아무런 시선을 끌지 못했고, 당연히 언론에도 제대로 보도되지 않았습니다. 누가 낙찰받았을까. 어디에 있는 걸까. 그 행방이 몹시 궁금합니다.

호조태환권 원판
어보가 대표적이긴 하지만, 다른 왕실 문화재도 있습니다. 사진에 보이는 유물의 이름은 '호조태환권(戶曹兌換券)입니다. 1892년 고종(재위 1863~1907)은 근대적 화폐 제도를 도입하고자 신식화폐 조례를 공포하고, 호조 산하에 태환서를 신설해 구화폐를 신화폐로 바꾸는 계획을 세웁니다. 호조태환권은 당시 태환서에서 구화폐를 회수하기 위해 발행한 교환권이었죠.

[다시보기] 조선왕실 반출 유물, 美서 무더기 경매 (KBS 뉴스9 2010년 6월 28일 방송)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2119797


당시 액수별로 네 종류가 만들어졌지만, 실제로 유통되지는 않고 위와 같은 원판만 남았습니다. 그나마도 50냥짜리 원판과 열 냥짜리 뒷면뿐, 나머지는 행방을 몰랐죠. 그러던 2010년 미국 미시건 주의 한 소도시 경매에 위 유물이 나옵니다. 열 냥짜리 지폐 동판의 앞면입니다. 당시 경매 사이트에는 6·25전쟁에 참가했던 라이오넬 헤이즈라는 미군이 1951년 덕수궁에서 반출했다는 설명이 붙어 있었습니다. 불법 반출됐음이 명백한 이 유물은 이후 한미 공조 수사를 거쳐 고국으로 돌아옵니다.

분청사기 상감 ‘경태5년명’ 이선제 묘지
비단 왕실 문화재만 아니라 개인 유물 중에도 불법으로 반출된 사실이 명명백백한 것들이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사진에 보이는 유물입니다. <분청사기 상감 '경태5년명' 이선제 묘지>라는 제법 긴 이름이 붙은 이 유물은 조선 세종대의 집현전 관리를 지낸 이선제(李先齊, 1390~1453)라는 인물이 세상을 떠난 뒤 생전의 행적을 적은 기록물입니다. 시대가 변해도 묘의 주인이 누군지 밝힐 수 있도록 보존성이 좋은 도자기로 만들어 무덤에 함께 묻은 겁니다.

망자의 정확한 생몰년과 묘지 제작연대를 알려줄 뿐 아니라, 그 형태가 독특하고 조선 분청사기 제작기법까지 잘 보여주는 귀중한 유물로 평가됩니다. 그래서 환수된 이후 국가지정문화재 보물이 됐습니다. 원래 무덤 안에 있어야 하는데 밖으로 나온 건 도굴됐음을 짐작게 하죠. 아니나 다를까 이 유물은 1998년 어느 문화재 밀매범에 의해 일본으로 불법 반출됩니다.

■"조상의 분신과도 같은 소중한 것입니다!"

이후 유물의 존재를 2014년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일본사무소 직원이 발견했고, 다행히 1998년 당시 김해공항 문화재감정관이 반출을 불허하면서 작성한 보고서와 실측도가 남아 있어서 실물을 확인하고 불법 반출 경위를 밝혀낼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를 바탕으로 재단이 일본의 소장자를 설득한 끝에 2018년 무상 기증 형식으로 되찾아올 수 있었죠. 묘지가 단순히 오래된 미술품이 아니라, 후손에겐 조상의 분신과도 다름없는 소중한 유산이라는 인도적 차원의 간곡한 호소가 일본인 소장자의 마음을 움직인 결과입니다.

일영원구
가장 최근에 환수된 유물입니다. 지구본처럼 생긴 이 유물의 이름은 일영원구(日影圓球), 풀이하면 '해그림자로 시간을 재는 둥근 기구'라 할 수 있겠죠. 지금까지 이런 형태는 단 하나도 나온 적이 없는, 말 그대로 '갑툭튀(갑자기 툭 튀어나온)'한 희귀 유물입니다. 심지어 주요 포털사이트에서 용어 검색을 해도 아무 흔적이 없더군요. 국내 최고 권위의 전통 해시계 전문가조차 처음 봤다고 했습니다.

유물이 우리 것이라는 사실은 표면에 새겨진 글자로 확인됩니다. 고종 27년인 1890년 7월에 상직현(尙稷鉉)이란 사람이 만들었다고 돼 있죠. 조선왕조실록 등의 기록을 보면, 상직현은 일찍이 수신사 일행으로 일본에 가 근대 문물을 접한 무관이었습니다. 과학에 조예가 깊은 가문의 내력이 있었는지, 그 아들은 청나라에서 전화기를 처음 들여온 인물로 알려졌습니다.

[다시보기] 일찍이 없었던 희귀 유물…휴대용 해시계 ‘일영원구’ 공개 (KBS 뉴스9 2022년 8월 19일 방송)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5536642


이 유물은 일본에 주둔하던 미군 장교가 소장하다가 최근 미국 경매에 나온 걸 우리 정부가 낙찰받아 환수했습니다. 불법 반출된 유물인지 아닌지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우리나라 사람이 만든, 그것도 단 하나뿐인, 그러면서 워낙에 드물기로 유명한 과학 문화재라는 점에서 환수 가치가 더없이 큽니다.

이렇게 이런저런 이유로 집 나갔다가 고국으로 돌아온 문화재를 한자리에 모은 특별한 전시회가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리고 있습니다. 전시 공간은 소박할 정도로 아담하지만, 그 안에 깃든 유물들의 무게와 그 안에 담긴 사연들은 결코 작지도, 가볍지도 않습니다. 민족의 명절 한가위에 이보다 더 잘 어울리는 전시가 또 있을까요.


■전시 정보
제목: 나라 밖 문화재의 여정
기간: 9월 25일(일)까지
장소: 국립고궁박물관 1층 기획전시실
전시품: 전적, 서화, 어보, 도자기, 의복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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