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 소음 수십 년 참았는데…쪼개기식 매입에 주민 ‘분통’

입력 2022.09.14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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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군 제20전투비행단이 있는 충남 서산의 한 마을. 곳곳에 최근 붉은 글씨의 현수막이 내걸렸습니다. 주민 대부분이 고령층인 이 마을에 최근 어떤 일이 일어난 걸까요?

■ 전투기 소음 수십 년 참았는데…6가구만 매입?

충남 서산시 해미면 기지1리는 24가구가 사는 작은 마을입니다. 이 마을은 공군비행장과 비행장 내 국방과학연구소 울타리에 인접해 있는데요. 주민들은 1996년 비행장이 들어선 이후 귀를 찢는 듯한 전투기 소음과 진동 피해를 고스란히 감내하며 살아왔습니다.

특히 야간훈련이라도 있는 날에는 밤낮없이 전투기가 뜨고 내리기 일쑤. 주민들은 수십 년간 지속된 전투기 소음과 진동으로 건물에도 금이 갔을 정도라고 말합니다. 실제 기지1리는 국방부가 지정한 소음대책지역 1·2종 지역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최근 국방과학연구소가 부지 확장을 계획하는 과정에서 6가구에만 토지 매입 공문을 보내면서 마을이 발칵 뒤집혔습니다.


■ 세 차례 쪼개기식 매입…초소형 마을 전락

연구소가 부지 확장을 위해 기지1리를 매입한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연구소는 2003년부터 필요할 때마다 마을을 쪼개기식으로 매입한 뒤 보안을 이유로 4m 높이의 담장을 쌓고 철조망을 세웠습니다.

지금까지 연구소에 편입된 면적은 기지1리 원래 면적의 3분의 1이 넘는 29만㎡.

한때 90여 가구에 달했던 마을이지만 부지 편입으로 초소형 마을로 전락했습니다. 이번 4차 매입까지 예정대로 진행될 경우 마을은 기역 모양으로 남아 마을의 기능을 온전히 하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남은 사람의 고통은…이건 죽은 거야. 살 수가 없어 먼지 때문에. 겨울 되면 4시 되면 햇볕이 없어요. 담이 높기 때문에." 유장춘(77살), 기지1리 주민

"사는 사람 생각은 않는겨…." 한만호(87살), 기지1리 주민

■ "동네 찢어놨다"…피해는 남은 주민 몫

주민들은 군이 삶은 물론 마을 공동체마저 파괴하고 있다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52년째 기지1리에 살고 있는 유장춘 씨는 "연구소가 동네를 찢어놨다"고 말했습니다.

80대 이장의 마음은 무겁습니다. 예정대로 4차 매입이 진행될 경우 피해는 남은 주민들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연로한 몸을 이끌고 현수막을 내걸고, 지역구 국회의원에게 호소문까지 쓴 이유입니다.

이무영 기지1리 이장은 "4차 공사를 한다고 하면 분진이 이루 말할 수 없다. 차로 실어 흙담을 쌓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남은 주민들이 피해를 본다"고 말했습니다.

수십 년간 살아온 고향에 비행장이 들어서면서 극심한 소음 피해에 더해, 높은 흙담과 철조망이 동네 경관을 망치고 이웃마저 하나 둘씩 떠나간다면 어떨까요?

앞서 수차례 반복돼 온 연구소의 부지 매입 과정이 남은 주민들의 생활을 고려했다고 보기 어려운 이유입니다.


■ 주민 갈등 요인도…서산시 "연구소 측에 사업지구 확대 건의"

매입 통보를 받은 주민들도 마음이 불편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대를 이어 기지1리에 거주해온 87살 한만호 씨는 "연구소가 필요한 대로만 마을에 선을 긋는다"며 "남은 주민들의 생활환경은 생각하지 않는다"고 지적했습니다.

또 "지금 보상받아서 좋다고 나갈 사람 별로 없다"며 "50~60년 동안 한동네에서 살던 사람들을 몇 집만 남겨놓고 떠나는 건 마음이 아프다"고도 했습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서산시도 차라리 마을 전체를 사업지구에 포함해 달라는 입장입니다.

이완섭 서산시장은 "군 소음 피해가 워낙 크다 보니 주민들이 청력 이상까지 오면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일부만 포함 시킬 것이 아니라 사업 구역을 확대해서 전 주민 모두 이주할 수 있도록 연구소 측에 건의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마을 위로 날아가는 공군 전투기마을 위로 날아가는 공군 전투기

■ "엄마, 왜 그렇게 소리를 지르세요?"

주민들은 지속적인 소음 피해에 난청과 이명 등 건강상의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피해 보상 소송도 준비 중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결혼 이후 십여 년째 기지1리에 거주하고 있는 장미순 씨는 "동네 사람들이 청력이 상해 잘 안 들리니까 목소리가 큰 편"이라며 "애들이 집에 오면 '엄마 싸우세요, 왜 그렇게 소리를 지르세요?' 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습니다.

서산시 관계자도 "비행장 인근 지역 이장님들은 다 목소리가 크시다"며 "전화 통화를 할 때는 공무원들도 소리를 지르듯이 말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습니다.

국방부는 올해부터 군소음보상법에 따라 군용비행장이나 군 사격장 인근에 거주하는 주민들의 소음피해 보상을 위해 보상금을 지급하고 있습니다. 기지1리 주민들을 포함해 서산시에서 군 소음 피해보상금을 받는 시민들은 해미면과 음암면 등 4개면 2개 동에 거주하는 주민 10,709명에 이릅니다.

기지1리 마을 위로 날아가는 전투기기지1리 마을 위로 날아가는 전투기

■ 국방과학연구소 "예산에 맞춰 가구 편입"

마을 주민들이 일방적으로 연구소 부지 확장과 비행 훈련에 반대하는 것은 아닙니다. 기지1리 주민들은 호소문을 통해 "안보도 중요하지만, 그로 인해 음지에서 생활해야 하는 힘없는 주민들도 생각해 달라"고 말했습니다.

또 "국가안보상 국방사업추진의 필요성을 충분히 이해하기 때문에 수십 년 동안 피해와 고통을 감내해왔다"며 "4차 매입이 예정대로 진행될 경우 남은 10여 가구는 여생을 담장과 철조망으로 둘러싸인 채 살아야 해 암담한 심정"이라고 호소했습니다.

국방과학연구소 측은 한정된 예산 때문에 일부 가구밖에 편입할 수 없다는 설명을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연구소는 "이번 사업 또한 한정된 예산과 사업목적에 따라 부지 매입을 추진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고령의 주민들이 오랜 시간 겪어 왔고 지금도 겪고 있는 피해를 해결하기 위한 대책이 필요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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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행기 소음 수십 년 참았는데…쪼개기식 매입에 주민 ‘분통’
    • 입력 2022-09-14 08:00:32
    취재K

공군 제20전투비행단이 있는 충남 서산의 한 마을. 곳곳에 최근 붉은 글씨의 현수막이 내걸렸습니다. 주민 대부분이 고령층인 이 마을에 최근 어떤 일이 일어난 걸까요?

■ 전투기 소음 수십 년 참았는데…6가구만 매입?

충남 서산시 해미면 기지1리는 24가구가 사는 작은 마을입니다. 이 마을은 공군비행장과 비행장 내 국방과학연구소 울타리에 인접해 있는데요. 주민들은 1996년 비행장이 들어선 이후 귀를 찢는 듯한 전투기 소음과 진동 피해를 고스란히 감내하며 살아왔습니다.

특히 야간훈련이라도 있는 날에는 밤낮없이 전투기가 뜨고 내리기 일쑤. 주민들은 수십 년간 지속된 전투기 소음과 진동으로 건물에도 금이 갔을 정도라고 말합니다. 실제 기지1리는 국방부가 지정한 소음대책지역 1·2종 지역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최근 국방과학연구소가 부지 확장을 계획하는 과정에서 6가구에만 토지 매입 공문을 보내면서 마을이 발칵 뒤집혔습니다.


■ 세 차례 쪼개기식 매입…초소형 마을 전락

연구소가 부지 확장을 위해 기지1리를 매입한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연구소는 2003년부터 필요할 때마다 마을을 쪼개기식으로 매입한 뒤 보안을 이유로 4m 높이의 담장을 쌓고 철조망을 세웠습니다.

지금까지 연구소에 편입된 면적은 기지1리 원래 면적의 3분의 1이 넘는 29만㎡.

한때 90여 가구에 달했던 마을이지만 부지 편입으로 초소형 마을로 전락했습니다. 이번 4차 매입까지 예정대로 진행될 경우 마을은 기역 모양으로 남아 마을의 기능을 온전히 하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남은 사람의 고통은…이건 죽은 거야. 살 수가 없어 먼지 때문에. 겨울 되면 4시 되면 햇볕이 없어요. 담이 높기 때문에." 유장춘(77살), 기지1리 주민

"사는 사람 생각은 않는겨…." 한만호(87살), 기지1리 주민

■ "동네 찢어놨다"…피해는 남은 주민 몫

주민들은 군이 삶은 물론 마을 공동체마저 파괴하고 있다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52년째 기지1리에 살고 있는 유장춘 씨는 "연구소가 동네를 찢어놨다"고 말했습니다.

80대 이장의 마음은 무겁습니다. 예정대로 4차 매입이 진행될 경우 피해는 남은 주민들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연로한 몸을 이끌고 현수막을 내걸고, 지역구 국회의원에게 호소문까지 쓴 이유입니다.

이무영 기지1리 이장은 "4차 공사를 한다고 하면 분진이 이루 말할 수 없다. 차로 실어 흙담을 쌓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남은 주민들이 피해를 본다"고 말했습니다.

수십 년간 살아온 고향에 비행장이 들어서면서 극심한 소음 피해에 더해, 높은 흙담과 철조망이 동네 경관을 망치고 이웃마저 하나 둘씩 떠나간다면 어떨까요?

앞서 수차례 반복돼 온 연구소의 부지 매입 과정이 남은 주민들의 생활을 고려했다고 보기 어려운 이유입니다.


■ 주민 갈등 요인도…서산시 "연구소 측에 사업지구 확대 건의"

매입 통보를 받은 주민들도 마음이 불편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대를 이어 기지1리에 거주해온 87살 한만호 씨는 "연구소가 필요한 대로만 마을에 선을 긋는다"며 "남은 주민들의 생활환경은 생각하지 않는다"고 지적했습니다.

또 "지금 보상받아서 좋다고 나갈 사람 별로 없다"며 "50~60년 동안 한동네에서 살던 사람들을 몇 집만 남겨놓고 떠나는 건 마음이 아프다"고도 했습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서산시도 차라리 마을 전체를 사업지구에 포함해 달라는 입장입니다.

이완섭 서산시장은 "군 소음 피해가 워낙 크다 보니 주민들이 청력 이상까지 오면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일부만 포함 시킬 것이 아니라 사업 구역을 확대해서 전 주민 모두 이주할 수 있도록 연구소 측에 건의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마을 위로 날아가는 공군 전투기
■ "엄마, 왜 그렇게 소리를 지르세요?"

주민들은 지속적인 소음 피해에 난청과 이명 등 건강상의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피해 보상 소송도 준비 중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결혼 이후 십여 년째 기지1리에 거주하고 있는 장미순 씨는 "동네 사람들이 청력이 상해 잘 안 들리니까 목소리가 큰 편"이라며 "애들이 집에 오면 '엄마 싸우세요, 왜 그렇게 소리를 지르세요?' 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습니다.

서산시 관계자도 "비행장 인근 지역 이장님들은 다 목소리가 크시다"며 "전화 통화를 할 때는 공무원들도 소리를 지르듯이 말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습니다.

국방부는 올해부터 군소음보상법에 따라 군용비행장이나 군 사격장 인근에 거주하는 주민들의 소음피해 보상을 위해 보상금을 지급하고 있습니다. 기지1리 주민들을 포함해 서산시에서 군 소음 피해보상금을 받는 시민들은 해미면과 음암면 등 4개면 2개 동에 거주하는 주민 10,709명에 이릅니다.

기지1리 마을 위로 날아가는 전투기
■ 국방과학연구소 "예산에 맞춰 가구 편입"

마을 주민들이 일방적으로 연구소 부지 확장과 비행 훈련에 반대하는 것은 아닙니다. 기지1리 주민들은 호소문을 통해 "안보도 중요하지만, 그로 인해 음지에서 생활해야 하는 힘없는 주민들도 생각해 달라"고 말했습니다.

또 "국가안보상 국방사업추진의 필요성을 충분히 이해하기 때문에 수십 년 동안 피해와 고통을 감내해왔다"며 "4차 매입이 예정대로 진행될 경우 남은 10여 가구는 여생을 담장과 철조망으로 둘러싸인 채 살아야 해 암담한 심정"이라고 호소했습니다.

국방과학연구소 측은 한정된 예산 때문에 일부 가구밖에 편입할 수 없다는 설명을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연구소는 "이번 사업 또한 한정된 예산과 사업목적에 따라 부지 매입을 추진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고령의 주민들이 오랜 시간 겪어 왔고 지금도 겪고 있는 피해를 해결하기 위한 대책이 필요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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