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천 년의 삶을 담아낸 시집’…할머니·할아버지가 쓴 시 100편을 만나다

입력 2022.09.17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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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전국 문해교실 할머니·할아버지가 쓴 시 100편
일제강점기·6·25전쟁 등 거치며 배움 기회 놓쳐
한글 몰라서 한 맺혔던 젊은 날... “이제는 시를 씁니다”
“한글 공부할 수 있어서 행복하고 너무 좋아요”


※ [주말& 책] 매주 토요일, 책을 소개합니다.

박광춘 할머니는 1943년에 태어났습니다. 초등학교에 들어갈 나이였던 여덟 살 때 한국전쟁이 일어납니다. 학교에 가지 못했습니다. 3년 뒤 휴전이 됐어도 동생들을 돌보느라 여전히 학교에 갈 수 없었습니다.

■ 동생들 돌보고, 일하고... 젊은 날 배움 기회 놓쳐
조금 더 커서는 돈을 벌어야 했습니다. 열여섯 살이 되던 해에 고향을 떠나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하루하루를 바쁘게 살았습니다. 학교도 다니고 공부도 하고 싶었지만, 생활고를 해결하느라 늘 마음뿐이었습니다. 일하다가 다른 회사 상호나 다른 사람 이름처럼 특정 글자를 익혀야 할 일이 생기면, 마치 그림 모양을 외우듯이 글자 형태를 통째로 암기하고는 했습니다.

세월이 흘러, 결혼하고 아이들을 키웠습니다. 박광춘 할머니도 어느덧 70대가 됐습니다. 2016년에는 암 수술을 받게 됐고, 2년 뒤인 2018년에는 남편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삶의 희로애락 속에 여러 일이 있었지만, 그때까지도 한글을 체계적으로 배울 기회는 없었습니다. 70대 후반에 들어선 2019년이 되어서야, 할머니 삶 속에 처음으로 ‘한글’이 들어오게 됩니다.

■ 자녀들 응원 속에 찾아간 문해교실...‘한글 배울 수 있어서 행복해요’
2019년 3월 4일, 박광춘 할머니는 이날을 잊지 못합니다. 한글 교실을 찾아간 날입니다. 갖가지 사정으로 한글을 깨우치지 못한 어르신들을 위해 구청에서 문해교실을 마련했는데, 박 씨의 자녀들이 어머니를 응원했습니다. 어머니의 한글 공부를 응원했습니다. 할머니는 ‘지금 와서 무슨 한글 공부냐’, 가지 않으려 했지만, 한 번만이라도 가보면 좋겠다는 자녀들 성원에 한글교실 문을 두드렸습니다.

할머니는 막상 글을 배우게 되자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 신이 나고 흥이 났습니다. 할머니는 그 뒤로 죽 문해교실에서 공부하고 있습니다. 코로나19가 심해져 대면 수업이 어려워졌을 때도 배움의 끈을 놓지 않았습니다. 전화 통화를 하면서 문해교실 선생님의 설명을 들었고, 한글 공부, 글공부를 계속했습니다.

취재진을 만난 박광춘 할머니는 학교에 다니지 못하고 한글을 깨우치지 못해 평생 맺힌 게 많았다며, ‘한글 공부를 하게 돼 자다가도 행복하고, 자다가도 다시 일어나서 공부하고 다시 써보고, 이러면서 정말로 정말로 이 한글 공부한다는 게 행복하고 너무 좋아요.’라고 말했습니다. 할머니는 웃으면서 ‘죽어서 하늘나라에 갈 때도 한글을 몰라서 이정표를 읽지 못하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모를 것 아니냐, 그래서 한글은 꼭 배워야 한다’는 얘기도 했습니다.

■ 뒤늦게 배웠지만...‘이제는 시를 씁니다’
그렇게 즐겁게, 열심히 한글을 배운 박광춘 할머니는 문해교실에서 시도 썼습니다. 그 시가 ‘나는 세상을 거꾸로 살아요’ 입니다.

나는 세상을 거꾸로 살아요

박광춘

참 이상하다
내가 공부를 시작하고
변했다고 한다

그동안 나는 쓸모없는 사람인 줄 알았다
그림을 그리는 것도
글씨를 쓰는 것도
팔십이 다 돼서
잘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런 것도 모르고
죽었으면 어쩔 뻔했어

우리 딸이
“엄마가 공부하더니 소녀가 됐네.” 한다

공부를 할 때면
가슴이 두근두근
정말 어린아이가 된다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2020년 기준으로 인구의 79.8%가 일상생활에 필요한 충분한 문해력을 갖춘 수준으로 조사됐지만, ‘일상생활에 필요한 기본적인 읽기나 쓰기가 가능하지 않은 수준’으로 추정되는 사람들도 4.5%에 이른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연령대별로 보면, 30세 미만의 경우 문해력이 기초 수준에 이르지 못하는 사람들이 0.2%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80세 이상 가운데는 49.3%를 차지하는 등 고령층의 비중이 컸습니다. 일제강점기와 6·25전쟁 등을 거치면서 한글 배울 기회를 놓쳤던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으로 풀이됩니다.

문해교실 시인 박광춘 할머니가 자작시를 낭독하고 있다.문해교실 시인 박광춘 할머니가 자작시를 낭독하고 있다.

■ 세상에 나온 전국 문해교실 할머니·할아버지가 쓴 시 100편
남보다 늦기는 했지만, 한글을 배우면서 글을 읽고 쓰는 재미에 빠져든 70대, 80대 어르신들이 있습니다. 새로 나온 책 ‘일흔 살 1학년’에는 박광춘 할머니처럼 전국 곳곳의 문해교실에서 늦은 나이에 한글을 배우고 깨우친 할머니, 할아버지의 시 100편이 담겨 있습니다.

한글 공부의 즐거움, 그리고 글을 익힌 뒤의 새로운 세상을 그려낸 시도 있고...

내 기분

강달막

이웃집 할망구가
가방 들고 학교 간다고 놀린다
지는 이름도 못 쓰면서
나는 이름도 쓸 줄 알고
버스도 안 물어보고 탄다
이 기분 니는 모르제

한글을 몰랐던 시절의 원통함과 글을 배운 뒤의 안도감을 함께 노래한 시도 있습니다.

그게 그거 같아서

문병복

국어책을 잘못 갖다준 날
부모님을 원망하며 실컷 울었다

아들은 낮에 엄마한테 심통 부려
미안한지 방에 들어가 있고
남편은 그런 일로 울면 뭐하냐며
담배만 피워 댔다

글씨를 못 읽어
가져오라는 국어책은 쏙 빼고
다른 책만 가져갔던 내가
이제는 다 읽을 수 있으니
손주한테 전화 와도 두렵지 않다

시집을 엮은 나태주 시인은 일흔이 넘은 어른들의 작품 백 편을 모아 놓았기 때문에 7천 년의 세월이 담겨 있다고 말합니다. 7천 년의 세월과 삶과 지혜를 품은 시집인 셈입니다.

이번 시집은 유네스코가 정한 세계 문해의 날인 9월 8일에 맞춰서 세상에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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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천 년의 삶을 담아낸 시집’…할머니·할아버지가 쓴 시 100편을 만나다
    • 입력 2022-09-17 10:02:03
    취재K
<strong>전국 문해교실 할머니·할아버지가 쓴 시 100편<br />일제강점기·6·25전쟁 등 거치며 배움 기회 놓쳐<br />한글 몰라서 한 맺혔던 젊은 날... “이제는 시를 씁니다”<br /></strong><strong>“한글 공부할 수 있어서 행복하고 너무 좋아요”</strong>

※ [주말& 책] 매주 토요일, 책을 소개합니다.

박광춘 할머니는 1943년에 태어났습니다. 초등학교에 들어갈 나이였던 여덟 살 때 한국전쟁이 일어납니다. 학교에 가지 못했습니다. 3년 뒤 휴전이 됐어도 동생들을 돌보느라 여전히 학교에 갈 수 없었습니다.

■ 동생들 돌보고, 일하고... 젊은 날 배움 기회 놓쳐
조금 더 커서는 돈을 벌어야 했습니다. 열여섯 살이 되던 해에 고향을 떠나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하루하루를 바쁘게 살았습니다. 학교도 다니고 공부도 하고 싶었지만, 생활고를 해결하느라 늘 마음뿐이었습니다. 일하다가 다른 회사 상호나 다른 사람 이름처럼 특정 글자를 익혀야 할 일이 생기면, 마치 그림 모양을 외우듯이 글자 형태를 통째로 암기하고는 했습니다.

세월이 흘러, 결혼하고 아이들을 키웠습니다. 박광춘 할머니도 어느덧 70대가 됐습니다. 2016년에는 암 수술을 받게 됐고, 2년 뒤인 2018년에는 남편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삶의 희로애락 속에 여러 일이 있었지만, 그때까지도 한글을 체계적으로 배울 기회는 없었습니다. 70대 후반에 들어선 2019년이 되어서야, 할머니 삶 속에 처음으로 ‘한글’이 들어오게 됩니다.

■ 자녀들 응원 속에 찾아간 문해교실...‘한글 배울 수 있어서 행복해요’
2019년 3월 4일, 박광춘 할머니는 이날을 잊지 못합니다. 한글 교실을 찾아간 날입니다. 갖가지 사정으로 한글을 깨우치지 못한 어르신들을 위해 구청에서 문해교실을 마련했는데, 박 씨의 자녀들이 어머니를 응원했습니다. 어머니의 한글 공부를 응원했습니다. 할머니는 ‘지금 와서 무슨 한글 공부냐’, 가지 않으려 했지만, 한 번만이라도 가보면 좋겠다는 자녀들 성원에 한글교실 문을 두드렸습니다.

할머니는 막상 글을 배우게 되자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 신이 나고 흥이 났습니다. 할머니는 그 뒤로 죽 문해교실에서 공부하고 있습니다. 코로나19가 심해져 대면 수업이 어려워졌을 때도 배움의 끈을 놓지 않았습니다. 전화 통화를 하면서 문해교실 선생님의 설명을 들었고, 한글 공부, 글공부를 계속했습니다.

취재진을 만난 박광춘 할머니는 학교에 다니지 못하고 한글을 깨우치지 못해 평생 맺힌 게 많았다며, ‘한글 공부를 하게 돼 자다가도 행복하고, 자다가도 다시 일어나서 공부하고 다시 써보고, 이러면서 정말로 정말로 이 한글 공부한다는 게 행복하고 너무 좋아요.’라고 말했습니다. 할머니는 웃으면서 ‘죽어서 하늘나라에 갈 때도 한글을 몰라서 이정표를 읽지 못하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모를 것 아니냐, 그래서 한글은 꼭 배워야 한다’는 얘기도 했습니다.

■ 뒤늦게 배웠지만...‘이제는 시를 씁니다’
그렇게 즐겁게, 열심히 한글을 배운 박광춘 할머니는 문해교실에서 시도 썼습니다. 그 시가 ‘나는 세상을 거꾸로 살아요’ 입니다.

나는 세상을 거꾸로 살아요

박광춘

참 이상하다
내가 공부를 시작하고
변했다고 한다

그동안 나는 쓸모없는 사람인 줄 알았다
그림을 그리는 것도
글씨를 쓰는 것도
팔십이 다 돼서
잘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런 것도 모르고
죽었으면 어쩔 뻔했어

우리 딸이
“엄마가 공부하더니 소녀가 됐네.” 한다

공부를 할 때면
가슴이 두근두근
정말 어린아이가 된다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2020년 기준으로 인구의 79.8%가 일상생활에 필요한 충분한 문해력을 갖춘 수준으로 조사됐지만, ‘일상생활에 필요한 기본적인 읽기나 쓰기가 가능하지 않은 수준’으로 추정되는 사람들도 4.5%에 이른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연령대별로 보면, 30세 미만의 경우 문해력이 기초 수준에 이르지 못하는 사람들이 0.2%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80세 이상 가운데는 49.3%를 차지하는 등 고령층의 비중이 컸습니다. 일제강점기와 6·25전쟁 등을 거치면서 한글 배울 기회를 놓쳤던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으로 풀이됩니다.

문해교실 시인 박광춘 할머니가 자작시를 낭독하고 있다.
■ 세상에 나온 전국 문해교실 할머니·할아버지가 쓴 시 100편
남보다 늦기는 했지만, 한글을 배우면서 글을 읽고 쓰는 재미에 빠져든 70대, 80대 어르신들이 있습니다. 새로 나온 책 ‘일흔 살 1학년’에는 박광춘 할머니처럼 전국 곳곳의 문해교실에서 늦은 나이에 한글을 배우고 깨우친 할머니, 할아버지의 시 100편이 담겨 있습니다.

한글 공부의 즐거움, 그리고 글을 익힌 뒤의 새로운 세상을 그려낸 시도 있고...

내 기분

강달막

이웃집 할망구가
가방 들고 학교 간다고 놀린다
지는 이름도 못 쓰면서
나는 이름도 쓸 줄 알고
버스도 안 물어보고 탄다
이 기분 니는 모르제

한글을 몰랐던 시절의 원통함과 글을 배운 뒤의 안도감을 함께 노래한 시도 있습니다.

그게 그거 같아서

문병복

국어책을 잘못 갖다준 날
부모님을 원망하며 실컷 울었다

아들은 낮에 엄마한테 심통 부려
미안한지 방에 들어가 있고
남편은 그런 일로 울면 뭐하냐며
담배만 피워 댔다

글씨를 못 읽어
가져오라는 국어책은 쏙 빼고
다른 책만 가져갔던 내가
이제는 다 읽을 수 있으니
손주한테 전화 와도 두렵지 않다

시집을 엮은 나태주 시인은 일흔이 넘은 어른들의 작품 백 편을 모아 놓았기 때문에 7천 년의 세월이 담겨 있다고 말합니다. 7천 년의 세월과 삶과 지혜를 품은 시집인 셈입니다.

이번 시집은 유네스코가 정한 세계 문해의 날인 9월 8일에 맞춰서 세상에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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