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마진국] 여왕, 그 긴 생애 속 영화가 집중한 1주일…영화 ‘더 퀸’

입력 2022.09.18 (09:09) 수정 2022.12.26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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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더 퀸’의 한 장면.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소식이 실린 신문을 보고 있다. 출처 IMDB.영화 ‘더 퀸’의 한 장면.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소식이 실린 신문을 보고 있다. 출처 IMDB.

※일요일 아침, 그 주의 시사 이슈와 관련된 영화를 소개합니다. 영화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극도로 잘 알려진 인물을 소재로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3시간, 5시간을 넘기는 영화들도 존재하지만, 통상적인 영화의 러닝타임은 2시간 안팎이지요. 인생의 주요 장면들을 골라 요약본을 만들어야 할까요? 아니면 관객들이 만족과 흥분에 젖어 극장을 빠져나올 수 있도록 인생의 최절정기에 막을 내려야 할까요?

2006년, 엘리자베스 2세의 전기 영화 제작에 뛰어든 스티븐 프리어스 감독과 각본가 피터 모건은 여왕의 길고 파란만장한 생애 가운데 딱 1주일을 택했습니다. 1997년 8월 31일 프랑스 파리에서 다이애나 전 왕세자비가 숨지고 난 뒤, 여왕이 버킹엄 궁 앞에서 직접 추도사를 발표하기까지의 기간입니다. 다이애나를 흠모했던 수많은 사람이 왕실을 비난하며 사실상 여왕이 그녀를 죽음으로 떠민 것과 다름없다고 비난을 쏟아내던 그 시기, 고고한 궁궐 담장 안쪽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는지에 집중한 것이죠.

두 사람은 상상력을 발휘하기보다 광범위한 취재로 현실에 접근하는 방식을 골랐습니다. 총리나 왕실과 가까운 익명의 정보원들을 두루 만나 실제 여왕의 반응이 어떠했으며, 당시 막 집권했던 토니 블레어 총리의 대처는 어떠했는지 이야기를 들었다고 합니다. 여왕을 연기한 헬렌 미렌 역시 엘리자베스 2세를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들을 만나 사소한 습관이나 일화들을 모았다고 하는데요.

그렇게 해서 완성된 여왕의 모습은… 글쎄요. 영화를 본 엘리자베스 2세가 헬렌 미렌의 연기를 마음에 쏙 들어 해 궁전의 저녁 만찬에 따로 초대하기까지 했다는 뒷얘기를 들었을 때 굉장히 의외였다는 것으로 설명을 대신하겠습니다. 영화 속 여왕의 모습은 피도 눈물도 없는 꼬장꼬장한 노인네에 가깝거든요.

‘더 퀸’을 포함해 모두 세 작품에서 토니 블레어 총리 역할을 연기한 배우 마이클 쉰. 출처 IMDB.‘더 퀸’을 포함해 모두 세 작품에서 토니 블레어 총리 역할을 연기한 배우 마이클 쉰. 출처 IMDB.

한때 며느리였던 다이애나의 부고에도 그녀는 더는 왕실 사람이 아니라는 말만 반복하는 여왕에게서 공감 능력이라곤 찾아볼 수 없습니다. 대신 왕실의 법도와 오랜 규율은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죠. 여왕 주위 인물, 즉 당시만 해도 살아 있었던 엘리자베스 왕대비와 필립 공의 반응은 한술 더 뜹니다. 이들은 물고기가 물 밖 세상을 상상할 수 없듯 바깥 사람들의 분노와 상실감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런 왕실 사람들을 어르고 달래려 애쓰는 건 갓 당선된 토니 블레어 총리의 몫입니다. 이대로 가다간 왕실 자체가 사라질 위기라며, 여왕이 직접 나서 TV 연설을 해야 한다고 설득하지요.

영화의 결말이 어떻게 끝나는지는 구태여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겁니다. 역사적 사실을 담은 전기 영화니까요. 다만 실제로라면 절대 있을 수 없는 허구의 장면을 굳이 보태어 가면서까지 감독과 각본가가 공들인 대목이 있습니다. 혼자 랜드로버를 몰고 드라이브를 나간 여왕이 스코틀랜드 영지에서 커다란 사슴을 만나는 장면인데요. 커다랗고 화려한 뿔을 자랑하는 사슴을 만나고 여왕은 설명하기 힘든 복잡한 감정에 사로잡힙니다. 그리고 며칠 뒤엔 그 사슴이 사냥당했다는 소식도 듣게 되지요. 모두의 눈길을 끄는 바로 그 아름다운 뿔 때문에 말입니다.

여왕은 혼자 스코틀랜드 영지를 운전하다 우연히 커다란 사슴을 만난다. 출처 IMDB.여왕은 혼자 스코틀랜드 영지를 운전하다 우연히 커다란 사슴을 만난다. 출처 IMDB.

여왕 곁에는 언제나 경호팀이 있음을 몰랐을 리 없는 두 사람이 이 장면을 통해 표현하고자 하는 건 단연코 여왕이 느끼는 '왕관의 무게'입니다. 왕좌에 올라본 적 없는 입장에서 상상하자면, 고독함과 중압감, 그리고 외롭고도 특별한 자긍심 정도가 비슷하지 않을까요.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화면에 등장하는 자막도 셰익스피어의 희곡 '헨리 4세'의 그 유명한 문구입니다. 우리나라엔 '왕관을 쓰려는 자, 그 무게를 견뎌라'라는 표현으로 잘 알려져 있지요.

목이 잘린 사슴을 찬찬히 바라보는 여왕의 모습을 카메라가 비출 때, 영화 속 엘리자베스 2세가 자신을 그 사슴과 동일시하고 있음은 명백해집니다. 한때는 고고하게 살아 숨 쉬었으나, 이제는 비참하게 목이 잘린 아름다운 존재. 총리를 비롯한 국민의 요구에 떠밀려, 결국 고집을 꺾고 끔찍이 싫어하던 며느리를 위해 추도사를 바치러 가는 여왕의 눈에 죽은 사슴은 자신의 자존심, 또는 윈저 가의 전통처럼 느껴졌을지 모릅니다.

이처럼 보온 물통을 끌어안고 잠들고 정리 정돈에 강박 증세가 있는 할머니로 자신을 묘사했을지언정, 영화의 궁극적인 시선은 결코 자신에게 비판적이지 않다는 걸 여왕은 눈치챘던 게 아닐까요. 영화가 궁금하다면, 올레TV 또는 OTT 서비스 '시즌'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향년 96세, 긴 생애를 마무리하고 이제 여왕은 눈을 감았습니다. 그녀의 업적과 치태, 공과 과를 평가하는 건 살아 있는 우리 '민중'들의 자유로 남았지요. 박제돼 벽에 걸린 사슴 머리를 둘러보는 구경꾼들처럼요. 이 역시 '군주'가 짊어져야 할 왕관의 무게임을, 여왕은 알고 있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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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09-18 09:09:18
    • 수정2022-12-26 09:39:19
    씨네마진국
영화 ‘더 퀸’의 한 장면.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소식이 실린 신문을 보고 있다. 출처 IMDB.
※일요일 아침, 그 주의 시사 이슈와 관련된 영화를 소개합니다. 영화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극도로 잘 알려진 인물을 소재로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3시간, 5시간을 넘기는 영화들도 존재하지만, 통상적인 영화의 러닝타임은 2시간 안팎이지요. 인생의 주요 장면들을 골라 요약본을 만들어야 할까요? 아니면 관객들이 만족과 흥분에 젖어 극장을 빠져나올 수 있도록 인생의 최절정기에 막을 내려야 할까요?

2006년, 엘리자베스 2세의 전기 영화 제작에 뛰어든 스티븐 프리어스 감독과 각본가 피터 모건은 여왕의 길고 파란만장한 생애 가운데 딱 1주일을 택했습니다. 1997년 8월 31일 프랑스 파리에서 다이애나 전 왕세자비가 숨지고 난 뒤, 여왕이 버킹엄 궁 앞에서 직접 추도사를 발표하기까지의 기간입니다. 다이애나를 흠모했던 수많은 사람이 왕실을 비난하며 사실상 여왕이 그녀를 죽음으로 떠민 것과 다름없다고 비난을 쏟아내던 그 시기, 고고한 궁궐 담장 안쪽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는지에 집중한 것이죠.

두 사람은 상상력을 발휘하기보다 광범위한 취재로 현실에 접근하는 방식을 골랐습니다. 총리나 왕실과 가까운 익명의 정보원들을 두루 만나 실제 여왕의 반응이 어떠했으며, 당시 막 집권했던 토니 블레어 총리의 대처는 어떠했는지 이야기를 들었다고 합니다. 여왕을 연기한 헬렌 미렌 역시 엘리자베스 2세를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들을 만나 사소한 습관이나 일화들을 모았다고 하는데요.

그렇게 해서 완성된 여왕의 모습은… 글쎄요. 영화를 본 엘리자베스 2세가 헬렌 미렌의 연기를 마음에 쏙 들어 해 궁전의 저녁 만찬에 따로 초대하기까지 했다는 뒷얘기를 들었을 때 굉장히 의외였다는 것으로 설명을 대신하겠습니다. 영화 속 여왕의 모습은 피도 눈물도 없는 꼬장꼬장한 노인네에 가깝거든요.

‘더 퀸’을 포함해 모두 세 작품에서 토니 블레어 총리 역할을 연기한 배우 마이클 쉰. 출처 IMDB.
한때 며느리였던 다이애나의 부고에도 그녀는 더는 왕실 사람이 아니라는 말만 반복하는 여왕에게서 공감 능력이라곤 찾아볼 수 없습니다. 대신 왕실의 법도와 오랜 규율은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죠. 여왕 주위 인물, 즉 당시만 해도 살아 있었던 엘리자베스 왕대비와 필립 공의 반응은 한술 더 뜹니다. 이들은 물고기가 물 밖 세상을 상상할 수 없듯 바깥 사람들의 분노와 상실감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런 왕실 사람들을 어르고 달래려 애쓰는 건 갓 당선된 토니 블레어 총리의 몫입니다. 이대로 가다간 왕실 자체가 사라질 위기라며, 여왕이 직접 나서 TV 연설을 해야 한다고 설득하지요.

영화의 결말이 어떻게 끝나는지는 구태여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겁니다. 역사적 사실을 담은 전기 영화니까요. 다만 실제로라면 절대 있을 수 없는 허구의 장면을 굳이 보태어 가면서까지 감독과 각본가가 공들인 대목이 있습니다. 혼자 랜드로버를 몰고 드라이브를 나간 여왕이 스코틀랜드 영지에서 커다란 사슴을 만나는 장면인데요. 커다랗고 화려한 뿔을 자랑하는 사슴을 만나고 여왕은 설명하기 힘든 복잡한 감정에 사로잡힙니다. 그리고 며칠 뒤엔 그 사슴이 사냥당했다는 소식도 듣게 되지요. 모두의 눈길을 끄는 바로 그 아름다운 뿔 때문에 말입니다.

여왕은 혼자 스코틀랜드 영지를 운전하다 우연히 커다란 사슴을 만난다. 출처 IMDB.
여왕 곁에는 언제나 경호팀이 있음을 몰랐을 리 없는 두 사람이 이 장면을 통해 표현하고자 하는 건 단연코 여왕이 느끼는 '왕관의 무게'입니다. 왕좌에 올라본 적 없는 입장에서 상상하자면, 고독함과 중압감, 그리고 외롭고도 특별한 자긍심 정도가 비슷하지 않을까요.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화면에 등장하는 자막도 셰익스피어의 희곡 '헨리 4세'의 그 유명한 문구입니다. 우리나라엔 '왕관을 쓰려는 자, 그 무게를 견뎌라'라는 표현으로 잘 알려져 있지요.

목이 잘린 사슴을 찬찬히 바라보는 여왕의 모습을 카메라가 비출 때, 영화 속 엘리자베스 2세가 자신을 그 사슴과 동일시하고 있음은 명백해집니다. 한때는 고고하게 살아 숨 쉬었으나, 이제는 비참하게 목이 잘린 아름다운 존재. 총리를 비롯한 국민의 요구에 떠밀려, 결국 고집을 꺾고 끔찍이 싫어하던 며느리를 위해 추도사를 바치러 가는 여왕의 눈에 죽은 사슴은 자신의 자존심, 또는 윈저 가의 전통처럼 느껴졌을지 모릅니다.

이처럼 보온 물통을 끌어안고 잠들고 정리 정돈에 강박 증세가 있는 할머니로 자신을 묘사했을지언정, 영화의 궁극적인 시선은 결코 자신에게 비판적이지 않다는 걸 여왕은 눈치챘던 게 아닐까요. 영화가 궁금하다면, 올레TV 또는 OTT 서비스 '시즌'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향년 96세, 긴 생애를 마무리하고 이제 여왕은 눈을 감았습니다. 그녀의 업적과 치태, 공과 과를 평가하는 건 살아 있는 우리 '민중'들의 자유로 남았지요. 박제돼 벽에 걸린 사슴 머리를 둘러보는 구경꾼들처럼요. 이 역시 '군주'가 짊어져야 할 왕관의 무게임을, 여왕은 알고 있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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