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꾼 될까 두려워라”…술을 노래한 한시 일백수

입력 2022.09.24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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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술 한잔에 시 한 수'
한중 대표 시인의 주시(酒詩) 114수
이규보, 이색, 권필 등이 얘기하는 술과 삶
시대를 가리지 않는 과음의 폐해도 시로 그려내


※ [주말& 책] 매주 토요일, 책을 소개합니다.

술 한 잔에 시 한 수, 고려와 조선 시대에는 술을 마시면서 시를 읊은 선비들이 적지 않았다. 조선 중기에 시로 이름을 날렸던 선비 권필 또한 그랬다. 술 좋아하고 시를 잘 지었던 그는 평생 야인으로 지내면서 술에 관한 시를 여럿 남겼다. 그는 한시 '시와 술'에서 술과 시에 대한 감회를 표현했다.

시와 술

권필

그런데 나는 어떤 사람이기에
시도 좋아하고 술도 좋아하는가

......

흥이 일면 취하고 취하면 시 읊나니
만물이 나에게 무슨 상관 있으랴

주시 일백수
송재소 역해 | 돌베개

조선왕조실록은 권필이 시를 너무나 잘 짓기에 명나라 사신을 상대하는 접반사로 뽑혔다는 일화를 전하고 있다. 나라를 대표하는 시인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인생은 평탄치 않았다. 꼿꼿한 성품이었던 권필은 조정의 높은 자리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광해군 시절 외척의 전횡을 풍자하는 시를 지었다는 죄명으로 곤장을 맞고 귀양길에 올랐다가 4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권필은 생전에 술을 끊거나 줄이라는 얘기를 들었던 듯, 금주에 관한 시도 남겼다. 그는 술 끊기를 권하는 아내의 말이 맞지만, 그러기는 힘들다면서 변명을 댔다.

아내가 나에게 술 끊기를 권하다

권필

객지에서 여러 날 술 마셨더니
오늘 아침 흥겨움이 다시 더한데

그대의 말씀이야 또한 옳지만
이 국화 가지를 어이하리오

주시 일백수
송재소 역해 | 돌베개

'술을 그만 마시라는 아내의 얘기가 옳지만, 국화꽃이 이렇게 예쁘니 어찌 술을 마시지 않을 수 있으리오.' 술을 끊을 수 없는 핑계로 말 없는 꽃을 든 것이다.

책 '주시 일백수'는 권필이 지은 '아내가 나에게 술 끊기를 권하다'를 비롯해 한국과 중국의 술에 관한 한시 114수를 엮어 놓은 시집이다. 성균관대학교 명예교수인 송재소 퇴계학연구원장이 술과 술자리와 술을 마시는 사람에 관한 한시를 엮고 풀어냈다.

책은 술 마시는 즐거움을 말하는 여러 시를 소개하고 있지만, 술은 어두운 면도 있다. 과음하게 되면 몸을 해치고 사고도 날 수 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2021년 한국복지패널 조사·분석 보고서'에 의하면, 술을 마신다고 응답한 사람들 가운데 '음주 후 필름이 끊겼던 경험이 몇 달에 한 번 정도 있다'고 답한 사람이 전체의 9.47%로 조사됐다. '한 달에 한두 번 정도 있다'고 답한 사람은 1.69%였다. 술을 찾는 사람 10명 가운데 1명은 종종 이른바 필름이 끊길 정도로 과음하고 있는 것이다.

'해야 할 일을 술 때문에 하지 못한 경험이 몇 달에 한 번 정도 있다'고 대답한 사람은 전체의 5.86%였다. '한 달에 한두 번 정도 있다'고 답한 사람도 0.99%로 나타났다. 일을 제대로 하기 힘들 정도로 과음에 이르는 경우도 적지 않다는 뜻이다.

과음은 물리적인 부상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음주로 인해 자신이 다치거나 다른 사람을 다치게 한 경험'에 관한 질문에 대해 '과거에는 있었지만 지난 한 해 동안 없었다'는 답변은 2.24%, '지난 한 해 동안 있었다'는 답변은 0.52%로 조사됐다.

과음으로 인한 폐해는 시대를 가리지 않고 기록돼 있다. 술에 관한 시를 여러 편 지었던 고려의 문장가 이규보도 정작 술을 즐겨 찾는 아들의 모습을 보게 되자 걱정이 된다며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옛 시인들 또한 술 마시는 즐거움을 시로 풀어내면서도, 과음을 경계한 시 또한 잇따라 남긴 것이다.

아들 삼백이 술을 마시기에

이규보

너 이제 어린 나이에 술잔을 기울이니
조만간 창자가 썩을까 두려워라

네 아비 늘 취한 것 배우지 마라
한평생 남들이 미치광이라 말한단다

한평생 몸 망친 게 모두가 술 탓인데
네가 술 좋아하니 이를 또 어이할꼬

삼백이라 이름 지은 것 이제야 후회하니
날마다 삼백 잔을 마실까 두렵구나

주시 일백수
송재소 역해 | 돌베개

삼백은 이규보 아들의 아명이었다. 송재소 원장은 책에서 '이규보가 삼백의 운으로 된 시를 짓던 날 아들이 태어나, 이를 기념하기 위해 아들 아명을 삼백이라고 지었다'고 설명했다. 아들이 자신과 같이 삼백 운의 시를 짓는 인물이 되라는 의미로 아명을 삼백이라고 했으나, 정작 삼백 운의 시가 아닌 삼백 잔의 술을 찾을 것 같아 걱정되었던 모양이라는 것이다.

조선 시대 남효온도 술을 경계했다. 그의 시 '주잠'은 술의 폐해를 구체적으로 노래하고 있다.

주잠

남효온

신축년(1481, 성종 12) 2월 5일, 남산 기슭에서 과음으로 실수하고 짓다.

술자리 처음에는 예의가 정연하여
손님과 주인이 거친 행동 경계하니

오르고 내림에 진실로 예법 있고
나아가고 물러날 때도 절도 있는데

술 석 잔이면 비로소 말이 많아져
법도를 잃음을 스스로 모르고

술 열 잔이면 소리 점점 높아져서
주고받는 얘기가 더욱더 어지럽네

......

올라탄 말 머리가 향하는 곳마다
아이들이 손뼉 치며 비웃어대고

끝내는 넘어지고 자빠져
부모가 주신 몸 손상시키네

......

술에 대한 경계(酒誥) 서책에 있으니
의당 생각하여 법규로 삼아야 하리

주시 일백수
송재소 역해 | 돌베개

술을 경계하기도 했지만, 여러 한시가 술을 벗처럼 말하고 있다. 책을 쓴 송재소 퇴계학연구원장은 '이들 술을 노래한 시에는 술과 인간이 맺는 가지가지의 곡절이 절절히 그려져 있어서, 술이 인간과 희로애락을 같이한 가장 오래된 벗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고 했다. 시를 통해 술이 어떻다는 생각이나 느낌을 전하는 데 그친 것이 아니라, 술을 빌려 사람과 삶에 관한 얘기를 풀어냈다는 의미다.

지난해 '당시 일백수'를 냈고, 이번에 '주시 일백수'를 출간한 송재소 원장은 앞으로 차를 노래한 시인 '다시(茶詩) 일백수', 한국의 한시를 엮은 '한국 한시 일백수'를 써서 '일백수 시리즈' 4부작을 완성하고 싶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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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술꾼 될까 두려워라”…술을 노래한 한시 일백수
    • 입력 2022-09-24 10:02:27
    취재K
<strong>'술 한잔에 시 한 수'</strong><br /><strong>한중 대표 시인의 주시(酒詩) 114수</strong><br /><strong>이규보, 이색, 권필 등이 얘기하는 술과 삶</strong><br /><strong>시대를 가리지 않는 과음의 폐해도 시로 그려내</strong>

※ [주말& 책] 매주 토요일, 책을 소개합니다.

술 한 잔에 시 한 수, 고려와 조선 시대에는 술을 마시면서 시를 읊은 선비들이 적지 않았다. 조선 중기에 시로 이름을 날렸던 선비 권필 또한 그랬다. 술 좋아하고 시를 잘 지었던 그는 평생 야인으로 지내면서 술에 관한 시를 여럿 남겼다. 그는 한시 '시와 술'에서 술과 시에 대한 감회를 표현했다.

시와 술

권필

그런데 나는 어떤 사람이기에
시도 좋아하고 술도 좋아하는가

......

흥이 일면 취하고 취하면 시 읊나니
만물이 나에게 무슨 상관 있으랴

주시 일백수
송재소 역해 | 돌베개

조선왕조실록은 권필이 시를 너무나 잘 짓기에 명나라 사신을 상대하는 접반사로 뽑혔다는 일화를 전하고 있다. 나라를 대표하는 시인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인생은 평탄치 않았다. 꼿꼿한 성품이었던 권필은 조정의 높은 자리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광해군 시절 외척의 전횡을 풍자하는 시를 지었다는 죄명으로 곤장을 맞고 귀양길에 올랐다가 4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권필은 생전에 술을 끊거나 줄이라는 얘기를 들었던 듯, 금주에 관한 시도 남겼다. 그는 술 끊기를 권하는 아내의 말이 맞지만, 그러기는 힘들다면서 변명을 댔다.

아내가 나에게 술 끊기를 권하다

권필

객지에서 여러 날 술 마셨더니
오늘 아침 흥겨움이 다시 더한데

그대의 말씀이야 또한 옳지만
이 국화 가지를 어이하리오

주시 일백수
송재소 역해 | 돌베개

'술을 그만 마시라는 아내의 얘기가 옳지만, 국화꽃이 이렇게 예쁘니 어찌 술을 마시지 않을 수 있으리오.' 술을 끊을 수 없는 핑계로 말 없는 꽃을 든 것이다.

책 '주시 일백수'는 권필이 지은 '아내가 나에게 술 끊기를 권하다'를 비롯해 한국과 중국의 술에 관한 한시 114수를 엮어 놓은 시집이다. 성균관대학교 명예교수인 송재소 퇴계학연구원장이 술과 술자리와 술을 마시는 사람에 관한 한시를 엮고 풀어냈다.

책은 술 마시는 즐거움을 말하는 여러 시를 소개하고 있지만, 술은 어두운 면도 있다. 과음하게 되면 몸을 해치고 사고도 날 수 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2021년 한국복지패널 조사·분석 보고서'에 의하면, 술을 마신다고 응답한 사람들 가운데 '음주 후 필름이 끊겼던 경험이 몇 달에 한 번 정도 있다'고 답한 사람이 전체의 9.47%로 조사됐다. '한 달에 한두 번 정도 있다'고 답한 사람은 1.69%였다. 술을 찾는 사람 10명 가운데 1명은 종종 이른바 필름이 끊길 정도로 과음하고 있는 것이다.

'해야 할 일을 술 때문에 하지 못한 경험이 몇 달에 한 번 정도 있다'고 대답한 사람은 전체의 5.86%였다. '한 달에 한두 번 정도 있다'고 답한 사람도 0.99%로 나타났다. 일을 제대로 하기 힘들 정도로 과음에 이르는 경우도 적지 않다는 뜻이다.

과음은 물리적인 부상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음주로 인해 자신이 다치거나 다른 사람을 다치게 한 경험'에 관한 질문에 대해 '과거에는 있었지만 지난 한 해 동안 없었다'는 답변은 2.24%, '지난 한 해 동안 있었다'는 답변은 0.52%로 조사됐다.

과음으로 인한 폐해는 시대를 가리지 않고 기록돼 있다. 술에 관한 시를 여러 편 지었던 고려의 문장가 이규보도 정작 술을 즐겨 찾는 아들의 모습을 보게 되자 걱정이 된다며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옛 시인들 또한 술 마시는 즐거움을 시로 풀어내면서도, 과음을 경계한 시 또한 잇따라 남긴 것이다.

아들 삼백이 술을 마시기에

이규보

너 이제 어린 나이에 술잔을 기울이니
조만간 창자가 썩을까 두려워라

네 아비 늘 취한 것 배우지 마라
한평생 남들이 미치광이라 말한단다

한평생 몸 망친 게 모두가 술 탓인데
네가 술 좋아하니 이를 또 어이할꼬

삼백이라 이름 지은 것 이제야 후회하니
날마다 삼백 잔을 마실까 두렵구나

주시 일백수
송재소 역해 | 돌베개

삼백은 이규보 아들의 아명이었다. 송재소 원장은 책에서 '이규보가 삼백의 운으로 된 시를 짓던 날 아들이 태어나, 이를 기념하기 위해 아들 아명을 삼백이라고 지었다'고 설명했다. 아들이 자신과 같이 삼백 운의 시를 짓는 인물이 되라는 의미로 아명을 삼백이라고 했으나, 정작 삼백 운의 시가 아닌 삼백 잔의 술을 찾을 것 같아 걱정되었던 모양이라는 것이다.

조선 시대 남효온도 술을 경계했다. 그의 시 '주잠'은 술의 폐해를 구체적으로 노래하고 있다.

주잠

남효온

신축년(1481, 성종 12) 2월 5일, 남산 기슭에서 과음으로 실수하고 짓다.

술자리 처음에는 예의가 정연하여
손님과 주인이 거친 행동 경계하니

오르고 내림에 진실로 예법 있고
나아가고 물러날 때도 절도 있는데

술 석 잔이면 비로소 말이 많아져
법도를 잃음을 스스로 모르고

술 열 잔이면 소리 점점 높아져서
주고받는 얘기가 더욱더 어지럽네

......

올라탄 말 머리가 향하는 곳마다
아이들이 손뼉 치며 비웃어대고

끝내는 넘어지고 자빠져
부모가 주신 몸 손상시키네

......

술에 대한 경계(酒誥) 서책에 있으니
의당 생각하여 법규로 삼아야 하리

주시 일백수
송재소 역해 | 돌베개

술을 경계하기도 했지만, 여러 한시가 술을 벗처럼 말하고 있다. 책을 쓴 송재소 퇴계학연구원장은 '이들 술을 노래한 시에는 술과 인간이 맺는 가지가지의 곡절이 절절히 그려져 있어서, 술이 인간과 희로애락을 같이한 가장 오래된 벗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고 했다. 시를 통해 술이 어떻다는 생각이나 느낌을 전하는 데 그친 것이 아니라, 술을 빌려 사람과 삶에 관한 얘기를 풀어냈다는 의미다.

지난해 '당시 일백수'를 냈고, 이번에 '주시 일백수'를 출간한 송재소 원장은 앞으로 차를 노래한 시인 '다시(茶詩) 일백수', 한국의 한시를 엮은 '한국 한시 일백수'를 써서 '일백수 시리즈' 4부작을 완성하고 싶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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