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마진국] 천재 감독이 만든 블랙 코미디의 최고봉…웃다가도 슬퍼지네

입력 2022.09.25 (09:13) 수정 2022.12.26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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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닥터 스트레인지러브’의 한 장면. 출처 IMDB.영화 ‘닥터 스트레인지러브’의 한 장면. 출처 IMDB.

※일요일 아침, 그 주의 시사 이슈와 관련된 영화를 소개합니다. 영화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핵전쟁을 가지고 코미디 영화를 만들 수 있을까? 그럴 수 있다. 그것도 보통 코미디 영화가 아니라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작을 만드는 것도 가능하다. 천재 감독 스탠리 큐브릭이라면. 1964년, 당시 36살의 나이에 완성한 작품 '닥터 스트레인지러브'는 지금까지도 최고의 정치 코미디 영화로 꼽힌다.

영화의 배경은 미소 갈등이 정점에 치달은 냉전 시대. 그런데 미 공군에 갑자기 30 메가톤급 핵폭탄을 적의 비행장과 미사일 기지를 향해 떨어뜨리라는 명령이 떨어진다. 명령을 내린 준장의 이름은 잭 D.리퍼. 명백히 영국의 살인마 '잭 더 리퍼'를 연상시키는 이름을 가진 이 인물은 사실 '불소 음모론'을 믿는 미치광이다. 상수도에 불소가 포함된 건 인간 체액을 오염시키려는 공산주의자들의 음모라는 것. 리퍼 장군이 입을 열수록 그는 전장에 있을 게 아니라 치료가 필요한 인물이라는 게 조금씩 드러나지만, 명령은 이미 떨어진 뒤다.

리퍼 장군의 돌발 행동으로 촉발된 상황은 갈수록 점입가경으로 흘러가고, 결국 핵폭탄은 펑펑 터진다. 터지고 또 터진다. 보고를 받고 상황을 알게 된 군 상부도 대통령도, 문제 해결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은 탓이다. 호색한에 전쟁광인 장군은 오히려 '고작 수천만' 정도의 희생만 감수하면 된다며 선제 공격을 이어가자고 주장하고, 소련 서기장과 직접 통화해 상황을 수습하겠다고 나선 미국 대통령은 무능하고 심약하기 그지없다.

호전광 버크 터지슨 장군은 수상쩍은 소련 대사 사데스키와 시종일관 말다툼을 벌인다. 출처 IMDB.호전광 버크 터지슨 장군은 수상쩍은 소련 대사 사데스키와 시종일관 말다툼을 벌인다. 출처 IMDB.

남을 웃길 때 가장 중요한 건 제 유머에 먼저 웃음을 터트리지 않는 거라고 했던가. 영화의 등장인물들은 시종일관 다들 진지한데 어처구니가 없어 웃음이 난다. 영화에서 풍자하고 있는 정치인들의 모습 역시 60년이라는 시차가 무색할 만큼 지금과 다르지 않다. 특유의 입에 발린 말과 빙빙 돌리는 화법, 사건의 파문보단 당장의 체면을 중시하는 태도, 내 업무가 아니니 담당자에 전화해보라는 관료주의 등이 긴박한 상황에도 어김없이 발휘된다.

그러나 바보들의 바보 짓만 계속 보여준다고 저절로 웃기는 영화가 되지는 않는 법. 영화 속 유일한 '정상인' 맨드레이크 대령의 고군분투가 없었다면 영화의 재미는 이보다 한참 덜했을 터다. 전장의 자신에게 도취해 카우보이 흉내를 내며 죽음을 맞는 공군 비행사, 원리원칙에 사로잡혀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 군인, 컴퓨터만 있으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과학 기술 만능주의자…. 냉전 시대의 광기를 상징하는 인물들 사이에서 맨드레이크 혼자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모습은 대비를 통해 웃음을 자아낸다. 맨드레이크를 포함해 모두 3가지 역을 맡아 천재적인 연기를 선보이는 피터 셀러스의 천연덕스러운 인물 묘사도 일품이다. 영화가 궁금하다면, 네이버와 유튜브 등에서 천원 안팎이면 볼 수 있다.

주마다 시사 이슈와 엮어 영화 추천 칼럼을 쓰겠다고 자원한 지도 어느덧 5달이 되어 가지만, 이번 주 영화 선정은 유독 쉽지 않았다. 며칠을 고민하다 영화사 전체를 통틀어 최고의 걸작 중 하나로 꼽히는 위대한 코미디 영화를 들고 왔지만, 솔직히 자신이 없다. '영화를 뭐하러 보느냐, 요새 돌아가는 상황이 영화보다 더 코미디 같은데.' 이런 비판을 듣지 않을 자신이. 블랙 코미디의 매력이 원래 그런 거 아닐까. 차마 웃을 수 없는 현실을 비틀어 웃음의 원료로 삼지만, 그렇기에 웃다가도 불현듯 씁쓸해지고 마는 것. 만약 스탠리 큐브릭이 요 며칠간 한국을 보았다면…감독님, 영화와 현실 가운데 뭐가 더 '웃픈'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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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정2022-12-26 09:39:18
    씨네마진국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러브’의 한 장면. 출처 IMDB.
※일요일 아침, 그 주의 시사 이슈와 관련된 영화를 소개합니다. 영화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핵전쟁을 가지고 코미디 영화를 만들 수 있을까? 그럴 수 있다. 그것도 보통 코미디 영화가 아니라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작을 만드는 것도 가능하다. 천재 감독 스탠리 큐브릭이라면. 1964년, 당시 36살의 나이에 완성한 작품 '닥터 스트레인지러브'는 지금까지도 최고의 정치 코미디 영화로 꼽힌다.

영화의 배경은 미소 갈등이 정점에 치달은 냉전 시대. 그런데 미 공군에 갑자기 30 메가톤급 핵폭탄을 적의 비행장과 미사일 기지를 향해 떨어뜨리라는 명령이 떨어진다. 명령을 내린 준장의 이름은 잭 D.리퍼. 명백히 영국의 살인마 '잭 더 리퍼'를 연상시키는 이름을 가진 이 인물은 사실 '불소 음모론'을 믿는 미치광이다. 상수도에 불소가 포함된 건 인간 체액을 오염시키려는 공산주의자들의 음모라는 것. 리퍼 장군이 입을 열수록 그는 전장에 있을 게 아니라 치료가 필요한 인물이라는 게 조금씩 드러나지만, 명령은 이미 떨어진 뒤다.

리퍼 장군의 돌발 행동으로 촉발된 상황은 갈수록 점입가경으로 흘러가고, 결국 핵폭탄은 펑펑 터진다. 터지고 또 터진다. 보고를 받고 상황을 알게 된 군 상부도 대통령도, 문제 해결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은 탓이다. 호색한에 전쟁광인 장군은 오히려 '고작 수천만' 정도의 희생만 감수하면 된다며 선제 공격을 이어가자고 주장하고, 소련 서기장과 직접 통화해 상황을 수습하겠다고 나선 미국 대통령은 무능하고 심약하기 그지없다.

호전광 버크 터지슨 장군은 수상쩍은 소련 대사 사데스키와 시종일관 말다툼을 벌인다. 출처 IMDB.
남을 웃길 때 가장 중요한 건 제 유머에 먼저 웃음을 터트리지 않는 거라고 했던가. 영화의 등장인물들은 시종일관 다들 진지한데 어처구니가 없어 웃음이 난다. 영화에서 풍자하고 있는 정치인들의 모습 역시 60년이라는 시차가 무색할 만큼 지금과 다르지 않다. 특유의 입에 발린 말과 빙빙 돌리는 화법, 사건의 파문보단 당장의 체면을 중시하는 태도, 내 업무가 아니니 담당자에 전화해보라는 관료주의 등이 긴박한 상황에도 어김없이 발휘된다.

그러나 바보들의 바보 짓만 계속 보여준다고 저절로 웃기는 영화가 되지는 않는 법. 영화 속 유일한 '정상인' 맨드레이크 대령의 고군분투가 없었다면 영화의 재미는 이보다 한참 덜했을 터다. 전장의 자신에게 도취해 카우보이 흉내를 내며 죽음을 맞는 공군 비행사, 원리원칙에 사로잡혀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 군인, 컴퓨터만 있으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과학 기술 만능주의자…. 냉전 시대의 광기를 상징하는 인물들 사이에서 맨드레이크 혼자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모습은 대비를 통해 웃음을 자아낸다. 맨드레이크를 포함해 모두 3가지 역을 맡아 천재적인 연기를 선보이는 피터 셀러스의 천연덕스러운 인물 묘사도 일품이다. 영화가 궁금하다면, 네이버와 유튜브 등에서 천원 안팎이면 볼 수 있다.

주마다 시사 이슈와 엮어 영화 추천 칼럼을 쓰겠다고 자원한 지도 어느덧 5달이 되어 가지만, 이번 주 영화 선정은 유독 쉽지 않았다. 며칠을 고민하다 영화사 전체를 통틀어 최고의 걸작 중 하나로 꼽히는 위대한 코미디 영화를 들고 왔지만, 솔직히 자신이 없다. '영화를 뭐하러 보느냐, 요새 돌아가는 상황이 영화보다 더 코미디 같은데.' 이런 비판을 듣지 않을 자신이. 블랙 코미디의 매력이 원래 그런 거 아닐까. 차마 웃을 수 없는 현실을 비틀어 웃음의 원료로 삼지만, 그렇기에 웃다가도 불현듯 씁쓸해지고 마는 것. 만약 스탠리 큐브릭이 요 며칠간 한국을 보았다면…감독님, 영화와 현실 가운데 뭐가 더 '웃픈'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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