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마진국] 자극적 소재 아닌 풀어야 할 문제로…최고의 마약 비판 영화

입력 2022.10.02 (07:00) 수정 2022.12.26 (09:39)

읽어주기 기능은 크롬기반의
브라우저에서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영화 ‘트래픽(2000)’의 한 장면. 출처 IMDB.영화 ‘트래픽(2000)’의 한 장면. 출처 IMDB.

※일요일 아침, 그 주의 시사 이슈와 관련된 영화를 소개합니다. 영화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유명 연예인의 마약 투약 소식과 실화를 바탕으로 한 넷플릭스 시리즈 '수리남'이 인기를 얻으며 국내 마약 유통 현실이 주목받고 있다. 대한민국은 마약 청정국이라는 오랜 착각도 깨지는 중이다. 소수의 조직 폭력배나 연예인들이나 하는 거라는 인식은 이제 옛말. 어린 학생들부터 평범한 회사원과 주부들까지, 사회 깊숙이 파고든 그물망을 걷어낼 방법을 고민해야 할 때다.

현실을 비추는 거울답게, 영화계도 일찌감치 마약이란 소재에 주목해 왔다. '나르코스'나 '브레이킹 배드'처럼 걸출한 시리즈를 보유한 미국만큼은 아니지만, 우리나라도 꾸준히 마약을 다룬 창작물을 만들어 왔다. 그러나 접근 방식은 대부분 비슷하다. 마약사범과 경찰의 대결을 다룬 액션 영화거나, 마약상의 범죄 수법을 자세히 따라가며 일종의 대리 만족을 안기는 범죄물일 때가 많다. 그나마 예외를 찾는다면, 중독의 무서움을 생생하게 그리며 마약 중독자에게도 목소리를 부여한 '사생결단' 정도가 떠오른다.

마약을 진기하고 자극적인 소재로만 대하는 게 아니라, 사회가 함께 풀어야 할 문제로 진지하게 접근하는 영화가 언젠가 우리나라에서도 나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추천하고 싶은 영화가 있다. 만들어진 지 20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최고의 마약 비판 영화라는 찬사가 떠나지 않는 작품, 바로 스티븐 소더버그가 연출한 '트래픽'이다. 국내에선 유튜브와 '왓챠'가 서비스한다.

아버지는 대통령이 지명한 미국 마약퇴치 책임자지만, 정작 딸 캐롤라인은 마약에 빠져든다. 출처 IMDB.아버지는 대통령이 지명한 미국 마약퇴치 책임자지만, 정작 딸 캐롤라인은 마약에 빠져든다. 출처 IMDB.

영화는 세 가지 서로 다른 이야기를 교차하며 마약 퇴치가 얼마나 불가능에 가까운 목표인지 절절하게 그린다. 미국 대통령의 명을 받고 마약 퇴치 업무를 벌이는 로버트(마이클 더글라스)는 정작 사립학교 모범생인 딸의 마약 중독을 막지 못하고, 멕시코 국경에서 일하는 경찰 자비에(베니시오 델 토로)는 매사 적당히 일하는 평범한 인물이지만 우연히 군 상층부가 연결된 거대한 마약 소탕 작전에 휘말린다. 반면 샌디에이고 상류층의 삶을 즐기던 헬레나(캐서린 제타 존스)는 돈 잘 버는 사업가인 줄 알았던 남편이 사실 마약상이었다는 걸 알게 되자 만삭 임산부의 몸으로 먹이 사슬의 한복판에 뛰어든다.

실제로 마약에 중독된 학창 시절을 보냈던 시나리오 작가가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완성해 낸 방대한 시나리오에는, 단순한 선악 구도나 응징의 서사 대신 입체적인 인물들이 가득하다. 이 더러운 전쟁에선 아무도 깨끗하지 않다는 개봉 당시 현지 홍보 문구처럼 주인공들은 회색 지대 안에서 허우적댄다. '더 와이어' 등 마약을 다룬 드라마의 팬이라면 이미 익숙할 주제들, 즉 범죄를 막기 위한 행동이 오히려 범죄를 부추기는 모순이나 정치권력과의 카르텔, 중독이 중독을 낳는 악순환 등이 2시간 20여 분짜리 영화 한 편에 알차게 압축돼 있다. 3가지 이야기를 오가다 보니 정치물과 수사물, 범죄물의 매력을 한 번에 느낄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다.

그러나 마지막 장면이 아니었다면 이 영화를 소개할 생각은 들지 않았을 것이다. 여타 마약 영화와 구분되는 '트래픽'의 장점이 마지막 장면에 응축돼 있기 때문이다. 유튜브에 영문으로 '트래픽 마지막 장면'이라고 검색하면 이 마지막 몇 분만 편집된 영상이 나올 정도로 유명한데, 영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봐야 감동을 느낄 수 있다. 수많은 사람이 생사를 오가며 마약과의 전쟁을 벌이는 영화의 결말치고는 한없이 시적이라, 마지막 장면만 찾아 본다면 '이게 뭐야?' 소리가 나올 수 있다. 인간은 삶에서 다른 재미와 충만함을 찾지 못할 때 마약에 중독된다는 것, 전 세계에 퍼진 마약 범죄를 주요 마약 생산국 몇몇 곳의 잘못이라고만 여기기엔 미국 등 소위 '선진국'의 책임도 못지 않다는 것, 끝없는 악순환을 피하려면 공동체 전체가 건강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 등 말로 풀어 설명하면 도덕 교과서 읽듯 뻔한 내용이 영화 안에선 저절로 마음에 날아와 꽂힌다. 절절한 감동과 함께. 이젠 우리도 비슷한 자세로 마약 문제를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 제보하기
▷ 카카오톡 : 'KBS제보' 검색, 채널 추가
▷ 전화 : 02-781-1234, 4444
▷ 이메일 : kbs1234@kbs.co.kr
▷ 유튜브, 네이버, 카카오에서도 KBS뉴스를 구독해주세요!


  • [씨네마진국] 자극적 소재 아닌 풀어야 할 문제로…최고의 마약 비판 영화
    • 입력 2022-10-02 07:00:11
    • 수정2022-12-26 09:39:18
    씨네마진국
영화 ‘트래픽(2000)’의 한 장면. 출처 IMDB.
※일요일 아침, 그 주의 시사 이슈와 관련된 영화를 소개합니다. 영화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유명 연예인의 마약 투약 소식과 실화를 바탕으로 한 넷플릭스 시리즈 '수리남'이 인기를 얻으며 국내 마약 유통 현실이 주목받고 있다. 대한민국은 마약 청정국이라는 오랜 착각도 깨지는 중이다. 소수의 조직 폭력배나 연예인들이나 하는 거라는 인식은 이제 옛말. 어린 학생들부터 평범한 회사원과 주부들까지, 사회 깊숙이 파고든 그물망을 걷어낼 방법을 고민해야 할 때다.

현실을 비추는 거울답게, 영화계도 일찌감치 마약이란 소재에 주목해 왔다. '나르코스'나 '브레이킹 배드'처럼 걸출한 시리즈를 보유한 미국만큼은 아니지만, 우리나라도 꾸준히 마약을 다룬 창작물을 만들어 왔다. 그러나 접근 방식은 대부분 비슷하다. 마약사범과 경찰의 대결을 다룬 액션 영화거나, 마약상의 범죄 수법을 자세히 따라가며 일종의 대리 만족을 안기는 범죄물일 때가 많다. 그나마 예외를 찾는다면, 중독의 무서움을 생생하게 그리며 마약 중독자에게도 목소리를 부여한 '사생결단' 정도가 떠오른다.

마약을 진기하고 자극적인 소재로만 대하는 게 아니라, 사회가 함께 풀어야 할 문제로 진지하게 접근하는 영화가 언젠가 우리나라에서도 나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추천하고 싶은 영화가 있다. 만들어진 지 20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최고의 마약 비판 영화라는 찬사가 떠나지 않는 작품, 바로 스티븐 소더버그가 연출한 '트래픽'이다. 국내에선 유튜브와 '왓챠'가 서비스한다.

아버지는 대통령이 지명한 미국 마약퇴치 책임자지만, 정작 딸 캐롤라인은 마약에 빠져든다. 출처 IMDB.
영화는 세 가지 서로 다른 이야기를 교차하며 마약 퇴치가 얼마나 불가능에 가까운 목표인지 절절하게 그린다. 미국 대통령의 명을 받고 마약 퇴치 업무를 벌이는 로버트(마이클 더글라스)는 정작 사립학교 모범생인 딸의 마약 중독을 막지 못하고, 멕시코 국경에서 일하는 경찰 자비에(베니시오 델 토로)는 매사 적당히 일하는 평범한 인물이지만 우연히 군 상층부가 연결된 거대한 마약 소탕 작전에 휘말린다. 반면 샌디에이고 상류층의 삶을 즐기던 헬레나(캐서린 제타 존스)는 돈 잘 버는 사업가인 줄 알았던 남편이 사실 마약상이었다는 걸 알게 되자 만삭 임산부의 몸으로 먹이 사슬의 한복판에 뛰어든다.

실제로 마약에 중독된 학창 시절을 보냈던 시나리오 작가가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완성해 낸 방대한 시나리오에는, 단순한 선악 구도나 응징의 서사 대신 입체적인 인물들이 가득하다. 이 더러운 전쟁에선 아무도 깨끗하지 않다는 개봉 당시 현지 홍보 문구처럼 주인공들은 회색 지대 안에서 허우적댄다. '더 와이어' 등 마약을 다룬 드라마의 팬이라면 이미 익숙할 주제들, 즉 범죄를 막기 위한 행동이 오히려 범죄를 부추기는 모순이나 정치권력과의 카르텔, 중독이 중독을 낳는 악순환 등이 2시간 20여 분짜리 영화 한 편에 알차게 압축돼 있다. 3가지 이야기를 오가다 보니 정치물과 수사물, 범죄물의 매력을 한 번에 느낄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다.

그러나 마지막 장면이 아니었다면 이 영화를 소개할 생각은 들지 않았을 것이다. 여타 마약 영화와 구분되는 '트래픽'의 장점이 마지막 장면에 응축돼 있기 때문이다. 유튜브에 영문으로 '트래픽 마지막 장면'이라고 검색하면 이 마지막 몇 분만 편집된 영상이 나올 정도로 유명한데, 영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봐야 감동을 느낄 수 있다. 수많은 사람이 생사를 오가며 마약과의 전쟁을 벌이는 영화의 결말치고는 한없이 시적이라, 마지막 장면만 찾아 본다면 '이게 뭐야?' 소리가 나올 수 있다. 인간은 삶에서 다른 재미와 충만함을 찾지 못할 때 마약에 중독된다는 것, 전 세계에 퍼진 마약 범죄를 주요 마약 생산국 몇몇 곳의 잘못이라고만 여기기엔 미국 등 소위 '선진국'의 책임도 못지 않다는 것, 끝없는 악순환을 피하려면 공동체 전체가 건강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 등 말로 풀어 설명하면 도덕 교과서 읽듯 뻔한 내용이 영화 안에선 저절로 마음에 날아와 꽂힌다. 절절한 감동과 함께. 이젠 우리도 비슷한 자세로 마약 문제를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이 기사가 좋으셨다면

오늘의 핫 클릭

실시간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뉴스

이 기사에 대한 의견을 남겨주세요.

수신료 수신료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