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도 못 외우겠네”…별별 ‘아파트 이름’의 세계

입력 2022.10.09 (08:00) 수정 2022.10.11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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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한글날’이 제576돌을 맞은 가운데, 한글의 유구한 역사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의 대표 주거 공간인 아파트 이름에는 여전히 한자와 영어 등 외래어가 많이 쓰이고 있다. (사진 출처=게티이미지뱅크, 이해를 돕기 위한 사진으로 기사 내용과 직접 관련 없음)오늘 ‘한글날’이 제576돌을 맞은 가운데, 한글의 유구한 역사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의 대표 주거 공간인 아파트 이름에는 여전히 한자와 영어 등 외래어가 많이 쓰이고 있다. (사진 출처=게티이미지뱅크, 이해를 돕기 위한 사진으로 기사 내용과 직접 관련 없음)

■ '캐슬(성)'부터 '팰리스(궁전)'까지…"손발이 오그라드네"

"반포 한신아파트, 압구정 현대아파트 할 때가 좋았는데…. 지금은 아파트 이름이 하도 어려워서 택시 기사분들도 모르겠네요. 너무 길어서 네비게이션에 입력하기도 힘들겠고요."

"힐·파크·캐슬에 클래스·팰리스까지…. 심하게 길고 난해해요. 어르신들은 물론 젊은 사람들도 못 외울 정도라니까요. '콩글리쉬' 합성어 자제했으면 좋겠어요. 손발이 오그라들어요."

- 온라인 커뮤니티 네티즌 글 재구성

오늘 10월 9일은 조선시대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사들이 한글을 창제·반포한 것을 기념하는 날, 바로 '한글날'입니다. 1446년 훈민정음(訓民正音)이 반포된 이후 올해 한글날은 576돌을 맞았는데요.

이 같은 한글의 유구한 역사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의 대표 주거 공간인 아파트 이름에는 한자와 영어 등 외래어가 많이 쓰이고 있습니다.

특히 고급스러움을 부각하기 위해 무게감 있는 외국어 단어들을 합성·작명하는 경우가 있는데, 윗부분에 인용한 네티즌 의견처럼 '조어(造語)가 길고 난해해 외우기도 이해하기도 어렵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 타워 팰리스 → 디에이치 퍼스티어 아이파크 → 동탄시범다은마을월드메르디앙반도유보라?

사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몇몇 아파트의 외래어 이름은 우리말이 없어 아쉽기는 해도, 어느 정도 해석이 가능한 편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고급 주상복합 아파트의 대명사인 '타워 팰리스'는 고공(高空)의 저택, 잠실 소재의 '레이크 팰리스'는 인근 석촌호수가 연상되는 식이었죠.

서울 강남구 개포동 소재의 개포시영아파트를 재건축, 2020년 9월 준공된 '래미안 포레스트' 역시, '래미안'(미래 지향적이며(來), 아름답고(美), 편안한(安) 아파트)이라는 한자 브랜드명에 숲을 뜻하는 영단어 '포레스트(Forest)'가 붙은 이름이라 이해가 크게 어렵지는 않았는데요.

고급 아파트의 대명사인 ‘타워 팰리스’와 ‘래미안’. 근래 아파트 이름은 단순 브랜드명 적용에 그치지 않고 지역명, 단지명 등이 포함된 ‘서브 네임’까지 붙어 길고 복잡해지는 경향이 있다. (사진 출처=연합뉴스, 이해를 돕기 위한 사진으로 기사 내용과 직접 관련 없음)고급 아파트의 대명사인 ‘타워 팰리스’와 ‘래미안’. 근래 아파트 이름은 단순 브랜드명 적용에 그치지 않고 지역명, 단지명 등이 포함된 ‘서브 네임’까지 붙어 길고 복잡해지는 경향이 있다. (사진 출처=연합뉴스, 이해를 돕기 위한 사진으로 기사 내용과 직접 관련 없음)

근래에는 건설사마다 아파트의 품격을 더욱 적극적으로 차별화하기 위해 새로운 브랜드명을 고안하면서, 다소 길고 어려워진 이름들이 생겨났습니다. 2024년 초 입주 예정으로 공사가 진행 중인 개포 1단지 아파트 명칭은 '디에이치 퍼스티어 아이파크'로 12자에 달합니다. 둔촌 주공 재건축 아파트인 '올림픽파크 포레온' 역시 명칭 공모 과정에서 '둔촌 올림픽파크 에비뉴포레'가 거론돼, 지명(地名)까지 들어간 12자 이름이 될 뻔했습니다.

지역명·단지명과 외래어 브랜드가 혼합된, 12자를 넘어 18~19자에 이르는 무척 긴 이름의 아파트들도 존재합니다. 경기도 이천 송정동에 위치한 아파트 '이천증포3지구대원칸타빌2차더테라스'는 18자, 화성시 동탄 소재의 아파트 '동탄시범다은마을월드메르디앙반도유보라'는 19자입니다.

길지 않아도 명칭 자체만 놓고 봤을 때, 뜻을 곧바로 유추하기 힘든 브랜드들도 있습니다. 삼성물산의 래미안 시리즈 가운데 '원베일리(One Bailey)'의 베일리는 건축 용어로서 중세 시대 성(城) 중심부에 영주와 가족들이 거주하던 공간으로, '성의 핵심 지역'을 뜻한다고 합니다. '블레스티지(Blesstige)'의 경우 '축복하다'는 의미의 '블레스(Bless)'와 특권·명성 등을 뜻하는 '프레스티지(Prestige)'의 합성어로 '축복받은 특권의 단지'라는 이름인데요.

서울 서초구 반포동 소재 고급 아파트 ‘디에이치 라클라스’ 주 출입문 전경. ‘디에이치’는 ‘단 하나의’ 뜻을 지닌 정관사 ‘디(THE)’와 현대(Hyundai), 하이엔드(High-end), 하이 소사이어티(High Society)를 관통하는 알파벳 ‘H’를 조합한 브랜드명으로 ‘완벽한 프레스티지 라이프를 위한 단 하나의 이름’이라는 뜻이다. (사진 출처=연합뉴스, 이해를 돕기 위한 사진으로 기사 내용과 직접 관련 없음)서울 서초구 반포동 소재 고급 아파트 ‘디에이치 라클라스’ 주 출입문 전경. ‘디에이치’는 ‘단 하나의’ 뜻을 지닌 정관사 ‘디(THE)’와 현대(Hyundai), 하이엔드(High-end), 하이 소사이어티(High Society)를 관통하는 알파벳 ‘H’를 조합한 브랜드명으로 ‘완벽한 프레스티지 라이프를 위한 단 하나의 이름’이라는 뜻이다. (사진 출처=연합뉴스, 이해를 돕기 위한 사진으로 기사 내용과 직접 관련 없음)

현대건설의 디에이치 아너힐즈에서 '디에이치'는 '단 하나의' 뜻을 지닌 정관사 '디(THE)'와 현대(Hyundai), 하이엔드(High-end), 하이 소사이어티(High Society)를 관통하는 알파벳 'H'를 조합한 브랜드명입니다. '완벽한 프레스티지 라이프를 위한 단 하나의 이름'이라는 의미입니다. 뒤에 붙는 '아너힐즈'는 명예를 뜻하는 '아너(Honor)'와 언덕 또는 나지막한 산의 '힐즈(hills)'를 조합한 이름입니다.

■ 입지·자연·공간 특색 강조 '독특한 작명'…옛날에는 '외래어 금지'도

부동산 정보 조사 업체 '부동산인포'에 따르면 2019년 분양된 전국 아파트 이름의 평균 자수(字數)는 9.84자로, 4.2자였던 1990년대보다 두 배 이상 늘었는데요.

건설 업계에서는 이처럼 길고 특별하게 짓는 아파트 이름을 '펫 네임(Pet Name·애칭)'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아파트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고유한 정체성을 부여하고 상징화하는 작명 전략이라는 것이죠. 입지 조건, 자연 경관, 공간 특색 등을 강조하기 위해 추가적으로 붙는 단어들이 늘어나, 독특하면서도 복잡한 이름이 탄생되는 식입니다. 특히 2015년 이후 여러 건설사가 컨소시엄 형태로 공동 시공하는 재개발 붐이 일어남에 따라 각종 브랜드가 뒤섞여 아파트 이름은 말 그대로 '기묘'해졌습니다.

1962년 지어진 서울 마포구 도화동 소재의 ‘마포아파트’. 옛날 아파트 이름은 지금보다 훨씬 짧고 직관적이었다. (사진 출처=KBS ‘명견만리’ 방송 갈무리)1962년 지어진 서울 마포구 도화동 소재의 ‘마포아파트’. 옛날 아파트 이름은 지금보다 훨씬 짧고 직관적이었다. (사진 출처=KBS ‘명견만리’ 방송 갈무리)

옛날 아파트 이름은 지금보다 훨씬 짧고 직관적이었습니다. 해방 이후 최초로 지은 현대식 아파트, 1958년 준공된 '종암아파트'는 서울 성북구 종암동에 있다고 해서 지명만 간단히 붙여 이름을 지었습니다. 1962년 지어진 마포구 도화동 소재의 아파트 이름도 '마포아파트'로 간결했습니다.

1960~70년대 근대화 시기 수도권을 중심으로 대규모 아파트 건설이 본격화하자, 행정 당국에서는 아파트 이름에 외래어를 쓰지 못하도록 규제를 내리기도 했습니다. 1974년 5월 1일자 『중앙일보』 기사 「아파트 이름 외래어 쓰면」을 보면, 당시 "서울시는 1일 '아파트 명칭 외래어 사용 규제안'을 마련, 아파트 명칭을 외래어로 사용할 경우 건축 허가를 내주지 않기로 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해당 기사는 "시 건축 당국은 시내에 들어선 대부분의 아파트 명칭이 생소한 외래어로 돼 있어 외국의 아파트 같은 느낌을 주고 있다고 밝히고, 이를 규제하기 위해 ▲신축 허가 때 아파트 명칭을 우리나라 말로 정하도록 하고 ▲건축 중인 아파트는 준공 검사 때 이를 규제하며 ▲기존 아파트에 대해서도 명칭을 바꾸도록 권장하기로 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 건설업계 "집값 고려해 '세련되고 차별화된 이름' 선택"

고급 아파트 브랜드들이 대부분 화려하고 웅장한 외래어 위주로 이름을 짓는 상황에서, 소박하면서도 구수한 우리말을 고수하는 아파트도 있습니다. 코오롱글로벌의 '하늘채', 금호건설의 '어울림' 등인데요.

부영주택의 ‘사랑으로’, 금호건설의 ‘어울림’은 외래어 위주인 아파트 이름들 가운데 우리말을 고수하는 브랜드다. (사진 출처=KBS 뉴스 및 유튜브 채널 ‘아파트언박싱 by 직방TV’ 영상 갈무리)부영주택의 ‘사랑으로’, 금호건설의 ‘어울림’은 외래어 위주인 아파트 이름들 가운데 우리말을 고수하는 브랜드다. (사진 출처=KBS 뉴스 및 유튜브 채널 ‘아파트언박싱 by 직방TV’ 영상 갈무리)

부영주택의 '사랑으로 부영'이 대표적입니다. 1999년부터 2005년까지 '그린 타운'이라는 영문으로 아파트 이름을 지었던 부영은, 2006년 창립 정신인 한글 '사랑으로'를 아파트 브랜드로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습니다. 부영 관계자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사랑으로'는 '사랑으로 지은 집' '사랑이 가득한 집'이라는 뜻으로, 입주민들도 기억하고 부르기 쉬워 현재까지 사용하고 있다"며 "'근사한 영어 이름으로 바꾸면 안 되냐'고 말하는 분도 있지만, 주민 대부분은 지금 이름에 적응해서 만족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물론 아파트 브랜드에 영어 등 외래어를 사용하는 건설사들도 나름의 이유는 있습니다. '조합 등 입주민들이 집값 상승을 고려,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이름을 원하기 때문에, 사측에서 명칭 안(案) 몇 가지를 제시하면 영단어가 조합된 가장 독창적인 이름을 선택한다'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신반포 1차, 2차' 같이 단순 지명만 따서 이름을 지었다면, 2000년대 들어서면서부터는 아파트 건설사들이 고유한 브랜드를 만들기 시작합니다. 브랜드만 놓고 보면 심플한 편이지만, 요새 그 뒤에 붙는 '서브 네임'들은 영어와 불어가 섞이는 등 '정체불명의 조어'가 많은 것이 사실이죠. 이제 입주민들은 과거처럼 어느 동네 1차, 2차 같은 이름을 선호하지 않아요. 조합에서 아파트 이름을 결정할 때도 '다른 곳과 차별화된 단지를 갖고 싶은 입주민의 마음을 대변'해 여러 후보 명칭 가운데 가장 특별한 이름을 고릅니다. " - 대형 아파트 건설사 A 관계자

"아파트 공사 수주를 할 때 조합에서 먼저 '지역에 맞게 고급스러운 외래어로 아파트 이름을 지어 제안해달라'요청하는 경우가 많아요. 결국 그게 아파트 가격과 연결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간단하게 '무슨 아파트' 이렇게만 지으면 되게 싫어하시죠. 아파트 이름에 지명을 넣을 때도, 아현동 소재지만 '아현' 대신 '신촌'을 넣길 원하는 등 '더 세련된 느낌을 주는 지역'을 선호합니다. " - 대형 아파트 건설사 B 관계자

김선철 국립국어원 공공언어과장은 “아파트에 지역명을 넣는 것 자체는 어쩔 수 없더라도, 처음 접하는 어려운 외국어로 브랜드명을 만드는 건 브랜드 가치에도 별로 도움이 안 된다”며 “아파트 이름도 ‘서로 잘 알아듣고 소통하기 좋은 우리말’로 많이 만들면 어떨까 싶다”고 조언했다. (사진 출처=게티이미지뱅크, 이해를 돕기 위한 사진으로 기사 내용과 직접 관련 없음)김선철 국립국어원 공공언어과장은 “아파트에 지역명을 넣는 것 자체는 어쩔 수 없더라도, 처음 접하는 어려운 외국어로 브랜드명을 만드는 건 브랜드 가치에도 별로 도움이 안 된다”며 “아파트 이름도 ‘서로 잘 알아듣고 소통하기 좋은 우리말’로 많이 만들면 어떨까 싶다”고 조언했다. (사진 출처=게티이미지뱅크, 이해를 돕기 위한 사진으로 기사 내용과 직접 관련 없음)

■ "'원하는 삶의 모습' 투영…지나친 외국어 사용은 브랜드 가치에도 안 좋아"

채완 동덕여대 국문과 명예교수는 '아파트 이름의 사회적 의미'라는 논문에서 "아파트 상표명은 구매자로 설정된 타깃 계층의 욕망을 구체화한다. 현대 한국인이 원하는 삶의 모습이 투영돼 있는 것"이라며 "로얄, 스위트, 팰리스 같은 단어는 왕족이나 귀족의 거주지라는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이름들은 (과거) '맨션'이 그러했듯이, 모방 작명에 의해 곧 그 차별성을 잃게 된다"고 분석했습니다.

김선철 국립국어원 공공언어과장은 "아파트에 지역명을 넣는 것 자체는 어쩔 수 없더라도, 처음 접하는 어려운 외국어로 브랜드명을 만드는 건 브랜드 가치에도 별로 도움이 안 된다. 일상에서 사용하기 힘들기 때문"이라며 "특히 나이가 어린, 또는 많은 사람들은 언어 생활에서 그런 생소한 명칭들에 소외받을 수 있으므로, 바람직하지 않은 면이 크다고 볼 수 있다. 아파트 이름도 '서로 잘 알아듣고 소통하기 좋은 우리말'로 많이 만들면 어떨까 싶다"고 조언했습니다.

아파트 이름에 꼭 낯선 외국어, 현란한 외래어를 써야만 집의 가치가 올라가는 건 아닐 겁니다. 친숙한 우리말도 창의적으로 사용한다면 품격 있게 느껴질 수 있을 텐데요. 한글날인 오늘, 빌딩가의 쌀쌀맞은 외국식 작명 대신 정겹고 따뜻한 고향 집의 이름을 떠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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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종대왕도 못 외우겠네”…별별 ‘아파트 이름’의 세계
    • 입력 2022-10-09 08:00:14
    • 수정2022-10-11 10:00:01
    취재K
오늘 ‘한글날’이 제576돌을 맞은 가운데, 한글의 유구한 역사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의 대표 주거 공간인 아파트 이름에는 여전히 한자와 영어 등 외래어가 많이 쓰이고 있다. (사진 출처=게티이미지뱅크, 이해를 돕기 위한 사진으로 기사 내용과 직접 관련 없음)
■ '캐슬(성)'부터 '팰리스(궁전)'까지…"손발이 오그라드네"

"반포 한신아파트, 압구정 현대아파트 할 때가 좋았는데…. 지금은 아파트 이름이 하도 어려워서 택시 기사분들도 모르겠네요. 너무 길어서 네비게이션에 입력하기도 힘들겠고요."

"힐·파크·캐슬에 클래스·팰리스까지…. 심하게 길고 난해해요. 어르신들은 물론 젊은 사람들도 못 외울 정도라니까요. '콩글리쉬' 합성어 자제했으면 좋겠어요. 손발이 오그라들어요."

- 온라인 커뮤니티 네티즌 글 재구성

오늘 10월 9일은 조선시대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사들이 한글을 창제·반포한 것을 기념하는 날, 바로 '한글날'입니다. 1446년 훈민정음(訓民正音)이 반포된 이후 올해 한글날은 576돌을 맞았는데요.

이 같은 한글의 유구한 역사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의 대표 주거 공간인 아파트 이름에는 한자와 영어 등 외래어가 많이 쓰이고 있습니다.

특히 고급스러움을 부각하기 위해 무게감 있는 외국어 단어들을 합성·작명하는 경우가 있는데, 윗부분에 인용한 네티즌 의견처럼 '조어(造語)가 길고 난해해 외우기도 이해하기도 어렵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 타워 팰리스 → 디에이치 퍼스티어 아이파크 → 동탄시범다은마을월드메르디앙반도유보라?

사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몇몇 아파트의 외래어 이름은 우리말이 없어 아쉽기는 해도, 어느 정도 해석이 가능한 편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고급 주상복합 아파트의 대명사인 '타워 팰리스'는 고공(高空)의 저택, 잠실 소재의 '레이크 팰리스'는 인근 석촌호수가 연상되는 식이었죠.

서울 강남구 개포동 소재의 개포시영아파트를 재건축, 2020년 9월 준공된 '래미안 포레스트' 역시, '래미안'(미래 지향적이며(來), 아름답고(美), 편안한(安) 아파트)이라는 한자 브랜드명에 숲을 뜻하는 영단어 '포레스트(Forest)'가 붙은 이름이라 이해가 크게 어렵지는 않았는데요.

고급 아파트의 대명사인 ‘타워 팰리스’와 ‘래미안’. 근래 아파트 이름은 단순 브랜드명 적용에 그치지 않고 지역명, 단지명 등이 포함된 ‘서브 네임’까지 붙어 길고 복잡해지는 경향이 있다. (사진 출처=연합뉴스, 이해를 돕기 위한 사진으로 기사 내용과 직접 관련 없음)
근래에는 건설사마다 아파트의 품격을 더욱 적극적으로 차별화하기 위해 새로운 브랜드명을 고안하면서, 다소 길고 어려워진 이름들이 생겨났습니다. 2024년 초 입주 예정으로 공사가 진행 중인 개포 1단지 아파트 명칭은 '디에이치 퍼스티어 아이파크'로 12자에 달합니다. 둔촌 주공 재건축 아파트인 '올림픽파크 포레온' 역시 명칭 공모 과정에서 '둔촌 올림픽파크 에비뉴포레'가 거론돼, 지명(地名)까지 들어간 12자 이름이 될 뻔했습니다.

지역명·단지명과 외래어 브랜드가 혼합된, 12자를 넘어 18~19자에 이르는 무척 긴 이름의 아파트들도 존재합니다. 경기도 이천 송정동에 위치한 아파트 '이천증포3지구대원칸타빌2차더테라스'는 18자, 화성시 동탄 소재의 아파트 '동탄시범다은마을월드메르디앙반도유보라'는 19자입니다.

길지 않아도 명칭 자체만 놓고 봤을 때, 뜻을 곧바로 유추하기 힘든 브랜드들도 있습니다. 삼성물산의 래미안 시리즈 가운데 '원베일리(One Bailey)'의 베일리는 건축 용어로서 중세 시대 성(城) 중심부에 영주와 가족들이 거주하던 공간으로, '성의 핵심 지역'을 뜻한다고 합니다. '블레스티지(Blesstige)'의 경우 '축복하다'는 의미의 '블레스(Bless)'와 특권·명성 등을 뜻하는 '프레스티지(Prestige)'의 합성어로 '축복받은 특권의 단지'라는 이름인데요.

서울 서초구 반포동 소재 고급 아파트 ‘디에이치 라클라스’ 주 출입문 전경. ‘디에이치’는 ‘단 하나의’ 뜻을 지닌 정관사 ‘디(THE)’와 현대(Hyundai), 하이엔드(High-end), 하이 소사이어티(High Society)를 관통하는 알파벳 ‘H’를 조합한 브랜드명으로 ‘완벽한 프레스티지 라이프를 위한 단 하나의 이름’이라는 뜻이다. (사진 출처=연합뉴스, 이해를 돕기 위한 사진으로 기사 내용과 직접 관련 없음)
현대건설의 디에이치 아너힐즈에서 '디에이치'는 '단 하나의' 뜻을 지닌 정관사 '디(THE)'와 현대(Hyundai), 하이엔드(High-end), 하이 소사이어티(High Society)를 관통하는 알파벳 'H'를 조합한 브랜드명입니다. '완벽한 프레스티지 라이프를 위한 단 하나의 이름'이라는 의미입니다. 뒤에 붙는 '아너힐즈'는 명예를 뜻하는 '아너(Honor)'와 언덕 또는 나지막한 산의 '힐즈(hills)'를 조합한 이름입니다.

■ 입지·자연·공간 특색 강조 '독특한 작명'…옛날에는 '외래어 금지'도

부동산 정보 조사 업체 '부동산인포'에 따르면 2019년 분양된 전국 아파트 이름의 평균 자수(字數)는 9.84자로, 4.2자였던 1990년대보다 두 배 이상 늘었는데요.

건설 업계에서는 이처럼 길고 특별하게 짓는 아파트 이름을 '펫 네임(Pet Name·애칭)'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아파트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고유한 정체성을 부여하고 상징화하는 작명 전략이라는 것이죠. 입지 조건, 자연 경관, 공간 특색 등을 강조하기 위해 추가적으로 붙는 단어들이 늘어나, 독특하면서도 복잡한 이름이 탄생되는 식입니다. 특히 2015년 이후 여러 건설사가 컨소시엄 형태로 공동 시공하는 재개발 붐이 일어남에 따라 각종 브랜드가 뒤섞여 아파트 이름은 말 그대로 '기묘'해졌습니다.

1962년 지어진 서울 마포구 도화동 소재의 ‘마포아파트’. 옛날 아파트 이름은 지금보다 훨씬 짧고 직관적이었다. (사진 출처=KBS ‘명견만리’ 방송 갈무리)
옛날 아파트 이름은 지금보다 훨씬 짧고 직관적이었습니다. 해방 이후 최초로 지은 현대식 아파트, 1958년 준공된 '종암아파트'는 서울 성북구 종암동에 있다고 해서 지명만 간단히 붙여 이름을 지었습니다. 1962년 지어진 마포구 도화동 소재의 아파트 이름도 '마포아파트'로 간결했습니다.

1960~70년대 근대화 시기 수도권을 중심으로 대규모 아파트 건설이 본격화하자, 행정 당국에서는 아파트 이름에 외래어를 쓰지 못하도록 규제를 내리기도 했습니다. 1974년 5월 1일자 『중앙일보』 기사 「아파트 이름 외래어 쓰면」을 보면, 당시 "서울시는 1일 '아파트 명칭 외래어 사용 규제안'을 마련, 아파트 명칭을 외래어로 사용할 경우 건축 허가를 내주지 않기로 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해당 기사는 "시 건축 당국은 시내에 들어선 대부분의 아파트 명칭이 생소한 외래어로 돼 있어 외국의 아파트 같은 느낌을 주고 있다고 밝히고, 이를 규제하기 위해 ▲신축 허가 때 아파트 명칭을 우리나라 말로 정하도록 하고 ▲건축 중인 아파트는 준공 검사 때 이를 규제하며 ▲기존 아파트에 대해서도 명칭을 바꾸도록 권장하기로 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 건설업계 "집값 고려해 '세련되고 차별화된 이름' 선택"

고급 아파트 브랜드들이 대부분 화려하고 웅장한 외래어 위주로 이름을 짓는 상황에서, 소박하면서도 구수한 우리말을 고수하는 아파트도 있습니다. 코오롱글로벌의 '하늘채', 금호건설의 '어울림' 등인데요.

부영주택의 ‘사랑으로’, 금호건설의 ‘어울림’은 외래어 위주인 아파트 이름들 가운데 우리말을 고수하는 브랜드다. (사진 출처=KBS 뉴스 및 유튜브 채널 ‘아파트언박싱 by 직방TV’ 영상 갈무리)
부영주택의 '사랑으로 부영'이 대표적입니다. 1999년부터 2005년까지 '그린 타운'이라는 영문으로 아파트 이름을 지었던 부영은, 2006년 창립 정신인 한글 '사랑으로'를 아파트 브랜드로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습니다. 부영 관계자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사랑으로'는 '사랑으로 지은 집' '사랑이 가득한 집'이라는 뜻으로, 입주민들도 기억하고 부르기 쉬워 현재까지 사용하고 있다"며 "'근사한 영어 이름으로 바꾸면 안 되냐'고 말하는 분도 있지만, 주민 대부분은 지금 이름에 적응해서 만족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물론 아파트 브랜드에 영어 등 외래어를 사용하는 건설사들도 나름의 이유는 있습니다. '조합 등 입주민들이 집값 상승을 고려,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이름을 원하기 때문에, 사측에서 명칭 안(案) 몇 가지를 제시하면 영단어가 조합된 가장 독창적인 이름을 선택한다'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신반포 1차, 2차' 같이 단순 지명만 따서 이름을 지었다면, 2000년대 들어서면서부터는 아파트 건설사들이 고유한 브랜드를 만들기 시작합니다. 브랜드만 놓고 보면 심플한 편이지만, 요새 그 뒤에 붙는 '서브 네임'들은 영어와 불어가 섞이는 등 '정체불명의 조어'가 많은 것이 사실이죠. 이제 입주민들은 과거처럼 어느 동네 1차, 2차 같은 이름을 선호하지 않아요. 조합에서 아파트 이름을 결정할 때도 '다른 곳과 차별화된 단지를 갖고 싶은 입주민의 마음을 대변'해 여러 후보 명칭 가운데 가장 특별한 이름을 고릅니다. " - 대형 아파트 건설사 A 관계자

"아파트 공사 수주를 할 때 조합에서 먼저 '지역에 맞게 고급스러운 외래어로 아파트 이름을 지어 제안해달라'요청하는 경우가 많아요. 결국 그게 아파트 가격과 연결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간단하게 '무슨 아파트' 이렇게만 지으면 되게 싫어하시죠. 아파트 이름에 지명을 넣을 때도, 아현동 소재지만 '아현' 대신 '신촌'을 넣길 원하는 등 '더 세련된 느낌을 주는 지역'을 선호합니다. " - 대형 아파트 건설사 B 관계자

김선철 국립국어원 공공언어과장은 “아파트에 지역명을 넣는 것 자체는 어쩔 수 없더라도, 처음 접하는 어려운 외국어로 브랜드명을 만드는 건 브랜드 가치에도 별로 도움이 안 된다”며 “아파트 이름도 ‘서로 잘 알아듣고 소통하기 좋은 우리말’로 많이 만들면 어떨까 싶다”고 조언했다. (사진 출처=게티이미지뱅크, 이해를 돕기 위한 사진으로 기사 내용과 직접 관련 없음)
■ "'원하는 삶의 모습' 투영…지나친 외국어 사용은 브랜드 가치에도 안 좋아"

채완 동덕여대 국문과 명예교수는 '아파트 이름의 사회적 의미'라는 논문에서 "아파트 상표명은 구매자로 설정된 타깃 계층의 욕망을 구체화한다. 현대 한국인이 원하는 삶의 모습이 투영돼 있는 것"이라며 "로얄, 스위트, 팰리스 같은 단어는 왕족이나 귀족의 거주지라는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이름들은 (과거) '맨션'이 그러했듯이, 모방 작명에 의해 곧 그 차별성을 잃게 된다"고 분석했습니다.

김선철 국립국어원 공공언어과장은 "아파트에 지역명을 넣는 것 자체는 어쩔 수 없더라도, 처음 접하는 어려운 외국어로 브랜드명을 만드는 건 브랜드 가치에도 별로 도움이 안 된다. 일상에서 사용하기 힘들기 때문"이라며 "특히 나이가 어린, 또는 많은 사람들은 언어 생활에서 그런 생소한 명칭들에 소외받을 수 있으므로, 바람직하지 않은 면이 크다고 볼 수 있다. 아파트 이름도 '서로 잘 알아듣고 소통하기 좋은 우리말'로 많이 만들면 어떨까 싶다"고 조언했습니다.

아파트 이름에 꼭 낯선 외국어, 현란한 외래어를 써야만 집의 가치가 올라가는 건 아닐 겁니다. 친숙한 우리말도 창의적으로 사용한다면 품격 있게 느껴질 수 있을 텐데요. 한글날인 오늘, 빌딩가의 쌀쌀맞은 외국식 작명 대신 정겹고 따뜻한 고향 집의 이름을 떠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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