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탐사보도 기자들이 말하다…‘나에게 거짓을 말하지 마라’

입력 2022.10.15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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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권력의 부정·부패 고발 탐사보도 이야기
24명의 저널리스트가 쓴 현대 세계사
탐사보도 기자 존 필저 엮음


※ [주말& 책] 매주 토요일, 책을 소개합니다.

기자가 신문에 광고를 냅니다. 일자리를 구하는 광고였습니다. 독일이 통일되기 전인 과거 서독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외국인, 튼튼함, 일자리 구함, 어떤 일도 좋음, 아주 힘들고 더러운 일도 상관없음, 보수가 적어도 됨, 연락 바람'

1980년대, 귄터 발라프 기자는 독일에서 일하는 이주노동자들이 갖은 차별 속에 보수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현실에 분노합니다. 그는 부조리한 세상을 고발하기 위해 독일의 불법 노동시장에 뛰어들기로 합니다. 일종의 잠입 취재를 계획한 겁니다.

불법과 탈법의 현장을 생생하게 취재하기 위해 자신이 직접 외국인 노동자가 되기로 한 귄터 발라프는 튀르키예 출신의 노동자로 위장합니다. 꼼꼼하게 준비했습니다. 외국인 노동자처럼 보이기 위해 눈동자 색부터 바꾸기로 했습니다. 전문가의 도움을 얻어 밤낮으로 착용할 수 있는 얇고 어두운색의 콘택트렌즈를 만들었고, 이를 착용했습니다. 당시 마흔세 살이었던 그는 젊어 보이기 위해 가발도 썼습니다. 일부러 문장 구조를 바꾸고, 말투도 어눌하게 했습니다. 누가 봐도 외국인 노동자라고 생각할 수 있도록 완벽한 변신을 시도했습니다.

그렇게 '외국인 노동자'가 된 그는 제강공장에서 일하게 됩니다. 독일 땅에서 독일 사람으로 살던 그가 남부 유럽 출신의 외국인 노동자가 된 것인데, 그러자 그의 앞에는 겪어 본 적 없는 끔찍한 세상이 펼쳐졌습니다.

공장의 독일 간부들은 툭 하면 막말을 내뱉었습니다. 인간적인 대우를 기대하기 힘들었습니다. 일터의 환경도 열악했습니다. 작업장에 참을 수 없을 만큼 먼지가 많아 숨을 쉬기도 고통스러웠지만, 작업반장은 신선한 공기가 약간이나마 들어오는 계단참에서 서서 소리치고는 했습니다.

"서둘러라! 그래야 두세 시간 만에 끝내고 좋은 공기를 마실 것 아니냐."

귄터 발라프는 작업용 장갑도 없어서, 쓰레기통이나 폐기물 운반 컨테이너에서 장갑을 구해야 했습니다. 안전모도 지급되지 않았기 때문에 누군가 쓰다가 버린 찌그러진 제품이라도 찾아야 했습니다. 그러지 못하면 자기 돈으로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폭력이나 다름없는 일도 일어났습니다. 작업반장은 두 번이나 '외국인 노동자'인 귄터 발라프의 안전모를 빼앗아서, 안전모가 없는 독일인 노동자에게 주었습니다.

"잠깐만요, 내가 샀어요. 그거 내 거예요."

항의했지만 되돌아온 말은 '분수를 알라'였습니다.

'외국인 노동자' 귄터 발라프가 일했던 회사는 주말 근무, 연속 근무를 일상화했습니다. 북아프리카에서 온 노동자가 쉼 없는 근무에 지쳐서 '나는 로봇이 아니다. 집에 가고 싶다'라는 말을 하자, 그는 바로 해고됐습니다. 그가 일하던 독일 회사는 일자리를 고리 삼아, 외국인 노동자들을 착취하고 있었습니다.

'외국인 노동자'로서 또 다른 독일 사회를 체험한 그는 자신이 겪은 경험을 고스란히 기록에 담아 책을 냈습니다. 귄터 발라프의 책은 발간 5개월도 안 되어서 2백만 부 이상 판매되는 등 독일 출판 시장을 강타했습니다. 정치적 의제를 만들어냈고, 사회 변화도 끌어냈습니다. 발라프가 불법과 탈법을 폭로한 회사는 수사를 받게 됐고, 독일 전역에서 불법 노동을 근절하기 위한 운동이 벌어졌습니다.

책 '나에게 거짓을 말하지 마라'는 귄터 발라프를 비롯해 전 세계 곳곳에서 정치권력과 자본권력의 부정과 부패를 고발해 온 탐사보도 기자들의 기사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책을 엮은 존 필저 또한 호주를 대표하는 탐사보도 기자 가운데 한 명입니다. 원제는 'Tell Me No Lies: Investigative Journalism and Its Triumphs'로 2004년 출간된 책입니다.

나온 지 10년이 넘었지만, 이번에 번역이 돼 한국 독자들을 찾아갑니다. 송요한이 옮겼습니다.

책은 미국의 매카시즘과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 등 여러 역사적 사건과 이슈를 취재한 전 세계 24명 탐사보도 기자들의 다양한 탐사 기사를 전하고 있습니다. 역사적 사건을 취재한 기사를 선보이고 있어 현대 세계사 같은 책이기도 합니다. 책을 엮은 존 필저는 '나에게 거짓을 말하지 마라'의 머리글 말미에 아래와 같이 밝혔습니다.

'나는 이 선집을 훌륭한 동료 저널리스트들에게 바친다. 어느 때보다도 필요한 그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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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상의 탐사보도 기자들이 말하다…‘나에게 거짓을 말하지 마라’
    • 입력 2022-10-15 09:00:08
    취재K
<strong>권력의 부정·부패 고발 탐사보도 이야기</strong><br /><strong>24명의 저널리스트가 쓴 현대 세계사</strong><br /><strong>탐사보도 기자 존 필저 엮음</strong><br />

※ [주말& 책] 매주 토요일, 책을 소개합니다.

기자가 신문에 광고를 냅니다. 일자리를 구하는 광고였습니다. 독일이 통일되기 전인 과거 서독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외국인, 튼튼함, 일자리 구함, 어떤 일도 좋음, 아주 힘들고 더러운 일도 상관없음, 보수가 적어도 됨, 연락 바람'

1980년대, 귄터 발라프 기자는 독일에서 일하는 이주노동자들이 갖은 차별 속에 보수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현실에 분노합니다. 그는 부조리한 세상을 고발하기 위해 독일의 불법 노동시장에 뛰어들기로 합니다. 일종의 잠입 취재를 계획한 겁니다.

불법과 탈법의 현장을 생생하게 취재하기 위해 자신이 직접 외국인 노동자가 되기로 한 귄터 발라프는 튀르키예 출신의 노동자로 위장합니다. 꼼꼼하게 준비했습니다. 외국인 노동자처럼 보이기 위해 눈동자 색부터 바꾸기로 했습니다. 전문가의 도움을 얻어 밤낮으로 착용할 수 있는 얇고 어두운색의 콘택트렌즈를 만들었고, 이를 착용했습니다. 당시 마흔세 살이었던 그는 젊어 보이기 위해 가발도 썼습니다. 일부러 문장 구조를 바꾸고, 말투도 어눌하게 했습니다. 누가 봐도 외국인 노동자라고 생각할 수 있도록 완벽한 변신을 시도했습니다.

그렇게 '외국인 노동자'가 된 그는 제강공장에서 일하게 됩니다. 독일 땅에서 독일 사람으로 살던 그가 남부 유럽 출신의 외국인 노동자가 된 것인데, 그러자 그의 앞에는 겪어 본 적 없는 끔찍한 세상이 펼쳐졌습니다.

공장의 독일 간부들은 툭 하면 막말을 내뱉었습니다. 인간적인 대우를 기대하기 힘들었습니다. 일터의 환경도 열악했습니다. 작업장에 참을 수 없을 만큼 먼지가 많아 숨을 쉬기도 고통스러웠지만, 작업반장은 신선한 공기가 약간이나마 들어오는 계단참에서 서서 소리치고는 했습니다.

"서둘러라! 그래야 두세 시간 만에 끝내고 좋은 공기를 마실 것 아니냐."

귄터 발라프는 작업용 장갑도 없어서, 쓰레기통이나 폐기물 운반 컨테이너에서 장갑을 구해야 했습니다. 안전모도 지급되지 않았기 때문에 누군가 쓰다가 버린 찌그러진 제품이라도 찾아야 했습니다. 그러지 못하면 자기 돈으로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폭력이나 다름없는 일도 일어났습니다. 작업반장은 두 번이나 '외국인 노동자'인 귄터 발라프의 안전모를 빼앗아서, 안전모가 없는 독일인 노동자에게 주었습니다.

"잠깐만요, 내가 샀어요. 그거 내 거예요."

항의했지만 되돌아온 말은 '분수를 알라'였습니다.

'외국인 노동자' 귄터 발라프가 일했던 회사는 주말 근무, 연속 근무를 일상화했습니다. 북아프리카에서 온 노동자가 쉼 없는 근무에 지쳐서 '나는 로봇이 아니다. 집에 가고 싶다'라는 말을 하자, 그는 바로 해고됐습니다. 그가 일하던 독일 회사는 일자리를 고리 삼아, 외국인 노동자들을 착취하고 있었습니다.

'외국인 노동자'로서 또 다른 독일 사회를 체험한 그는 자신이 겪은 경험을 고스란히 기록에 담아 책을 냈습니다. 귄터 발라프의 책은 발간 5개월도 안 되어서 2백만 부 이상 판매되는 등 독일 출판 시장을 강타했습니다. 정치적 의제를 만들어냈고, 사회 변화도 끌어냈습니다. 발라프가 불법과 탈법을 폭로한 회사는 수사를 받게 됐고, 독일 전역에서 불법 노동을 근절하기 위한 운동이 벌어졌습니다.

책 '나에게 거짓을 말하지 마라'는 귄터 발라프를 비롯해 전 세계 곳곳에서 정치권력과 자본권력의 부정과 부패를 고발해 온 탐사보도 기자들의 기사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책을 엮은 존 필저 또한 호주를 대표하는 탐사보도 기자 가운데 한 명입니다. 원제는 'Tell Me No Lies: Investigative Journalism and Its Triumphs'로 2004년 출간된 책입니다.

나온 지 10년이 넘었지만, 이번에 번역이 돼 한국 독자들을 찾아갑니다. 송요한이 옮겼습니다.

책은 미국의 매카시즘과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 등 여러 역사적 사건과 이슈를 취재한 전 세계 24명 탐사보도 기자들의 다양한 탐사 기사를 전하고 있습니다. 역사적 사건을 취재한 기사를 선보이고 있어 현대 세계사 같은 책이기도 합니다. 책을 엮은 존 필저는 '나에게 거짓을 말하지 마라'의 머리글 말미에 아래와 같이 밝혔습니다.

'나는 이 선집을 훌륭한 동료 저널리스트들에게 바친다. 어느 때보다도 필요한 그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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