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블랙리스트 피해자’ 돕겠다더니…‘소송 대비’부터 한 영진위

입력 2022.10.19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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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4월 4일.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실행과 관련해 영화진흥위원회는 기자회견을 열고 대국민 사과를 합니다.

"지난 두 정부(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 관계 당국의 지시를 받아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를 만들고 차별과 배제를 직접 실행한 큰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통렬하게 반성하고 준엄하게 혁신하겠습니다."

-오석근, 당시 영화진흥위원회위원장-

이후 영진위는 '과거사 진상규명 및 쇄신을 위한 특별위원회'(과거사특위)를 출범시키고 진상 조사에 착수했습니다.

하지만 3년 동안 운영된 특위는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한 채 활동을 접었습니다.

이에 영진위는 지난해 12월 '블랙리스트 피해 회복 및 재발 방지를 위한 특별위 원회'(블랙리스트 특위)를 다시 출범시키고 재조사에 들어갔습니다.

영진위가 블랙리스트 실행의 주체였음을 인정하며 대국민 사과까지 했지만, 피해 회복을 위한 노력을 다하지 못했다는 반성에서 새 출발을 한 겁니다.

실제 특위는 첫 번째 업무로 '블랙리스트 피해 사실 인정'을 명시하고 관련 연구를 진행했습니다.


■ 박찬욱, 송강호 등 2,891건 '영화계 블랙리스트' 피해 DB화

KBS는 영진위의 '블랙리스트 피해 인정 연구 보고서'를 입수했습니다.(*개인정보 보호를 위해 비실명 처리했지만, 실제 명단에는 피해자 이름과 사유 등이 모두 기재돼 있습니다)

특위가 확인한 '영화계 블랙리스트' 피해 규모는 2,891건입니다. 현재까지 밝혀진 블랙리스트 증거 자료 등을 종합해 작품과 영화인 개인 피해까지 총망라한 내용을 최초로 데이터베이스(DB)화했습니다.

내용을 보면 '박찬욱 감독과 배우 송강호, 박해일, 김규리, 김여진 씨와 같이 블랙리스트 피해자로 잘 알려진 유명인부터 대중들에게는 낯선 배우들까지 2,577명의 예술인이 사찰 피 해를 받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시국 선언에 참여했거나 문재인·박원순 등 당시 야권 후보를 지지했던 경우, 노무현 전 대통령 지지를 선언하고 문재인 후보 대선 광고를 촬영했던 인물 등이 주요 관리 대상이었습니다.

기존에 일부 밝혀진 블랙리스트 피해 명단이 문체부 진상조사위원회나 소송 과정에서 나온 것이라면, 이번 명단은 영진위 스스로 '영화계 블랙리스트' 피해 사실을 인정했다는데 의미가 있습니다.


특위는 보고서에서 "영진위가 영화인 피해자가 누구인지 최초로 확인하는 작업"이라며 "영화계 블랙리스트 명단에 누가 등재돼 있었는지, 실제로 심사 및 지원에 어떻게 개입했고 어떤 결과를 야기했는지, 그것이 영화인들에게 어떤 손해를 입혔는지와 관련해 최초로 명백히 밝히고 그 피해 회복을 하고자하는 '승인' 과정"이라고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특히 "영진위는 피해 인정 결과에 대해 우선 그 사실을 국민들과 피해자들에게 안내하여야 할 것이며, 실질적인 피해 회복을 위한 대책을 함께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 '피해 지원'한다더니…소송부터 대비?

그런데 3월부터 시작된 연구 보고서가 올해 8월 완성될 무렵 영진위 태도가 돌변합니다.

KBS가 입수한 내부 문건을 보면, 영진위는 보고서가 최종 완성되기도 전에 '법률 자문'부터 의뢰했습니다.

이 법률 자문을 토대로 영진위가 내부 보고한 내용도 입수했습니다.

소송에 불이익을 줄 수 있는 특위의 '연구 보고서' 공개에 우려를 표하며, "대외비가 권장되나 특위의 공개 요구가 강할 것으로 판단되는 만큼 정책적 판단이 필요하고 심의, 의결은 가급적 피해야 한 다"고 결론 내립니다.


결론적으로 특위의 연구보고서 용역 기간이 두 차례 연장되며 보완 작업을 하고 있던 과정에서 영진위는 서둘러 '소송 대비'부터 한 셈입니다.

블랙리스트 피해 지원에 최선을 다하겠다며 스스로 만든 특위의 출범 취지, 그리고 연구 목적과는 완전히 상반되는 행동에 연구에 참여했던 위원들의 반발도 커지고 있습니다.

책임 연구위원으로 참여한 하주희 변호사는 KBS와의 인터뷰에서 "영진위가 연구를 하게 된 것은 본인들이 했던 약속을 지키는 과정이었다"며 "있는 그대로 피해 사실을 밝히고 책임지겠다는 취지였다"고 말했습니다.

'소송 불이익 우려'에 대해선 "영진위가 인정하면 당연히 중요한 자료가 되겠지만 그걸 모르고 시작한 게 아니"라며 "연구 말미에 갑자기 이런 조치를 취한 것은 유 감스럽다"고 밝혔습니다.

■ 영진위 "실무적 검토 차원…공개 시기 미정"

영진위는 법률 검토와 내부 보고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실무적인 검토 차원"이었다고 해명했습니다.

연구 보고서 발간 시점에 대해서는 확답할 수는 없다며 "사실관계 등을 확인하는데 물리적으로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밝혔습니다.

국회 문화체육위원회 민주당 간사인 김윤덕 의원은 "연구 용역을 맡긴 목적은 피해자 입장에서 진상조사를 하고 다시는 블랙리스트 사건과 같은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며 "목적과 전혀 다른 방향의 법률 자문부터 받은 영진위의 태도는 사건을 덮으려는 것으로밖에 볼 수 없다"고 지적했습니다.

김 의원은 영진위의 '블랙리스트 보고 축소' 의혹과 관련해 당 차원의 진상조사 추진을 검토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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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단독] ‘블랙리스트 피해자’ 돕겠다더니…‘소송 대비’부터 한 영진위
    • 입력 2022-10-19 17:25:09
    취재K

2018년 4월 4일.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실행과 관련해 영화진흥위원회는 기자회견을 열고 대국민 사과를 합니다.

"지난 두 정부(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 관계 당국의 지시를 받아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를 만들고 차별과 배제를 직접 실행한 큰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통렬하게 반성하고 준엄하게 혁신하겠습니다."

-오석근, 당시 영화진흥위원회위원장-

이후 영진위는 '과거사 진상규명 및 쇄신을 위한 특별위원회'(과거사특위)를 출범시키고 진상 조사에 착수했습니다.

하지만 3년 동안 운영된 특위는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한 채 활동을 접었습니다.

이에 영진위는 지난해 12월 '블랙리스트 피해 회복 및 재발 방지를 위한 특별위 원회'(블랙리스트 특위)를 다시 출범시키고 재조사에 들어갔습니다.

영진위가 블랙리스트 실행의 주체였음을 인정하며 대국민 사과까지 했지만, 피해 회복을 위한 노력을 다하지 못했다는 반성에서 새 출발을 한 겁니다.

실제 특위는 첫 번째 업무로 '블랙리스트 피해 사실 인정'을 명시하고 관련 연구를 진행했습니다.


■ 박찬욱, 송강호 등 2,891건 '영화계 블랙리스트' 피해 DB화

KBS는 영진위의 '블랙리스트 피해 인정 연구 보고서'를 입수했습니다.(*개인정보 보호를 위해 비실명 처리했지만, 실제 명단에는 피해자 이름과 사유 등이 모두 기재돼 있습니다)

특위가 확인한 '영화계 블랙리스트' 피해 규모는 2,891건입니다. 현재까지 밝혀진 블랙리스트 증거 자료 등을 종합해 작품과 영화인 개인 피해까지 총망라한 내용을 최초로 데이터베이스(DB)화했습니다.

내용을 보면 '박찬욱 감독과 배우 송강호, 박해일, 김규리, 김여진 씨와 같이 블랙리스트 피해자로 잘 알려진 유명인부터 대중들에게는 낯선 배우들까지 2,577명의 예술인이 사찰 피 해를 받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시국 선언에 참여했거나 문재인·박원순 등 당시 야권 후보를 지지했던 경우, 노무현 전 대통령 지지를 선언하고 문재인 후보 대선 광고를 촬영했던 인물 등이 주요 관리 대상이었습니다.

기존에 일부 밝혀진 블랙리스트 피해 명단이 문체부 진상조사위원회나 소송 과정에서 나온 것이라면, 이번 명단은 영진위 스스로 '영화계 블랙리스트' 피해 사실을 인정했다는데 의미가 있습니다.


특위는 보고서에서 "영진위가 영화인 피해자가 누구인지 최초로 확인하는 작업"이라며 "영화계 블랙리스트 명단에 누가 등재돼 있었는지, 실제로 심사 및 지원에 어떻게 개입했고 어떤 결과를 야기했는지, 그것이 영화인들에게 어떤 손해를 입혔는지와 관련해 최초로 명백히 밝히고 그 피해 회복을 하고자하는 '승인' 과정"이라고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특히 "영진위는 피해 인정 결과에 대해 우선 그 사실을 국민들과 피해자들에게 안내하여야 할 것이며, 실질적인 피해 회복을 위한 대책을 함께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 '피해 지원'한다더니…소송부터 대비?

그런데 3월부터 시작된 연구 보고서가 올해 8월 완성될 무렵 영진위 태도가 돌변합니다.

KBS가 입수한 내부 문건을 보면, 영진위는 보고서가 최종 완성되기도 전에 '법률 자문'부터 의뢰했습니다.

이 법률 자문을 토대로 영진위가 내부 보고한 내용도 입수했습니다.

소송에 불이익을 줄 수 있는 특위의 '연구 보고서' 공개에 우려를 표하며, "대외비가 권장되나 특위의 공개 요구가 강할 것으로 판단되는 만큼 정책적 판단이 필요하고 심의, 의결은 가급적 피해야 한 다"고 결론 내립니다.


결론적으로 특위의 연구보고서 용역 기간이 두 차례 연장되며 보완 작업을 하고 있던 과정에서 영진위는 서둘러 '소송 대비'부터 한 셈입니다.

블랙리스트 피해 지원에 최선을 다하겠다며 스스로 만든 특위의 출범 취지, 그리고 연구 목적과는 완전히 상반되는 행동에 연구에 참여했던 위원들의 반발도 커지고 있습니다.

책임 연구위원으로 참여한 하주희 변호사는 KBS와의 인터뷰에서 "영진위가 연구를 하게 된 것은 본인들이 했던 약속을 지키는 과정이었다"며 "있는 그대로 피해 사실을 밝히고 책임지겠다는 취지였다"고 말했습니다.

'소송 불이익 우려'에 대해선 "영진위가 인정하면 당연히 중요한 자료가 되겠지만 그걸 모르고 시작한 게 아니"라며 "연구 말미에 갑자기 이런 조치를 취한 것은 유 감스럽다"고 밝혔습니다.

■ 영진위 "실무적 검토 차원…공개 시기 미정"

영진위는 법률 검토와 내부 보고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실무적인 검토 차원"이었다고 해명했습니다.

연구 보고서 발간 시점에 대해서는 확답할 수는 없다며 "사실관계 등을 확인하는데 물리적으로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밝혔습니다.

국회 문화체육위원회 민주당 간사인 김윤덕 의원은 "연구 용역을 맡긴 목적은 피해자 입장에서 진상조사를 하고 다시는 블랙리스트 사건과 같은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며 "목적과 전혀 다른 방향의 법률 자문부터 받은 영진위의 태도는 사건을 덮으려는 것으로밖에 볼 수 없다"고 지적했습니다.

김 의원은 영진위의 '블랙리스트 보고 축소' 의혹과 관련해 당 차원의 진상조사 추진을 검토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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