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대담] 한말 어등산 의병을 아시나요?

입력 2022.10.24 (19:20) 수정 2022.10.24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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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최근 정진석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일본은 조선왕조와 전쟁을 한 적이 없다라는 글을 올려 논란이 일었습니다.

하지만 한말 호남은 전국 최대 의병 항쟁지였고 그 중심에는 어등산이 있었습니다.

내일은 올해로 13회를 맞는 한말 어등산 의병의 날인데요.

그래서 이슈 대담, 오늘은 어등산 의병 활동과 그 의미에 대해 이야기 나눠보겠습니다.

김갑제 한말 호남의병기념사업회 이사장 나와 계십니다.

어서 오십시오

먼저 정진석 국민의힘 비대위원장 주장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답변]

전형적인 친일 역사관에 근거를 둔 발언이죠.

1895년 명성황후께서 시해되신 이후에 1945년 8월 15일까지 50여 년간 끈질기게 전개돼 왔던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사를 싸그리 부정하는 그런 망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앵커]

내일이 사실 기념일이기도 한데 아직도 어등산 의병 활동에 대해서 모르는 분들도 꽤 계실 것 같아서 간략하게 설명해 주신다면요?

[답변]

먼저 의병에 대한 정의를 내려볼까요.

의병은 나라가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즉 나라가, 군대가 국민을 보호해 주지 못할 때 자기 스스로 일어서서 국가를 건지고자 했던 백성의 군대입니다.

한말 조선 망국기에는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부터 전국에서 의병투쟁이 전개된 이후에 특히 1905년 을사늑약 이후에는 남녀노소 반상 구분 없이 의병에 직접 투신을 했고 또 많은 사람들이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중에서도 한말 호남 의병은 1907년부터 1910년까지 전국의 반일 의병 전쟁을 주도했는데요.

1909년에만 보더라도 약 2만 3천200여 명의 호남 의병이 820여 회의 전투를 일본군과 벌임으로써 전국 반일 의병 전쟁의 60%를 차지할 정도였습니다.

그야말로 결사항전이었죠.

결국 호남 의병을 이대로 두고는 한일 병합을 이룰 수 없다고 판단한 일제는 1909년 9월부터 10월 25일까지 한말 호남의병 말살 작전, 소위 남한 폭도 대토벌 작전을 전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앵커]

간략하게 정리를 하면 한말 의병 활동 가운데 호남 의병의 역할이 가장 두드러졌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중심에는 어등산이 있었잖아요.

어등산이 최대 격전지가 된 배경이 있습니까?

[답변]

거기는 아시다시피 비산비야 지역입니다.

즉 산도 아니고 들도 아닌, 그런 그러나 곡창지대였죠.

그리고 함평, 영광, 광산, 담양, 장성 지역을 아우르는 아주 넓은 지역이에요.

그 앞에는 황룡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기 때문에 일본 군경과 전투에서 치고 빠지기가 아주 쉬웠습니다.

그 다음에 박뫼마을 같은 경우 군수 물자 즉 식량 같은 몇백 명이 식사를 하고 해야 하니까, 군수 물자 지원이 아끼지 않는 등 지역 주민의 협조가 많았기 때문에 최대 격전지가 되고 근거지가 되지 않았나 그렇게 생각합니다.

[앵커]

어등산 일대는 김태원 장군이 전사했던 곳이기도 하고, 이사장께서는 김태원 장군의 후손이기도 하시잖아요.

기념일의 의미가 좀 더 남다르실 것 같아요.

[답변]

저희 할아버지께서는, 죽봉 김태원 장군께서는 1908년 4월 25일에 헌병대, 기마대, 보병대가 함께 이루어 제2 특별순사대와 마을 어등산에서 박뫼마을에서 3시간 동안 전투 끝에 순국하셨습니다.

동생인 청봉 김율 장군께서는 한 달 전에 광산에서 체포됐는데 지금의 구 도청 자리 수협 자리에 일본 헌병대가 있었어요.

거기에 수감돼 계시다가 정말 일본군이 의심을 했어요.

죽봉을 정말 잡았느냐, 그래서 자기 동생을 데리고 가서 시체 확인을 시킨 후에 그 자리에서 총살을 시켰습니다.

저희 할머니는 1919년 3월 1일 나라가 망했으니 내가 살아 있을 이유가 없다 하시면서 자결을 하셨고요.

10살 때 일본에 체포돼서 전기 고문 등 무자비한 고문을 당하셨던 저희 아버지께서는 반신불수가 돼서 비참한 생활을 하시다가 해방 이후에 조사, 빨리 돌아가셨습니다.

아주 피어린 저의 눈물 나는 역사 가족사입니다.

[앵커]

그래서 이제 기념일의 의미가 좀 더 남다르시죠?

[답변]

가슴이 시리죠.

[앵커]

아무래도 어등산에서 시작된 이런 한말 의병 정신이 우리가 지금 흔히 말하는 광주 정신으로 이어진 게 아닐까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답변]

그렇습니다.

그 한말 호남 의병 정신이 3·1 운동을 낳고 3·1운동이 십 년 뒤에 광주학생독립운동을 낳았고 해방 후에는 최초로 전개됐던 4·19혁명, 5·18, 촛불혁명까지 자유를 향한 대장정의 뿌리는 호남 의병 정신에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호남 의병 정신을 국민 정신으로 승화시켜야 한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앵커]

이야기를 저도 쭉 듣다 보니까 어등산 호남 의병 활동이 꼭 기억해야 할 우리의 역사적 중요한 사실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현재 역사적으로 평가나 대우 제대로 받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답변]

얼마나 계란으로 바위치기 싸움이었죠.

그런데도 그들은 싸웠습니다.

어찌 어기 남아가 나라가 망하는 데 이대로 있을 수만 있겠느냐 싸웠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계란으로 바위치기인 것 같았지만 그 정신이 불굴의 독립 정신으로 이어져서 오늘날에 이어졌는데 광주의 경우는 아직 기념관 하나도 없고요.

독립운동 자체를 후손들에게 알려줄만한 그런 기능을 가진 박물관이나 역사관이 한 군데도 없습니다.

그래서 참 씁쓸합니다.

[앵커]

올해 공식 추모제 기념식은 오는 31일로 예정돼 있다고 들었습니다.

행사 잘 치르시고요.

오늘 이야기 여기까지 듣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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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슈대담] 한말 어등산 의병을 아시나요?
    • 입력 2022-10-24 19:20:20
    • 수정2022-10-24 19:48:49
    뉴스7(광주)
[앵커]

최근 정진석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일본은 조선왕조와 전쟁을 한 적이 없다라는 글을 올려 논란이 일었습니다.

하지만 한말 호남은 전국 최대 의병 항쟁지였고 그 중심에는 어등산이 있었습니다.

내일은 올해로 13회를 맞는 한말 어등산 의병의 날인데요.

그래서 이슈 대담, 오늘은 어등산 의병 활동과 그 의미에 대해 이야기 나눠보겠습니다.

김갑제 한말 호남의병기념사업회 이사장 나와 계십니다.

어서 오십시오

먼저 정진석 국민의힘 비대위원장 주장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답변]

전형적인 친일 역사관에 근거를 둔 발언이죠.

1895년 명성황후께서 시해되신 이후에 1945년 8월 15일까지 50여 년간 끈질기게 전개돼 왔던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사를 싸그리 부정하는 그런 망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앵커]

내일이 사실 기념일이기도 한데 아직도 어등산 의병 활동에 대해서 모르는 분들도 꽤 계실 것 같아서 간략하게 설명해 주신다면요?

[답변]

먼저 의병에 대한 정의를 내려볼까요.

의병은 나라가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즉 나라가, 군대가 국민을 보호해 주지 못할 때 자기 스스로 일어서서 국가를 건지고자 했던 백성의 군대입니다.

한말 조선 망국기에는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부터 전국에서 의병투쟁이 전개된 이후에 특히 1905년 을사늑약 이후에는 남녀노소 반상 구분 없이 의병에 직접 투신을 했고 또 많은 사람들이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중에서도 한말 호남 의병은 1907년부터 1910년까지 전국의 반일 의병 전쟁을 주도했는데요.

1909년에만 보더라도 약 2만 3천200여 명의 호남 의병이 820여 회의 전투를 일본군과 벌임으로써 전국 반일 의병 전쟁의 60%를 차지할 정도였습니다.

그야말로 결사항전이었죠.

결국 호남 의병을 이대로 두고는 한일 병합을 이룰 수 없다고 판단한 일제는 1909년 9월부터 10월 25일까지 한말 호남의병 말살 작전, 소위 남한 폭도 대토벌 작전을 전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앵커]

간략하게 정리를 하면 한말 의병 활동 가운데 호남 의병의 역할이 가장 두드러졌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중심에는 어등산이 있었잖아요.

어등산이 최대 격전지가 된 배경이 있습니까?

[답변]

거기는 아시다시피 비산비야 지역입니다.

즉 산도 아니고 들도 아닌, 그런 그러나 곡창지대였죠.

그리고 함평, 영광, 광산, 담양, 장성 지역을 아우르는 아주 넓은 지역이에요.

그 앞에는 황룡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기 때문에 일본 군경과 전투에서 치고 빠지기가 아주 쉬웠습니다.

그 다음에 박뫼마을 같은 경우 군수 물자 즉 식량 같은 몇백 명이 식사를 하고 해야 하니까, 군수 물자 지원이 아끼지 않는 등 지역 주민의 협조가 많았기 때문에 최대 격전지가 되고 근거지가 되지 않았나 그렇게 생각합니다.

[앵커]

어등산 일대는 김태원 장군이 전사했던 곳이기도 하고, 이사장께서는 김태원 장군의 후손이기도 하시잖아요.

기념일의 의미가 좀 더 남다르실 것 같아요.

[답변]

저희 할아버지께서는, 죽봉 김태원 장군께서는 1908년 4월 25일에 헌병대, 기마대, 보병대가 함께 이루어 제2 특별순사대와 마을 어등산에서 박뫼마을에서 3시간 동안 전투 끝에 순국하셨습니다.

동생인 청봉 김율 장군께서는 한 달 전에 광산에서 체포됐는데 지금의 구 도청 자리 수협 자리에 일본 헌병대가 있었어요.

거기에 수감돼 계시다가 정말 일본군이 의심을 했어요.

죽봉을 정말 잡았느냐, 그래서 자기 동생을 데리고 가서 시체 확인을 시킨 후에 그 자리에서 총살을 시켰습니다.

저희 할머니는 1919년 3월 1일 나라가 망했으니 내가 살아 있을 이유가 없다 하시면서 자결을 하셨고요.

10살 때 일본에 체포돼서 전기 고문 등 무자비한 고문을 당하셨던 저희 아버지께서는 반신불수가 돼서 비참한 생활을 하시다가 해방 이후에 조사, 빨리 돌아가셨습니다.

아주 피어린 저의 눈물 나는 역사 가족사입니다.

[앵커]

그래서 이제 기념일의 의미가 좀 더 남다르시죠?

[답변]

가슴이 시리죠.

[앵커]

아무래도 어등산에서 시작된 이런 한말 의병 정신이 우리가 지금 흔히 말하는 광주 정신으로 이어진 게 아닐까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답변]

그렇습니다.

그 한말 호남 의병 정신이 3·1 운동을 낳고 3·1운동이 십 년 뒤에 광주학생독립운동을 낳았고 해방 후에는 최초로 전개됐던 4·19혁명, 5·18, 촛불혁명까지 자유를 향한 대장정의 뿌리는 호남 의병 정신에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호남 의병 정신을 국민 정신으로 승화시켜야 한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앵커]

이야기를 저도 쭉 듣다 보니까 어등산 호남 의병 활동이 꼭 기억해야 할 우리의 역사적 중요한 사실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현재 역사적으로 평가나 대우 제대로 받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답변]

얼마나 계란으로 바위치기 싸움이었죠.

그런데도 그들은 싸웠습니다.

어찌 어기 남아가 나라가 망하는 데 이대로 있을 수만 있겠느냐 싸웠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계란으로 바위치기인 것 같았지만 그 정신이 불굴의 독립 정신으로 이어져서 오늘날에 이어졌는데 광주의 경우는 아직 기념관 하나도 없고요.

독립운동 자체를 후손들에게 알려줄만한 그런 기능을 가진 박물관이나 역사관이 한 군데도 없습니다.

그래서 참 씁쓸합니다.

[앵커]

올해 공식 추모제 기념식은 오는 31일로 예정돼 있다고 들었습니다.

행사 잘 치르시고요.

오늘 이야기 여기까지 듣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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