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원’이 된 경비원…갑질방지법 1년, 변화는 더뎠다
입력 2022.10.25 (11:40)
수정 2022.10.25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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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모 씨(가명)는 2년 전까지 보석 부속품을 납품하는 공장의 사장님이었습니다. 코로나19로 업황이 나빠져 공장을 접어야 했습니다.
그리고는 서울 중랑구의 K 아파트 경비원으로 재취업했습니다. 낯선 새 직장이었지만 특유의 근면 성실함으로 두 달 만에 '반장'이 되기도 했습니다.
김 씨는 다른 동료들, 관리소장은 물론 다른 입주민들과도 사이가 좋았습니다.
■ "나이 처먹고, 뭘 한 게 있어?"
하지만, 김 씨는 지난달 이 일을 그만뒀습니다. 두 달 전 겪은 '충격' 때문입니다.
지난 8월, 술에 취해 귀가하는 입주민을 도와주다 30분 넘게 폭언을 들었습니다. 김 씨가 들려준 녹음 파일엔 아래와 같은 폭언이 생생히 들어 있었습니다.
"당신 뭐하는 거야 누구 월급 받아, 내 월급 받아 안 받아, 내가 ×× 갑질하는 거야? ×××가 이거 진짜 나이 X먹고…니가 경비로서 그러면 뭘 한 게 있어?" - 김 씨가 입주민에게 들은 폭언 |
목덜미 부위를 짓눌리는 폭행도 당했습니다. 한순간에 살아온 인생을 부정당한 것 같았습니다.
해당 입주민은 관리소장까지 괴롭혔습니다. 자신이 쏟아낸 폭언이 문제가 될까 봐 문제를 무마하라고 관리사무소 측을 압박한 겁니다.
"(가해 입주민이) 빨리 합의를 하라는 등, 동대표 회장 한테도 문자 보내고 소장한테도 문자 보내...너무 스트레스 받아서 도저히 있지를 못하겠더라고요." - 피해 경비원 김 씨 |
지난해 개정된 산업안전보건법 제41조는 경비원이 '제3자의 폭언'에 시달릴 경우 사업주가 보호조치를 하도록 명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김 씨는 아무 보호조치를 받을 수 없었습니다.
'사업주', 즉 용역업체나 관리사무소도 입주민 입김 앞에 힘없는 '을'이었기 때문입니다.
"입주민분들이 직접 고용주는 아니라고 하지만... 저희도 동대표나 입김이 있는 입주민들이 불만을 얘기하면 교체도 될 수 있고…" - K 아파트 관리소장 "어느 회사라면 사장을 통해 얘기하는데 이건 주민을 상대로 하기 때문에 쉽게 어떤 행동하기 참 힘든 부분이야... 관리소장도 을이야, 우리보다 더 을." - 관리원 박 모 씨(가명) |
김 씨는 결국 K 아파트를 스스로 그만뒀습니다.
■ 주차 시키지 말랬더니, 정작 바뀐 건…
폭언과 함께 경비원들을 고질적으로 괴롭혀 온 건 '잡일'입니다. 경비 업무와 무관한 가욋일을 시키는 거죠. 가장 대표적인 게 대리주차입니다.
대리주차 문제가 가장 도드라진 곳은 서울시 강남구 압구정동의 한 아파트입니다. 지역의 랜드마크급 아파트이자 주차난으로 악명높은 곳입니다.
현장에서 가장 눈에 띈 변화는 호칭이었습니다. 이 아파트는 '경비원' 이 아니라 '관리원'이라고 부르고 있었습니다.
경비원이 아닌 관리원이 된 이후 뭐가 달라졌냐고 물었습니다. 돌아온 답은 '그대로다' 였습니다.
"경비원에서 관리자라는 이름 석 자로 바뀌었을 뿐이지 어떤 그 처우나 이런 건 아무 관계가 없어요" -관리원 박 모 씨 "우리가 관리원이라고 소개해도 입주민분들은 아직 경비라고…" -관리원 최 모 씨 |
그렇다면, 굳이 호칭을 바꾼 이유는 뭘까. '대리주차'를 포기하기 싫었기 때문입니다. 법으로 경비원의 대리주차를 금지했더니 아파트 측은 이들의 신분을 '관리원'으로 바꿔 주차 업무를 지속한 겁니다.
더 이상 경비원이 아니라 일반 근로자인 셈이니 '무슨 일이든' 시킬 수 있게 된 겁니다. 대리 주차는 물론 택배 상자 배달, 집안 허드렛일까지 다 가능한 상황입니다.
반면, 관리원이 되면 장점도 있습니다. 일반 근로자이기 떄문에 휴게 시간을 보장받아야 하고 주 52시간을 초과해서 근무해선 안 됩니다.
그런데 또, 이런 제한 조치는 사실상 사문화 돼 있다고 합니다. '무늬만' 관리원인 셈입니다.
"출퇴근 시간 제일 바쁜데, 여기 같이 있으면서 휴게시간이라고 못합니다, 그럴 수 있겠어요?" - 관리원 정 모 씨 "23시 30분부터 6시까지 휴식시간이고 자는 건데, 차 빼달라면 빼줘야지..." - 관리원 박 모 씨 |
■ 경비원 갑질방지법 1년 지났지만…
2년 전, 경비원 故 최희석 씨는 입주민의 갑질과 폭행을 견디다 숨졌습니다. 그의 절절한 음성 유서는 사회에 큰 충격을 줬습니다.
그 뒤 대책 논의가 시작됐고, 이른바 '경비원 갑질방지법'이 시행됐습니다. 시행일은 지난해 10월 21일, 이제 1년이 좀 지났습니다.
본래 업무 말고 대리 주차나 택배 배달 같은 잡무를 시키면 안 되고 어기면 과태료가 최대 1,000만 원입니다.
국토교통부 "업무범위가 현실에 맞게 정비됨에 따라 경비원의 처우개선은 물론 고용안정에도 도움이 될 것" - 공동주택관리법 시행령 제69조의2(2021.10.21.시행) 고용노동부 "경비원도 폭언으로부터 보호 대상이 될 수 있다" - 산업안전보건법 제41조(2021.10.14. 시행) |
하지만 위 사례에서 보듯 현실의 변화는 매우 더딥니다. 법을 피해 가는 각종 꼼수에 경비원들의 고통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서울노동권익센터에 접수된 '경비원' 갑질 상담 건수는 지난해 293건에서 올해 553건으로(1~9월 동기간 비교) 증가했는데, 이 중 폭언·폭행 괴롭힘 상담은 10건에서 25건으로 두 배 이상 증가했습니다.
갑질 피해 상담은 늘어난 반면, '방지법'들을 근거로 이뤄진 처벌 사례는 좀처럼 찾기 어렵습니다. 현장 경비 노동자와 노조 관계자는 피해 신고는 물론 노조 가입조차 어려운 3개월 초단기 계약 구조를 지적합니다.
"(갑질 당해도) 신고를 못 하죠. 바로 쫓겨나는데요. 단기계약을 해 가지고 석 달이면 계약 안 하려고 하는데…" - 경비원 나 모 씨 "입주자 대표들이 만약에 노동조합에 가입하게 되면 너희를 다음 계약 만료 때 더 이상 연장해 주지 않겠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는 경우도 있고요." - 전국민주일반노동조합 조직차장 정의석(경비노조) |
■ "이 나이에 일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한 거지"
경비원의 열악한 고용환경의 근본에는 노인 빈곤의 문제가 있습니다.
현장에서 수많은 경비 노동자들은 입을 모아 말했습니다. "이 나이에 일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한 거지"라고….
감사하게도 그 나이에 일할 수 있게 해 줬으니 경비원은 폭언과 갑질은 감수해야 하는 걸까요.
경비원 갑질방지법 1년, 변화는 매우 더딥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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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리원’이 된 경비원…갑질방지법 1년, 변화는 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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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2022-10-25 11:40:06
- 수정2022-10-25 11:40:59
김 모 씨(가명)는 2년 전까지 보석 부속품을 납품하는 공장의 사장님이었습니다. 코로나19로 업황이 나빠져 공장을 접어야 했습니다.
그리고는 서울 중랑구의 K 아파트 경비원으로 재취업했습니다. 낯선 새 직장이었지만 특유의 근면 성실함으로 두 달 만에 '반장'이 되기도 했습니다.
김 씨는 다른 동료들, 관리소장은 물론 다른 입주민들과도 사이가 좋았습니다.
■ "나이 처먹고, 뭘 한 게 있어?"
하지만, 김 씨는 지난달 이 일을 그만뒀습니다. 두 달 전 겪은 '충격' 때문입니다.
지난 8월, 술에 취해 귀가하는 입주민을 도와주다 30분 넘게 폭언을 들었습니다. 김 씨가 들려준 녹음 파일엔 아래와 같은 폭언이 생생히 들어 있었습니다.
"당신 뭐하는 거야 누구 월급 받아, 내 월급 받아 안 받아, 내가 ×× 갑질하는 거야? ×××가 이거 진짜 나이 X먹고…니가 경비로서 그러면 뭘 한 게 있어?" - 김 씨가 입주민에게 들은 폭언 |
목덜미 부위를 짓눌리는 폭행도 당했습니다. 한순간에 살아온 인생을 부정당한 것 같았습니다.
해당 입주민은 관리소장까지 괴롭혔습니다. 자신이 쏟아낸 폭언이 문제가 될까 봐 문제를 무마하라고 관리사무소 측을 압박한 겁니다.
"(가해 입주민이) 빨리 합의를 하라는 등, 동대표 회장 한테도 문자 보내고 소장한테도 문자 보내...너무 스트레스 받아서 도저히 있지를 못하겠더라고요." - 피해 경비원 김 씨 |
지난해 개정된 산업안전보건법 제41조는 경비원이 '제3자의 폭언'에 시달릴 경우 사업주가 보호조치를 하도록 명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김 씨는 아무 보호조치를 받을 수 없었습니다.
'사업주', 즉 용역업체나 관리사무소도 입주민 입김 앞에 힘없는 '을'이었기 때문입니다.
"입주민분들이 직접 고용주는 아니라고 하지만... 저희도 동대표나 입김이 있는 입주민들이 불만을 얘기하면 교체도 될 수 있고…" - K 아파트 관리소장 "어느 회사라면 사장을 통해 얘기하는데 이건 주민을 상대로 하기 때문에 쉽게 어떤 행동하기 참 힘든 부분이야... 관리소장도 을이야, 우리보다 더 을." - 관리원 박 모 씨(가명) |
김 씨는 결국 K 아파트를 스스로 그만뒀습니다.
■ 주차 시키지 말랬더니, 정작 바뀐 건…
폭언과 함께 경비원들을 고질적으로 괴롭혀 온 건 '잡일'입니다. 경비 업무와 무관한 가욋일을 시키는 거죠. 가장 대표적인 게 대리주차입니다.
대리주차 문제가 가장 도드라진 곳은 서울시 강남구 압구정동의 한 아파트입니다. 지역의 랜드마크급 아파트이자 주차난으로 악명높은 곳입니다.
현장에서 가장 눈에 띈 변화는 호칭이었습니다. 이 아파트는 '경비원' 이 아니라 '관리원'이라고 부르고 있었습니다.
경비원이 아닌 관리원이 된 이후 뭐가 달라졌냐고 물었습니다. 돌아온 답은 '그대로다' 였습니다.
"경비원에서 관리자라는 이름 석 자로 바뀌었을 뿐이지 어떤 그 처우나 이런 건 아무 관계가 없어요" -관리원 박 모 씨 "우리가 관리원이라고 소개해도 입주민분들은 아직 경비라고…" -관리원 최 모 씨 |
그렇다면, 굳이 호칭을 바꾼 이유는 뭘까. '대리주차'를 포기하기 싫었기 때문입니다. 법으로 경비원의 대리주차를 금지했더니 아파트 측은 이들의 신분을 '관리원'으로 바꿔 주차 업무를 지속한 겁니다.
더 이상 경비원이 아니라 일반 근로자인 셈이니 '무슨 일이든' 시킬 수 있게 된 겁니다. 대리 주차는 물론 택배 상자 배달, 집안 허드렛일까지 다 가능한 상황입니다.
반면, 관리원이 되면 장점도 있습니다. 일반 근로자이기 떄문에 휴게 시간을 보장받아야 하고 주 52시간을 초과해서 근무해선 안 됩니다.
그런데 또, 이런 제한 조치는 사실상 사문화 돼 있다고 합니다. '무늬만' 관리원인 셈입니다.
"출퇴근 시간 제일 바쁜데, 여기 같이 있으면서 휴게시간이라고 못합니다, 그럴 수 있겠어요?" - 관리원 정 모 씨 "23시 30분부터 6시까지 휴식시간이고 자는 건데, 차 빼달라면 빼줘야지..." - 관리원 박 모 씨 |
■ 경비원 갑질방지법 1년 지났지만…
2년 전, 경비원 故 최희석 씨는 입주민의 갑질과 폭행을 견디다 숨졌습니다. 그의 절절한 음성 유서는 사회에 큰 충격을 줬습니다.
그 뒤 대책 논의가 시작됐고, 이른바 '경비원 갑질방지법'이 시행됐습니다. 시행일은 지난해 10월 21일, 이제 1년이 좀 지났습니다.
본래 업무 말고 대리 주차나 택배 배달 같은 잡무를 시키면 안 되고 어기면 과태료가 최대 1,000만 원입니다.
국토교통부 "업무범위가 현실에 맞게 정비됨에 따라 경비원의 처우개선은 물론 고용안정에도 도움이 될 것" - 공동주택관리법 시행령 제69조의2(2021.10.21.시행) 고용노동부 "경비원도 폭언으로부터 보호 대상이 될 수 있다" - 산업안전보건법 제41조(2021.10.14. 시행) |
하지만 위 사례에서 보듯 현실의 변화는 매우 더딥니다. 법을 피해 가는 각종 꼼수에 경비원들의 고통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서울노동권익센터에 접수된 '경비원' 갑질 상담 건수는 지난해 293건에서 올해 553건으로(1~9월 동기간 비교) 증가했는데, 이 중 폭언·폭행 괴롭힘 상담은 10건에서 25건으로 두 배 이상 증가했습니다.
갑질 피해 상담은 늘어난 반면, '방지법'들을 근거로 이뤄진 처벌 사례는 좀처럼 찾기 어렵습니다. 현장 경비 노동자와 노조 관계자는 피해 신고는 물론 노조 가입조차 어려운 3개월 초단기 계약 구조를 지적합니다.
"(갑질 당해도) 신고를 못 하죠. 바로 쫓겨나는데요. 단기계약을 해 가지고 석 달이면 계약 안 하려고 하는데…" - 경비원 나 모 씨 "입주자 대표들이 만약에 노동조합에 가입하게 되면 너희를 다음 계약 만료 때 더 이상 연장해 주지 않겠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는 경우도 있고요." - 전국민주일반노동조합 조직차장 정의석(경비노조) |
■ "이 나이에 일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한 거지"
경비원의 열악한 고용환경의 근본에는 노인 빈곤의 문제가 있습니다.
현장에서 수많은 경비 노동자들은 입을 모아 말했습니다. "이 나이에 일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한 거지"라고….
감사하게도 그 나이에 일할 수 있게 해 줬으니 경비원은 폭언과 갑질은 감수해야 하는 걸까요.
경비원 갑질방지법 1년, 변화는 매우 더딥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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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다예 기자 allyes@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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