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분에 한번씩 전화해줘” 딸에게 부탁하는 이유는

입력 2022.10.26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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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숙 씨는 매일 낯선 집에 들어가야 합니다. 가스레인지 등에 설치된 밸브를 점검해 가스가 새는지 등을 확인하는 가스검침원이기 때문입니다.

김 씨는 올 여름, 악몽 같은 일을 겪었습니다. 한 집에 점검차 들렀는데, 알몸 상태인 고객과 마주친 겁니다.

고객이 바닥에 앉아 계시더라고요. 그런데 윗옷은 입고 계셨는데, 바지랑 팬티는 안 입고 계셨어요. '들어와' 그러시더라고요. 너무 소스라치게 놀라서 도망갔어요.
-김윤숙/가스점검원

놀라운 건 처음이 아니란 사실입니다. 자주 있는 일이라고 합니다.

과거에도 수차례 '알몸' 상태인 고객과 마주쳤고, 점검 내내 따라다니며 부적절한 신체 접촉을 하는 고객도 있었다고 했습니다.


고객이 알몸으로 나오셨어요. 저한테 욕을 퍼부으면서 왜 와서 시끄럽게 하냐고 그러더라고요. 그때 어떻게 해야 될지도 모르고 그냥 얼음인 상태가 돼버렸어요.
-김윤숙/가스점검원

■ "엄마 여기 들어가니 1분에 한 번씩 전화 좀 해줘"

올해로 19년 차 가스점검원 박 모 씨(가명)는 2년 전 더한 일을 겪었습니다. 아예 감금을 당했습니다.

집에 있던 고객은 갑자기 화를 내며 박 씨를 못 나가게 잡아뒀습니다. 박 씨가 점검 확인용 사진을 찍은 뒤였습니다.

"점검했다는 증거로 가스레인지 좀 찍고 갈게요 그랬더니, 화를 내면서 현관문을 잡는 거예요. 기분 나쁘게 남의 집을 왜 찍냐고."
- 박 모 씨/가스점검원

감금은 20분 넘게 이어졌습니다. 나가게 해달라고 사정했지만, 그는 문을 열어주지 않았습니다.

결국 박 씨는 찍어둔 사진을 전부 삭제하고, 경찰에 신고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뒤에야 그 집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무서워 가지고 막 빌었어요. 제발 문 좀 열어달라고. 제가 잘못했으니까 문 열어 주시라고. 이것도 지우고 다 지울 테니까 문 좀 열어주시면 제가 여기 안 오겠다고."
-박 모 씨/가스점검원

2년 전 일이지만, 박 씨는 여전히 그날의 공포가 생생합니다.

그 뒤 무서운 집에 방문할 때면 딸에게 미리 전화를 걸고, "1분마다 전화해달라"고 부탁하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자신을 지킬 뾰족한 수가 없으니, 가족에게라도 의지하는 겁니다.

■ SOS 눌렀는데 1시간 뒤에 확인 전화

가스점검원은 대표적인 '가구 방문 노동자'입니다. 택배 기사, 우체부, 음식 배달원 등 여러 방문 노동자가 있지만, 점검원은 '한 발 더' 들어갑니다.

직접 집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집 안에 누가 사는지 모르는 채 들어가야 합니다. 그야말로 '깜깜이'입니다. 각종 범죄에 상시 노출돼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런 특성을 감안하면, 안전 대책은 훨씬 꼼꼼해야 할 텐데,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일단, 도시가스 회사가 안전 대책이라고 시행 중인 'SOS 신고 시스템'부터 허술하기 짝이 없습니다.

실제로 취재진이 이틀간 점검원 2명과 동행하며 SOS 단추를 눌러봤더니, 한 시간 뒤에나 확인 연락이 오는 곳도 있었습니다.


(SOS 단추를 눌러도) 한참 뒤에, 몇 시간 흘러서 '잘못 눌렀지?' 그렇게 전화가 오고. 긴급하게 눌렀을 때 빠르게 답이 온 적은 별로 없었던 거 같아요.
-김윤숙/가스점검원

■ "성범죄자 정보라도 알려줬으면..."

점검하러 들어간 집에 전자발찌를 찬 성범죄자가 거주하고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전 정보제공이나 고지는 전혀 없습니다.

"동료가 점검을 갔을 때 발에 전자발찌 그걸 하고 있었던 집도 간 거예요. 성범죄자 정보를 주면 우리가 마음을 가다듬고 신경 써서 갈 수 있지 않겠느냐."
-김윤숙/가스점검원

이런 일이 벌어지다 보니, 점검원들은 안전을 위해 성범죄자 정보를 사전에 알려달라고 요구합니다.


회사는 '개인정보'라는 이유로 불가능하다는 입장이고, 이를 강제하기 위한 제도도 전혀 없는 상태입니다.

성범죄자 정보는 저희한테 좀 알려줬으면 좋겠어요. 그분이 몇 번지에, 어디어디에 사신다. 어떤 전과가 있다. 이런 것만 알려주셔도 저희는 안심하고 들어갈 것 같아요.
- 박 모 씨/가스점검원

결국 '성범죄자 알림e'에 접속해 자신이 담당하는 지역에 성범죄자가 거주하는지 일일이 확인하는 수밖에 없는데, 이마저도 정확한 동 호수는 나오지 않는 한계가 있습니다.

점검원들이 요구하는 '2인 1조 근무'는 논의 테이블에서 아예 배제되고 있습니다. 비용이 늘어난다는 이유에서입니다.

전국의 가스점검원은 5천 6백여 명, 그중 99%가 여성입니다. 모두의 안전을 책임지는 가스 점검원들. 그들의 안전도 지켜줘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픽 제작: 김서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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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분에 한번씩 전화해줘” 딸에게 부탁하는 이유는
    • 입력 2022-10-26 07:00:15
    취재K

김윤숙 씨는 매일 낯선 집에 들어가야 합니다. 가스레인지 등에 설치된 밸브를 점검해 가스가 새는지 등을 확인하는 가스검침원이기 때문입니다.

김 씨는 올 여름, 악몽 같은 일을 겪었습니다. 한 집에 점검차 들렀는데, 알몸 상태인 고객과 마주친 겁니다.

고객이 바닥에 앉아 계시더라고요. 그런데 윗옷은 입고 계셨는데, 바지랑 팬티는 안 입고 계셨어요. '들어와' 그러시더라고요. 너무 소스라치게 놀라서 도망갔어요.
-김윤숙/가스점검원

놀라운 건 처음이 아니란 사실입니다. 자주 있는 일이라고 합니다.

과거에도 수차례 '알몸' 상태인 고객과 마주쳤고, 점검 내내 따라다니며 부적절한 신체 접촉을 하는 고객도 있었다고 했습니다.


고객이 알몸으로 나오셨어요. 저한테 욕을 퍼부으면서 왜 와서 시끄럽게 하냐고 그러더라고요. 그때 어떻게 해야 될지도 모르고 그냥 얼음인 상태가 돼버렸어요.
-김윤숙/가스점검원

■ "엄마 여기 들어가니 1분에 한 번씩 전화 좀 해줘"

올해로 19년 차 가스점검원 박 모 씨(가명)는 2년 전 더한 일을 겪었습니다. 아예 감금을 당했습니다.

집에 있던 고객은 갑자기 화를 내며 박 씨를 못 나가게 잡아뒀습니다. 박 씨가 점검 확인용 사진을 찍은 뒤였습니다.

"점검했다는 증거로 가스레인지 좀 찍고 갈게요 그랬더니, 화를 내면서 현관문을 잡는 거예요. 기분 나쁘게 남의 집을 왜 찍냐고."
- 박 모 씨/가스점검원

감금은 20분 넘게 이어졌습니다. 나가게 해달라고 사정했지만, 그는 문을 열어주지 않았습니다.

결국 박 씨는 찍어둔 사진을 전부 삭제하고, 경찰에 신고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뒤에야 그 집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무서워 가지고 막 빌었어요. 제발 문 좀 열어달라고. 제가 잘못했으니까 문 열어 주시라고. 이것도 지우고 다 지울 테니까 문 좀 열어주시면 제가 여기 안 오겠다고."
-박 모 씨/가스점검원

2년 전 일이지만, 박 씨는 여전히 그날의 공포가 생생합니다.

그 뒤 무서운 집에 방문할 때면 딸에게 미리 전화를 걸고, "1분마다 전화해달라"고 부탁하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자신을 지킬 뾰족한 수가 없으니, 가족에게라도 의지하는 겁니다.

■ SOS 눌렀는데 1시간 뒤에 확인 전화

가스점검원은 대표적인 '가구 방문 노동자'입니다. 택배 기사, 우체부, 음식 배달원 등 여러 방문 노동자가 있지만, 점검원은 '한 발 더' 들어갑니다.

직접 집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집 안에 누가 사는지 모르는 채 들어가야 합니다. 그야말로 '깜깜이'입니다. 각종 범죄에 상시 노출돼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런 특성을 감안하면, 안전 대책은 훨씬 꼼꼼해야 할 텐데,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일단, 도시가스 회사가 안전 대책이라고 시행 중인 'SOS 신고 시스템'부터 허술하기 짝이 없습니다.

실제로 취재진이 이틀간 점검원 2명과 동행하며 SOS 단추를 눌러봤더니, 한 시간 뒤에나 확인 연락이 오는 곳도 있었습니다.


(SOS 단추를 눌러도) 한참 뒤에, 몇 시간 흘러서 '잘못 눌렀지?' 그렇게 전화가 오고. 긴급하게 눌렀을 때 빠르게 답이 온 적은 별로 없었던 거 같아요.
-김윤숙/가스점검원

■ "성범죄자 정보라도 알려줬으면..."

점검하러 들어간 집에 전자발찌를 찬 성범죄자가 거주하고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전 정보제공이나 고지는 전혀 없습니다.

"동료가 점검을 갔을 때 발에 전자발찌 그걸 하고 있었던 집도 간 거예요. 성범죄자 정보를 주면 우리가 마음을 가다듬고 신경 써서 갈 수 있지 않겠느냐."
-김윤숙/가스점검원

이런 일이 벌어지다 보니, 점검원들은 안전을 위해 성범죄자 정보를 사전에 알려달라고 요구합니다.


회사는 '개인정보'라는 이유로 불가능하다는 입장이고, 이를 강제하기 위한 제도도 전혀 없는 상태입니다.

성범죄자 정보는 저희한테 좀 알려줬으면 좋겠어요. 그분이 몇 번지에, 어디어디에 사신다. 어떤 전과가 있다. 이런 것만 알려주셔도 저희는 안심하고 들어갈 것 같아요.
- 박 모 씨/가스점검원

결국 '성범죄자 알림e'에 접속해 자신이 담당하는 지역에 성범죄자가 거주하는지 일일이 확인하는 수밖에 없는데, 이마저도 정확한 동 호수는 나오지 않는 한계가 있습니다.

점검원들이 요구하는 '2인 1조 근무'는 논의 테이블에서 아예 배제되고 있습니다. 비용이 늘어난다는 이유에서입니다.

전국의 가스점검원은 5천 6백여 명, 그중 99%가 여성입니다. 모두의 안전을 책임지는 가스 점검원들. 그들의 안전도 지켜줘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픽 제작: 김서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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