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아 작가 “아버지를 조금씩 알아가는 이야기”

입력 2022.10.29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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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정지아 작가의 장편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
'빨치산이 아닌 아버지 얘기'
장례 치르며 만나는 아버지의 여러 인연
'나는 아버지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 [주말& 책] 매주 토요일, 책을 소개합니다.

자연을 상징하는 녹색을 배경으로 집이 있고, 나무가 있습니다. 조금 떨어져서 백발의 머리로 자전거를 타는 사람이 보입니다. 허리를 편 채로 꼿꼿하게 안장에 앉아 자전거를 몰고 어딘가를 향해 갑니다. 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의 책 표지는 이처럼 평화롭고 한적한 풍경을 담고 있습니다.


소설의 표지 디자인만 보면 전원생활의 체험담을 들려주는 정감 있고 따스한 분위기의 수필집 같아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작품이 다루는 내용과 소재는 가볍지 않습니다. 첫 문장도 아버지의 죽음을 전하는 얘기로 시작합니다.

아버지가 죽었다.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평생을 정색하고 살아온 아버지가···
('아버지의 해방일지' 7쪽)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을 떠난 소설 속 화자인 '나'의 아버지는 달랐습니다. 아버지는 전직 빨치산이었습니다. 지리산에서 활동하다 검거돼 감옥에도 갔던 빨치산이었습니다. 소설은 아버지의 빨치산 시절에 대해 구체적으로 묘사하지는 않습니다. 나는 아버지의 빨치산 시절이 어떠했는지, 아버지가 왜 평생을 사회주의자로 살았던 것인지, 아버지가 아버지의 인생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했습니다. 아버지가 평생토록 한 길만을 고집했다는 점만큼은 뚜렷했습니다. 그 결과, 나는 힘든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고 성인이 되어서도 하루하루 버텨내며 살아가기 바빴습니다. 그러니, 무엇인가 억울한 기분이 드는 것도 당연했습니다.

아버지는 선택이라도 했지, 나는 무엇도 선택하지 않았다. 나는 빨갱이가 되기로 선택하지 않았고, 빨갱이의 딸로 태어나겠다 선택하지도 않았다. 태어나보니 가난한 빨갱이의 딸이었을 뿐이다. 선택할 수 있다면 누군들 빨갱이의 딸을 선택하겠는가.
('아버지의 해방일지' 76쪽)

빨치산 아버지는 일가친척에게도 짐이 되고는 했습니다. 과거 연좌제가 있던 시절, 사촌 오빠는 육사에 합격하고도 신원조회에 걸려 입학하지 못합니다. 사실상 집안 모두가 알게 모르게 빨치산 아버지의 존재로 인해 크고 작은 영향을 받았던 겁니다. 소설의 화자인 '나'는 얘기합니다.

빨갱이의 딸인 나는 오빠를 생각할 때마다 죄를 지은 느낌이었다. 빨갱이의 딸인 나보다 빨갱이의 조카인 오빠가 견뎌야 했을 인생이 더 억울할 것 같아서였다. 자기 인생을 막아선 게 아버지의 죄도 아니고 작은아버지의 죄라니!
('아버지의 해방일지' 81쪽)

빨치산 아버지의 딸인 '나'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구례로 내려와 사흘 동안 장례를 치르게 됩니다. 늙은 빨치산의 죽음, 장례식장에 조문객들이 찾아듭니다. 빨갱이 작은아버지를 둔 덕분에 육사에 합격하지 못한 사촌 오빠도 오고, 아버지의 옛 동지들도 오고, 아버지의 어린 시절 친구들도 오고, 사람들이 쉴 새 없이 마지막 인사를 하러 옵니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조문객들이 몰려듭니다.

고인에 대한 얘기가 오고 갑니다. 조문객을 맞이하며 나는 아버지가 만든 여러 인연을 만나게 되고, 아버지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됩니다.


소설은 그렇게 장례식장을 배경으로 아버지를 떠나보내기까지, 사흘간의 이야기를 풀어냅니다. 지난 16일, 서울에서 취재진을 만난 정지아 작가는 이 소설은 '아버지에 대해 조금 더 알아가게 되는 이야기'라고 말했습니다.

"부모에게는 원망이 많고 상처가 많고, 늘 우리 아버지는 이걸 못 해주고 저걸 못 해주고 이런 생각만 하다가 비로소 자기가 부모가 되어 보면 깨달아지는 것이 있는데, 그때는 또 자기들이 사느라 바쁘잖아요. 저도 마찬가지였고요. 그래서 아버지의 마음을 어렴풋이 짐작은 하지만 돌아볼 겨를은 없이 살다가 막상 부모님이 가시고 나면, 그제야 처음으로 아버지를 내 부모가 아니라 한 사람으로 돌아보게 되는 계기가 되는 것 같고요. 그래서 이 책은 그 장례식장에서 보통의 자식들처럼, 잘 모르고 있던 아버지를 아버지의 주변 사람들을 통해서 알아가는 이야기입니다.”

작가는 이렇게도 설명했습니다.

"부모가 자본가든 노동자든 농민이든 누가 됐든 간에, 자식에게 나쁘고 싶은 부모가 얼마나 있겠습니까. 그래서 사실은 이 소설의 주인공 아버지가 빨치산 출신이긴 하지만 거기에 방점을 두기보다는, 그가 한 아버지로서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조명하려고 했고요. 빨치산이라는 이데올로기로부터 거리를 좀 지키기 위해서, 일부러 화자인 '나'를 조금 더 아버지에게 냉소적이고 비판적인 인물로 그렸던 것 같습니다."

정지아 작가는 우리가 가족은 물론이고 다른 누군가의 인생을 잘 알고 있다고 쉽게 말해도 괜찮은 것인지, 그런 얘기를 하고 싶었다고 밝혔습니다.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게 사실은 아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 사실 가족은 제일 가까운 존재인데 또 냉정하게 돌이켜보면, 우리가 부모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다고 말을 할 수 있을까, 또 내가 아는 것은 사실일까, 그래서 꼭 부모만이 아니라 조금 넓혀서 보자면 우리가 미워하는 사람이건 좋아하는 사람이건 그 사람에 대해서 과연 우리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 것일까, 이런 얘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작가가 소설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잘 안다고 생각하니까 밉기도 하고 이런 것인데, 사실은 그에게도 그만의 사정이 있을 것이고, 그런 이면을 조금 더 돌아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사실 미워하는 마음이 되게 힘들거든요. 미워하게 되면 내 마음이 먼저 망가질 수 있으니까요. 그러니 내 삶이 따뜻해지고 풍요로워지려면 '내가 누군가를 잘 모르는구나'라는 전제를 갖게 되면 조금 더 나아지지 않을까, 제가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하게 말하고 싶었던 것은 그런 것일 것 같습니다."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쓴 정지아 작가는 지난 199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고욤나무'가 당선되었고, 김유정문학상, 심훈문학대상, 이효석문학상 등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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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지아 작가 “아버지를 조금씩 알아가는 이야기”
    • 입력 2022-10-29 10:03:03
    취재K
정지아 작가의 장편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br />'빨치산이 아닌 아버지 얘기'<br />장례 치르며 만나는 아버지의 여러 인연<br />'나는 아버지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br />

※ [주말& 책] 매주 토요일, 책을 소개합니다.

자연을 상징하는 녹색을 배경으로 집이 있고, 나무가 있습니다. 조금 떨어져서 백발의 머리로 자전거를 타는 사람이 보입니다. 허리를 편 채로 꼿꼿하게 안장에 앉아 자전거를 몰고 어딘가를 향해 갑니다. 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의 책 표지는 이처럼 평화롭고 한적한 풍경을 담고 있습니다.


소설의 표지 디자인만 보면 전원생활의 체험담을 들려주는 정감 있고 따스한 분위기의 수필집 같아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작품이 다루는 내용과 소재는 가볍지 않습니다. 첫 문장도 아버지의 죽음을 전하는 얘기로 시작합니다.

아버지가 죽었다.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평생을 정색하고 살아온 아버지가···
('아버지의 해방일지' 7쪽)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을 떠난 소설 속 화자인 '나'의 아버지는 달랐습니다. 아버지는 전직 빨치산이었습니다. 지리산에서 활동하다 검거돼 감옥에도 갔던 빨치산이었습니다. 소설은 아버지의 빨치산 시절에 대해 구체적으로 묘사하지는 않습니다. 나는 아버지의 빨치산 시절이 어떠했는지, 아버지가 왜 평생을 사회주의자로 살았던 것인지, 아버지가 아버지의 인생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했습니다. 아버지가 평생토록 한 길만을 고집했다는 점만큼은 뚜렷했습니다. 그 결과, 나는 힘든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고 성인이 되어서도 하루하루 버텨내며 살아가기 바빴습니다. 그러니, 무엇인가 억울한 기분이 드는 것도 당연했습니다.

아버지는 선택이라도 했지, 나는 무엇도 선택하지 않았다. 나는 빨갱이가 되기로 선택하지 않았고, 빨갱이의 딸로 태어나겠다 선택하지도 않았다. 태어나보니 가난한 빨갱이의 딸이었을 뿐이다. 선택할 수 있다면 누군들 빨갱이의 딸을 선택하겠는가.
('아버지의 해방일지' 76쪽)

빨치산 아버지는 일가친척에게도 짐이 되고는 했습니다. 과거 연좌제가 있던 시절, 사촌 오빠는 육사에 합격하고도 신원조회에 걸려 입학하지 못합니다. 사실상 집안 모두가 알게 모르게 빨치산 아버지의 존재로 인해 크고 작은 영향을 받았던 겁니다. 소설의 화자인 '나'는 얘기합니다.

빨갱이의 딸인 나는 오빠를 생각할 때마다 죄를 지은 느낌이었다. 빨갱이의 딸인 나보다 빨갱이의 조카인 오빠가 견뎌야 했을 인생이 더 억울할 것 같아서였다. 자기 인생을 막아선 게 아버지의 죄도 아니고 작은아버지의 죄라니!
('아버지의 해방일지' 81쪽)

빨치산 아버지의 딸인 '나'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구례로 내려와 사흘 동안 장례를 치르게 됩니다. 늙은 빨치산의 죽음, 장례식장에 조문객들이 찾아듭니다. 빨갱이 작은아버지를 둔 덕분에 육사에 합격하지 못한 사촌 오빠도 오고, 아버지의 옛 동지들도 오고, 아버지의 어린 시절 친구들도 오고, 사람들이 쉴 새 없이 마지막 인사를 하러 옵니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조문객들이 몰려듭니다.

고인에 대한 얘기가 오고 갑니다. 조문객을 맞이하며 나는 아버지가 만든 여러 인연을 만나게 되고, 아버지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됩니다.


소설은 그렇게 장례식장을 배경으로 아버지를 떠나보내기까지, 사흘간의 이야기를 풀어냅니다. 지난 16일, 서울에서 취재진을 만난 정지아 작가는 이 소설은 '아버지에 대해 조금 더 알아가게 되는 이야기'라고 말했습니다.

"부모에게는 원망이 많고 상처가 많고, 늘 우리 아버지는 이걸 못 해주고 저걸 못 해주고 이런 생각만 하다가 비로소 자기가 부모가 되어 보면 깨달아지는 것이 있는데, 그때는 또 자기들이 사느라 바쁘잖아요. 저도 마찬가지였고요. 그래서 아버지의 마음을 어렴풋이 짐작은 하지만 돌아볼 겨를은 없이 살다가 막상 부모님이 가시고 나면, 그제야 처음으로 아버지를 내 부모가 아니라 한 사람으로 돌아보게 되는 계기가 되는 것 같고요. 그래서 이 책은 그 장례식장에서 보통의 자식들처럼, 잘 모르고 있던 아버지를 아버지의 주변 사람들을 통해서 알아가는 이야기입니다.”

작가는 이렇게도 설명했습니다.

"부모가 자본가든 노동자든 농민이든 누가 됐든 간에, 자식에게 나쁘고 싶은 부모가 얼마나 있겠습니까. 그래서 사실은 이 소설의 주인공 아버지가 빨치산 출신이긴 하지만 거기에 방점을 두기보다는, 그가 한 아버지로서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조명하려고 했고요. 빨치산이라는 이데올로기로부터 거리를 좀 지키기 위해서, 일부러 화자인 '나'를 조금 더 아버지에게 냉소적이고 비판적인 인물로 그렸던 것 같습니다."

정지아 작가는 우리가 가족은 물론이고 다른 누군가의 인생을 잘 알고 있다고 쉽게 말해도 괜찮은 것인지, 그런 얘기를 하고 싶었다고 밝혔습니다.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게 사실은 아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 사실 가족은 제일 가까운 존재인데 또 냉정하게 돌이켜보면, 우리가 부모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다고 말을 할 수 있을까, 또 내가 아는 것은 사실일까, 그래서 꼭 부모만이 아니라 조금 넓혀서 보자면 우리가 미워하는 사람이건 좋아하는 사람이건 그 사람에 대해서 과연 우리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 것일까, 이런 얘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작가가 소설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잘 안다고 생각하니까 밉기도 하고 이런 것인데, 사실은 그에게도 그만의 사정이 있을 것이고, 그런 이면을 조금 더 돌아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사실 미워하는 마음이 되게 힘들거든요. 미워하게 되면 내 마음이 먼저 망가질 수 있으니까요. 그러니 내 삶이 따뜻해지고 풍요로워지려면 '내가 누군가를 잘 모르는구나'라는 전제를 갖게 되면 조금 더 나아지지 않을까, 제가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하게 말하고 싶었던 것은 그런 것일 것 같습니다."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쓴 정지아 작가는 지난 199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고욤나무'가 당선되었고, 김유정문학상, 심훈문학대상, 이효석문학상 등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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