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마진국] 냉전 스릴러 혹은 블랙 코미디…10·26 다룬 두 감독의 해석

입력 2022.10.30 (10:05) 수정 2022.12.26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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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그때 그 사람들’(2005)의 한 장면. 출처 네이버 영화.영화 ‘그때 그 사람들’(2005)의 한 장면. 출처 네이버 영화.

※일요일 아침, 그 주의 시사 이슈와 관련된 영화를 소개합니다. 영화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1979년 10월 26일 저녁,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총을 들었다. 대한민국의 제5·6·7·8·9대 대통령 박정희와 경호실장 차지철이 이 총에 맞아 숨졌다. 박선호 중정 의전과장과 박흥주 중정부장 수행비서관이 가담한 작전이었다. 중정 비서실의 운전사와 경비원들도 지시를 따랐다. 함께 안가에 있던 경호원과 요리사 등이 총에 맞았고, 4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후 중앙정보부가 아닌 삼각지 육군본부로 향한 김재규는 그곳에서 체포됐고, 모두 6명이 이듬해 사형됐다. 한국 현대사의 가장 큰 사건 중 하나인 박정희 대통령 피격 사건, 통칭 '10.26 사건'의 개괄이다.

수많은 사람의 인생은 물론 대한민국의 역사를 완전히 바꿔 놓은 이 사건은 지금껏 두 차례 영화화됐다. 임상수 감독이 2005년에 내놓은 '그때 그 사람들', 그리고 2020년 개봉한 우민호 감독의 '남산의 부장들'이다. 15년 시차를 둔 두 작품은 같은 사건을 완전히 다른 시각으로 다룬다. 우민호 감독의 영화가 냉전 시대 할리우드 첩보물을 연상시킨다면, 임상수 감독의 작품은 냉소가 뚝뚝 흘러넘치는 블랙 코미디다. 감독이 직접 밝힌 작품 의도에서도 차이가 느껴진다. 우 감독은 사건보다 인간의 내면에 집중하고 싶었다고 했고, 임 감독은 '여성의 시선으로 군사 문화를 조롱하고 싶었다'는 말을 남겼다. 10.26 사건 43년째를 맞은 이번 주, 두 영화를 오랜만에 다시 보며 비교해 봤다.

영화 ‘남산의 부장들’(2020)의 한 장면. 출처 IMDB.영화 ‘남산의 부장들’(2020)의 한 장면. 출처 IMDB.

영화 '남산의 부장들'은 첫 장면부터 '사건 전 40일을 재구성한 픽션'이라고 못 박는다. 극 중에선 '규평'이라는 이름을 쓰긴 하지만, 누구나 김재규임을 알 수 있는 인물이 왜 10월 26일 그런 선택을 내릴 수밖에 없었는지 설명하는 게 목적이다. 사건의 원인을 추측하는 여러 가설, 즉 미국 뒷배설 또는 차지철과의 갈등으로 인한 것이었다는 설명 등이 골고루 등장하는 가운데, 영화는 김재규 본인의 주장대로 '구국의 결단'이었다는 설명에 가장 힘을 싣는 듯 보인다. 실제로는 5.16 군사 정변에 가담하지 않았던 김재규를 영화 속에선 박정희와 생사를 함께한 '혁명 동지'로 설정한 점 때문이다. 총구를 겨눈 채 규평은 우리가 왜 혁명을 했느냐고 울먹이고, 각하를 혁명의 배신자로 처단한다는 말과 함께 방아쇠를 당긴다.

한 남자를 진심으로 믿었다가 배신당한 충직한 사내의 실연담 같은 멜로 드라마적 연출과 함께 영화에서 눈에 띄는 건 수평과 수직, 대칭이 강조된 직선적 화면이다. 거대한 링컨 기념관 동상 앞이나 청와대 근처를 순찰하는 탱크 앞에 선 규평처럼, 크기 대비를 부각하는 장면도 반복된다. 이처럼 영화 속 규평은 거대한 권력에 맨몸으로 맞선 작은 영웅이다. 배우 이성민이 연기하는 극 중 인물 '박통'이 권력과 돈에 대한 강한 집착을 보이며 내내 고함을 지르거나 신경질을 부리는 것과 달리, 규평은 내내 인도적 접근을 강조하는 신사적 인물로 그려진다.

반면 '그때 그 사람들'에서 인물들은 대부분 화면의 중심에서 비껴 서 있다. 영화 제목을 '그때 그 사람'에서 '그때 그 사람들'로 바꾸는 등, 임상수 감독은 역사의 현장 주변에 있다가 억울하게 휘말린 인물들에게 초점을 맞추겠다는 의도를 충실히 지킨다. 무려 감독 본인이 카메오로 출연해 내뱉는 대사가 "사무라이 좋아하시네"일 만큼 모든 것을 비웃는 영화지만, 궁정동 안가의 요리사와 보일러 기사 등 평범한 사람들을 비출 때만은 조롱 대신 연민이 깃든다.

장중한 누아르 같은 '남산의 부장들'과 달리, '그때 그 사람들'은 박정희 정권의 가담자 모두 결코 깨끗한 영웅이 아님을 강조한다. 경호원들이 당구를 치며 평범한 대학생을 간첩으로 둔갑시키는 수법을 아무렇지 않게 읊는 장면, 그리고 뒤에 이어지는 남산 대공분실의 트래킹씬이 영화 속 몇 안 되는 진지한 장면이라는 점에서 감독이 전하려던 의도가 읽힌다. 붙잡혀 취조받는 '김 부장'을 비추면서, 대놓고 해설을 통해 '어때요, 저 사람? 혁명적 민주 투사로 보입니까? 아니면 과대망상에 빠진 돈키호테였을까요?' 하고 묻기도 한다.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만큼이나 상반된 두 영화의 온도 차가 흥미로운데, 작품 사이 존재하는 15년의 시간 동안 한국 사회가 어떻게 변해 왔는지 등 곁들여 생각해 볼거리를 남긴다. 두 작품 다 OTT 서비스 등을 통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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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씨네마진국] 냉전 스릴러 혹은 블랙 코미디…10·26 다룬 두 감독의 해석
    • 입력 2022-10-30 10:05:47
    • 수정2022-12-26 09:39:17
    씨네마진국
영화 ‘그때 그 사람들’(2005)의 한 장면. 출처 네이버 영화.
※일요일 아침, 그 주의 시사 이슈와 관련된 영화를 소개합니다. 영화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1979년 10월 26일 저녁,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총을 들었다. 대한민국의 제5·6·7·8·9대 대통령 박정희와 경호실장 차지철이 이 총에 맞아 숨졌다. 박선호 중정 의전과장과 박흥주 중정부장 수행비서관이 가담한 작전이었다. 중정 비서실의 운전사와 경비원들도 지시를 따랐다. 함께 안가에 있던 경호원과 요리사 등이 총에 맞았고, 4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후 중앙정보부가 아닌 삼각지 육군본부로 향한 김재규는 그곳에서 체포됐고, 모두 6명이 이듬해 사형됐다. 한국 현대사의 가장 큰 사건 중 하나인 박정희 대통령 피격 사건, 통칭 '10.26 사건'의 개괄이다.

수많은 사람의 인생은 물론 대한민국의 역사를 완전히 바꿔 놓은 이 사건은 지금껏 두 차례 영화화됐다. 임상수 감독이 2005년에 내놓은 '그때 그 사람들', 그리고 2020년 개봉한 우민호 감독의 '남산의 부장들'이다. 15년 시차를 둔 두 작품은 같은 사건을 완전히 다른 시각으로 다룬다. 우민호 감독의 영화가 냉전 시대 할리우드 첩보물을 연상시킨다면, 임상수 감독의 작품은 냉소가 뚝뚝 흘러넘치는 블랙 코미디다. 감독이 직접 밝힌 작품 의도에서도 차이가 느껴진다. 우 감독은 사건보다 인간의 내면에 집중하고 싶었다고 했고, 임 감독은 '여성의 시선으로 군사 문화를 조롱하고 싶었다'는 말을 남겼다. 10.26 사건 43년째를 맞은 이번 주, 두 영화를 오랜만에 다시 보며 비교해 봤다.

영화 ‘남산의 부장들’(2020)의 한 장면. 출처 IMDB.
영화 '남산의 부장들'은 첫 장면부터 '사건 전 40일을 재구성한 픽션'이라고 못 박는다. 극 중에선 '규평'이라는 이름을 쓰긴 하지만, 누구나 김재규임을 알 수 있는 인물이 왜 10월 26일 그런 선택을 내릴 수밖에 없었는지 설명하는 게 목적이다. 사건의 원인을 추측하는 여러 가설, 즉 미국 뒷배설 또는 차지철과의 갈등으로 인한 것이었다는 설명 등이 골고루 등장하는 가운데, 영화는 김재규 본인의 주장대로 '구국의 결단'이었다는 설명에 가장 힘을 싣는 듯 보인다. 실제로는 5.16 군사 정변에 가담하지 않았던 김재규를 영화 속에선 박정희와 생사를 함께한 '혁명 동지'로 설정한 점 때문이다. 총구를 겨눈 채 규평은 우리가 왜 혁명을 했느냐고 울먹이고, 각하를 혁명의 배신자로 처단한다는 말과 함께 방아쇠를 당긴다.

한 남자를 진심으로 믿었다가 배신당한 충직한 사내의 실연담 같은 멜로 드라마적 연출과 함께 영화에서 눈에 띄는 건 수평과 수직, 대칭이 강조된 직선적 화면이다. 거대한 링컨 기념관 동상 앞이나 청와대 근처를 순찰하는 탱크 앞에 선 규평처럼, 크기 대비를 부각하는 장면도 반복된다. 이처럼 영화 속 규평은 거대한 권력에 맨몸으로 맞선 작은 영웅이다. 배우 이성민이 연기하는 극 중 인물 '박통'이 권력과 돈에 대한 강한 집착을 보이며 내내 고함을 지르거나 신경질을 부리는 것과 달리, 규평은 내내 인도적 접근을 강조하는 신사적 인물로 그려진다.

반면 '그때 그 사람들'에서 인물들은 대부분 화면의 중심에서 비껴 서 있다. 영화 제목을 '그때 그 사람'에서 '그때 그 사람들'로 바꾸는 등, 임상수 감독은 역사의 현장 주변에 있다가 억울하게 휘말린 인물들에게 초점을 맞추겠다는 의도를 충실히 지킨다. 무려 감독 본인이 카메오로 출연해 내뱉는 대사가 "사무라이 좋아하시네"일 만큼 모든 것을 비웃는 영화지만, 궁정동 안가의 요리사와 보일러 기사 등 평범한 사람들을 비출 때만은 조롱 대신 연민이 깃든다.

장중한 누아르 같은 '남산의 부장들'과 달리, '그때 그 사람들'은 박정희 정권의 가담자 모두 결코 깨끗한 영웅이 아님을 강조한다. 경호원들이 당구를 치며 평범한 대학생을 간첩으로 둔갑시키는 수법을 아무렇지 않게 읊는 장면, 그리고 뒤에 이어지는 남산 대공분실의 트래킹씬이 영화 속 몇 안 되는 진지한 장면이라는 점에서 감독이 전하려던 의도가 읽힌다. 붙잡혀 취조받는 '김 부장'을 비추면서, 대놓고 해설을 통해 '어때요, 저 사람? 혁명적 민주 투사로 보입니까? 아니면 과대망상에 빠진 돈키호테였을까요?' 하고 묻기도 한다.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만큼이나 상반된 두 영화의 온도 차가 흥미로운데, 작품 사이 존재하는 15년의 시간 동안 한국 사회가 어떻게 변해 왔는지 등 곁들여 생각해 볼거리를 남긴다. 두 작품 다 OTT 서비스 등을 통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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