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당신 식탁의 60%는 다국적 기업이 차렸습니다

입력 2022.11.05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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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밥에 고기 반찬과 각종 나물을 오늘 한 끼로 먹은 당신. 우리 땅에서 난 '신토불이' 밥상이었다고 만족할지 모른다. 하지만 당신이 먹은 한돈·한우는 어떤 나라에서 온 사료를 먹고 컸을까. 또 나물 볶을 때 쓴 식용유는 어느 땅에서 난 콩으로 만들었을까. 당신의 식탁을 차리는데 쓴 각종 곡물들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ABCD'란 낯선 단어를 발견하게 된다.

■ 한국빵 샀는데 외국 기업에 돈 냈다고?

ABCD는 국제 곡물 시장을 장악한 4개 메이저 기업을 지칭하는 말이다. 아처대니얼스미들랜드(Archer Daniels Midland)와 벙기(Bunge), 카길(Cargill)과 루이드레퓌스(Louis Dreyfus)의 앞글자들을 땄다. 루이드레퓌스만 프랑스에 기반을 뒀고, 나머지는 미국 기업이다. 모두 짧게는 100년에서 길게는 200년이 넘는 오랜 역사를 지녔다.


우리가 자주 먹는 빵을 굽기 위해서는 대한제분과 CJ제일제당 등 제분업체가 만든 밀가루가 먼저 있어야 한다. 이들 제분업체는 밀(원맥)을 ABCD로부터 구매한다. 결국 최종 소비자가 낸 빵값에는 다국적 기업에 지불한 금액도 일부 포함돼 있다고도 할 수 있다.

■ "곡물 60%가 ABCD 통해 수입"

우리 식탁의 ABCD 영향력은 얼마나 될까. 국회예산정책처의 지난해 10월 보고서인 <곡물 수급안정 사업·정책 분석>을 보면 수입 밀 중 ABCD를 통해 들어오는 비중은 27.5%에 달했다. 옥수수의 경우 ABCD로부터의 수입 비중은 43.2%였다. 이는 ABCD가 현지 곡물 조달부터 선박 운송까지 책임지는 '직접 경로' 비중이다.


ABCD는 주요 항만에 설치한 곡물 터미널로 모든 유통 경로를 장악하고 있다. 이런 인프라들을 활용, 중간 트레이딩 업체를 거쳐 ABCD '간접 경로'로 들어오는 곡물도 연간 수백만 톤 분량이다. 농식품신유통연구원장을 맡고 있는 김동환 원장은 "ABCD는 산지에서부터 수출 엘리베이터(곡물 수출 설비), 곡물 밸류 체인 전반을 장악하고 있다"라면서 "ABCD로부터 수입돼 들어오는 곡물은 전체의 60% 수준"이라고 말했다.

■ 밥상 장악한 '옥수수'…99%가 수입

'한국인의 밥상'을 차리는 데 가장 많이 쓰이는 곡물은 쌀도, 밀도 아니다. 옥수수다. 2020년 옥수수 1,165만 톤이 우리나라에서 소비됐다. 우리나라 연간 곡물 수요량(2,132만 톤)의 55% 수준이다. 식량으로 소비하는 쌀은 300만 톤도 채 되지 않는다.

국내에서 소비되는 옥수수 99%가 수입이다. 이걸 대부분 가축들이 먹는다. 육류(소고기·돼지고기·닭고기) 1㎏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평균 7㎏의 곡물이 필요하다고 한다. 가축들이 먹는 배합 사료는 '사료용 옥수수'로 만든다. 우리나라는 2020년에만 사료용 옥수수 961만 톤을 수입했다.


이 밖에도 우리나라는 밀(333만 톤)과 콩(124만 톤), 쌀(47만 톤)을 적지 않게 수입한다. 이에 따라 2020년 곡물 자급률은 20.2%에 그쳤다. 필요한 곡물 80%는 수입에 의존한다는 이야기다. 한국은 세계에서 7번째로 많이 곡물을 수입하는 나라다. 우리가 ABCD 손아귀에 놓일 수 밖에 없는 배경이다.

■ 전쟁으로 끊겼다 다시 들어온 옥수수

한국판 ABCD는 불가능할까. 2011년 정부는 750억 원을 투입해 'aT그레인컴퍼니'를 만들었다가 2년 반 만에 사업을 접었다. 다국적 기업들의 장벽은 높았고, '관치 경제' 한계도 있었다. 지금은 포스코 인터내셔널과 하림 팬오션, CJ 등 민간 기업들이 국제 곡물 시장에 도전하고 있다.

포스코 인터내셔널은 우크라이나 미콜라이우에서 연간 250만 톤의 곡물을 생산할 수 있는 터미널을 운영하고 있다. 올해 2월 러시아 침공으로 수출길이 한 때 끊겼지만, 다시 9월부터 우크라이나산 곡물이 한국으로 들어오고 있다. 국내에 3명뿐인 곡물거래분쟁중재인(GAFTA Arbitrator) 중 한 명인 백상윤 포스코 인터내셔널 그룹장은 "한국 회사가 해외에서 확보한 곡물은 확실하게 국내로 들어온다고 보장할 수 있기 때문에 식량 안보·물가 안정 차원에서 도움이 된다"라고 말했다.

9월 말 포스코 인터내셔널이 인천항에 들여온 우크라이나산 옥수수 6만 1천 톤. [촬영기자 김용모]9월 말 포스코 인터내셔널이 인천항에 들여온 우크라이나산 옥수수 6만 1천 톤. [촬영기자 김용모]

■ 푸틴 "언제든 탈퇴"…불안한 곡물 시장

하지만 곡물 반입은 언제고 다시 끊길 수 있다. 러시아는 지난달 말 곡물수출협정을 무기한 중단하겠다고 선언했다가 나흘 만에 다시 복귀했다. 그러면서도 푸틴 대통령은 "러시아는 협정을 중단할 권리를 갖고 있다"라고 말해, 불씨는 남아있다.

남재작 한국정밀농업연구소장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촉발된 글로벌 식량 위기는 비료 등 공급망 위기와 겹치면서 2∼3년간 지속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다국적 기업 손에 넘어간 '밥상 차림 비용'은 앞으로도 더 오를 가능성이 커진 셈이다.

(대문사진 : 신혜지 / 인포그래픽 : 권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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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 당신 식탁의 60%는 다국적 기업이 차렸습니다
    • 입력 2022-11-05 09:00:54
    취재K

쌀밥에 고기 반찬과 각종 나물을 오늘 한 끼로 먹은 당신. 우리 땅에서 난 '신토불이' 밥상이었다고 만족할지 모른다. 하지만 당신이 먹은 한돈·한우는 어떤 나라에서 온 사료를 먹고 컸을까. 또 나물 볶을 때 쓴 식용유는 어느 땅에서 난 콩으로 만들었을까. 당신의 식탁을 차리는데 쓴 각종 곡물들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ABCD'란 낯선 단어를 발견하게 된다.

■ 한국빵 샀는데 외국 기업에 돈 냈다고?

ABCD는 국제 곡물 시장을 장악한 4개 메이저 기업을 지칭하는 말이다. 아처대니얼스미들랜드(Archer Daniels Midland)와 벙기(Bunge), 카길(Cargill)과 루이드레퓌스(Louis Dreyfus)의 앞글자들을 땄다. 루이드레퓌스만 프랑스에 기반을 뒀고, 나머지는 미국 기업이다. 모두 짧게는 100년에서 길게는 200년이 넘는 오랜 역사를 지녔다.


우리가 자주 먹는 빵을 굽기 위해서는 대한제분과 CJ제일제당 등 제분업체가 만든 밀가루가 먼저 있어야 한다. 이들 제분업체는 밀(원맥)을 ABCD로부터 구매한다. 결국 최종 소비자가 낸 빵값에는 다국적 기업에 지불한 금액도 일부 포함돼 있다고도 할 수 있다.

■ "곡물 60%가 ABCD 통해 수입"

우리 식탁의 ABCD 영향력은 얼마나 될까. 국회예산정책처의 지난해 10월 보고서인 <곡물 수급안정 사업·정책 분석>을 보면 수입 밀 중 ABCD를 통해 들어오는 비중은 27.5%에 달했다. 옥수수의 경우 ABCD로부터의 수입 비중은 43.2%였다. 이는 ABCD가 현지 곡물 조달부터 선박 운송까지 책임지는 '직접 경로' 비중이다.


ABCD는 주요 항만에 설치한 곡물 터미널로 모든 유통 경로를 장악하고 있다. 이런 인프라들을 활용, 중간 트레이딩 업체를 거쳐 ABCD '간접 경로'로 들어오는 곡물도 연간 수백만 톤 분량이다. 농식품신유통연구원장을 맡고 있는 김동환 원장은 "ABCD는 산지에서부터 수출 엘리베이터(곡물 수출 설비), 곡물 밸류 체인 전반을 장악하고 있다"라면서 "ABCD로부터 수입돼 들어오는 곡물은 전체의 60% 수준"이라고 말했다.

■ 밥상 장악한 '옥수수'…99%가 수입

'한국인의 밥상'을 차리는 데 가장 많이 쓰이는 곡물은 쌀도, 밀도 아니다. 옥수수다. 2020년 옥수수 1,165만 톤이 우리나라에서 소비됐다. 우리나라 연간 곡물 수요량(2,132만 톤)의 55% 수준이다. 식량으로 소비하는 쌀은 300만 톤도 채 되지 않는다.

국내에서 소비되는 옥수수 99%가 수입이다. 이걸 대부분 가축들이 먹는다. 육류(소고기·돼지고기·닭고기) 1㎏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평균 7㎏의 곡물이 필요하다고 한다. 가축들이 먹는 배합 사료는 '사료용 옥수수'로 만든다. 우리나라는 2020년에만 사료용 옥수수 961만 톤을 수입했다.


이 밖에도 우리나라는 밀(333만 톤)과 콩(124만 톤), 쌀(47만 톤)을 적지 않게 수입한다. 이에 따라 2020년 곡물 자급률은 20.2%에 그쳤다. 필요한 곡물 80%는 수입에 의존한다는 이야기다. 한국은 세계에서 7번째로 많이 곡물을 수입하는 나라다. 우리가 ABCD 손아귀에 놓일 수 밖에 없는 배경이다.

■ 전쟁으로 끊겼다 다시 들어온 옥수수

한국판 ABCD는 불가능할까. 2011년 정부는 750억 원을 투입해 'aT그레인컴퍼니'를 만들었다가 2년 반 만에 사업을 접었다. 다국적 기업들의 장벽은 높았고, '관치 경제' 한계도 있었다. 지금은 포스코 인터내셔널과 하림 팬오션, CJ 등 민간 기업들이 국제 곡물 시장에 도전하고 있다.

포스코 인터내셔널은 우크라이나 미콜라이우에서 연간 250만 톤의 곡물을 생산할 수 있는 터미널을 운영하고 있다. 올해 2월 러시아 침공으로 수출길이 한 때 끊겼지만, 다시 9월부터 우크라이나산 곡물이 한국으로 들어오고 있다. 국내에 3명뿐인 곡물거래분쟁중재인(GAFTA Arbitrator) 중 한 명인 백상윤 포스코 인터내셔널 그룹장은 "한국 회사가 해외에서 확보한 곡물은 확실하게 국내로 들어온다고 보장할 수 있기 때문에 식량 안보·물가 안정 차원에서 도움이 된다"라고 말했다.

9월 말 포스코 인터내셔널이 인천항에 들여온 우크라이나산 옥수수 6만 1천 톤. [촬영기자 김용모]
■ 푸틴 "언제든 탈퇴"…불안한 곡물 시장

하지만 곡물 반입은 언제고 다시 끊길 수 있다. 러시아는 지난달 말 곡물수출협정을 무기한 중단하겠다고 선언했다가 나흘 만에 다시 복귀했다. 그러면서도 푸틴 대통령은 "러시아는 협정을 중단할 권리를 갖고 있다"라고 말해, 불씨는 남아있다.

남재작 한국정밀농업연구소장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촉발된 글로벌 식량 위기는 비료 등 공급망 위기와 겹치면서 2∼3년간 지속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다국적 기업 손에 넘어간 '밥상 차림 비용'은 앞으로도 더 오를 가능성이 커진 셈이다.

(대문사진 : 신혜지 / 인포그래픽 : 권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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