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산내 골령골 학살지…“희생자 더 있을텐데, 유해 발굴 곧 마감?”

입력 2022.11.16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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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시 낭월동에서 벌어진 골령골 민간인 학살 사건.대전시 낭월동에서 벌어진 골령골 민간인 학살 사건.

6·25전쟁 전후 최대 규모 민간인 학살이 벌어진 대전시 낭월동 ‘골령골’.

국군과 경찰에 의해 3,000명에서 최대 7,000명이 학살당한 것으로 추정되는 이곳에서 올해에도 희생자 111명의 유해가 추가로 발굴됐습니다.

유해발굴은 올해가 지나면 종료됩니다. 내년부터는 산내추모공원 사업이 추진될 예정입니다.

그런데 유족들은 초조하기만 합니다. 왜 그럴까요?

■ 올해도 골령골 희생자 111명 임시 봉안

대전 산내 골령골 민간인 희생자 유해 안치식.대전 산내 골령골 민간인 희생자 유해 안치식.

짙은 안개가 낀 오늘(16일) 오전. 백발의 노인 100여 명이 대전시 낭월동에 위치한 골령골에 모였습니다.

이곳에서 희생된 부모와 형제의 유해를 봉안하기 위해 제주에서부터 여수, 순천 등 전국에서 온 유족들입니다.

학살 희생자 봉안식에 참석한 유족들.학살 희생자 봉안식에 참석한 유족들.

서영균 제주 4·3유족회 대전위원회장.서영균 제주 4·3유족회 대전위원회장.

진혼제가 거행되고 흰색 상자에 담긴 희생자의 주검은 하나 둘, 운구차에 실려 세종 추모의 집 '임시봉안시설'로 옮겨졌습니다.

세종 추모의 집에는 골령골을 비롯해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자들의 유해가 모여있는데, 2층 보관실 전체가 가득 찰 정도로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유해가 봉안돼 있습니다.

세종 추모의 집 ‘임시봉안시설’ 내부 모습.세종 추모의 집 ‘임시봉안시설’ 내부 모습.

그중에서도 대전 골령골에서는 단일지역으로는 가장 많은 유해가 수습돼 영면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2007년 34구의 유해가 수습된 이후 2015년 20구, 2020년 234구, 2021년 962구 그리고 올해 111구까지 모두 1,361명의 희생자가 발굴돼 임시 봉안됐습니다.

왜 이렇게 많은 유해가 골령골에서 나왔을까요?

■4·3사건과 여순, 그리고 보도연맹까지

"대전 산내 골령골에서 드러난 유해는 참혹했습니다. 그날의 절규가 그대로 배어있었습니다. 72년의 세월동안 이렇게 묻어두고 밝은 곳으로 모시지 못한 유가족의 게으름을 온몸으로 사죄드립니다. 제주 4·3 영령들께도 고합니다. 특별법이 전면 개정되면서 영령들에 대한 명예회복이 본격화 됐습니다. 넋이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 있도록 저희가 살아있는 날까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서영균 제주 4·3유족회 대전위원회장, 2022년 골령골 유해 안치식 추모사

1947년 3월 1일, 광복 후 두 번째 맞는 삼일절.

기념행사가 열리던 제주도에서 기마경찰이 타던 말발굽에 아이가 치이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군중들은 몰려들었고 경찰은 이들을 향해 총을 발포했습니다. 젖먹이를 안고 있던 21살 여성부터 학생, 농부까지 6명이 숨졌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남로당이 봉기를 일으켰고, 이듬해까지 이어졌습니다.

미 군정과 이승만 정부는 군대를 투입해 진압에 나섰고, 3만여 명이 학살됐습니다. 제주도민 10명 중 1명꼴로 군경에 의해 희생된 겁니다.

제주 4·3사건 당시 촬영된 영상. 미군(오른쪽)의 모습이 눈에 띈다.제주 4·3사건 당시 촬영된 영상. 미군(오른쪽)의 모습이 눈에 띈다.

당시 학살을 피해 살아남은 제주도민 상당수가 내란죄와 국방경기법 위반 혐의로 징역형을 선고받고 대전형무소 등에 수감됐습니다.

그리고 6·25전쟁이 발발하자 대전형무소에 7년형을 선고받아 수용돼 있던 300여 명의 제주도민은 골령골로 끌려가 살해당했습니다.

김운택 대전산내사건희생자유족회 전남지회장김운택 대전산내사건희생자유족회 전남지회장

"내 어머니, 우리 형, 우리 오빠. 우리 이웃이 끌려가던 길이었습니다. 끔찍한 총성에 하늘도 하얗게 질린 날이었습니다. 억울함과 절규하는 울부짖음에 영혼마저 땅속 깊이 묻어버린 곳이었습니다. 가족들과 영영 만날 수 없다는 두려움마저 감춰놓은 땅이었습니다."

-김운택 대전산내사건희생자유족회 전남지회장, 2022년 골령골 유해 안치식 추모사

1948년 6월 14일 촬영된 국군 제14연대 소속 군인들.(사진제공=역사공간 벗 주철희 박사)1948년 6월 14일 촬영된 국군 제14연대 소속 군인들.(사진제공=역사공간 벗 주철희 박사)

군경에 의한 무자비한 탄압은 제주에서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번엔 여수에 주둔하던 국군 14연대 소속 군인들이 1948년 봉기를 일으켰습니다. 제주 4·3사건의 진압 명령을 거부하고 무장한 채 봉기를 일으킨 겁니다.

이들은 순천과 고흥지역 등을 장악했고, 이승만 정부는 여수와 순천에 계엄령을 선포한 뒤 진압에 나섰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을 계기로 이승만 정부는 ‘국가보안법’을 제정했습니다.

여순사건이 벌어질 당시 순천지역 희생자 주검 앞에 가족들이 오열하고 있는 모습.(사진제공=역사공간 벗 주철희 박사)여순사건이 벌어질 당시 순천지역 희생자 주검 앞에 가족들이 오열하고 있는 모습.(사진제공=역사공간 벗 주철희 박사)

진압 과정에서 여수와 순천에 살던 무수한 양민이 14연대에 협조했다는 이유 등으로 살해됐습니다.

당시 사건은 ‘라이프지’ 소속 칼 마이던스 기자 등 외신을 통해 알려졌습니다. 그리고 반세기가 한참 지나서인 지난해에 이르러서야 특별법 제정을 통해 ‘민간인 희생’ 사건으로 확정됐습니다.

여순사건 당시에 군경에게 붙잡혔던 많은 군인과 민간인들 역시 대전형무소 등에 수감됐고, 제주4ㆍ3사건 수감자들과 마찬가지로 전쟁이 벌어지자 학살됐습니다.

골령골에서 민간인들을 사살하는 군인들.골령골에서 민간인들을 사살하는 군인들.

이뿐만 아닙니다. '보도연맹'에 가입했던 수많은 민간인이 예비검속을 명목으로 대전역 등 주요 거점에서 검문을 서던 군경에 붙잡혔고, 이들 역시 보도연맹원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골령골로 끌려가 살해됐습니다.

“제주4ㆍ3사건”이란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그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한다.

-제주4ㆍ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여수ㆍ순천 10ㆍ19사건”이란 정부 수립의 초기 단계에 여수에서 주둔하고 있던 국군 제14연대 일부 군인들이 국가의 ‘제주4ㆍ3사건’ 진압 명령을 거부하고 일으킨 사건으로 인하여, 1948년 10월 19일부터 지리산 입산 금지가 해제된 1955년 4월 1일까지 여수ㆍ순천지역을 비롯하여 전라남도, 전라북도, 경상남도 일부 지역에서 발생한 혼란과 무력 충돌 및 이의 진압과정에서 다수의 민간인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한다.

-여수ㆍ순천 10ㆍ19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영면을 기다리는 희생자 1,361명.

마구잡이식 학살로 뒤엉킨 채 암매장됐던 희생자들이 반세기가 넘어서야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됐지만 영면에 들지 못했습니다. 유해가 수습된 1,361명에는 여전히 '임시 봉안'이라는 꼬리표가 붙어 있습니다.

세종 추모의 집 ‘임시봉안시설’ 내부 모습.세종 추모의 집 ‘임시봉안시설’ 내부 모습.

정부는 골령골 학살지에 ‘산내평화공원’을 조성하고 희생자들이 영면에 들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골령골에 묻힌 희생자들의 유해가 모두 수습돼야 합니다.

앞서 행정안전부 과거사관련업무지원단 관계자는 “희생자 유해가 아직 남아 있는데 그 위에 공원을 짓고 봉안할 수는 없다”며 “최대한 서둘러 유해 발굴에 나설 예정”이라고 밝힌 바 있습니다.

유해발굴 사업은 공식적으로 올해가 마지막인 만큼 내년부터는 산내평화공원 조성사업이 착수됩니다.

대전 동구는 2024년 12월을 완공 시점으로 잡고 있습니다.

유해발굴단은 내년에 사업이 착공되기 전까지를 마지막 발굴 기회로 보고 있습니다.

지난해 발굴 당시 골령골 골짜기를 따라 드러난 희생자 유해.지난해 발굴 당시 골령골 골짜기를 따라 드러난 희생자 유해.

■ 애가 타는 유족들…"내년 사업 착공 전이 마지막 기회"

유족들은 애가 탑니다. 아직 발굴하지 못한 지역이 상당하고, 정부 조사에서 집계된 희생자와 발굴된 유해 수와 비교해도 더 많은 희생자가 아직 골령골 골짜기마다 매장돼있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입니다.

제1 학살지부터 제7 학살지 까지 남아있는 모든 지역에 대한 발굴을 마치기에는 시간도 인력도 아직 부족합니다. 더욱이 진실규명 신청을 받지 않는 유족들도 아직 상당합니다.

정부 기구인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한시 기구. 법에 정해진 활동 기간이 끝나면 해산 절차를 밟게 됩니다.

그전에 추가 진실규명과 발굴, 희생자 확인까지 모든 절차를 밟을 수 있을지 지금도 지켜봐야 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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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전 산내 골령골 학살지…“희생자 더 있을텐데, 유해 발굴 곧 마감?”
    • 입력 2022-11-16 17:34:33
    취재K
대전시 낭월동에서 벌어진 골령골 민간인 학살 사건.
6·25전쟁 전후 최대 규모 민간인 학살이 벌어진 대전시 낭월동 ‘골령골’.

국군과 경찰에 의해 3,000명에서 최대 7,000명이 학살당한 것으로 추정되는 이곳에서 올해에도 희생자 111명의 유해가 추가로 발굴됐습니다.

유해발굴은 올해가 지나면 종료됩니다. 내년부터는 산내추모공원 사업이 추진될 예정입니다.

그런데 유족들은 초조하기만 합니다. 왜 그럴까요?

■ 올해도 골령골 희생자 111명 임시 봉안

대전 산내 골령골 민간인 희생자 유해 안치식.
짙은 안개가 낀 오늘(16일) 오전. 백발의 노인 100여 명이 대전시 낭월동에 위치한 골령골에 모였습니다.

이곳에서 희생된 부모와 형제의 유해를 봉안하기 위해 제주에서부터 여수, 순천 등 전국에서 온 유족들입니다.

학살 희생자 봉안식에 참석한 유족들.
서영균 제주 4·3유족회 대전위원회장.
진혼제가 거행되고 흰색 상자에 담긴 희생자의 주검은 하나 둘, 운구차에 실려 세종 추모의 집 '임시봉안시설'로 옮겨졌습니다.

세종 추모의 집에는 골령골을 비롯해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자들의 유해가 모여있는데, 2층 보관실 전체가 가득 찰 정도로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유해가 봉안돼 있습니다.

세종 추모의 집 ‘임시봉안시설’ 내부 모습.
그중에서도 대전 골령골에서는 단일지역으로는 가장 많은 유해가 수습돼 영면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2007년 34구의 유해가 수습된 이후 2015년 20구, 2020년 234구, 2021년 962구 그리고 올해 111구까지 모두 1,361명의 희생자가 발굴돼 임시 봉안됐습니다.

왜 이렇게 많은 유해가 골령골에서 나왔을까요?

■4·3사건과 여순, 그리고 보도연맹까지

"대전 산내 골령골에서 드러난 유해는 참혹했습니다. 그날의 절규가 그대로 배어있었습니다. 72년의 세월동안 이렇게 묻어두고 밝은 곳으로 모시지 못한 유가족의 게으름을 온몸으로 사죄드립니다. 제주 4·3 영령들께도 고합니다. 특별법이 전면 개정되면서 영령들에 대한 명예회복이 본격화 됐습니다. 넋이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 있도록 저희가 살아있는 날까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서영균 제주 4·3유족회 대전위원회장, 2022년 골령골 유해 안치식 추모사

1947년 3월 1일, 광복 후 두 번째 맞는 삼일절.

기념행사가 열리던 제주도에서 기마경찰이 타던 말발굽에 아이가 치이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군중들은 몰려들었고 경찰은 이들을 향해 총을 발포했습니다. 젖먹이를 안고 있던 21살 여성부터 학생, 농부까지 6명이 숨졌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남로당이 봉기를 일으켰고, 이듬해까지 이어졌습니다.

미 군정과 이승만 정부는 군대를 투입해 진압에 나섰고, 3만여 명이 학살됐습니다. 제주도민 10명 중 1명꼴로 군경에 의해 희생된 겁니다.

제주 4·3사건 당시 촬영된 영상. 미군(오른쪽)의 모습이 눈에 띈다.
당시 학살을 피해 살아남은 제주도민 상당수가 내란죄와 국방경기법 위반 혐의로 징역형을 선고받고 대전형무소 등에 수감됐습니다.

그리고 6·25전쟁이 발발하자 대전형무소에 7년형을 선고받아 수용돼 있던 300여 명의 제주도민은 골령골로 끌려가 살해당했습니다.

김운택 대전산내사건희생자유족회 전남지회장
"내 어머니, 우리 형, 우리 오빠. 우리 이웃이 끌려가던 길이었습니다. 끔찍한 총성에 하늘도 하얗게 질린 날이었습니다. 억울함과 절규하는 울부짖음에 영혼마저 땅속 깊이 묻어버린 곳이었습니다. 가족들과 영영 만날 수 없다는 두려움마저 감춰놓은 땅이었습니다."

-김운택 대전산내사건희생자유족회 전남지회장, 2022년 골령골 유해 안치식 추모사

1948년 6월 14일 촬영된 국군 제14연대 소속 군인들.(사진제공=역사공간 벗 주철희 박사)
군경에 의한 무자비한 탄압은 제주에서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번엔 여수에 주둔하던 국군 14연대 소속 군인들이 1948년 봉기를 일으켰습니다. 제주 4·3사건의 진압 명령을 거부하고 무장한 채 봉기를 일으킨 겁니다.

이들은 순천과 고흥지역 등을 장악했고, 이승만 정부는 여수와 순천에 계엄령을 선포한 뒤 진압에 나섰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을 계기로 이승만 정부는 ‘국가보안법’을 제정했습니다.

여순사건이 벌어질 당시 순천지역 희생자 주검 앞에 가족들이 오열하고 있는 모습.(사진제공=역사공간 벗 주철희 박사)
진압 과정에서 여수와 순천에 살던 무수한 양민이 14연대에 협조했다는 이유 등으로 살해됐습니다.

당시 사건은 ‘라이프지’ 소속 칼 마이던스 기자 등 외신을 통해 알려졌습니다. 그리고 반세기가 한참 지나서인 지난해에 이르러서야 특별법 제정을 통해 ‘민간인 희생’ 사건으로 확정됐습니다.

여순사건 당시에 군경에게 붙잡혔던 많은 군인과 민간인들 역시 대전형무소 등에 수감됐고, 제주4ㆍ3사건 수감자들과 마찬가지로 전쟁이 벌어지자 학살됐습니다.

골령골에서 민간인들을 사살하는 군인들.
이뿐만 아닙니다. '보도연맹'에 가입했던 수많은 민간인이 예비검속을 명목으로 대전역 등 주요 거점에서 검문을 서던 군경에 붙잡혔고, 이들 역시 보도연맹원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골령골로 끌려가 살해됐습니다.

“제주4ㆍ3사건”이란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그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한다.

-제주4ㆍ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여수ㆍ순천 10ㆍ19사건”이란 정부 수립의 초기 단계에 여수에서 주둔하고 있던 국군 제14연대 일부 군인들이 국가의 ‘제주4ㆍ3사건’ 진압 명령을 거부하고 일으킨 사건으로 인하여, 1948년 10월 19일부터 지리산 입산 금지가 해제된 1955년 4월 1일까지 여수ㆍ순천지역을 비롯하여 전라남도, 전라북도, 경상남도 일부 지역에서 발생한 혼란과 무력 충돌 및 이의 진압과정에서 다수의 민간인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한다.

-여수ㆍ순천 10ㆍ19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영면을 기다리는 희생자 1,361명.

마구잡이식 학살로 뒤엉킨 채 암매장됐던 희생자들이 반세기가 넘어서야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됐지만 영면에 들지 못했습니다. 유해가 수습된 1,361명에는 여전히 '임시 봉안'이라는 꼬리표가 붙어 있습니다.

세종 추모의 집 ‘임시봉안시설’ 내부 모습.
정부는 골령골 학살지에 ‘산내평화공원’을 조성하고 희생자들이 영면에 들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골령골에 묻힌 희생자들의 유해가 모두 수습돼야 합니다.

앞서 행정안전부 과거사관련업무지원단 관계자는 “희생자 유해가 아직 남아 있는데 그 위에 공원을 짓고 봉안할 수는 없다”며 “최대한 서둘러 유해 발굴에 나설 예정”이라고 밝힌 바 있습니다.

유해발굴 사업은 공식적으로 올해가 마지막인 만큼 내년부터는 산내평화공원 조성사업이 착수됩니다.

대전 동구는 2024년 12월을 완공 시점으로 잡고 있습니다.

유해발굴단은 내년에 사업이 착공되기 전까지를 마지막 발굴 기회로 보고 있습니다.

지난해 발굴 당시 골령골 골짜기를 따라 드러난 희생자 유해.
■ 애가 타는 유족들…"내년 사업 착공 전이 마지막 기회"

유족들은 애가 탑니다. 아직 발굴하지 못한 지역이 상당하고, 정부 조사에서 집계된 희생자와 발굴된 유해 수와 비교해도 더 많은 희생자가 아직 골령골 골짜기마다 매장돼있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입니다.

제1 학살지부터 제7 학살지 까지 남아있는 모든 지역에 대한 발굴을 마치기에는 시간도 인력도 아직 부족합니다. 더욱이 진실규명 신청을 받지 않는 유족들도 아직 상당합니다.

정부 기구인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한시 기구. 법에 정해진 활동 기간이 끝나면 해산 절차를 밟게 됩니다.

그전에 추가 진실규명과 발굴, 희생자 확인까지 모든 절차를 밟을 수 있을지 지금도 지켜봐야 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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