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분히 대화하고 있나요?…‘가녀장의 시대’ 이슬아 작가가 말하는 화목한 가정

입력 2022.12.03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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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말& 책] 매주 토요일, 책을 소개합니다.

할아버지가 손녀에게 붓글씨를 가르칩니다. 사자소학 첫 구절을 화선지에 써 내려갑니다.

父生我身 母鞠吾身

부생아신 모국오신. ‘아버지 내 몸을 낳으시고 어머니가 내 몸을 기르셨느니라’, 뜻풀이를 합니다. 할아버지의 얘기에 어린 손녀는 갸우뚱합니다. ‘아버지가 나를 낳았다?’, 손녀는 의문이 생깁니다.

“엄마가 저 낳았는데요.”

할아버지가 나름대로 설명을 해줍니다.

“아빠 없었으면 너는 태어나지도 못했어.”

이게 무슨 말인지 어린 손녀는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따져본다면, 엄마 없었으면 태어날 꿈도 꾸지 못했을 테니까요. 손녀가 다시 의문을 제기합니다. 할아버지는 이제, 씨앗과 땅의 비유를 들면서 조금 더 쉽게 풀어주려 합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궁금증이 가시지 않은 손녀도 한마디 합니다 .

“그치만 씨앗도 땅이 없으면......”

할아버지는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서둘러 다음 문장으로 넘어갑니다.

이슬아 작가의 소설 ‘가녀장의 시대’에 나오는 일화입니다. 소설의 첫 번째 장에 나옵니다. 제목만 보면 ‘가녀장’의 얘기를 다루고 있지만, 소설은 ‘가부장’의 얘기로 시작합니다. 사실 대부분 사람에게 익숙하거나 익숙했던 단어는 가녀장이 아니라 가부장입니다.

표준국어대사전은 가부장을 아래와 같이 풀이합니다.

가부장: 봉건 사회에서, 가장권(家長權)의 주체가 되는 사람. 가족에 대하여 절대적인 권력을 가졌다.

사전은 가부장은 가장권의 주체가 되는 ‘사람’이라고 설명했지만, 가부장의 ‘부’가 한자로 ‘아버지부’ 자이기도 해서 가부장이라는 단어를 듣게 되면 흔히 아버지나 할아버지처럼 남성을 떠올리고는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가장권’의 주체가 반드시 아버지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슬아 작가의 물음도 이 지점에서 비롯됩니다. 딸이 진정한 의미의 가장이 되면 집안은 어떤 풍경이 될까? 작가는 집안 생계를 책임져 온 자신의 경험 위에 상상력을 펼쳐 소설을 씁니다. 그렇게 세상에 나온 소설이 ‘가녀장의 시대’입니다. 주인공의 이름도 ‘슬아’입니다. 작가와 같습니다. 소설 속 슬아 씨는 집안의 기둥입니다. 작은 출판사를 운영하는데, 직원은 어머니, 아버지입니다. 단순히 딸의 일을 조금 도와주는 정도가 아니라, 진짜로 여러 일을 하면서 대표인 딸로부터 급여를 받습니다. 가정을 이끌고, 가정의 기둥인 소설 속 슬아는 말 그대로 가‘부’장이 아니라 가‘녀’장인 셈입니다.

지난달 KBS 취재진을 만난 이슬아 작가는, 가녀장이라는 이름에 관해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가부장제 체제의 역사는 오래되었잖아요. 그런데 알게 모르게 여성 가장 체제로 운영되던 가족도 많았던 것 같아요. 그중에서도 딸들이 경제권을 가진 집도 있었는데, 따로 이름이 붙여졌던 적이 없으니까 그 딸들을 뭐라고 부를지, 혹은 어떻게 대우하면 좋을지, 적절한 말이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가녀장’이라는 이름을 소개하고 싶었어요.”


가부장과 달리 가녀장은 국어사전에 나오지 않습니다. 가녀장이 사전에 올라간다면 어떻게 정의되는 게 좋을지 작가에게 물어봤습니다. 이슬아 작가는 가부장이 그러하듯이 가녀장 또한 단순히 생계를 책임지는 딸을 뜻하는 것은 아닐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딸이 집안의 윤리적 기준까지 제시하는, 그런 가정이 될 것 같다고 설명했습니다.

“가녀장은 한 가정의 딸이 경제적 토대와 윤리적 토대를 마련하는 체제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가녀장이 된다는 것은 딸이 단순히 돈만 벌어오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가족의 크고 작은 대소사에서 어떤 결정을 할 수 있는 권한 또한 가진다는 것을 뜻하니까요. 그렇기에 도덕적, 윤리적 잣대 같은 것도 함께 마련하는 주체라고 생각합니다. 훌륭한 아버지들이나 어머니들이 그렇게 하셨듯이 가녀장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소설은 한 편의 가족드라마 같은 얘기를 담고 있습니다. 한두 개의 큰 사건이 일어나면서 소설이 전개된다기보다는, 대다수 가정의 모습이 그러하듯이 작지만 무시할 수는 없는 갖가지 사건들이 연이어 계속되면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그래서 웃음 속에 여운이 남는 시트콤 같기도 합니다. 이슬아 작가는 ‘가족 이야기도 무겁게 쓰려면 한없이 무겁게 쓸 수도 있겠지만, 명랑하게 저항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최대한 재미있게 쓰려고 했다’고 밝혔습니다.

소설은 예전부터 사용해 와서, 당연하게 생각하고는 했던 단어에 관해서도 새로운 관점을 보여줍니다. ‘가녀장의 시대’에서는 가부장이 ‘가녀장’이 되는 것은 물론, 부모는 ‘모부’로 표현됩니다. 흔히들 ‘어머니, 아버지’라고 말하는데,한자어로는 왜 ‘모부’가 아닌 ‘부모’라고 표현하는 것일까. 소설은 작가가 말한 것처럼 명랑하게 저항합니다. 소설 ‘가녀장의 시대’에는 모부가 등장하는 겁니다.

슬아는 두 명의 직원을 두었다. 바로 복희와 웅이다. 슬아의 모부이기도 하다.

작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부모님’이란 말이 사실 훨씬 많이 쓰여왔는데, 모와 부를 똑같이 평등하게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순서를 한번 균형상 바꿔봐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부모라 표현되며) 늘 아버지 다음 자리에 오던 엄마의 호명을 한번 앞으로 가져오면 어떨까 생각해서 바꿔 보았습니다.”

그러면서 ‘가부장제’라는 것은 남성에게도 억압으로 작용한 면이 있다고 밝혔습니다. 가부장이 되어 권한이 커질수록 책임도 커지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가부장제라는 게 남자한테도 어떤 억압이었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지난 시대의 아버지 가장들도 많은 고생을 해오셨잖아요. 그런데 그들에게 어떤 성 역할이 강요되는 게 당연히 남자에게도 힘들 수 있는 일인 것 같고요. 그래서 우리 모두 성별에서 잠시 해방되면 어떨까, 그런 상상을 해봤습니다.”

그렇다면, ‘명랑한 저항’을 얘기하는 이슬아 작가가 꿈꾸는 이상향은 가녀장의 세상일까요?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가녀장조차 낡은 단어가 되는 시대, 작가가 진정으로 꿈꾸는 세상입니다.

“가녀장의 시대가 왔으면 하는 염원을 담아서 책 제목을 정했지만, 가녀장의 시대도 종착지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당연히 유토피아도 아니고요. 어떤 과도기라고 여겨집니다. 제가 정말로 원하는 시대는 가녀장이라는 말조차 낡아진 시대가 아닐까 싶습니다. 죽기 전에 살아보고 싶은 시대는 가녀장도 낡은 개념이 되는 시대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가녀장조차 낡은 개념이 되는 시대를 꿈꾸는 이슬아 작가, 그가 생각하는 화목한 가정은 어떤 모습인지 물어봤습니다. 작가는 아래와 같이 답했습니다.

“가족은 서로 간에 너무 가깝기 때문에, 오히려 그래서 무례한 실수를 할 수 있잖아요. 소설 속 인물들도 그런 사실을 깨닫게 되는 거죠. 무엇보다 내가 내 가족을 다 안다고 생각하면 안 되는 것 같습니다. 가족일수록 더 많이 물어보고요. 내가 당신을 다 알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고요. 거기서부터 대화를 시작하는 게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한 가족의 좋은 구성원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질문을 하면서 이 소설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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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분히 대화하고 있나요?…‘가녀장의 시대’ 이슬아 작가가 말하는 화목한 가정
    • 입력 2022-12-03 07:00:40
    취재K

※ [주말& 책] 매주 토요일, 책을 소개합니다.

할아버지가 손녀에게 붓글씨를 가르칩니다. 사자소학 첫 구절을 화선지에 써 내려갑니다.

父生我身 母鞠吾身

부생아신 모국오신. ‘아버지 내 몸을 낳으시고 어머니가 내 몸을 기르셨느니라’, 뜻풀이를 합니다. 할아버지의 얘기에 어린 손녀는 갸우뚱합니다. ‘아버지가 나를 낳았다?’, 손녀는 의문이 생깁니다.

“엄마가 저 낳았는데요.”

할아버지가 나름대로 설명을 해줍니다.

“아빠 없었으면 너는 태어나지도 못했어.”

이게 무슨 말인지 어린 손녀는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따져본다면, 엄마 없었으면 태어날 꿈도 꾸지 못했을 테니까요. 손녀가 다시 의문을 제기합니다. 할아버지는 이제, 씨앗과 땅의 비유를 들면서 조금 더 쉽게 풀어주려 합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궁금증이 가시지 않은 손녀도 한마디 합니다 .

“그치만 씨앗도 땅이 없으면......”

할아버지는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서둘러 다음 문장으로 넘어갑니다.

이슬아 작가의 소설 ‘가녀장의 시대’에 나오는 일화입니다. 소설의 첫 번째 장에 나옵니다. 제목만 보면 ‘가녀장’의 얘기를 다루고 있지만, 소설은 ‘가부장’의 얘기로 시작합니다. 사실 대부분 사람에게 익숙하거나 익숙했던 단어는 가녀장이 아니라 가부장입니다.

표준국어대사전은 가부장을 아래와 같이 풀이합니다.

가부장: 봉건 사회에서, 가장권(家長權)의 주체가 되는 사람. 가족에 대하여 절대적인 권력을 가졌다.

사전은 가부장은 가장권의 주체가 되는 ‘사람’이라고 설명했지만, 가부장의 ‘부’가 한자로 ‘아버지부’ 자이기도 해서 가부장이라는 단어를 듣게 되면 흔히 아버지나 할아버지처럼 남성을 떠올리고는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가장권’의 주체가 반드시 아버지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슬아 작가의 물음도 이 지점에서 비롯됩니다. 딸이 진정한 의미의 가장이 되면 집안은 어떤 풍경이 될까? 작가는 집안 생계를 책임져 온 자신의 경험 위에 상상력을 펼쳐 소설을 씁니다. 그렇게 세상에 나온 소설이 ‘가녀장의 시대’입니다. 주인공의 이름도 ‘슬아’입니다. 작가와 같습니다. 소설 속 슬아 씨는 집안의 기둥입니다. 작은 출판사를 운영하는데, 직원은 어머니, 아버지입니다. 단순히 딸의 일을 조금 도와주는 정도가 아니라, 진짜로 여러 일을 하면서 대표인 딸로부터 급여를 받습니다. 가정을 이끌고, 가정의 기둥인 소설 속 슬아는 말 그대로 가‘부’장이 아니라 가‘녀’장인 셈입니다.

지난달 KBS 취재진을 만난 이슬아 작가는, 가녀장이라는 이름에 관해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가부장제 체제의 역사는 오래되었잖아요. 그런데 알게 모르게 여성 가장 체제로 운영되던 가족도 많았던 것 같아요. 그중에서도 딸들이 경제권을 가진 집도 있었는데, 따로 이름이 붙여졌던 적이 없으니까 그 딸들을 뭐라고 부를지, 혹은 어떻게 대우하면 좋을지, 적절한 말이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가녀장’이라는 이름을 소개하고 싶었어요.”


가부장과 달리 가녀장은 국어사전에 나오지 않습니다. 가녀장이 사전에 올라간다면 어떻게 정의되는 게 좋을지 작가에게 물어봤습니다. 이슬아 작가는 가부장이 그러하듯이 가녀장 또한 단순히 생계를 책임지는 딸을 뜻하는 것은 아닐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딸이 집안의 윤리적 기준까지 제시하는, 그런 가정이 될 것 같다고 설명했습니다.

“가녀장은 한 가정의 딸이 경제적 토대와 윤리적 토대를 마련하는 체제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가녀장이 된다는 것은 딸이 단순히 돈만 벌어오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가족의 크고 작은 대소사에서 어떤 결정을 할 수 있는 권한 또한 가진다는 것을 뜻하니까요. 그렇기에 도덕적, 윤리적 잣대 같은 것도 함께 마련하는 주체라고 생각합니다. 훌륭한 아버지들이나 어머니들이 그렇게 하셨듯이 가녀장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소설은 한 편의 가족드라마 같은 얘기를 담고 있습니다. 한두 개의 큰 사건이 일어나면서 소설이 전개된다기보다는, 대다수 가정의 모습이 그러하듯이 작지만 무시할 수는 없는 갖가지 사건들이 연이어 계속되면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그래서 웃음 속에 여운이 남는 시트콤 같기도 합니다. 이슬아 작가는 ‘가족 이야기도 무겁게 쓰려면 한없이 무겁게 쓸 수도 있겠지만, 명랑하게 저항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최대한 재미있게 쓰려고 했다’고 밝혔습니다.

소설은 예전부터 사용해 와서, 당연하게 생각하고는 했던 단어에 관해서도 새로운 관점을 보여줍니다. ‘가녀장의 시대’에서는 가부장이 ‘가녀장’이 되는 것은 물론, 부모는 ‘모부’로 표현됩니다. 흔히들 ‘어머니, 아버지’라고 말하는데,한자어로는 왜 ‘모부’가 아닌 ‘부모’라고 표현하는 것일까. 소설은 작가가 말한 것처럼 명랑하게 저항합니다. 소설 ‘가녀장의 시대’에는 모부가 등장하는 겁니다.

슬아는 두 명의 직원을 두었다. 바로 복희와 웅이다. 슬아의 모부이기도 하다.

작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부모님’이란 말이 사실 훨씬 많이 쓰여왔는데, 모와 부를 똑같이 평등하게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순서를 한번 균형상 바꿔봐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부모라 표현되며) 늘 아버지 다음 자리에 오던 엄마의 호명을 한번 앞으로 가져오면 어떨까 생각해서 바꿔 보았습니다.”

그러면서 ‘가부장제’라는 것은 남성에게도 억압으로 작용한 면이 있다고 밝혔습니다. 가부장이 되어 권한이 커질수록 책임도 커지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가부장제라는 게 남자한테도 어떤 억압이었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지난 시대의 아버지 가장들도 많은 고생을 해오셨잖아요. 그런데 그들에게 어떤 성 역할이 강요되는 게 당연히 남자에게도 힘들 수 있는 일인 것 같고요. 그래서 우리 모두 성별에서 잠시 해방되면 어떨까, 그런 상상을 해봤습니다.”

그렇다면, ‘명랑한 저항’을 얘기하는 이슬아 작가가 꿈꾸는 이상향은 가녀장의 세상일까요?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가녀장조차 낡은 단어가 되는 시대, 작가가 진정으로 꿈꾸는 세상입니다.

“가녀장의 시대가 왔으면 하는 염원을 담아서 책 제목을 정했지만, 가녀장의 시대도 종착지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당연히 유토피아도 아니고요. 어떤 과도기라고 여겨집니다. 제가 정말로 원하는 시대는 가녀장이라는 말조차 낡아진 시대가 아닐까 싶습니다. 죽기 전에 살아보고 싶은 시대는 가녀장도 낡은 개념이 되는 시대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가녀장조차 낡은 개념이 되는 시대를 꿈꾸는 이슬아 작가, 그가 생각하는 화목한 가정은 어떤 모습인지 물어봤습니다. 작가는 아래와 같이 답했습니다.

“가족은 서로 간에 너무 가깝기 때문에, 오히려 그래서 무례한 실수를 할 수 있잖아요. 소설 속 인물들도 그런 사실을 깨닫게 되는 거죠. 무엇보다 내가 내 가족을 다 안다고 생각하면 안 되는 것 같습니다. 가족일수록 더 많이 물어보고요. 내가 당신을 다 알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고요. 거기서부터 대화를 시작하는 게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한 가족의 좋은 구성원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질문을 하면서 이 소설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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