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 위험 여전, 나라도 알려야” 트라우마 있지만 인터뷰 하는 이유

입력 2022.12.10 (07:00) 수정 2022.12.10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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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하(62) 씨는 경북 봉화군 아연 광산 매몰 사고 열흘째인 11월 4일 고립 221시간 만에 동료들의 구조작업끝에  기적적으로 살아 돌아왔다.박정하(62) 씨는 경북 봉화군 아연 광산 매몰 사고 열흘째인 11월 4일 고립 221시간 만에 동료들의 구조작업끝에 기적적으로 살아 돌아왔다.

22년 10월 26일 오후 6시 경북 봉화의 아연광산이 무너졌다. 두명의 광부가 지하 190미터의 어둠 속에 갇혔다. 한 명은 경력 27년의 베테랑 광부 박정하(62)씨, 다른 한 명은 작업 4일밖에 안된 초보 광부 박장건(56)씨였다. 빛 한 줄기 들어오지 않은 칠흙같은 어둠이었다. 헤드렌턴을 켜고 주위를 둘러봤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괭이 두 자루와 붕락을 방지하기 위해 갖고 들어온 목재, 커피믹스 한 움큼, 그리고 커피포트 한 개가 전부였다. 불을 피우고 커피포트에 천정에서 흘러내린 물을 끓였다. 커피믹스를 타 허기를 견뎠다. 그렇게 버틴지 닷새째 되는 날, 멀리서 작은 발파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아! 동료들이 우리를 구하러 오는구냐."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죽음의 공포가 점점 더 밀려왔지만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동료들에 대한 믿음이었다. 그렇게 고립 221시간 열흘째 되던 날 막힌 곳이 똟리면서 동료의 목소리가 들렸다. "정하 형님!". 어둠을 뚫고 달려온 동료와 부둥켜 안고 펑펑 울었다. " 아 살았다." 그렇게 기적적으로 살아나온 것이 11월 4일, 어느덧 한 달이 넘었다. 박정하씨는 여전히 해가지면 불안해지고 새벽에 잠을 깨 방 여기저기를 다니면서 전등을 켠다. 트라우마는 이제 시작이다. 고통스럽다고 한다. 하지만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한다. 지금도 지하 수백미터에서 일하는 동료광부들이 같은 사고를 당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나서야 한다고 말한다. 무엇이 문제이고 무엇을 고쳐야 하는지를 알려야 한다. 그것이 해야 할 일이기 때문에 언론인터뷰에 응하고 있다고 말한다. 힘들지만 그것이 자신을 구해준 동료들을 위해 해야 할 일이라고 믿는다.

인터뷰 동영상은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5620715 에서 볼 수 있습니다.


Q. 구조된 지 40일 가까이 됐는데 요즘은 어떻게 지내시나요?

박정하 : 쉬면서 치료받고 있죠. 간간이 언론사에서 인터뷰요청 들어오면 응하고 있죠. 또 그동안 집에 쌓였던 일들이 많아요. 집을 비워놓고 있다 보니까. 그래서 집 손질도 하고 있고요. 병원 갈 시간이면 병원도 다니면서 이렇게 지내고 있죠.

Q. 열흘 가까이 갇혀 있었는데 동료들이 구조를 중단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은 없었나요?

박정하 : 저는 동료들은 끝까지 믿었어요. 같이 있던 친구는 “혹시 우리를 그냥 죽기를 기다리고 내버려 두는 거 아니냐.” 라는 걱정을 하더라고요. 그런데 저는 절대 그런 일은 없으리라는 것을 믿었어요. 왜냐하면, 광부들의 동료애는 남달리 끈끈한 데가 있어요. 광부생활을 하다 보면 일 끝나고 나오면 숙소에 전부 모여 앉아서 삼겹살에 소주 한 잔을 먹더라도 힘들었던 얘기밖에 안 하거든요. 막장의 상태가 어땠는데 오늘 큰일 날 뻔했다. 이런 이야기들을 많이 하거든요. 그러면서 정이 쌓여가는 거죠. 저도 동료들이 끝까지 구조하러 올 것이다.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올 것이라는 믿음을 버리지 않고 있었죠.

■ 동료들 끝까지 믿어, 광부의 동료애는 남달리 끈끈해

Q. 동료들이 구조 작업을 하고 있다는 것을 언제쯤 아셨나요?

박정하 : 고립된 지 5일째 되는 날이었죠. 4일째까지 나름대로 탈출구를 찾아보려고 괭이 두 개 가지고 한 10 미터 정도 팠어요. 관통해서 안쪽을 확인해보니까 붕락이 많이 됐더라고요. 더는 먹는 것도 없고 체력도 완전히 고갈된 상태였죠. 그걸 확인을 하고 거기서 철수를 했죠. 이제 여기는 가능성이 없다 하고 철수를 하고 5일째 되던 날부터 무너진 곳 위쪽에서 작지만 ‘빵빵’하는 발파 소리가 계속 들리더라고요. 그래서 구조작업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죠. 그때 희망을 좀 많이 가졌죠.


Q. 요즘도 사고에 따른 후유증 (트라우마)가 남아 있나요?

박정하 : 해지고 어두워지면 불안감이 밀려와요. 잠들기 전에 환청도 들리고 자가 깨기를 반복하면서 새벽 3시 전이면 꼭 눈을 뜨게 돼요. 그 뒤로는 잠이 안 와요. 어두우니까 이 방 저 방 돌아다니면서 전등 다 켜요. 어두운 게 싫으니까요. 이런 게 바로 ‘트라우마’라는 걸 실감을 하고 있죠, 어쨌든 좀 적극적으로 치료해서 회복되어야 하는데 걱정이 많이 되죠.

■ 트라우마 있지만, 필요하다면 발 벗고 나서서 구조 활동 할 것

Q. ‘트라우마’ 가 남아있는데 혹시 동료들이 매몰되고 본인이 구조하러 들어가야 하는 상황이 된다면 들어가실 수 있을 것 같나요?

박정하 : 트라우마가 있고 없고는 다른 문제죠. 나도 동료들의 도움으로 살아나올 수 있었는데 내 동료가 그 안에 갇혀 있다는데 제가 아무리 트라우마가 있다 하더라도 발 벗고 나서서 구조 활동을 해야죠. 그게 도리 아니겠습니까.

인터뷰는 과거 탄광의 생활상을 전시하고 있는 강원도 정선군 사북읍 뿌리관에서 진행됐다.인터뷰는 과거 탄광의 생활상을 전시하고 있는 강원도 정선군 사북읍 뿌리관에서 진행됐다.

Q. 이번 사고는 우연한 것이 아니라 언젠가 일어날 수 있는 사고였다고 보시나요?

박정하 : 제가 맨 처음 광부생활을 할 때가 82년도였죠. 하지만 4차 산업 혁명 시대를 맞이하고 있는 지금도 80년대 초반의 채굴방식을 그대로 이어가고 있어요. 그래서 갱내에서 일하는 광부들은 여전히 항상 위험에 노출되어 있죠. 갱도가 거미줄처럼 얽혀 있어요. 좌로 갔다 우로 갔다. 밑으로 갔다. 위로 올라갔다. 이런 식으로 막 얽혀 있죠. 사용하지 않는 갱도들도 많이 있고요. 사용하지 않는 갱도들이 무너질 수 있는 위험은 항상 있죠. 그런데 광부들은 그 갱도를 항상 지나가면서 작업을 하거든요. 그나마 대한석탄공사에서 운영하는 탄광들은 기계화를 많이 해서 광부들이 힘들지 않게 일하기도 하지만 개인이 운영하는 광산은 그렇지 못해요. 왜냐하면, 갱내에 기계화 시설을 설치하려면 갱도 확장이 필요한데 그만큼 돈이 더 들거든요. 그러니 지금도 예전의 원시적인 방법으로 채굴하고 있다고 봐야죠, 이번에 제가 겪은 사고도 안전조치가 충분히 이뤄졌다면 예방될 수 있었던 사고였어요. 열흘 동안 고립돼서 고생을 안 해도 될 수 있는 그런 사고였죠.

■ 40년이 지났지만 여전한 작업방식, 안전조치 있었다면 예방될 수 있었던 사고

Q. 관계 당국에서 안전 관련 규제를 해서 시설기준을 맞추라고 할 수 있는 것 아닌가요?

박정하 : 우리나라가 지하자원이 풍부한 나라도 아니고, 지하자원 매장량이 한정된 양밖에 없잖아요. 그런데 시설기준 못 맞췄다고 채굴채광을 못 하게 하고 시설을 다 갖춰야만 허가를 내준다고 하면 누가 그 많은 돈을 투자해서 채광하겠습니까. 결국, 생산량이 충분해야 하는데 생산량이 그렇게 따라주느냐 이거죠.

Q. 구조적인 문제를 갖고 있는 거네요. 이런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없나요?

박정하 : 사업주 입장에서는 안전장치를 완벽하게 갖추고 작업하려면 거기에 따른 비용이 들잖아요. 인건비가 더 들어가야 하고 자재도 또 더 들어가야 하고, 그러니까 안전에 소홀해질 수밖에 없는 거죠. 정부가 좀 어느 정도 예산지원을 해서 안전조치가 미흡한 부분에 대해서 개선할 수 있다고 봅니다. 정부가 어느 정도 보조금을 줄 테니 회사에서도 부담해라 하는 방법도 있을 수 있고요. 제가 지금 이렇게 인터뷰하는 것도 아직 힘들지만 이런 인터뷰라도 하지 않고 그냥 끝낸다면 봉화광산 고립사고는 그냥 그걸로 매듭지어지고 말거라는 생각이 들죠. 그래서 언론매체를 통해서라도 이런 실상들을 좀 알리고 안전 대책들이 조속히 좀 마련되면 좋겠다는 바람이죠.

Q. 이런 안전 문제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힘들게 광부 일을 하시는 분들이 있는 것으로 아는데

박정하 : 80년대 제가 초반에 여기 광부일 시작할 때만 해도 임금이 좋아서 시작했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완전히 달라요. 제가 사고 나기 전에 하루에 15만 7천 원을 받았어요. 오전 8시부터 오후 4시까지를 갑방이라고 하고, 오후 4시부터 12시까지 일하는 것을 을방이라고 해요. 그러면 아침 8시부터 밤 12시까지 작업할 수 있어요. 열여섯 시간을 일하는 거죠. 그러면 31만 4천 원을 받아요. 그런데 이렇게 한 달에 12일에서 15일 일할 수 있어요. 그렇지 일하지 않으면 돈이 안 되니까 이렇게 일하는데 너무 저임금이죠. 도시 근로자들 임금하고 비교하면 그 전에는 광산 근로자가 배 이상 많았는데 지금은 역전됐죠. 광산 근로자 임금이 도시 근로자 임금의 반 인거죠.

Q. 열악한 환경이고 급여도 높지 않다면 다른 일 하실 수도 있는 거 아닌가요?

박정하 : 배운 것이 이거잖아요. 사고가 난 회사도 거의 60대 이상이에요. 70대도 계세요. 제가 광부일 시작할 때만 해도 젊은 사람들이 많이 왔어요. 다른 직종에 비해서 임금이 높았기 때문에요. 지금은 임금이 적으니까 안 와요. 젊은 사람들이 간혹 와도 며칠을 못 견디고 그냥 가요. 그러니까 이 광산기술을 전수 받을 수 있는 사람이 없죠. 이것도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거든요. 천공하고 발파하고 실어내고 하는 그런 것도 상당히 기술이 필요한데 배울 수 있는 인력 자체가 나타나질 않으니까 지금 있는 사람들이 할 수밖에 없거든요. 이제 지금 일하는 사람들이 손 털고 광산 일 안 하면 이제는 광산 하고 싶어도 못하는 거죠. 광산사업자들은 광산기술자를 못 구해서 사업을 못 하게 되겠죠.

■ 죽음 대비하는 순간에 구조돼, 끝까지 희망 놓지 않는 마음가짐이 제일중요

Q. 이태원 참사로 국민이 힘들어할 때 구조되시면서 작은 희망을 주셨는데 국민에게 연말을 맞아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박정하 : 구조돼서 나와서 응급실에서 이태원 참사 소식을 접하게 됐어요. 이태원 참사가 참 큰 사고였잖아요. 그런데 이제 저희 일까지 겹쳐서... 어쨌든 저희는 구사일생으로 살아서 나왔는데 너무나 많은 국민이 시름에 빠지셨잖아요. 그런데 저희 둘이 어쨌든 구조가 돼서 나오면서 조금 위로가 됐다는 그런 얘기를 들었죠. 저희도 마지막에는 희망이 없으니 죽음을 대비하자는 얘기를 하는 순간 두려움, 공포가 한꺼번에 밀려오면서 감당할 수 없을 정도였죠. 하지만 그래도 마지막까지 “우리가 지금 죽지는 않았다. 혹시 아느냐? 밑에서 뭐가 '뻥' 하고 올라올지 옆에서 튀어나올지 지금 분명히 애를 쓰고 구조작업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 얘기를 하고 난 다음에 두세 시간 지났을 때 진짜로 ‘빵’하는 소리가 나고, 동료 한 명이 “정하 형님” 하면서 막 달려와서 부둥켜안고 울더라고요. 바로 그거라고 생각해요.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희망 놓지 않는 마음가짐이 제일 중요하다는 그런 생각을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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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고 위험 여전, 나라도 알려야” 트라우마 있지만 인터뷰 하는 이유
    • 입력 2022-12-10 07:00:13
    • 수정2022-12-10 07:00:57
    취재K
박정하(62) 씨는 경북 봉화군 아연 광산 매몰 사고 열흘째인 11월 4일 고립 221시간 만에 동료들의 구조작업끝에  기적적으로 살아 돌아왔다.
22년 10월 26일 오후 6시 경북 봉화의 아연광산이 무너졌다. 두명의 광부가 지하 190미터의 어둠 속에 갇혔다. 한 명은 경력 27년의 베테랑 광부 박정하(62)씨, 다른 한 명은 작업 4일밖에 안된 초보 광부 박장건(56)씨였다. 빛 한 줄기 들어오지 않은 칠흙같은 어둠이었다. 헤드렌턴을 켜고 주위를 둘러봤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괭이 두 자루와 붕락을 방지하기 위해 갖고 들어온 목재, 커피믹스 한 움큼, 그리고 커피포트 한 개가 전부였다. 불을 피우고 커피포트에 천정에서 흘러내린 물을 끓였다. 커피믹스를 타 허기를 견뎠다. 그렇게 버틴지 닷새째 되는 날, 멀리서 작은 발파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아! 동료들이 우리를 구하러 오는구냐."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죽음의 공포가 점점 더 밀려왔지만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동료들에 대한 믿음이었다. 그렇게 고립 221시간 열흘째 되던 날 막힌 곳이 똟리면서 동료의 목소리가 들렸다. "정하 형님!". 어둠을 뚫고 달려온 동료와 부둥켜 안고 펑펑 울었다. " 아 살았다." 그렇게 기적적으로 살아나온 것이 11월 4일, 어느덧 한 달이 넘었다. 박정하씨는 여전히 해가지면 불안해지고 새벽에 잠을 깨 방 여기저기를 다니면서 전등을 켠다. 트라우마는 이제 시작이다. 고통스럽다고 한다. 하지만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한다. 지금도 지하 수백미터에서 일하는 동료광부들이 같은 사고를 당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나서야 한다고 말한다. 무엇이 문제이고 무엇을 고쳐야 하는지를 알려야 한다. 그것이 해야 할 일이기 때문에 언론인터뷰에 응하고 있다고 말한다. 힘들지만 그것이 자신을 구해준 동료들을 위해 해야 할 일이라고 믿는다.

인터뷰 동영상은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5620715 에서 볼 수 있습니다.


Q. 구조된 지 40일 가까이 됐는데 요즘은 어떻게 지내시나요?

박정하 : 쉬면서 치료받고 있죠. 간간이 언론사에서 인터뷰요청 들어오면 응하고 있죠. 또 그동안 집에 쌓였던 일들이 많아요. 집을 비워놓고 있다 보니까. 그래서 집 손질도 하고 있고요. 병원 갈 시간이면 병원도 다니면서 이렇게 지내고 있죠.

Q. 열흘 가까이 갇혀 있었는데 동료들이 구조를 중단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은 없었나요?

박정하 : 저는 동료들은 끝까지 믿었어요. 같이 있던 친구는 “혹시 우리를 그냥 죽기를 기다리고 내버려 두는 거 아니냐.” 라는 걱정을 하더라고요. 그런데 저는 절대 그런 일은 없으리라는 것을 믿었어요. 왜냐하면, 광부들의 동료애는 남달리 끈끈한 데가 있어요. 광부생활을 하다 보면 일 끝나고 나오면 숙소에 전부 모여 앉아서 삼겹살에 소주 한 잔을 먹더라도 힘들었던 얘기밖에 안 하거든요. 막장의 상태가 어땠는데 오늘 큰일 날 뻔했다. 이런 이야기들을 많이 하거든요. 그러면서 정이 쌓여가는 거죠. 저도 동료들이 끝까지 구조하러 올 것이다.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올 것이라는 믿음을 버리지 않고 있었죠.

■ 동료들 끝까지 믿어, 광부의 동료애는 남달리 끈끈해

Q. 동료들이 구조 작업을 하고 있다는 것을 언제쯤 아셨나요?

박정하 : 고립된 지 5일째 되는 날이었죠. 4일째까지 나름대로 탈출구를 찾아보려고 괭이 두 개 가지고 한 10 미터 정도 팠어요. 관통해서 안쪽을 확인해보니까 붕락이 많이 됐더라고요. 더는 먹는 것도 없고 체력도 완전히 고갈된 상태였죠. 그걸 확인을 하고 거기서 철수를 했죠. 이제 여기는 가능성이 없다 하고 철수를 하고 5일째 되던 날부터 무너진 곳 위쪽에서 작지만 ‘빵빵’하는 발파 소리가 계속 들리더라고요. 그래서 구조작업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죠. 그때 희망을 좀 많이 가졌죠.


Q. 요즘도 사고에 따른 후유증 (트라우마)가 남아 있나요?

박정하 : 해지고 어두워지면 불안감이 밀려와요. 잠들기 전에 환청도 들리고 자가 깨기를 반복하면서 새벽 3시 전이면 꼭 눈을 뜨게 돼요. 그 뒤로는 잠이 안 와요. 어두우니까 이 방 저 방 돌아다니면서 전등 다 켜요. 어두운 게 싫으니까요. 이런 게 바로 ‘트라우마’라는 걸 실감을 하고 있죠, 어쨌든 좀 적극적으로 치료해서 회복되어야 하는데 걱정이 많이 되죠.

■ 트라우마 있지만, 필요하다면 발 벗고 나서서 구조 활동 할 것

Q. ‘트라우마’ 가 남아있는데 혹시 동료들이 매몰되고 본인이 구조하러 들어가야 하는 상황이 된다면 들어가실 수 있을 것 같나요?

박정하 : 트라우마가 있고 없고는 다른 문제죠. 나도 동료들의 도움으로 살아나올 수 있었는데 내 동료가 그 안에 갇혀 있다는데 제가 아무리 트라우마가 있다 하더라도 발 벗고 나서서 구조 활동을 해야죠. 그게 도리 아니겠습니까.

인터뷰는 과거 탄광의 생활상을 전시하고 있는 강원도 정선군 사북읍 뿌리관에서 진행됐다.
Q. 이번 사고는 우연한 것이 아니라 언젠가 일어날 수 있는 사고였다고 보시나요?

박정하 : 제가 맨 처음 광부생활을 할 때가 82년도였죠. 하지만 4차 산업 혁명 시대를 맞이하고 있는 지금도 80년대 초반의 채굴방식을 그대로 이어가고 있어요. 그래서 갱내에서 일하는 광부들은 여전히 항상 위험에 노출되어 있죠. 갱도가 거미줄처럼 얽혀 있어요. 좌로 갔다 우로 갔다. 밑으로 갔다. 위로 올라갔다. 이런 식으로 막 얽혀 있죠. 사용하지 않는 갱도들도 많이 있고요. 사용하지 않는 갱도들이 무너질 수 있는 위험은 항상 있죠. 그런데 광부들은 그 갱도를 항상 지나가면서 작업을 하거든요. 그나마 대한석탄공사에서 운영하는 탄광들은 기계화를 많이 해서 광부들이 힘들지 않게 일하기도 하지만 개인이 운영하는 광산은 그렇지 못해요. 왜냐하면, 갱내에 기계화 시설을 설치하려면 갱도 확장이 필요한데 그만큼 돈이 더 들거든요. 그러니 지금도 예전의 원시적인 방법으로 채굴하고 있다고 봐야죠, 이번에 제가 겪은 사고도 안전조치가 충분히 이뤄졌다면 예방될 수 있었던 사고였어요. 열흘 동안 고립돼서 고생을 안 해도 될 수 있는 그런 사고였죠.

■ 40년이 지났지만 여전한 작업방식, 안전조치 있었다면 예방될 수 있었던 사고

Q. 관계 당국에서 안전 관련 규제를 해서 시설기준을 맞추라고 할 수 있는 것 아닌가요?

박정하 : 우리나라가 지하자원이 풍부한 나라도 아니고, 지하자원 매장량이 한정된 양밖에 없잖아요. 그런데 시설기준 못 맞췄다고 채굴채광을 못 하게 하고 시설을 다 갖춰야만 허가를 내준다고 하면 누가 그 많은 돈을 투자해서 채광하겠습니까. 결국, 생산량이 충분해야 하는데 생산량이 그렇게 따라주느냐 이거죠.

Q. 구조적인 문제를 갖고 있는 거네요. 이런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없나요?

박정하 : 사업주 입장에서는 안전장치를 완벽하게 갖추고 작업하려면 거기에 따른 비용이 들잖아요. 인건비가 더 들어가야 하고 자재도 또 더 들어가야 하고, 그러니까 안전에 소홀해질 수밖에 없는 거죠. 정부가 좀 어느 정도 예산지원을 해서 안전조치가 미흡한 부분에 대해서 개선할 수 있다고 봅니다. 정부가 어느 정도 보조금을 줄 테니 회사에서도 부담해라 하는 방법도 있을 수 있고요. 제가 지금 이렇게 인터뷰하는 것도 아직 힘들지만 이런 인터뷰라도 하지 않고 그냥 끝낸다면 봉화광산 고립사고는 그냥 그걸로 매듭지어지고 말거라는 생각이 들죠. 그래서 언론매체를 통해서라도 이런 실상들을 좀 알리고 안전 대책들이 조속히 좀 마련되면 좋겠다는 바람이죠.

Q. 이런 안전 문제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힘들게 광부 일을 하시는 분들이 있는 것으로 아는데

박정하 : 80년대 제가 초반에 여기 광부일 시작할 때만 해도 임금이 좋아서 시작했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완전히 달라요. 제가 사고 나기 전에 하루에 15만 7천 원을 받았어요. 오전 8시부터 오후 4시까지를 갑방이라고 하고, 오후 4시부터 12시까지 일하는 것을 을방이라고 해요. 그러면 아침 8시부터 밤 12시까지 작업할 수 있어요. 열여섯 시간을 일하는 거죠. 그러면 31만 4천 원을 받아요. 그런데 이렇게 한 달에 12일에서 15일 일할 수 있어요. 그렇지 일하지 않으면 돈이 안 되니까 이렇게 일하는데 너무 저임금이죠. 도시 근로자들 임금하고 비교하면 그 전에는 광산 근로자가 배 이상 많았는데 지금은 역전됐죠. 광산 근로자 임금이 도시 근로자 임금의 반 인거죠.

Q. 열악한 환경이고 급여도 높지 않다면 다른 일 하실 수도 있는 거 아닌가요?

박정하 : 배운 것이 이거잖아요. 사고가 난 회사도 거의 60대 이상이에요. 70대도 계세요. 제가 광부일 시작할 때만 해도 젊은 사람들이 많이 왔어요. 다른 직종에 비해서 임금이 높았기 때문에요. 지금은 임금이 적으니까 안 와요. 젊은 사람들이 간혹 와도 며칠을 못 견디고 그냥 가요. 그러니까 이 광산기술을 전수 받을 수 있는 사람이 없죠. 이것도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거든요. 천공하고 발파하고 실어내고 하는 그런 것도 상당히 기술이 필요한데 배울 수 있는 인력 자체가 나타나질 않으니까 지금 있는 사람들이 할 수밖에 없거든요. 이제 지금 일하는 사람들이 손 털고 광산 일 안 하면 이제는 광산 하고 싶어도 못하는 거죠. 광산사업자들은 광산기술자를 못 구해서 사업을 못 하게 되겠죠.

■ 죽음 대비하는 순간에 구조돼, 끝까지 희망 놓지 않는 마음가짐이 제일중요

Q. 이태원 참사로 국민이 힘들어할 때 구조되시면서 작은 희망을 주셨는데 국민에게 연말을 맞아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박정하 : 구조돼서 나와서 응급실에서 이태원 참사 소식을 접하게 됐어요. 이태원 참사가 참 큰 사고였잖아요. 그런데 이제 저희 일까지 겹쳐서... 어쨌든 저희는 구사일생으로 살아서 나왔는데 너무나 많은 국민이 시름에 빠지셨잖아요. 그런데 저희 둘이 어쨌든 구조가 돼서 나오면서 조금 위로가 됐다는 그런 얘기를 들었죠. 저희도 마지막에는 희망이 없으니 죽음을 대비하자는 얘기를 하는 순간 두려움, 공포가 한꺼번에 밀려오면서 감당할 수 없을 정도였죠. 하지만 그래도 마지막까지 “우리가 지금 죽지는 않았다. 혹시 아느냐? 밑에서 뭐가 '뻥' 하고 올라올지 옆에서 튀어나올지 지금 분명히 애를 쓰고 구조작업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 얘기를 하고 난 다음에 두세 시간 지났을 때 진짜로 ‘빵’하는 소리가 나고, 동료 한 명이 “정하 형님” 하면서 막 달려와서 부둥켜안고 울더라고요. 바로 그거라고 생각해요.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희망 놓지 않는 마음가짐이 제일 중요하다는 그런 생각을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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