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 타고 네팔 가는 101마리 젖소

입력 2022.12.22 (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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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소가 국경을 넘는 일은 잘 없다. 비행기를 타고선 더더욱 그렇다. 고(故) 정주영 회장의 방북 소 떼들은 트럭을 탔다. 오늘(22일) 우리 젖소 42마리가 아시아나항공 A350 기종을 타고 네팔로 떠난다. 대한민국 최초의 생우(生牛) 반출이다.

■ 젖소 수는 20배, 생산성은 10분의 1

세계 최빈국(1인당 GDP 1,223달러) 중 하나인 네팔은 낙농업이 GDP의 9%를 차지한다. 젖소가 750만 마리(우리는 39만 마리) 있지만, 생산성은 매우 떨어진다. 한국 젖소의 연간 평균 산유량은 1만㎏이 넘지만, 네팔 토착 젖소는 880㎏에 그친다. 농림축산식품부와 미국 비영리단체 '헤퍼코리아'는 네팔 낙농업 육성을 위해 젖소 101마리와 한국형 젖소 종자(종모우 2마리, 인공수정용 정액)를 주기로 했다. 민관 협력 개발원조사업(ODA)이다.

경기 화성시 검영시행장에서 네팔 출국 대기 중인 우리 젖소들 [헤퍼코리아 제공]경기 화성시 검영시행장에서 네팔 출국 대기 중인 우리 젖소들 [헤퍼코리아 제공]

젖소들은 네팔 수도 카트만두에서 150㎞ 떨어진 시골 마을에 정착한다. 50여 개 농가가 젖소를 받게 되는데, 첫 번째 암송아지와 가축관리 기술을 이웃에게 전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우리 젖소 전문가가 네팔에서 사육 기술을 전수하며 바이오가스 시설도 설치해 준다. 종모우 2마리와 정액으로 네팔 젖소의 유전적 개량 작업도 이뤄질 예정이다.

■ 반세기 전 도움받은 목장주의 보은

우리도 네팔처럼 젖소들을 지원받을 때가 있었다. 1952년부터 1976년까지 국제 사회 도움으로 젖소 약 900마리가 바다를 건너 한국 땅을 밟았다. 이런 젖소들은 우리가 일본·덴마크를 앞질러 현재 세계 5위 수준(우유 산유량 기준)의 축산 강국으로 발돋움하는 기틀이 됐다. 1962년 수송선을 타고 연세대학교에 기증된 소 10마리도 우리가 잘 아는 '연세우유'의 시초다.

1950년대 미국에서 원조를 받아 한국으로 들오는 젖소들과 가축들 [헤퍼코리아 제공]1950년대 미국에서 원조를 받아 한국으로 들오는 젖소들과 가축들 [헤퍼코리아 제공]

84살 이재복 씨는 미국에서 젖소를 받아 경북 안동에 1973년 젖소 농장을 세웠다. 이 씨가 쾌척한 젖소 한 마리도 오늘 네팔행 비행기를 탔다. 소 두 마리를 해외에서 받아 100여 마리 규모의 장호원목장을 일군 고(故) 최은영 목장주의 손자 최충희 씨도 네 마리를 기증했다. 이시돌목장의 경병희 대표는 "미국의 원조 분유를 먹고 자랐다"라면서 세 마리를 기꺼이 내놓았다.

한국전쟁 직후 미국에서 원조를 받은 젖소들과 한국 어린이들 [헤퍼코리아 제공]한국전쟁 직후 미국에서 원조를 받은 젖소들과 한국 어린이들 [헤퍼코리아 제공]

■ 모두의 참여가 기적으로

비행기를 탄 소들은 모두 생후 10개월 미만이다. 체고가 140㎝를 넘으면 특수 제작된 원목 우리에 실릴 수 없어서, 조금 덜 자란 소들로 엄선했다. 42마리 무게는 대략 10톤 정도. 사실 화물기에 소들을 더 실을 수도 있지만, 비행기 안에서 소들의 산소 흡입량·탄소 배출량을 계산해 42마리가 적당하다는 계산이 나왔다고 한다. 총 101마리가 네팔로 이동하려면 비행기가 몇 차례 더 떠야 한다.

아시아나항공의 A350 기종아시아나항공의 A350 기종

원래는 우크라이나가 소유한 일류신(러시아산) 항공기를 빌려 탈 생각이었다. 그러다 올해 초 전쟁이 터지면서 계획이 무산됐다. 난항에 빠졌을 때 아시아나항공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코로나19'로 승객 운송이 중단되면서 화물기로 개조했던 여객기가 한 대 남아 있었던 것이다. 구제역 탓에 살아있는 소의 항공 운송은 극히 제한되지만, 농림축산식품부는 검역 절차와 예방 접종, 증명서 발급에 힘을 보탰다.

■ "받은만큼 돌려주는 기쁨"

'노아의 방주'를 떠올리게 하는 이번 기부는 공교롭게도 성탄절을 바로 앞두고 이뤄졌다. 정황근 농식품부 장관은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주는 나라로 성장한 우리 낙농업 위상을 나타낸다"라면서 “네팔 낙농 산업의 발전을 이루고 양국 간 우호 증진의 발판이 되길 기대한다"라고 말했다.

이른바 '국뽕'(과도한 애국주의)에 취할 필요까지는 없다. 하지만 누군가의 도움에 보답하려 노력하는 게 인간적 도리인 건 분명하다. 이혜원 헤퍼코리아 대표는 "네팔로 간 젖소들은 아이들에게 영양분을 제공하고, 가족의 경제적 자립 토대가 된다"라면서 "소중한 암소를 선뜻 기부해준 농가와 후원금을 주신 분들께 감사하다"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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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행기 타고 네팔 가는 101마리 젖소
    • 입력 2022-12-22 09:33:41
    취재K

살아있는 소가 국경을 넘는 일은 잘 없다. 비행기를 타고선 더더욱 그렇다. 고(故) 정주영 회장의 방북 소 떼들은 트럭을 탔다. 오늘(22일) 우리 젖소 42마리가 아시아나항공 A350 기종을 타고 네팔로 떠난다. 대한민국 최초의 생우(生牛) 반출이다.

■ 젖소 수는 20배, 생산성은 10분의 1

세계 최빈국(1인당 GDP 1,223달러) 중 하나인 네팔은 낙농업이 GDP의 9%를 차지한다. 젖소가 750만 마리(우리는 39만 마리) 있지만, 생산성은 매우 떨어진다. 한국 젖소의 연간 평균 산유량은 1만㎏이 넘지만, 네팔 토착 젖소는 880㎏에 그친다. 농림축산식품부와 미국 비영리단체 '헤퍼코리아'는 네팔 낙농업 육성을 위해 젖소 101마리와 한국형 젖소 종자(종모우 2마리, 인공수정용 정액)를 주기로 했다. 민관 협력 개발원조사업(ODA)이다.

경기 화성시 검영시행장에서 네팔 출국 대기 중인 우리 젖소들 [헤퍼코리아 제공]
젖소들은 네팔 수도 카트만두에서 150㎞ 떨어진 시골 마을에 정착한다. 50여 개 농가가 젖소를 받게 되는데, 첫 번째 암송아지와 가축관리 기술을 이웃에게 전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우리 젖소 전문가가 네팔에서 사육 기술을 전수하며 바이오가스 시설도 설치해 준다. 종모우 2마리와 정액으로 네팔 젖소의 유전적 개량 작업도 이뤄질 예정이다.

■ 반세기 전 도움받은 목장주의 보은

우리도 네팔처럼 젖소들을 지원받을 때가 있었다. 1952년부터 1976년까지 국제 사회 도움으로 젖소 약 900마리가 바다를 건너 한국 땅을 밟았다. 이런 젖소들은 우리가 일본·덴마크를 앞질러 현재 세계 5위 수준(우유 산유량 기준)의 축산 강국으로 발돋움하는 기틀이 됐다. 1962년 수송선을 타고 연세대학교에 기증된 소 10마리도 우리가 잘 아는 '연세우유'의 시초다.

1950년대 미국에서 원조를 받아 한국으로 들오는 젖소들과 가축들 [헤퍼코리아 제공]
84살 이재복 씨는 미국에서 젖소를 받아 경북 안동에 1973년 젖소 농장을 세웠다. 이 씨가 쾌척한 젖소 한 마리도 오늘 네팔행 비행기를 탔다. 소 두 마리를 해외에서 받아 100여 마리 규모의 장호원목장을 일군 고(故) 최은영 목장주의 손자 최충희 씨도 네 마리를 기증했다. 이시돌목장의 경병희 대표는 "미국의 원조 분유를 먹고 자랐다"라면서 세 마리를 기꺼이 내놓았다.

한국전쟁 직후 미국에서 원조를 받은 젖소들과 한국 어린이들 [헤퍼코리아 제공]
■ 모두의 참여가 기적으로

비행기를 탄 소들은 모두 생후 10개월 미만이다. 체고가 140㎝를 넘으면 특수 제작된 원목 우리에 실릴 수 없어서, 조금 덜 자란 소들로 엄선했다. 42마리 무게는 대략 10톤 정도. 사실 화물기에 소들을 더 실을 수도 있지만, 비행기 안에서 소들의 산소 흡입량·탄소 배출량을 계산해 42마리가 적당하다는 계산이 나왔다고 한다. 총 101마리가 네팔로 이동하려면 비행기가 몇 차례 더 떠야 한다.

아시아나항공의 A350 기종
원래는 우크라이나가 소유한 일류신(러시아산) 항공기를 빌려 탈 생각이었다. 그러다 올해 초 전쟁이 터지면서 계획이 무산됐다. 난항에 빠졌을 때 아시아나항공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코로나19'로 승객 운송이 중단되면서 화물기로 개조했던 여객기가 한 대 남아 있었던 것이다. 구제역 탓에 살아있는 소의 항공 운송은 극히 제한되지만, 농림축산식품부는 검역 절차와 예방 접종, 증명서 발급에 힘을 보탰다.

■ "받은만큼 돌려주는 기쁨"

'노아의 방주'를 떠올리게 하는 이번 기부는 공교롭게도 성탄절을 바로 앞두고 이뤄졌다. 정황근 농식품부 장관은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주는 나라로 성장한 우리 낙농업 위상을 나타낸다"라면서 “네팔 낙농 산업의 발전을 이루고 양국 간 우호 증진의 발판이 되길 기대한다"라고 말했다.

이른바 '국뽕'(과도한 애국주의)에 취할 필요까지는 없다. 하지만 누군가의 도움에 보답하려 노력하는 게 인간적 도리인 건 분명하다. 이혜원 헤퍼코리아 대표는 "네팔로 간 젖소들은 아이들에게 영양분을 제공하고, 가족의 경제적 자립 토대가 된다"라면서 "소중한 암소를 선뜻 기부해준 농가와 후원금을 주신 분들께 감사하다"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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