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시(詩)의 본질은 공감”…‘사랑의 세레나데’ 원태연의 귀환

입력 2022.12.24 (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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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눈물, 약속’으로 집약되는 서정시인 원태연. 그는 시의 본질이 ‘공감(共感)’이라고 했다. (사진=원태연 제공)‘사랑, 눈물, 약속’으로 집약되는 서정시인 원태연. 그는 시의 본질이 ‘공감(共感)’이라고 했다. (사진=원태연 제공)

■ 가끔가다 내 생각을 하는 '너에게 전화가 왔다'…20년 만에

'넌 가끔가다 / 내 생각을 하지 / 난 가끔가다 / 딴 생각을 해'
'손 끝으로 원을 그려봐 / 네가 그릴 수 있는 한 크게 / 그걸 뺀 만큼 널 사랑해'

1990~2000년대 솔직한 언어와 섬세한 감수성으로 동시대 독자들의 눈물샘을 자극했던 서정시인 원태연. 당시 '원태연 신드롬'이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그의 시집(詩集)들은 도합 '600만 부 판매'라는 진기록을 세우며 '베스트셀러'로 등극했는데요.

2002년 시집 《안녕》을 끝으로 불현듯 문학계에서 사라졌던 원 시인이 독자 곁으로 돌아왔습니다. 20년 만의 신작 《너에게 전화가 왔다》(은행나무)를 지난 11월 펴내면서 말입니다. 요즘 청년 세대에게는 유명 드라마 OST, 인기 대중 가요의 작사가로 익숙한 그가 다시 시를 쓰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한동안 시에게 많이 당했다. 당해도 싸다"고 말할 정도로 창작의 고통에 괴로워하면서도 끝내 펜을 놓지 않았던 시인. '외로워'라는 이름의 푸른 털의 고양이가 인사를 건네는, 그의 고요한 다락방 안으로 들어가봤습니다.

첫 시집 ‘넌 가끔가다 내 생각을 하지 난 가끔가다 딴 생각을 해’(왼쪽, 사진은 최근 특별판 표지)가 150만 부 판매고를 올리면서 일약 ‘스타 시인’이 된 원태연. 한동안 시를 놓고 있었던 그는, 지난달 20년 만의 신작 시집 ‘너에게 전화가 왔다’(오른쪽)로 문학계에 복귀했다. (사진=책 표지 갈무리)첫 시집 ‘넌 가끔가다 내 생각을 하지 난 가끔가다 딴 생각을 해’(왼쪽, 사진은 최근 특별판 표지)가 150만 부 판매고를 올리면서 일약 ‘스타 시인’이 된 원태연. 한동안 시를 놓고 있었던 그는, 지난달 20년 만의 신작 시집 ‘너에게 전화가 왔다’(오른쪽)로 문학계에 복귀했다. (사진=책 표지 갈무리)

■ '13개월 27일'간의 고투(苦鬪)... "시, 천장 깨고 잠 못 자니 나오더라"

지난 19일 오후 서울 서초동의 한 빌라 꼭대기 층, 원 시인의 집필실은 일반 가정집인 그곳 다락방 한편에 있었습니다. 천장이 낮아 로봇 청소기처럼 바퀴 달린 작은 의자를 타고 이동해야 했는데, 시인은 기자와 함께 마치 모험을 떠나는 기분인 듯 재밌어했습니다.

상아색 가디건 차림의 그는 창밖의 나목(裸木)을 가만히 바라보며 담뱃갑을 뒤적이더니, 이윽고 천장에 난 두 개의 구멍을 가리켰습니다. "여기 보세요. 나 참, 별짓 다 했지요?"

Q. 이게 시인의 머리로 뚫었다는 구멍들인가요.

"시가 너무 안 써져서요. 이틀인가는 잠도 한숨 못 잤어요. 입맛도 없어서 물만 먹었고요. 그러니까 시가 조금씩 나오더라고요. 제정신이 아니니까. 13개월 27일 동안 시에게 당했어요. 당해도 싸지."

20년 만에 펜을 잡은 시인은 머리로 천장을 뚫고 잠을 못 이루는 고통 끝에 작품을 쓸 수 있었다. (사진=원태연 제공)20년 만에 펜을 잡은 시인은 머리로 천장을 뚫고 잠을 못 이루는 고통 끝에 작품을 쓸 수 있었다. (사진=원태연 제공)

Q. 왜 그렇게까지 시 쓰기에 사력(死力)을 다하는가요.

"20년 만이잖아요, 제대로 된 새 시집을 펴낸 게. 20년 만에 편지를 쓰더라도 모든 정성을 기울이는데, 하물며 시는 어떻겠어요? 양심이 있어야죠. 양심 있는 시를 쓰고 싶었어요."

Q. 이번 시집에서 '한 페이지도 허투루 쓰지 않겠다'고 밝힌 것도 그 때문이겠군요. 30년 전부터 알고 지낸 독자에게 약속한 다짐이었다지요.

"원래는 '한 페이지도 허투루 넘길 수 없는 시'를 쓰겠다는 것이었는데, 그러면 너무 건방져 보이잖아요. (웃음) 다시 시를 쓰기까지, 그분(30년 지기 독자)이 제게 용기를 많이 줬어요. 예전에 제가 만난 여자친구와 이름이 똑같아서 기억하고 있었는데, 그분 언니까지 제 신작을 사서 읽고 있었다네요. 신기한 인연이지요."

■ "일곱 글자 시 한 편 완성 위해…9개월 동안 70번 넘게 고쳤다"

원태연 신작 ‘너에게 전화가 왔다’의 각 챕터 첫 페이지에는 그의 육필 원고(사진 왼쪽)가 삽화처럼 담겨 있다. (사진=은행나무 제공)원태연 신작 ‘너에게 전화가 왔다’의 각 챕터 첫 페이지에는 그의 육필 원고(사진 왼쪽)가 삽화처럼 담겨 있다. (사진=은행나무 제공)

'전화가 옵니다 / 당신입니다 / 겁도 없습니다 / 받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 시 '너에게 전화가 왔다'
'끊어진다 / 마음 / 이' - 시 '버퍼링'
'외롭다' - 시 '나뭇잎 뜯기'

원 시인의 신작 《너에게 전화가 왔다》에는 이처럼 짧으면서도 함축적인 시편(詩篇)들이 다수 수록돼 있습니다. 산문시와 세로쓰기, 한 글자씩 띄어쓰기, 시어(詩語)를 좌우로 엇갈리게 나열한 시 등 형식을 다양하게 변주한 작품들도 눈에 띄는데요. 그러나 시인은 해당 시편들을 "실험적으로 보이기 위해 의도하고 쓴 건 아니었다"고 강조합니다.

Q. 그래도 '원태연 스타일', 자신만의 작법(作法)은 있을 텐데요.

"저도 제 시들이 그렇게 짧게 될 줄 몰랐어요. 저는요, 제가 그만 쓸 때까지, 시가 매력적으로 보일 때까지 고치고 또 고쳐요. '버퍼링', 그 일곱 글자 시 한 편을 완성하기 위해 9개월 동안 70번 넘게 고쳤어요. 뭘 어떻게 적어봐도 도대체 버퍼링 같지가 않아서요. 퇴고한 원고들을 모으면 버퍼링으로만 시집 한 권을 낼 수 있을 정도죠. 그런데 신 기자는 제 시집에서 어떤 시가 가장 마음에 와닿았나요?"

Q. 저는 '나뭇잎 뜯기'가 좋았습니다. 제일 짧은 시지만, 제목과 본문이 일치돼 여운이 증폭되는 느낌을 받았거든요.

"그 시도 원래는 '외롭다 / 외롭지 않다 / 외롭다 / 외롭지 않다…'로 길게 이어지는 형식이었는데, 다 걷어내고 딱 한마디로 표현했어요. 저는 원고 인쇄하기 직전까지도 고쳐요."

시인은 “일곱 글자 시 한 편(버퍼링)을 완성하기 위해 70번 넘게 고쳤다”며 퇴고한 원고를 보여줬다. (사진=신승민 기자)시인은 “일곱 글자 시 한 편(버퍼링)을 완성하기 위해 70번 넘게 고쳤다”며 퇴고한 원고를 보여줬다. (사진=신승민 기자)

■ '대중문학가' '돈 많이 번 시인'이라는 시선들…"그래서라도 '간절히' '열심히' 쓰지 않았을까요?"

1992년 첫 시집 '넌 가끔가다~'가 150만 부 판매고를 올리면서 일약 '스타 시인'으로 거듭난 20대 청년 원태연. 이후 펴내는 시집마다 수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으며, 주요 시편들이 온·오프라인을 넘나들어 '사랑의 세레나데'로 인용되곤 했는데요.

'인기 작가'라는 휘황한 칭호의 이면에는, '감성시인' '대중문학가'라는 달갑지 않은 수식어가 따라붙었습니다. '돈 많이 번 시인'이라며 비꼬는 듯한 문학계 일각의 시선들도 시인의 마음을 아프게 했지요. 그는 "그 시절, 나를 보던 세상의 시선이 그랬다. '돈 벌려고 그렇게 쓴 거 아니다'라고 강하게 말하지 못한 게 아쉽다""첫 시집은 출판사에 모든 권리를 넘겨서 인세도 받지 못했지만, 책을 처음 내준 게 고마워서 지금까지도 사장님을 원망하지 않는다"고 털어놨습니다.

Q. 사랑을 비롯해 눈물, 그리움, 외로움, 너와 나 등 '원초적 감정에 기인한 주제어'들이 시 세계를 관통합니다. 그래서인지 때로는 작품성 면에서 '감상주의적'이라는 지적을 받기도 합니다. 문단 일각에서 본인을 '감성시인' '대중문학가'로 규정하는 것에 불만은 없는가요.

"시인으로 부르든 감성시인으로 부르든, 그냥 좀 놔뒀으면 좋겠어요. 저는 시인이 되려고 시를 쓰고 시집을 내는 게 아닌데요. 시 쓰기 자체는 고통스럽지만, 독자들의 반응에 보람을 느끼기 때문에 계속 쓰는 거예요. 어렸을 때 사격선수로도 활동하고 대학에서는 체육을 전공했지만, 그때도 항상 저는 무엇인가를 쓰고 있었어요. 지금도 시뿐 아니라 소설, 사전, 가사를 계속 쓰고 있어요…. 그리고, 그런 비판이 설득력을 가지려면 누군가 '이것이 진정한 시다'라고 지목하고 보여줘야죠. 그렇지도 않은 비판의 핵심이 뭔가요? 정말 궁금해요."

그는 “시인이 되기 위해 시를 쓰지 않았다”고 했다. 독자들의 반응에 보람을 느껴 고통을 자처했을 뿐. (사진=원태연 제공)그는 “시인이 되기 위해 시를 쓰지 않았다”고 했다. 독자들의 반응에 보람을 느껴 고통을 자처했을 뿐. (사진=원태연 제공)

Q. 본인이 시 쓰기를 통해 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메시지 전달인가요, 독자와의 소통인가요.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이거 하나는 분명해요. '예술의 최고봉'이라 불리는 시의 본질은 '경외'(敬畏·공경하면서 두려워함)가 아닌 '공감(共感)'이에요. 제가 시를 쓸 때 가장 중시하는 것도 독자들과의 '공감대'예요. 공감 가는 시를 쓰기 위해 저는 정말 열심히 노력해요. 시는요, '글빨'로 되지 않아요. 정말 절실해야 해요…. 누군가 말했던 것처럼, 제가 정말 '돈 때문에 쓰는' 인간이라고 칩시다. 그러면 그 사람은, 돈을 많이 벌기 위해서라도, 정말 간절하게 쓰지 않았을까요?"

■ 백지영 '그 여자'부터 태연 '쉿'까지…난독증 이겨내며 '스테디 작사가'의 길로

시를 놓았던 지난 20년, 시인 원태연은 작사가, 영화감독, 시나리오 작가 등으로 활동하며 자신만의 창작 세계를 넓혀가고 있었습니다. 특히 '사랑과 이별의 번민을 진솔하게 노래한 작사가'로 음악계에 자리매김했는데요. 시인은 1995년 싱어송라이터 김현철의 곡 '왜 그래'를 시작으로, 신승훈·성시경·백지영·이효리 등 인기 가수들의 노랫말을 써 내려가며 다시금 문명(文名)을 드러냈습니다. 현빈·하지원 주연의 드라마 '시크릿 가든' OST(그 여자, 그 남자), 개그맨 박명수의 청혼곡으로 유명한 '바보에게 바보가'부터 허각의 '나를 잊지 말아요', 유미 '사랑은 언제나 목마르다' 등이 대표작입니다.

Q. 태연('쉿')·온유('또각또각')에 오렌지 캬라멜('방콕시티') 등 아이돌 가수들의 노랫말까지 썼습니다. 시도 가사처럼 '젊게 쓰려고' 노력하는 것 같은데요.

"제가 1995년 9월 27일에 제대했는데요. 그날 부모님에게 인사드리고, 점심에 친구 만나서 밥 먹고, 오후 3시 40분에 스튜디오 가서 김현철씨 만나고 작사를 시작했어요. 시 쓰기도 작사도 20대에 시작한 거죠. 지금 일상에서는 저도 보통 중년 남자지만, 시와 가사에서까지 아저씨일 필요는 없잖아요? 저는 항상 '열여덟 살 이전의 언어'로 표현하고자 합니다."

그는 자신의 시가 “‘여든 살’에 읽어도 ‘스무 살’ 때 읽었던 것처럼” 첫 느낌을 간직하길 바란다고 했다. (사진=원태연 제공)그는 자신의 시가 “‘여든 살’에 읽어도 ‘스무 살’ 때 읽었던 것처럼” 첫 느낌을 간직하길 바란다고 했다. (사진=원태연 제공)

Q. '마흔 살에 처음 난독증을 앓고 있다는 걸 알았다'(※ 시인은 현재 한국난독증협회 홍보대사다.)던데, 창작을 이어가기가 힘들지는 않은가요.

"난독증이요, 남들은 '책을 아예 못 읽는'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아요. 책을 읽는 데 필요한 어떤 '소프트웨어' 하나가 부족해서 불편할 따름이죠. 그래서 저 같은 경우는 각 페이지를 '사진으로 찍듯이' 머릿속에 기억하고, 나중에 내용을 떠올려 이해하는 식이에요 …. 그래도 시도 쓰고 작사도 하고 다 하잖아요? 지난달에는 제 가사로 히트를 친 모(某) 가수가 '예전 곡의 인기를 뛰어넘는 노랫말을 써달라'고 해서 하나 써주기도 했어요.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웃음)"

■ "그대들이 계속 읽어만 준다면…그 시절의 나를 다시 보여주겠어요"

다락방에 한낮의 햇살이 조금씩 새어나갈 무렵, 담뱃불을 끈 시인에게 마지막 질문을 건넸습니다.

Q. 시인이 아닌 시 그 자체, 독자들에게 어떤 '시'로 기억되고 싶나요.

"'여든 살'에 읽어도 '스무 살' 때 읽었던 것처럼, '처음 그 느낌'을 간직하는 시였으면 좋겠어요. 제 시를 읽은 할머니가 잠시나마 '소녀의 시간'으로 돌아가는…. 나를 계속 읽어주신다면, 그 시절 당신이 읽었던 나를 다시 보여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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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터뷰] “시(詩)의 본질은 공감”…‘사랑의 세레나데’ 원태연의 귀환
    • 입력 2022-12-24 08:0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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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눈물, 약속’으로 집약되는 서정시인 원태연. 그는 시의 본질이 ‘공감(共感)’이라고 했다. (사진=원태연 제공)
■ 가끔가다 내 생각을 하는 '너에게 전화가 왔다'…20년 만에

'넌 가끔가다 / 내 생각을 하지 / 난 가끔가다 / 딴 생각을 해'
'손 끝으로 원을 그려봐 / 네가 그릴 수 있는 한 크게 / 그걸 뺀 만큼 널 사랑해'

1990~2000년대 솔직한 언어와 섬세한 감수성으로 동시대 독자들의 눈물샘을 자극했던 서정시인 원태연. 당시 '원태연 신드롬'이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그의 시집(詩集)들은 도합 '600만 부 판매'라는 진기록을 세우며 '베스트셀러'로 등극했는데요.

2002년 시집 《안녕》을 끝으로 불현듯 문학계에서 사라졌던 원 시인이 독자 곁으로 돌아왔습니다. 20년 만의 신작 《너에게 전화가 왔다》(은행나무)를 지난 11월 펴내면서 말입니다. 요즘 청년 세대에게는 유명 드라마 OST, 인기 대중 가요의 작사가로 익숙한 그가 다시 시를 쓰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한동안 시에게 많이 당했다. 당해도 싸다"고 말할 정도로 창작의 고통에 괴로워하면서도 끝내 펜을 놓지 않았던 시인. '외로워'라는 이름의 푸른 털의 고양이가 인사를 건네는, 그의 고요한 다락방 안으로 들어가봤습니다.

첫 시집 ‘넌 가끔가다 내 생각을 하지 난 가끔가다 딴 생각을 해’(왼쪽, 사진은 최근 특별판 표지)가 150만 부 판매고를 올리면서 일약 ‘스타 시인’이 된 원태연. 한동안 시를 놓고 있었던 그는, 지난달 20년 만의 신작 시집 ‘너에게 전화가 왔다’(오른쪽)로 문학계에 복귀했다. (사진=책 표지 갈무리)
■ '13개월 27일'간의 고투(苦鬪)... "시, 천장 깨고 잠 못 자니 나오더라"

지난 19일 오후 서울 서초동의 한 빌라 꼭대기 층, 원 시인의 집필실은 일반 가정집인 그곳 다락방 한편에 있었습니다. 천장이 낮아 로봇 청소기처럼 바퀴 달린 작은 의자를 타고 이동해야 했는데, 시인은 기자와 함께 마치 모험을 떠나는 기분인 듯 재밌어했습니다.

상아색 가디건 차림의 그는 창밖의 나목(裸木)을 가만히 바라보며 담뱃갑을 뒤적이더니, 이윽고 천장에 난 두 개의 구멍을 가리켰습니다. "여기 보세요. 나 참, 별짓 다 했지요?"

Q. 이게 시인의 머리로 뚫었다는 구멍들인가요.

"시가 너무 안 써져서요. 이틀인가는 잠도 한숨 못 잤어요. 입맛도 없어서 물만 먹었고요. 그러니까 시가 조금씩 나오더라고요. 제정신이 아니니까. 13개월 27일 동안 시에게 당했어요. 당해도 싸지."

20년 만에 펜을 잡은 시인은 머리로 천장을 뚫고 잠을 못 이루는 고통 끝에 작품을 쓸 수 있었다. (사진=원태연 제공)
Q. 왜 그렇게까지 시 쓰기에 사력(死力)을 다하는가요.

"20년 만이잖아요, 제대로 된 새 시집을 펴낸 게. 20년 만에 편지를 쓰더라도 모든 정성을 기울이는데, 하물며 시는 어떻겠어요? 양심이 있어야죠. 양심 있는 시를 쓰고 싶었어요."

Q. 이번 시집에서 '한 페이지도 허투루 쓰지 않겠다'고 밝힌 것도 그 때문이겠군요. 30년 전부터 알고 지낸 독자에게 약속한 다짐이었다지요.

"원래는 '한 페이지도 허투루 넘길 수 없는 시'를 쓰겠다는 것이었는데, 그러면 너무 건방져 보이잖아요. (웃음) 다시 시를 쓰기까지, 그분(30년 지기 독자)이 제게 용기를 많이 줬어요. 예전에 제가 만난 여자친구와 이름이 똑같아서 기억하고 있었는데, 그분 언니까지 제 신작을 사서 읽고 있었다네요. 신기한 인연이지요."

■ "일곱 글자 시 한 편 완성 위해…9개월 동안 70번 넘게 고쳤다"

원태연 신작 ‘너에게 전화가 왔다’의 각 챕터 첫 페이지에는 그의 육필 원고(사진 왼쪽)가 삽화처럼 담겨 있다. (사진=은행나무 제공)
'전화가 옵니다 / 당신입니다 / 겁도 없습니다 / 받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 시 '너에게 전화가 왔다'
'끊어진다 / 마음 / 이' - 시 '버퍼링'
'외롭다' - 시 '나뭇잎 뜯기'

원 시인의 신작 《너에게 전화가 왔다》에는 이처럼 짧으면서도 함축적인 시편(詩篇)들이 다수 수록돼 있습니다. 산문시와 세로쓰기, 한 글자씩 띄어쓰기, 시어(詩語)를 좌우로 엇갈리게 나열한 시 등 형식을 다양하게 변주한 작품들도 눈에 띄는데요. 그러나 시인은 해당 시편들을 "실험적으로 보이기 위해 의도하고 쓴 건 아니었다"고 강조합니다.

Q. 그래도 '원태연 스타일', 자신만의 작법(作法)은 있을 텐데요.

"저도 제 시들이 그렇게 짧게 될 줄 몰랐어요. 저는요, 제가 그만 쓸 때까지, 시가 매력적으로 보일 때까지 고치고 또 고쳐요. '버퍼링', 그 일곱 글자 시 한 편을 완성하기 위해 9개월 동안 70번 넘게 고쳤어요. 뭘 어떻게 적어봐도 도대체 버퍼링 같지가 않아서요. 퇴고한 원고들을 모으면 버퍼링으로만 시집 한 권을 낼 수 있을 정도죠. 그런데 신 기자는 제 시집에서 어떤 시가 가장 마음에 와닿았나요?"

Q. 저는 '나뭇잎 뜯기'가 좋았습니다. 제일 짧은 시지만, 제목과 본문이 일치돼 여운이 증폭되는 느낌을 받았거든요.

"그 시도 원래는 '외롭다 / 외롭지 않다 / 외롭다 / 외롭지 않다…'로 길게 이어지는 형식이었는데, 다 걷어내고 딱 한마디로 표현했어요. 저는 원고 인쇄하기 직전까지도 고쳐요."

시인은 “일곱 글자 시 한 편(버퍼링)을 완성하기 위해 70번 넘게 고쳤다”며 퇴고한 원고를 보여줬다. (사진=신승민 기자)
■ '대중문학가' '돈 많이 번 시인'이라는 시선들…"그래서라도 '간절히' '열심히' 쓰지 않았을까요?"

1992년 첫 시집 '넌 가끔가다~'가 150만 부 판매고를 올리면서 일약 '스타 시인'으로 거듭난 20대 청년 원태연. 이후 펴내는 시집마다 수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으며, 주요 시편들이 온·오프라인을 넘나들어 '사랑의 세레나데'로 인용되곤 했는데요.

'인기 작가'라는 휘황한 칭호의 이면에는, '감성시인' '대중문학가'라는 달갑지 않은 수식어가 따라붙었습니다. '돈 많이 번 시인'이라며 비꼬는 듯한 문학계 일각의 시선들도 시인의 마음을 아프게 했지요. 그는 "그 시절, 나를 보던 세상의 시선이 그랬다. '돈 벌려고 그렇게 쓴 거 아니다'라고 강하게 말하지 못한 게 아쉽다""첫 시집은 출판사에 모든 권리를 넘겨서 인세도 받지 못했지만, 책을 처음 내준 게 고마워서 지금까지도 사장님을 원망하지 않는다"고 털어놨습니다.

Q. 사랑을 비롯해 눈물, 그리움, 외로움, 너와 나 등 '원초적 감정에 기인한 주제어'들이 시 세계를 관통합니다. 그래서인지 때로는 작품성 면에서 '감상주의적'이라는 지적을 받기도 합니다. 문단 일각에서 본인을 '감성시인' '대중문학가'로 규정하는 것에 불만은 없는가요.

"시인으로 부르든 감성시인으로 부르든, 그냥 좀 놔뒀으면 좋겠어요. 저는 시인이 되려고 시를 쓰고 시집을 내는 게 아닌데요. 시 쓰기 자체는 고통스럽지만, 독자들의 반응에 보람을 느끼기 때문에 계속 쓰는 거예요. 어렸을 때 사격선수로도 활동하고 대학에서는 체육을 전공했지만, 그때도 항상 저는 무엇인가를 쓰고 있었어요. 지금도 시뿐 아니라 소설, 사전, 가사를 계속 쓰고 있어요…. 그리고, 그런 비판이 설득력을 가지려면 누군가 '이것이 진정한 시다'라고 지목하고 보여줘야죠. 그렇지도 않은 비판의 핵심이 뭔가요? 정말 궁금해요."

그는 “시인이 되기 위해 시를 쓰지 않았다”고 했다. 독자들의 반응에 보람을 느껴 고통을 자처했을 뿐. (사진=원태연 제공)
Q. 본인이 시 쓰기를 통해 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메시지 전달인가요, 독자와의 소통인가요.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이거 하나는 분명해요. '예술의 최고봉'이라 불리는 시의 본질은 '경외'(敬畏·공경하면서 두려워함)가 아닌 '공감(共感)'이에요. 제가 시를 쓸 때 가장 중시하는 것도 독자들과의 '공감대'예요. 공감 가는 시를 쓰기 위해 저는 정말 열심히 노력해요. 시는요, '글빨'로 되지 않아요. 정말 절실해야 해요…. 누군가 말했던 것처럼, 제가 정말 '돈 때문에 쓰는' 인간이라고 칩시다. 그러면 그 사람은, 돈을 많이 벌기 위해서라도, 정말 간절하게 쓰지 않았을까요?"

■ 백지영 '그 여자'부터 태연 '쉿'까지…난독증 이겨내며 '스테디 작사가'의 길로

시를 놓았던 지난 20년, 시인 원태연은 작사가, 영화감독, 시나리오 작가 등으로 활동하며 자신만의 창작 세계를 넓혀가고 있었습니다. 특히 '사랑과 이별의 번민을 진솔하게 노래한 작사가'로 음악계에 자리매김했는데요. 시인은 1995년 싱어송라이터 김현철의 곡 '왜 그래'를 시작으로, 신승훈·성시경·백지영·이효리 등 인기 가수들의 노랫말을 써 내려가며 다시금 문명(文名)을 드러냈습니다. 현빈·하지원 주연의 드라마 '시크릿 가든' OST(그 여자, 그 남자), 개그맨 박명수의 청혼곡으로 유명한 '바보에게 바보가'부터 허각의 '나를 잊지 말아요', 유미 '사랑은 언제나 목마르다' 등이 대표작입니다.

Q. 태연('쉿')·온유('또각또각')에 오렌지 캬라멜('방콕시티') 등 아이돌 가수들의 노랫말까지 썼습니다. 시도 가사처럼 '젊게 쓰려고' 노력하는 것 같은데요.

"제가 1995년 9월 27일에 제대했는데요. 그날 부모님에게 인사드리고, 점심에 친구 만나서 밥 먹고, 오후 3시 40분에 스튜디오 가서 김현철씨 만나고 작사를 시작했어요. 시 쓰기도 작사도 20대에 시작한 거죠. 지금 일상에서는 저도 보통 중년 남자지만, 시와 가사에서까지 아저씨일 필요는 없잖아요? 저는 항상 '열여덟 살 이전의 언어'로 표현하고자 합니다."

그는 자신의 시가 “‘여든 살’에 읽어도 ‘스무 살’ 때 읽었던 것처럼” 첫 느낌을 간직하길 바란다고 했다. (사진=원태연 제공)
Q. '마흔 살에 처음 난독증을 앓고 있다는 걸 알았다'(※ 시인은 현재 한국난독증협회 홍보대사다.)던데, 창작을 이어가기가 힘들지는 않은가요.

"난독증이요, 남들은 '책을 아예 못 읽는'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아요. 책을 읽는 데 필요한 어떤 '소프트웨어' 하나가 부족해서 불편할 따름이죠. 그래서 저 같은 경우는 각 페이지를 '사진으로 찍듯이' 머릿속에 기억하고, 나중에 내용을 떠올려 이해하는 식이에요 …. 그래도 시도 쓰고 작사도 하고 다 하잖아요? 지난달에는 제 가사로 히트를 친 모(某) 가수가 '예전 곡의 인기를 뛰어넘는 노랫말을 써달라'고 해서 하나 써주기도 했어요.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웃음)"

■ "그대들이 계속 읽어만 준다면…그 시절의 나를 다시 보여주겠어요"

다락방에 한낮의 햇살이 조금씩 새어나갈 무렵, 담뱃불을 끈 시인에게 마지막 질문을 건넸습니다.

Q. 시인이 아닌 시 그 자체, 독자들에게 어떤 '시'로 기억되고 싶나요.

"'여든 살'에 읽어도 '스무 살' 때 읽었던 것처럼, '처음 그 느낌'을 간직하는 시였으면 좋겠어요. 제 시를 읽은 할머니가 잠시나마 '소녀의 시간'으로 돌아가는…. 나를 계속 읽어주신다면, 그 시절 당신이 읽었던 나를 다시 보여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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