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모르게 퇴직금이 3분의 1로”…법률구조공단의 ‘황당한 변론’

입력 2023.01.10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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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부터 경기도의 한 섬유 공장에서 일한 외국인 노동자 A 씨. 업무량이 늘어나고 업무 강도도 더 세지면서 2020년 회사를 그만뒀습니다.

7년이나 일했으니 퇴직금을 당연히 받아야 하는데, 회사는 한 푼도 주지 않았습니다. 노동청도 "사업주가 A 씨에게 730만 원가량의 퇴직금을 줘야 한다"고 했는데, 회사는 들은 체도 안 했습니다.

결국 A 씨는 외국인 노동자나 저소득층에게 법률 지원을 해주는 대한법률구조공단의 도움을 받아 2021년 7월 소송을 냈습니다. 지난해 3월엔 소송 대리를 맡은 법률구조공단의 변호사와 한 차례 면담도 했습니다.

A 씨는 퇴직금을 받으면 고국으로 돌아가 작은 가게를 열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계획은 지난해 5월 전화 한 통을 받으면서 모두 물거품이 됐습니다.

■ 통장에 들어온 돈 268만 원…변호사가 '임의조정'

"제 통역을 도와준 시민단체에서 '퇴직금이 당신 계좌에 들어갔다고 한다, 확인해보라'고 전화를 해 왔어요. 그래서 확인해봤더니 정말 돈이 들어온 거예요."

그런데 계좌에 입금된 돈은 258만 원, 노동청이 산정한 금액의 3분의 1밖에 안 되는 액수였습니다. 어떻게 된 일일까?

알고 보니, 소송 대리를 맡은 법률구조공단의 변호사가 A 씨도 모르게 혼자 재판에 나가 '임의조정'에 합의했다는 겁니다. 이 소송의 조정조서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 1. 피고(반소원고)는 원고(반소피고)에게 2,589,953원을 2022. 5. 6까지 지급한다. (중략)
2. 원고(반소피고)는 나머지 본소청구를, 피고(반소원고)는 이 사건 반소청구를 각 포기한다. "
- A 씨의 조정조서 중

'임의조정'은 원고와 피고가 서로 합의하고 다투던 내용을 조정해서 끝내는 겁니다. 임의조정을 하면 그 이후 다시는 이의 제기를 할 수 없어 확정 판결과 같은 효력을 갖습니다. 소송이 완전히 끝나는 것이죠.


A 씨의 실망감은 컸습니다. 변호사가 합의한 금액이 A 씨가 받아야 할 금액과 너무 크게 차이가 난 탓도 있지만,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변호사에게 도움을 받고 적절한 법률서비스를 제공받기를 원했어요. 하지만 변호사는 내게 250만 원에 합의해도 되는지 물어보지도 않았어요. 혼자 결정한 겁니다. 변호사는 조정이 끝나고 돈이 입금될 때까지 단 한 번도 전화하지 않았습니다."

■ 인권지원센터 "소외계층 법률 절차, 더 세심해야"

A 씨는 시민단체 도움을 받아 경기도 산하기관인 경기도외국인인권지원센터에 진정을 넣었습니다. 조사 결과, 법률구조공단 변호사가 A 씨에게 구체적인 의사를 묻지 않았다는 점이 인정됐습니다.

이에 따라 센터는 법률구조공단에 "A 씨가 입은 손해를 배상하고 다시는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재발 방지 대책을 마련하라"고 권고했습니다.

인권지원센터 김대권 팀장은 "금액적으로 차이가 없다 하더라도 조정으로 끝나는 것과 판결을 받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며 "(A 씨는) 패소를 하더라도 퇴직금 액수에 대해 다퉈보고 싶었는데 그럴 기회조차 빼앗은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특히 법률구조공단은 외국인 노동자와 저소득층, 장애인 등 통상적인 법률 절차에서 소외되기 쉬운 사람들이 찾는 곳인데, 다시 이런 일이 반복돼선 안 된다고도 강조했습니다.


"재판의 결과도 중요하지만, 이런 법률절차에서 소외되는 분들은 좀 더 세심한 배려가 필요하거든요. 절차를 통해서 나의 주장을 온전히 했고, 그것이 받아들여졌든 아니든 절차가 제대로 진행됐다는 거를 확인받고 싶어하는 그런 부분도 있거든요. 이를 공단에서도 이해하시고 앞으로 그런 부분이 반영됐으면 좋겠다는 취지에서 내린 권고입니다."

그러면서 김 팀장은 지난해 말 알려진 서울행정법원의 한 판결을 사례로 들었습니다. 구청 일자리 사업에 지원했다가 불합격된 지원자가, 채용 과정에서 차별을 겪었다며 불합격 처리를 취소해달라고 낸 소송의 판결이었습니다.

"안타깝지만 지셨네요"…한 판결문이 보여준 '배려'

이 판결이 세상에 알려진 건 이 판결문이 쓰인 방식 때문입니다. 아래는 판결문에 쓰인 주문의 첫 문장입니다.

1. 원고의 청구를 기각한다(안타깝지만 원고가 졌습니다).

재판부는 중증 장애인인 원고를 위해 판결의 내용을 이해하기 쉬운 말로 요약하고, 재판부가 고민했던 지점을 잘 나타낼 수 있는 그림도 활용했습니다.

원고 측 소송 대리를 맡은 장수혁 변호사(가현 법률사무소)는 KBS 기자와의 통화에서 "재판부가 재판 진행 과정에서 장애인인 원고 측을 배려하는 모습을 많이 보였다"며 "재판 절차에서 충분히 배려했기 때문에 그런 모습이 판결문에서도 잘 드러난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전했습니다.


평소 난민과 장애인을 대리해 소송을 많이 진행해 온 장 변호사는 "소외계층이 당사자인 법률 절차에서는 이들이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정당하게 법적인 권리를 누릴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게 특히 중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 '1년에 1000건' 담당하는 공단 변호사들…"사고만 안 났으면"

A 씨 소송을 담당했던 변호사는 취재 요청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인권지원센터 조사 과정에서 해당 변호사는 '포괄적 대리권을 행사했다' '변론 과정 등을 다 설명해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어려운 부분이 있다'고 설명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대한법률구조공단 변호사와 공익법무관의 업무량이 지나치게 많은 것도 사실입니다. 지난해 국회 국정감사 때 법제사법위원회 소속 박주민 의원이 법무부로부터 제출받은 자료를 보면, 2021년 기준 법률구조공단 변호사와 공익 법무관 한 명이 담당하는 사건이 1년에 1007건이나 됐습니다. 민사와 가사 사건, 형사 사건을 합쳐 사건은 모두 13만4000여 건인데, 실제로 송무 업무를 할 수 있는 사람은 134명뿐이었습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법률구조공단 출신의 한 변호사는 KBS 기자와의 통화에서 "인력이 부족해 사고만 안 나면 좋겠다라고 생각할 정도였다"고 털어놓기도 했습니다. 이어 "보통 한 번에 사건이 40건 정도 돌아가면 '정신이 없다'고 이야기하는데, 그에 비해 1년에 1000건을 담당한다는 건 업무량이 지나치게 많은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또 "의뢰인과 원활한 의사소통을 위해선 송무 대리를 해주는 직원이 필요한데, 변호사 1명당 송무 대리 직원이 1명 있는 일반 법률사무소와 달리 공단은 변호사 2명당 1명꼴"이라며 "대부분 업무를 변호사 혼자 처리해야 하는 문제도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외국인 노동자 A 씨도 "못 받은 퇴직금이 문제가 아니라, 법률구조공단의 문제가 개선됐으면 한다"고 전했습니다.

"저 같은 이주 노동자는 한국에서 작은 '점'일 뿐이고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 같은 사람을 도와주는 기관인 법률구조공단이 더 나아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에 외국인 노동자들이 더 많아지고 그 사람들도 이런 법률 구조를 많이 이용하게 될테니까요."

법률구조공단은 "변호사가 '의뢰인의 양해를 얻었다고 생각했다'고 해 주장이 엇갈리는 부분이 있어 사실관계를 먼저 파악해보려고 한다"며 "그 결과에 따라 손해배상도 배제하지 않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또 임의조정에 대해 소속 변호사들에 대한 교육도 검토하겠다고 덧붙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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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도 모르게 퇴직금이 3분의 1로”…법률구조공단의 ‘황당한 변론’
    • 입력 2023-01-10 17:02:26
    취재K

2013년부터 경기도의 한 섬유 공장에서 일한 외국인 노동자 A 씨. 업무량이 늘어나고 업무 강도도 더 세지면서 2020년 회사를 그만뒀습니다.

7년이나 일했으니 퇴직금을 당연히 받아야 하는데, 회사는 한 푼도 주지 않았습니다. 노동청도 "사업주가 A 씨에게 730만 원가량의 퇴직금을 줘야 한다"고 했는데, 회사는 들은 체도 안 했습니다.

결국 A 씨는 외국인 노동자나 저소득층에게 법률 지원을 해주는 대한법률구조공단의 도움을 받아 2021년 7월 소송을 냈습니다. 지난해 3월엔 소송 대리를 맡은 법률구조공단의 변호사와 한 차례 면담도 했습니다.

A 씨는 퇴직금을 받으면 고국으로 돌아가 작은 가게를 열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계획은 지난해 5월 전화 한 통을 받으면서 모두 물거품이 됐습니다.

■ 통장에 들어온 돈 268만 원…변호사가 '임의조정'

"제 통역을 도와준 시민단체에서 '퇴직금이 당신 계좌에 들어갔다고 한다, 확인해보라'고 전화를 해 왔어요. 그래서 확인해봤더니 정말 돈이 들어온 거예요."

그런데 계좌에 입금된 돈은 258만 원, 노동청이 산정한 금액의 3분의 1밖에 안 되는 액수였습니다. 어떻게 된 일일까?

알고 보니, 소송 대리를 맡은 법률구조공단의 변호사가 A 씨도 모르게 혼자 재판에 나가 '임의조정'에 합의했다는 겁니다. 이 소송의 조정조서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 1. 피고(반소원고)는 원고(반소피고)에게 2,589,953원을 2022. 5. 6까지 지급한다. (중략)
2. 원고(반소피고)는 나머지 본소청구를, 피고(반소원고)는 이 사건 반소청구를 각 포기한다. "
- A 씨의 조정조서 중

'임의조정'은 원고와 피고가 서로 합의하고 다투던 내용을 조정해서 끝내는 겁니다. 임의조정을 하면 그 이후 다시는 이의 제기를 할 수 없어 확정 판결과 같은 효력을 갖습니다. 소송이 완전히 끝나는 것이죠.


A 씨의 실망감은 컸습니다. 변호사가 합의한 금액이 A 씨가 받아야 할 금액과 너무 크게 차이가 난 탓도 있지만,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변호사에게 도움을 받고 적절한 법률서비스를 제공받기를 원했어요. 하지만 변호사는 내게 250만 원에 합의해도 되는지 물어보지도 않았어요. 혼자 결정한 겁니다. 변호사는 조정이 끝나고 돈이 입금될 때까지 단 한 번도 전화하지 않았습니다."

■ 인권지원센터 "소외계층 법률 절차, 더 세심해야"

A 씨는 시민단체 도움을 받아 경기도 산하기관인 경기도외국인인권지원센터에 진정을 넣었습니다. 조사 결과, 법률구조공단 변호사가 A 씨에게 구체적인 의사를 묻지 않았다는 점이 인정됐습니다.

이에 따라 센터는 법률구조공단에 "A 씨가 입은 손해를 배상하고 다시는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재발 방지 대책을 마련하라"고 권고했습니다.

인권지원센터 김대권 팀장은 "금액적으로 차이가 없다 하더라도 조정으로 끝나는 것과 판결을 받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며 "(A 씨는) 패소를 하더라도 퇴직금 액수에 대해 다퉈보고 싶었는데 그럴 기회조차 빼앗은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특히 법률구조공단은 외국인 노동자와 저소득층, 장애인 등 통상적인 법률 절차에서 소외되기 쉬운 사람들이 찾는 곳인데, 다시 이런 일이 반복돼선 안 된다고도 강조했습니다.


"재판의 결과도 중요하지만, 이런 법률절차에서 소외되는 분들은 좀 더 세심한 배려가 필요하거든요. 절차를 통해서 나의 주장을 온전히 했고, 그것이 받아들여졌든 아니든 절차가 제대로 진행됐다는 거를 확인받고 싶어하는 그런 부분도 있거든요. 이를 공단에서도 이해하시고 앞으로 그런 부분이 반영됐으면 좋겠다는 취지에서 내린 권고입니다."

그러면서 김 팀장은 지난해 말 알려진 서울행정법원의 한 판결을 사례로 들었습니다. 구청 일자리 사업에 지원했다가 불합격된 지원자가, 채용 과정에서 차별을 겪었다며 불합격 처리를 취소해달라고 낸 소송의 판결이었습니다.

"안타깝지만 지셨네요"…한 판결문이 보여준 '배려'

이 판결이 세상에 알려진 건 이 판결문이 쓰인 방식 때문입니다. 아래는 판결문에 쓰인 주문의 첫 문장입니다.

1. 원고의 청구를 기각한다(안타깝지만 원고가 졌습니다).

재판부는 중증 장애인인 원고를 위해 판결의 내용을 이해하기 쉬운 말로 요약하고, 재판부가 고민했던 지점을 잘 나타낼 수 있는 그림도 활용했습니다.

원고 측 소송 대리를 맡은 장수혁 변호사(가현 법률사무소)는 KBS 기자와의 통화에서 "재판부가 재판 진행 과정에서 장애인인 원고 측을 배려하는 모습을 많이 보였다"며 "재판 절차에서 충분히 배려했기 때문에 그런 모습이 판결문에서도 잘 드러난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전했습니다.


평소 난민과 장애인을 대리해 소송을 많이 진행해 온 장 변호사는 "소외계층이 당사자인 법률 절차에서는 이들이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정당하게 법적인 권리를 누릴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게 특히 중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 '1년에 1000건' 담당하는 공단 변호사들…"사고만 안 났으면"

A 씨 소송을 담당했던 변호사는 취재 요청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인권지원센터 조사 과정에서 해당 변호사는 '포괄적 대리권을 행사했다' '변론 과정 등을 다 설명해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어려운 부분이 있다'고 설명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대한법률구조공단 변호사와 공익법무관의 업무량이 지나치게 많은 것도 사실입니다. 지난해 국회 국정감사 때 법제사법위원회 소속 박주민 의원이 법무부로부터 제출받은 자료를 보면, 2021년 기준 법률구조공단 변호사와 공익 법무관 한 명이 담당하는 사건이 1년에 1007건이나 됐습니다. 민사와 가사 사건, 형사 사건을 합쳐 사건은 모두 13만4000여 건인데, 실제로 송무 업무를 할 수 있는 사람은 134명뿐이었습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법률구조공단 출신의 한 변호사는 KBS 기자와의 통화에서 "인력이 부족해 사고만 안 나면 좋겠다라고 생각할 정도였다"고 털어놓기도 했습니다. 이어 "보통 한 번에 사건이 40건 정도 돌아가면 '정신이 없다'고 이야기하는데, 그에 비해 1년에 1000건을 담당한다는 건 업무량이 지나치게 많은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또 "의뢰인과 원활한 의사소통을 위해선 송무 대리를 해주는 직원이 필요한데, 변호사 1명당 송무 대리 직원이 1명 있는 일반 법률사무소와 달리 공단은 변호사 2명당 1명꼴"이라며 "대부분 업무를 변호사 혼자 처리해야 하는 문제도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외국인 노동자 A 씨도 "못 받은 퇴직금이 문제가 아니라, 법률구조공단의 문제가 개선됐으면 한다"고 전했습니다.

"저 같은 이주 노동자는 한국에서 작은 '점'일 뿐이고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 같은 사람을 도와주는 기관인 법률구조공단이 더 나아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에 외국인 노동자들이 더 많아지고 그 사람들도 이런 법률 구조를 많이 이용하게 될테니까요."

법률구조공단은 "변호사가 '의뢰인의 양해를 얻었다고 생각했다'고 해 주장이 엇갈리는 부분이 있어 사실관계를 먼저 파악해보려고 한다"며 "그 결과에 따라 손해배상도 배제하지 않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또 임의조정에 대해 소속 변호사들에 대한 교육도 검토하겠다고 덧붙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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