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리포트] “난 지지 않았어” 트럼프가 뿌린 선거결과 부정의 씨앗, 싹을 틔우다

입력 2023.01.18 (14:00) 수정 2023.01.18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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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시각 16일 오후. 에스파냐의 흔적이 역력한 미국 뉴멕시코주 앨버커키의 한 주택에 무장한 경찰 특공대(SWAT)가 출동했습니다. 끌려나온 것은 39살 솔로몬 페냐. 미 공화당 소속으로 지난해 11월 치러진 중간선거에서 뉴멕시코주 하원의원 후보(14지구)로 출마했던 정치인이었습니다.

페냐는 중간선거에서 민주당 후보(현직)에게 48%p 차로 패배했지만 졌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민주당에 의해 선거가 조작되었다고 굳게 믿은 그는 민주당 소속 주의원들과 선거위원들에게 정치적 보복을 하기로 결정합니다. 선거가 도난당했다는 거죠.

놀랍지 않습니다. 어디에서 많이 들어본 것 같지 않나요?
맞습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2020년 대통령 선거에서 자신이 조 바이든(현직) 대통령에게 졌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도난당한 선거"를 주장했던 것과 같습니다(현재 진행형입니다). 트럼프는 당시 법무부에 부정 선거가 의심된다는 성명을 발표하도록 종용하고, 조지아주에는 선거 재검표를 지시했으며, 이도 저도 먹히지 않자 마침내 자신을 지지하는 극우 추종자들을 워싱턴 D.C.로 불러모아 미 의사당으로 진격하도록 불을 놓았죠.

솔로몬 페냐(39) 미 뉴멕시코주 하원의원 후보.솔로몬 페냐(39) 미 뉴멕시코주 하원의원 후보.

39살. 젊은 히스패닉 정치인 페냐는 열렬한 트럼프 추종자였습니다(놀랍지 않습니다). 페냐는 2021년 1월 6일 워싱턴으로 날아가 트럼프의 이른바 "도둑맞은 선거"를 되찾기 위한 시위에 참여했습니다. 트럼프와 트럼프가 꿈꾸는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를 신념으로 삼았습니다. 트럼프가 뿌린 "선거 결과 부정" 이라는 씨앗은 페냐의 마음 속에서 싹을 틔웠습니다. "난 지지 않았어. 저들이 조작한 거야."

"상대당 죽여달라" 청부 총격 사주한 젊은 정치인

직접 보복하기엔 위험하다고 판단했을까요? 페냐는 일당 4명을 고용해 돈을 주고 청부 총격을 사주했습니다. 집 주소를 주고 가서 총을 쏘라고 한 겁니다.

민주당 관계자들을 겨냥한 총격은 지난해 중간선거가 끝난 후 보름 뒤인 12월 4일 시작됩니다. 앨버커키 경찰은 12월 4일 누군가가 민주당 소속 카운티 위원인 아드리안 바르보아의 집에 총 8발을 발사했다고 밝혔습니다. 이어 12월 8일, 하비에르 마르티네스 주 하원의원(역시 민주당 소속)의 집에서 총성이 울렸습니다. 사흘 뒤인 12월 11일, 또 다른 카운티 위원인 데비 오말리(민주당)의 집을 겨냥한 총격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카운티 위원들은 선거 결과를 인증하는 역할(미국 대선에서 의회 의원들의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연쇄 총격 범행의 꼬리가 잡힌 건 이달 초 뉴멕시코 주 상원의원인 린다 로페즈의 집을 겨냥한 총격이었습니다.

경찰 조사에서 제보자는 총격 범행이 페냐의 맘에 들지 않았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정치인들과 그들의 가족들이 이미 잠을 자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늦은 밤에 민주당 관계자들에 대한 첫 번째 총격이 일어났고, 일부는 집의 벽 높이에서 총이 발사된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제보자는 "페냐는 총격이 더 공격적이길 원했다. 더 낮은 곳으로 (사람을 맞힐 수 있는 높이에서) 발사되길 원했다"고 진술했습니다.

총격이 성에 차지 않았던 페냐는 마지막 공격이었던 주 상원의원의 집으로 갈 때는 본인이 직접 자동소총 AR 15를 들고 동행했습니다. 그러나 페냐의 총은 기기 오작동으로 발사되지 않았고, 같이 간 다른 일당의 총알은 12발 넘게 발사돼 로페즈 의원의 10살 난 딸이 자고 있던 침실 벽을 관통했습니다. 인명 피해는 발생하지 않았지만, 다행이라고 하기엔 용납할 수 없는 범행입니다.

뉴멕시코 로페즈 주 상원의원 집을 관통한 총탄. 10살 딸이 자고 있던 침실 벽을 관통했다뉴멕시코 로페즈 주 상원의원 집을 관통한 총탄. 10살 딸이 자고 있던 침실 벽을 관통했다

경찰은 마지막 공격 직후 공범인 호세 트루히요(21세)를 체포해 범행의 전모를 알게 됐습니다. 페냐는 형사청탁, 가중폭행 미수, 점유 주택 총격, 이동 중인 차량에서 총격, 음모 등의 혐의로 기소됐습니다.

■어쩌다 이런 사람이 하원 의원 후보가 되었을까?

큰 표 차로 졌다고는 하나 페냐의 이력으로 공화당의 후보로 선출됐다는 것은 믿기 힘든 일입니다. 페냐는 강도와 절도 등의 혐의로 뉴멕시코 주에서 7년 가까이 복역한 뒤 2016년 출소했습니다. 출소 뒤엔 뉴멕시코 대학에서 정치학 학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페냐의 전과 내용은 완전히 알려지진 않았습니다만, 2010년 페냐가 한 교정 시설의 구내식당에서 일할 당시, 한 수감자가 그에게 버터를 던지고 머리를 박자, 수감자의 눈을 찔렀다고 합니다(뉴욕타임즈 보도).

지난해 중간선거 후보자 선출 과정에서 민주당이 전과를 이유로 그의 출마 자격을 박탈하려 했지만, 주 하원 공화당 지도부의 대변인은 페냐의 출마를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그를 변호했습니다.

물론 페냐가 체포된 현재, 뉴멕시코주 공화당의 입장은 선회했습니다. "아무도 다치지 않은 것에 감사한다. 페냐는 법적으로 기소하기에 충분하다."

■페냐의 체포는 단순히 하나의 우발적 범행이 아니다

중간선거 투표 직전에 일어났던 낸시 펠로시 전 하원의장의 남편 폴 펠로시에 대한 공격(본래 낸시를 공격하기 위해 자택으로 침입해 낸시~를 찾아 헤맸다고 하죠), 그레첸 휘트머 미시간 주지사 납치 음모, 워싱턴 주 프라밀라 자야팔 하원의원에 대한 무장 남성의 스토킹 등 현실에서 정치적 폭력이 발현된 일련의 현상이라는 겁니다.

2021년 1월 6일 트럼프의 ‘선거 사기’ 집회에 참석을 인증하는 페냐2021년 1월 6일 트럼프의 ‘선거 사기’ 집회에 참석을 인증하는 페냐

지난 중간선거에서 트럼프는 자신을 지지하고, 대선 사기 주장에 동조한 많은 이들을 공화당 후보로 꽂아넣었습니다. 대다수는 당선되지 못했지만, 일부는 분명한 승리를 거뒀습니다. 극단으로 갈라진 미국 정치에서 트럼프가 뿌린 씨앗들은 지금 발아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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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특파원 리포트] “난 지지 않았어” 트럼프가 뿌린 선거결과 부정의 씨앗, 싹을 틔우다
    • 입력 2023-01-18 14:00:36
    • 수정2023-01-18 15:22:03
    특파원 리포트

현지시각 16일 오후. 에스파냐의 흔적이 역력한 미국 뉴멕시코주 앨버커키의 한 주택에 무장한 경찰 특공대(SWAT)가 출동했습니다. 끌려나온 것은 39살 솔로몬 페냐. 미 공화당 소속으로 지난해 11월 치러진 중간선거에서 뉴멕시코주 하원의원 후보(14지구)로 출마했던 정치인이었습니다.

페냐는 중간선거에서 민주당 후보(현직)에게 48%p 차로 패배했지만 졌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민주당에 의해 선거가 조작되었다고 굳게 믿은 그는 민주당 소속 주의원들과 선거위원들에게 정치적 보복을 하기로 결정합니다. 선거가 도난당했다는 거죠.

놀랍지 않습니다. 어디에서 많이 들어본 것 같지 않나요?
맞습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2020년 대통령 선거에서 자신이 조 바이든(현직) 대통령에게 졌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도난당한 선거"를 주장했던 것과 같습니다(현재 진행형입니다). 트럼프는 당시 법무부에 부정 선거가 의심된다는 성명을 발표하도록 종용하고, 조지아주에는 선거 재검표를 지시했으며, 이도 저도 먹히지 않자 마침내 자신을 지지하는 극우 추종자들을 워싱턴 D.C.로 불러모아 미 의사당으로 진격하도록 불을 놓았죠.

솔로몬 페냐(39) 미 뉴멕시코주 하원의원 후보.
39살. 젊은 히스패닉 정치인 페냐는 열렬한 트럼프 추종자였습니다(놀랍지 않습니다). 페냐는 2021년 1월 6일 워싱턴으로 날아가 트럼프의 이른바 "도둑맞은 선거"를 되찾기 위한 시위에 참여했습니다. 트럼프와 트럼프가 꿈꾸는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를 신념으로 삼았습니다. 트럼프가 뿌린 "선거 결과 부정" 이라는 씨앗은 페냐의 마음 속에서 싹을 틔웠습니다. "난 지지 않았어. 저들이 조작한 거야."

"상대당 죽여달라" 청부 총격 사주한 젊은 정치인

직접 보복하기엔 위험하다고 판단했을까요? 페냐는 일당 4명을 고용해 돈을 주고 청부 총격을 사주했습니다. 집 주소를 주고 가서 총을 쏘라고 한 겁니다.

민주당 관계자들을 겨냥한 총격은 지난해 중간선거가 끝난 후 보름 뒤인 12월 4일 시작됩니다. 앨버커키 경찰은 12월 4일 누군가가 민주당 소속 카운티 위원인 아드리안 바르보아의 집에 총 8발을 발사했다고 밝혔습니다. 이어 12월 8일, 하비에르 마르티네스 주 하원의원(역시 민주당 소속)의 집에서 총성이 울렸습니다. 사흘 뒤인 12월 11일, 또 다른 카운티 위원인 데비 오말리(민주당)의 집을 겨냥한 총격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카운티 위원들은 선거 결과를 인증하는 역할(미국 대선에서 의회 의원들의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연쇄 총격 범행의 꼬리가 잡힌 건 이달 초 뉴멕시코 주 상원의원인 린다 로페즈의 집을 겨냥한 총격이었습니다.

경찰 조사에서 제보자는 총격 범행이 페냐의 맘에 들지 않았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정치인들과 그들의 가족들이 이미 잠을 자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늦은 밤에 민주당 관계자들에 대한 첫 번째 총격이 일어났고, 일부는 집의 벽 높이에서 총이 발사된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제보자는 "페냐는 총격이 더 공격적이길 원했다. 더 낮은 곳으로 (사람을 맞힐 수 있는 높이에서) 발사되길 원했다"고 진술했습니다.

총격이 성에 차지 않았던 페냐는 마지막 공격이었던 주 상원의원의 집으로 갈 때는 본인이 직접 자동소총 AR 15를 들고 동행했습니다. 그러나 페냐의 총은 기기 오작동으로 발사되지 않았고, 같이 간 다른 일당의 총알은 12발 넘게 발사돼 로페즈 의원의 10살 난 딸이 자고 있던 침실 벽을 관통했습니다. 인명 피해는 발생하지 않았지만, 다행이라고 하기엔 용납할 수 없는 범행입니다.

뉴멕시코 로페즈 주 상원의원 집을 관통한 총탄. 10살 딸이 자고 있던 침실 벽을 관통했다
경찰은 마지막 공격 직후 공범인 호세 트루히요(21세)를 체포해 범행의 전모를 알게 됐습니다. 페냐는 형사청탁, 가중폭행 미수, 점유 주택 총격, 이동 중인 차량에서 총격, 음모 등의 혐의로 기소됐습니다.

■어쩌다 이런 사람이 하원 의원 후보가 되었을까?

큰 표 차로 졌다고는 하나 페냐의 이력으로 공화당의 후보로 선출됐다는 것은 믿기 힘든 일입니다. 페냐는 강도와 절도 등의 혐의로 뉴멕시코 주에서 7년 가까이 복역한 뒤 2016년 출소했습니다. 출소 뒤엔 뉴멕시코 대학에서 정치학 학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페냐의 전과 내용은 완전히 알려지진 않았습니다만, 2010년 페냐가 한 교정 시설의 구내식당에서 일할 당시, 한 수감자가 그에게 버터를 던지고 머리를 박자, 수감자의 눈을 찔렀다고 합니다(뉴욕타임즈 보도).

지난해 중간선거 후보자 선출 과정에서 민주당이 전과를 이유로 그의 출마 자격을 박탈하려 했지만, 주 하원 공화당 지도부의 대변인은 페냐의 출마를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그를 변호했습니다.

물론 페냐가 체포된 현재, 뉴멕시코주 공화당의 입장은 선회했습니다. "아무도 다치지 않은 것에 감사한다. 페냐는 법적으로 기소하기에 충분하다."

■페냐의 체포는 단순히 하나의 우발적 범행이 아니다

중간선거 투표 직전에 일어났던 낸시 펠로시 전 하원의장의 남편 폴 펠로시에 대한 공격(본래 낸시를 공격하기 위해 자택으로 침입해 낸시~를 찾아 헤맸다고 하죠), 그레첸 휘트머 미시간 주지사 납치 음모, 워싱턴 주 프라밀라 자야팔 하원의원에 대한 무장 남성의 스토킹 등 현실에서 정치적 폭력이 발현된 일련의 현상이라는 겁니다.

2021년 1월 6일 트럼프의 ‘선거 사기’ 집회에 참석을 인증하는 페냐
지난 중간선거에서 트럼프는 자신을 지지하고, 대선 사기 주장에 동조한 많은 이들을 공화당 후보로 꽂아넣었습니다. 대다수는 당선되지 못했지만, 일부는 분명한 승리를 거뒀습니다. 극단으로 갈라진 미국 정치에서 트럼프가 뿌린 씨앗들은 지금 발아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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