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시골에 묻힌 11살의 울음…국가 책임 규명될까?

입력 2023.01.22 (09:00)

읽어주기 기능은 크롬기반의
브라우저에서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요약

보건복지부 공식 통계에 따르면 해외 입양이 시작된 1958년부터 지난 2021년까지 16만 8,285명의 아동이 해외로 입양 보내졌습니다. 특히 1970~80년대에는 한해 1만 명 가까운 아이들을 입양 보낼 정도였습니다. 입양 보내는 데 급급하다보니 인권 침해와 불법 행위도 있었습니다. 부모가 있는데도 고아 호적을 발급받아 입양보내고, 입양 후 양부모에게 학대를 당하더라도 방치했습니다. 심지어 부모의 동의를 받지 않고 해외로 입양보낸 사례도 있습니다.

해외 입양인들이 아픔을 딛고 국가의 책임을 묻기 위해 움직이고 있습니다. 많은 입양인이 진실화해위원회에 정식 조사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국가와 입양기관을 상대로 최초로 소송을 제기한 해외입양인도 있습니다. 이들이 내는 목소리가 책임 규명으로 이어질 수 있을까요?

관련 기사: “왜 내 나라에서 추방돼야 했나요?”…국가에 책임 묻는 입양인들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6929623


■ 친부모 동의도 없이 해외로..."왜 내 나라에서 추방돼야 했나요?"

1982년 어린이날, 광주에서 살던 김유리 씨는 9살이 되던 해 엄마 손에 이끌려 고아원에 맡겨졌습니다. 엄마는 어려운 집안 사정이 나아질 때까지 잠시만 있어 달라는 말을 했습니다.

"엄마가 천사의 집(고아원)에 데려다 주면서 당분간만 있어달라고, 자주 연락하시겠다고 했어요. 고아원에 맡겨진 이후로도 엄마가 편지도 보내주시고 소포도 보내주시고 했던 기억이 나요."

그렇게 겨우 낯선 고아원에서 적응하던 중, 한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입양기관 홀트아동복지회 직원이었습니다. 그 직원은 김 씨에게 해외로 입양 갈 거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엄마를 기다리던 김 씨는 의아했습니다.

"홀트 직원이 제 영문 이름에 ‘k83471’라는 일련 번호가 붙은 서류를 들고 와서 너는 프랑스로 갈 거라고 말했어요. 그래서 저는 이 사실을 엄마가 알고 있냐고 우리 엄마 만나게 해달라고 했었어요. 고아원 대표는 저한테 이미 엄마가 동의한 일이라고 말을 하더라고요"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이는 입양기관과 고아원의 거짓말이었습니다. 김 씨의 부모님은 입양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부모님도, 김 씨도 모르는 사이에 입양 절차는 일사천리로 진행됐습니다. 가정법원의 심판으로 김 씨는 법적인 고아가 됐고, 입양기관인 홀트아동복지회 회장이 김 씨의 후견인이 됐습니다. 그렇게 ‘고아’가 된 김 씨는 남동생과 함께 프랑스로 떠났습니다. 김 씨가 11살, 남동생이 9살 때였습니다.

"부모가 있는 나라에서 내가 뭘 잘못했길래 나를 다른 데로 추방하지? 열한 살이면 내 삶이라는 게 있는데 왜 나는 여기서 살 수가 없지? 생각이 들었어요. 프랑스에는 한국말 하는 직원도 아무도 없었고 무서웠어요."

스무 시간 가까운 비행 끝에 도착한 프랑스. 불행하게도 김 씨가 만난 양부모는 좋은 부모가 아니었습니다. 프랑스로 도착한 직후부터 학대가 시작됐습니다.

"버터나 크림 들어간 거 우리는 전혀 그런 걸 먹어본 적이 없어서 구토까지 하고 그랬었는데 그거를 다시 먹으라고 때리면서..."

두 남매를 향한 양부의 학대는 점점 심해졌습니다. 하지만 겨우 이천 명이 사는 프랑스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존경받는 전직 경찰'인 양부를 상대로 김 씨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습니다. 그렇게 지옥같은 시간을 보냈지만, 입양을 보낸 기관은 한 번도 김 씨 남매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들여다보지 않았습니다.

“방문이라도 한 번은 오겠지 싶었죠. 근데 단 한 번도 오지 않았어요. 양부가 이상한 짓을 하고, 성적인 학대를 하고, 우리 한국으로 다시 보내달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17살이 되던 해에 김 씨는 6년 만에 양부모와 살던 시골에서 혼자 도망쳤습니다. 이후 김 씨는 한국에서 친부모도 만났지만, 다시 가족이 되기엔 너무 시간이 오래 흘러버린 뒤였습니다.

“많은 분들이 친부모를 찾은 저에게 ‘앞으로는 부모님들과 행복하세요’라는 말을 해줘요. 하지만 저는 우리 부모님들하고 행복할 수가 없어요. 우리는 다시 가족이 될 수가 없어요. 헤어진 시간이 너무 길기 때문에 38년이라는 시간은 되돌릴 수가 없어요."

"(제가 겪은 입양제도는) 수준이 낮은 입양제도라고 할까요. 이 모델은 가족을 파괴시키는 모델이라고 생각합니다.”

김 씨는 진실 규명을 위해 자신의 입양 과정에서 벌어진 국가와 입양기관의 불법행위 증거들을 수집하고 있습니다. 한국 입양 제도에 대한 대한 보고서를 작성해 UN 등 국제 사회에 공개하는 게 목표입니다.

■ '시민권 취득 못 해 미국에서도 추방'… 해외입양인 최초 국가 상대 소송

3살 때 미국으로 입양 보내진 애덤 크랩서 씨도 ‘수준이 낮은 입양 제도’의 피해자입니다. 크랩서 씨는 양부모의 지속적인 학대를 받다가 12살에 파양됐습니다. 재입양된 이후 두 번째 양부모에게도 학대를 받고 16살에 노숙자 신세가 됐습니다.

이 과정에서 양부모들은 크랩서 씨의 시민권 취득 절차를 마치지 않았습니다. 애덤 씨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불법 체류' 상태가 됐습니다. 미국에서 결혼하고 가정을 꾸렸던 크랩서 씨는 미국법에 따라 2016년에 한국으로 추방됐습니다.

2019년 크랩서 씨는 홀트아동복지회가가 입양기관으로서 책임을 다하지 못했고, 대한민국 정부가 관리 감독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며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해외 입양인이 국가와 입양기관을 상대로 제기한 첫 소송입니다.

크랩서 씨의 소송을 대리하고 있는 법무법인 지향의 김수정 변호사는 "소송을 통해 돈을 받아내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국가와 입양기관에 책임을 묻기 위해 하고 있는 소송"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국가와 홀트 측은 재판 과정 내내 법적 책임을 부인해왔습니다. 김 변호사는 "국가와 입양기관 측은 크랩서 씨의 사연이 안타깝긴 하지만, 당시 입양기관에 사후관리나 국적 취득 여부를 확인해야 하는 법적인 의무가 없었다고 주장해왔다"고 말했습니다.

■ 미뤄진 재판 선고… '사후관리 책임' 증거 발견돼

크랩서 씨가 제기한 민사소송의 결과는 작년 12월 20일에 나올 예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선고일 직전에 크랩서 씨의 변호인단은 국가기록원에서 새로운 증거를 발견했습니다. 새로운 증거를 제출받은 재판부는 선고일을 뒤로 미뤘습니다.

변호인단이 제출한 문서 중 하나가 1983년 보건사회부(지금의 보건복지부)가 국내 입양 기관에 보낸 ‘입양알선기관 사업지침’입니다. 보건사회부는 입양기관에 '외국의 협약기관을 통해 아동의 적응 상태를 6개월에 1번 이상 관찰하고, 입양 후에는 국적 취득 상황을 파악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입양기관에 '사후관리 의무'가, 국가기관에는 '관리책임'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문서입니다.

보건사회부 ‘1983년 입양알선기관 사업지침’보건사회부 ‘1983년 입양알선기관 사업지침’

하지만 취재 중에 만난 수많은 입양인 중에서 입양 보내진 후에 입양기관이 찾아오거나 안부를 물어본 적이 있었다고 말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애덤 크랩서 씨의 소송 결과도 불과 몇 달 뒤면 나옵니다. 재판부가 국가와 입양기관의 책임이 있다고 인정한다면, 비슷한 처지의 해외 입양인들이 연달아 소송을 제기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 진실화해위 조사신청도 잇따라… 해외입양의 '진실' 밝혀질까?

해외입양의 문제점을 밝히고, 국가의 책임을 묻기 위한 움직임은 또 있습니다. 지금까지 해외입양인 371명이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 해외 입양 과정에 전반에 대한 조사를 신청했습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지난해 12월 "해외입양 과정에 국가 등의 불법행위와 아동과 친생부모에 대한 중대한 인권침해 소지가 있다"며 이 중 일부인 34건에 대해 조사개시 결정을 내렸습니다. 해외 입양인들의 조사 신청은 이어지고 있어 앞으로 조사는 더 확대될 겁니다.

'수준이 낮은 입양제도'의 피해자인 해외입양인들. 지금까지 아무도 이들의 목소리를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11살 김유리 씨의 울음은 프랑스 시골 마을에 묻혀버렸고, 어린 크랩서 씨를 살펴야 했던 입양기관은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이들의 목소리가 이번에는 어디까지 닿을 수 있을까요? 어렵게 낸 목소리가 진실규명과 국가의 사과로 이어질 수 있을지 지켜봐야겠습니다.

■ 제보하기
▷ 카카오톡 : 'KBS제보' 검색, 채널 추가
▷ 전화 : 02-781-1234, 4444
▷ 이메일 : kbs1234@kbs.co.kr
▷ 유튜브, 네이버, 카카오에서도 KBS뉴스를 구독해주세요!


  • 프랑스 시골에 묻힌 11살의 울음…국가 책임 규명될까?
    • 입력 2023-01-22 09:00:31
    취재K
보건복지부 공식 통계에 따르면 해외 입양이 시작된 1958년부터 지난 2021년까지 16만 8,285명의 아동이 해외로 입양 보내졌습니다. 특히 1970~80년대에는 한해 1만 명 가까운 아이들을 입양 보낼 정도였습니다. 입양 보내는 데 급급하다보니 인권 침해와 불법 행위도 있었습니다. 부모가 있는데도 고아 호적을 발급받아 입양보내고, 입양 후 양부모에게 학대를 당하더라도 방치했습니다. 심지어 부모의 동의를 받지 않고 해외로 입양보낸 사례도 있습니다.<br /><br />해외 입양인들이 아픔을 딛고 국가의 책임을 묻기 위해 움직이고 있습니다. 많은 입양인이 진실화해위원회에 정식 조사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국가와 입양기관을 상대로 최초로 소송을 제기한 해외입양인도 있습니다. 이들이 내는 목소리가 책임 규명으로 이어질 수 있을까요?<br /><br />관련 기사: “왜 내 나라에서 추방돼야 했나요?”…국가에 책임 묻는 입양인들<br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6929623

■ 친부모 동의도 없이 해외로..."왜 내 나라에서 추방돼야 했나요?"

1982년 어린이날, 광주에서 살던 김유리 씨는 9살이 되던 해 엄마 손에 이끌려 고아원에 맡겨졌습니다. 엄마는 어려운 집안 사정이 나아질 때까지 잠시만 있어 달라는 말을 했습니다.

"엄마가 천사의 집(고아원)에 데려다 주면서 당분간만 있어달라고, 자주 연락하시겠다고 했어요. 고아원에 맡겨진 이후로도 엄마가 편지도 보내주시고 소포도 보내주시고 했던 기억이 나요."

그렇게 겨우 낯선 고아원에서 적응하던 중, 한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입양기관 홀트아동복지회 직원이었습니다. 그 직원은 김 씨에게 해외로 입양 갈 거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엄마를 기다리던 김 씨는 의아했습니다.

"홀트 직원이 제 영문 이름에 ‘k83471’라는 일련 번호가 붙은 서류를 들고 와서 너는 프랑스로 갈 거라고 말했어요. 그래서 저는 이 사실을 엄마가 알고 있냐고 우리 엄마 만나게 해달라고 했었어요. 고아원 대표는 저한테 이미 엄마가 동의한 일이라고 말을 하더라고요"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이는 입양기관과 고아원의 거짓말이었습니다. 김 씨의 부모님은 입양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부모님도, 김 씨도 모르는 사이에 입양 절차는 일사천리로 진행됐습니다. 가정법원의 심판으로 김 씨는 법적인 고아가 됐고, 입양기관인 홀트아동복지회 회장이 김 씨의 후견인이 됐습니다. 그렇게 ‘고아’가 된 김 씨는 남동생과 함께 프랑스로 떠났습니다. 김 씨가 11살, 남동생이 9살 때였습니다.

"부모가 있는 나라에서 내가 뭘 잘못했길래 나를 다른 데로 추방하지? 열한 살이면 내 삶이라는 게 있는데 왜 나는 여기서 살 수가 없지? 생각이 들었어요. 프랑스에는 한국말 하는 직원도 아무도 없었고 무서웠어요."

스무 시간 가까운 비행 끝에 도착한 프랑스. 불행하게도 김 씨가 만난 양부모는 좋은 부모가 아니었습니다. 프랑스로 도착한 직후부터 학대가 시작됐습니다.

"버터나 크림 들어간 거 우리는 전혀 그런 걸 먹어본 적이 없어서 구토까지 하고 그랬었는데 그거를 다시 먹으라고 때리면서..."

두 남매를 향한 양부의 학대는 점점 심해졌습니다. 하지만 겨우 이천 명이 사는 프랑스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존경받는 전직 경찰'인 양부를 상대로 김 씨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습니다. 그렇게 지옥같은 시간을 보냈지만, 입양을 보낸 기관은 한 번도 김 씨 남매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들여다보지 않았습니다.

“방문이라도 한 번은 오겠지 싶었죠. 근데 단 한 번도 오지 않았어요. 양부가 이상한 짓을 하고, 성적인 학대를 하고, 우리 한국으로 다시 보내달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17살이 되던 해에 김 씨는 6년 만에 양부모와 살던 시골에서 혼자 도망쳤습니다. 이후 김 씨는 한국에서 친부모도 만났지만, 다시 가족이 되기엔 너무 시간이 오래 흘러버린 뒤였습니다.

“많은 분들이 친부모를 찾은 저에게 ‘앞으로는 부모님들과 행복하세요’라는 말을 해줘요. 하지만 저는 우리 부모님들하고 행복할 수가 없어요. 우리는 다시 가족이 될 수가 없어요. 헤어진 시간이 너무 길기 때문에 38년이라는 시간은 되돌릴 수가 없어요."

"(제가 겪은 입양제도는) 수준이 낮은 입양제도라고 할까요. 이 모델은 가족을 파괴시키는 모델이라고 생각합니다.”

김 씨는 진실 규명을 위해 자신의 입양 과정에서 벌어진 국가와 입양기관의 불법행위 증거들을 수집하고 있습니다. 한국 입양 제도에 대한 대한 보고서를 작성해 UN 등 국제 사회에 공개하는 게 목표입니다.

■ '시민권 취득 못 해 미국에서도 추방'… 해외입양인 최초 국가 상대 소송

3살 때 미국으로 입양 보내진 애덤 크랩서 씨도 ‘수준이 낮은 입양 제도’의 피해자입니다. 크랩서 씨는 양부모의 지속적인 학대를 받다가 12살에 파양됐습니다. 재입양된 이후 두 번째 양부모에게도 학대를 받고 16살에 노숙자 신세가 됐습니다.

이 과정에서 양부모들은 크랩서 씨의 시민권 취득 절차를 마치지 않았습니다. 애덤 씨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불법 체류' 상태가 됐습니다. 미국에서 결혼하고 가정을 꾸렸던 크랩서 씨는 미국법에 따라 2016년에 한국으로 추방됐습니다.

2019년 크랩서 씨는 홀트아동복지회가가 입양기관으로서 책임을 다하지 못했고, 대한민국 정부가 관리 감독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며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해외 입양인이 국가와 입양기관을 상대로 제기한 첫 소송입니다.

크랩서 씨의 소송을 대리하고 있는 법무법인 지향의 김수정 변호사는 "소송을 통해 돈을 받아내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국가와 입양기관에 책임을 묻기 위해 하고 있는 소송"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국가와 홀트 측은 재판 과정 내내 법적 책임을 부인해왔습니다. 김 변호사는 "국가와 입양기관 측은 크랩서 씨의 사연이 안타깝긴 하지만, 당시 입양기관에 사후관리나 국적 취득 여부를 확인해야 하는 법적인 의무가 없었다고 주장해왔다"고 말했습니다.

■ 미뤄진 재판 선고… '사후관리 책임' 증거 발견돼

크랩서 씨가 제기한 민사소송의 결과는 작년 12월 20일에 나올 예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선고일 직전에 크랩서 씨의 변호인단은 국가기록원에서 새로운 증거를 발견했습니다. 새로운 증거를 제출받은 재판부는 선고일을 뒤로 미뤘습니다.

변호인단이 제출한 문서 중 하나가 1983년 보건사회부(지금의 보건복지부)가 국내 입양 기관에 보낸 ‘입양알선기관 사업지침’입니다. 보건사회부는 입양기관에 '외국의 협약기관을 통해 아동의 적응 상태를 6개월에 1번 이상 관찰하고, 입양 후에는 국적 취득 상황을 파악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입양기관에 '사후관리 의무'가, 국가기관에는 '관리책임'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문서입니다.

보건사회부 ‘1983년 입양알선기관 사업지침’
하지만 취재 중에 만난 수많은 입양인 중에서 입양 보내진 후에 입양기관이 찾아오거나 안부를 물어본 적이 있었다고 말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애덤 크랩서 씨의 소송 결과도 불과 몇 달 뒤면 나옵니다. 재판부가 국가와 입양기관의 책임이 있다고 인정한다면, 비슷한 처지의 해외 입양인들이 연달아 소송을 제기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 진실화해위 조사신청도 잇따라… 해외입양의 '진실' 밝혀질까?

해외입양의 문제점을 밝히고, 국가의 책임을 묻기 위한 움직임은 또 있습니다. 지금까지 해외입양인 371명이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 해외 입양 과정에 전반에 대한 조사를 신청했습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지난해 12월 "해외입양 과정에 국가 등의 불법행위와 아동과 친생부모에 대한 중대한 인권침해 소지가 있다"며 이 중 일부인 34건에 대해 조사개시 결정을 내렸습니다. 해외 입양인들의 조사 신청은 이어지고 있어 앞으로 조사는 더 확대될 겁니다.

'수준이 낮은 입양제도'의 피해자인 해외입양인들. 지금까지 아무도 이들의 목소리를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11살 김유리 씨의 울음은 프랑스 시골 마을에 묻혀버렸고, 어린 크랩서 씨를 살펴야 했던 입양기관은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이들의 목소리가 이번에는 어디까지 닿을 수 있을까요? 어렵게 낸 목소리가 진실규명과 국가의 사과로 이어질 수 있을지 지켜봐야겠습니다.

이 기사가 좋으셨다면

오늘의 핫 클릭

실시간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뉴스

이 기사에 대한 의견을 남겨주세요.

2024 파리 패럴림픽 배너 이미지 수신료 수신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