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 집념으로 일군 천안 ‘우리밀 왕국’

입력 2023.01.24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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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100% 민간 소비하는 천안 우리밀
호두과자 '재료 국산화' 이종민 씨
"판로 문제 해결이 밀 육성 핵심"

충남 천안의 우리밀 생산단지충남 천안의 우리밀 생산단지

'천안 호두과자에 천안이 없다'. 신문기사 한 줄에 평범한 호두 농사꾼 이종민 씨(現 천안밀영농조합 대표) 피가 끓었다. 호두과자에 쓰이는 밀과 호두, 팥 모두 수입산이란 기사 내용이었다. 천안에서 3대 째 농사를 짓는 이 씨가 이걸 한 번 바꿔보자고 마음 먹은 게 2007년의 일이었다.

■ "농사꾼이 무슨 밀가루냐"

힘들게 키운 우리밀을 들고 천안 시내 호두과자 가게를 돌았지만 전부 퇴짜를 맞았다. 수입밀이 훨씬 싸고 맛도 더 좋다는 편견이었다. 2년간 제빵 기술을 배운 끝에 우리밀에 적합한 수분량과 발효·가공법을 깨달았다. 다시 제과점을 돌며 우리밀 반죽하는 법을 알려주겠다고 했더니 "농사꾼이 무슨 밀가루 반죽이냐"라는 핀잔이 돌아왔다. 고집을 꺾지 않았다. 눈앞에서 직접 반죽하는 모습을 보여주자 제빵사들 눈이 휘둥그래졌다. "다른 밀은 안 되던데, 천안 밀은 빵이 되네요?"

이종민 천안밀영농조합 대표가 우리밀 반죽을 하고 있다이종민 천안밀영농조합 대표가 우리밀 반죽을 하고 있다

"우리밀이 품질이 나쁜 게 아니라 특성이 다른 거예요. 비가 많이 오거나 가물면 밀 단백질과 글루텐 함량이 달라집니다. 거기에 맞춰 반죽할 때 넣는 물과 숙성 시간이 따로 있는데, 그걸 모르는 거죠. 해방 직후 미국이 밀을 무상으로 공급해 주다 보니까 밀 산업이 붕괴되고, 우리밀 다루는 기술이 그 때 다 사라져 버렸습니다" - 이종민 천안밀영농조합 대표

천안 호두과자 제과점들이 쓰고 있는 ‘천안 우리밀’ [촬영기자 최진영]천안 호두과자 제과점들이 쓰고 있는 ‘천안 우리밀’ [촬영기자 최진영]

지금 천안 시내 호두과자 가게들 80%가 천안에서 생산된 밀을 쓴다. 박상갑 옛날천안호두과자 실장은 "우리밀로 바꾼 뒤 손님들이 맛도 좋고 소화도 더 잘 된다고 얘기한다"라고 했다. 천안 시내 칼국수집과 제과점은 물론이고 강원·제주 전국 50여곳 가게에서 천안밀을 써서 음식을 만든다. 천안에서 생산되는 밀 은 연간 800톤(재배면적 200㏊). 삼양사에서 OEM 방식으로 제분한 뒤 자체 상표로 전국으로 퍼진다. 연간 매출이 20억 원이 넘는다.

■ 100년 전만 해도 흔했던 밀밭

밀 얘기하면 '우리 땅엔 안 맞아'란 반응 일색이다. 과연 그럴까. 시인 박목월은 '강나루 건너서 / 밀밭 길을 / 구름에 달 가듯이 / 가는 나그네' 같은 시를 어떻게 쓸 수 있었을까. 일제시대인 1920년만 해도 우리 땅에서 밀밭은 흔하디 흔했고, 생산량도 지금의 10배가 넘었다. 하지만 미국의 무상 공급(1970년대), 밀 수입 자유화(1982년), 밀 정부 수매 중단(1984년) 등을 거치며 우리밀은 씨가 말랐다.


'외국에서 싸게 사서 먹으면 된다'라는 생각이 지배하고 있다. 당연히 수입밀이 우리밀에 비해 훨씬 싸기는 하다. 우리밀 가격(㎏당 975원)은 수입밀의 2.5배 수준이다. 하지만 언제까지 그러리란 보장은 없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지난해 수입밀 가격이 40% 넘게 폭등했고, 식품 물가에 그대로 전이됐다. 우리는 연간 밀 450만 톤 정도를 소비하는데, 99%가 수입이다. 지난해 밀 443만 톤 수입에 1조 7천억 원(13억 6,100만 달러)을 썼다.


밀은 쌀과 경합하지 않는다. 쌀은 여름에 키우고, 밀은 겨울에 키운다. 이모작이 가능하다는 얘기다. 쌀과 농기계도 같이 쓰고, 키오는 게 크게 까다롭지도 않다. 그런데도 농민들은 키우지 않는다. 차라리 겨울이면 공사장 같은 곳에 나가 다른 일을 하는 걸 선호한다. 밀 키워봤자 쌀로 얻을 수 있는 소득의 3분의 1에도 못 미치기 때문이다. 이종민 씨는 "농사꾼은 팔 곳이 없으면 절대 농사를 짓지 않는다"라면서 "소비처를 늘리기 위해 정부에 밀 가공법을 교육·공유할 수 있는 장소라도 만들어 달라고 했지만, 들어주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 우리밀 육성한다지만…

정부는 2020년 '밀 산업 육성법'을 제정했다. 그때 세운 계획은 우리밀 생산량의 25%를 정부가 수매하고(실제로는 40% 정도까지 수매한다고 농식품부는 설명한다), 생산단지는 5년간 50곳으로 늘린다는 내용이다. 올해부터는 별도로 '전략작물직불제'를 도입해 콩과 가루 쌀을 이모작하는 밀 농가에게 ㏊당 250만 원의 추가 직불금을 준다.


이런 장밋빛 구상을 믿는 밀 농가들은 많지 않다. 김경아 우리밀살리기운동본부 사무총장은 "생산단지를 육성한다고 하지만 정부 수매량은 제한돼 있고, 구체적 소비 계획을 세우지도 않는다"라면서 "쌀과 밀을 이모작하는 것도 힘든데, 직불금을 늘려주지도 않고 콩·가루 쌀도 같이 키워야 한다는 어려운 조건만 내걸었다"라고 비판했다. 정부는 벼 재배면적을 줄여야 하기 때문에, 쌀과 밀을 이모작하는 농가에게까지 추가 직불금을 주긴 어렵다는 입장이다.

■ '우리밀 왕국'의 영속성

해답은 관공서의 두꺼운 서류철 속이 아니라, 천안 밀밭에 있을지도 모른다.

지산지소(地産地消). '지역에서 생산한 농산물을 지역에서 소비한다'라는 뜻이다. 신토불이(身土不二)가 감정에 호소할 뿐이었다면, 이 말은 좀 더 경제적 개념에 가깝다. 천안밀은 정부 수매 일절 없이, 지역에서 100% 소비한다. 이 씨는 '지산지소'를 실현한, 성공한 농사꾼인 셈이다.

이종민 천안밀영농조합 대표(오른쪽)이 기자에게 우리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촬영기자 최진영]이종민 천안밀영농조합 대표(오른쪽)이 기자에게 우리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촬영기자 최진영]

광할한 밀밭을 보며 그에게 '우리밀 왕국'을 만든 소감이 어떠냐고 물었다.

"천안 한 곳 바꾸는데 15년 걸렸습니다. 정부 도움은 바라지도 않아요. 혹여나 백종원 대표라도 우리밀 우수성을 널리 알려줄 수 있다면, 이걸 전국의 다른 농촌으로 넓힐 수 있지 않을까요?"

(인포그래픽 : 김서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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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5년 집념으로 일군 천안 ‘우리밀 왕국’
    • 입력 2023-01-24 08:00:48
    취재K
100% 민간 소비하는 천안 우리밀<br />호두과자 '재료 국산화' 이종민 씨<br />"판로 문제 해결이 밀 육성 핵심"
충남 천안의 우리밀 생산단지
'천안 호두과자에 천안이 없다'. 신문기사 한 줄에 평범한 호두 농사꾼 이종민 씨(現 천안밀영농조합 대표) 피가 끓었다. 호두과자에 쓰이는 밀과 호두, 팥 모두 수입산이란 기사 내용이었다. 천안에서 3대 째 농사를 짓는 이 씨가 이걸 한 번 바꿔보자고 마음 먹은 게 2007년의 일이었다.

■ "농사꾼이 무슨 밀가루냐"

힘들게 키운 우리밀을 들고 천안 시내 호두과자 가게를 돌았지만 전부 퇴짜를 맞았다. 수입밀이 훨씬 싸고 맛도 더 좋다는 편견이었다. 2년간 제빵 기술을 배운 끝에 우리밀에 적합한 수분량과 발효·가공법을 깨달았다. 다시 제과점을 돌며 우리밀 반죽하는 법을 알려주겠다고 했더니 "농사꾼이 무슨 밀가루 반죽이냐"라는 핀잔이 돌아왔다. 고집을 꺾지 않았다. 눈앞에서 직접 반죽하는 모습을 보여주자 제빵사들 눈이 휘둥그래졌다. "다른 밀은 안 되던데, 천안 밀은 빵이 되네요?"

이종민 천안밀영농조합 대표가 우리밀 반죽을 하고 있다
"우리밀이 품질이 나쁜 게 아니라 특성이 다른 거예요. 비가 많이 오거나 가물면 밀 단백질과 글루텐 함량이 달라집니다. 거기에 맞춰 반죽할 때 넣는 물과 숙성 시간이 따로 있는데, 그걸 모르는 거죠. 해방 직후 미국이 밀을 무상으로 공급해 주다 보니까 밀 산업이 붕괴되고, 우리밀 다루는 기술이 그 때 다 사라져 버렸습니다" - 이종민 천안밀영농조합 대표

천안 호두과자 제과점들이 쓰고 있는 ‘천안 우리밀’ [촬영기자 최진영]
지금 천안 시내 호두과자 가게들 80%가 천안에서 생산된 밀을 쓴다. 박상갑 옛날천안호두과자 실장은 "우리밀로 바꾼 뒤 손님들이 맛도 좋고 소화도 더 잘 된다고 얘기한다"라고 했다. 천안 시내 칼국수집과 제과점은 물론이고 강원·제주 전국 50여곳 가게에서 천안밀을 써서 음식을 만든다. 천안에서 생산되는 밀 은 연간 800톤(재배면적 200㏊). 삼양사에서 OEM 방식으로 제분한 뒤 자체 상표로 전국으로 퍼진다. 연간 매출이 20억 원이 넘는다.

■ 100년 전만 해도 흔했던 밀밭

밀 얘기하면 '우리 땅엔 안 맞아'란 반응 일색이다. 과연 그럴까. 시인 박목월은 '강나루 건너서 / 밀밭 길을 / 구름에 달 가듯이 / 가는 나그네' 같은 시를 어떻게 쓸 수 있었을까. 일제시대인 1920년만 해도 우리 땅에서 밀밭은 흔하디 흔했고, 생산량도 지금의 10배가 넘었다. 하지만 미국의 무상 공급(1970년대), 밀 수입 자유화(1982년), 밀 정부 수매 중단(1984년) 등을 거치며 우리밀은 씨가 말랐다.


'외국에서 싸게 사서 먹으면 된다'라는 생각이 지배하고 있다. 당연히 수입밀이 우리밀에 비해 훨씬 싸기는 하다. 우리밀 가격(㎏당 975원)은 수입밀의 2.5배 수준이다. 하지만 언제까지 그러리란 보장은 없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지난해 수입밀 가격이 40% 넘게 폭등했고, 식품 물가에 그대로 전이됐다. 우리는 연간 밀 450만 톤 정도를 소비하는데, 99%가 수입이다. 지난해 밀 443만 톤 수입에 1조 7천억 원(13억 6,100만 달러)을 썼다.


밀은 쌀과 경합하지 않는다. 쌀은 여름에 키우고, 밀은 겨울에 키운다. 이모작이 가능하다는 얘기다. 쌀과 농기계도 같이 쓰고, 키오는 게 크게 까다롭지도 않다. 그런데도 농민들은 키우지 않는다. 차라리 겨울이면 공사장 같은 곳에 나가 다른 일을 하는 걸 선호한다. 밀 키워봤자 쌀로 얻을 수 있는 소득의 3분의 1에도 못 미치기 때문이다. 이종민 씨는 "농사꾼은 팔 곳이 없으면 절대 농사를 짓지 않는다"라면서 "소비처를 늘리기 위해 정부에 밀 가공법을 교육·공유할 수 있는 장소라도 만들어 달라고 했지만, 들어주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 우리밀 육성한다지만…

정부는 2020년 '밀 산업 육성법'을 제정했다. 그때 세운 계획은 우리밀 생산량의 25%를 정부가 수매하고(실제로는 40% 정도까지 수매한다고 농식품부는 설명한다), 생산단지는 5년간 50곳으로 늘린다는 내용이다. 올해부터는 별도로 '전략작물직불제'를 도입해 콩과 가루 쌀을 이모작하는 밀 농가에게 ㏊당 250만 원의 추가 직불금을 준다.


이런 장밋빛 구상을 믿는 밀 농가들은 많지 않다. 김경아 우리밀살리기운동본부 사무총장은 "생산단지를 육성한다고 하지만 정부 수매량은 제한돼 있고, 구체적 소비 계획을 세우지도 않는다"라면서 "쌀과 밀을 이모작하는 것도 힘든데, 직불금을 늘려주지도 않고 콩·가루 쌀도 같이 키워야 한다는 어려운 조건만 내걸었다"라고 비판했다. 정부는 벼 재배면적을 줄여야 하기 때문에, 쌀과 밀을 이모작하는 농가에게까지 추가 직불금을 주긴 어렵다는 입장이다.

■ '우리밀 왕국'의 영속성

해답은 관공서의 두꺼운 서류철 속이 아니라, 천안 밀밭에 있을지도 모른다.

지산지소(地産地消). '지역에서 생산한 농산물을 지역에서 소비한다'라는 뜻이다. 신토불이(身土不二)가 감정에 호소할 뿐이었다면, 이 말은 좀 더 경제적 개념에 가깝다. 천안밀은 정부 수매 일절 없이, 지역에서 100% 소비한다. 이 씨는 '지산지소'를 실현한, 성공한 농사꾼인 셈이다.

이종민 천안밀영농조합 대표(오른쪽)이 기자에게 우리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촬영기자 최진영]
광할한 밀밭을 보며 그에게 '우리밀 왕국'을 만든 소감이 어떠냐고 물었다.

"천안 한 곳 바꾸는데 15년 걸렸습니다. 정부 도움은 바라지도 않아요. 혹여나 백종원 대표라도 우리밀 우수성을 널리 알려줄 수 있다면, 이걸 전국의 다른 농촌으로 넓힐 수 있지 않을까요?"

(인포그래픽 : 김서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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