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방관 폐방화복’이 화재 이재민 새 집 돼

입력 2023.01.26 (10:49) 수정 2023.01.26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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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소방관 폐방화복대구 소방관 폐방화복

지난해 9월 중순, 대구 달성군 화원읍 한 단독 주택 2층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불이 났습니다. 불은 20여 분만에 꺼졌지만, 화염이 빠르게 번져나가며 60제곱미터 집 내부가 상당 부분 불에 탔습니다. 불이 났을 당시 부인은 이웃집에 가느라 잠시 집을 비웠고, 거실에서 잠들었던 남편은 곧바로 대피했습니다.

화마 속 부부 모두 목숨을 건졌다는 다행스러움도 잠시. 새까맣게 잿더미로 변해버린 집 내부와 가재도구들을 보며 망연자실했습니다. 게다가 70대 남편은 대피 도중 화상을 입어 두 달 넘게 화상 치료를 받아야 했습니다. 이후 거처를 잃은 70대 노부부는 병원과 자녀들의 집을 전전했습니다.

지난해 9월 화재 피해를 본 대구 달성군 한 주택 내부지난해 9월 화재 피해를 본 대구 달성군 한 주택 내부

소방관들은 이런 화재 이재민들의 안타까운 사연을 자주 접합니다. '이들에게 현실적인 도움을 줄 수는 없을까?' 이런 생각이 계기가 돼 대구 달서소방서 소방관들이 아이디어를 냈습니다. 달서소방서를 포함해 대구 8개 소방서에서 매년 버려지고 있던 폐방화복을 활용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소방관들이 화재 현장에서 입는 방화복의 내구 연한은 3년. 1년에 2번 전문 수거업체를 통해 폐기하는 폐방화복은 3백여 벌에 달했습니다. 달서소방서는 폐방화복으로 가방, 액세서리 등을 만드는 업사이클링 업체에 연락해 업무협약을 제의했습니다. 업사이클링 제품 판매 수익금 일부를 화재 피해를 본 집 수리에 보태자는 거였습니다. 여기에 재난재해 이재민들의 주거 개선 사업을 진행하고 있던 비영리단체도 힘을 보탰습니다. 그동안 폐방화복 재활용 사례는 몇몇 있었지만, 화재 피해 주민들의 집을 고쳐주는 사업과 연계한 건 처음입니다.

채성현/한국해비타트 개인후원팀 매니져
"소방관분들이 불을 끄다 보니 어려운 분들이 화재에 더 많이 노출되는 점이 안타까우셨나 봐요. 본인들은 불을 끌 수는 있지만, 그 이후의 삶을 우리가 고쳐줄 수는 없다. 그러면서 저희가 함께 주거 지원을 해줄 수 있냐는 제안이 있으셨고. 많은 시민들한테 기금을 모으고 안전 취약 계층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전하기 위한 캠페인을 열게 됐습니다."


폐방화복을 수거하는 대구 달서소방서 직원들 모습.폐방화복을 수거하는 대구 달서소방서 직원들 모습.

사업 수혜 대상자 1호는 지난해 9월 화재 피해로 집을 잃었던 대구 달성군 70대 노부부가 됐습니다. 이들의 집 수리에는 모두 6천여만 원이 들었습니다. 대구 달서소방서가 대구지역 소방관들이 입던 폐방화복 330여 벌을 모아 업사이클링 업체에 전달했고, 재활용한 제품을 판매해 수익금 5백만 원을 기부했습니다. 달서소방서 직원들도 삼삼오오 마음을 모아 자체 기부금 100만 원도 마련했습니다. 나머지는 시민들의 성금으로 채워졌습니다. 비영리단체 한국해비타트가 지난 11월부터 진행해오고 있는 안전 취약 가정 돕기 성금 모금 캠페인을 통해서입니다. 소방관들의 헌신과 화재 이재민들의 사연에 많은 시민이 정기 후원 형태로 기부에 참여했습니다.

대구 달서소방서, 한국해비타트 등이 함께한 캠페인대구 달서소방서, 한국해비타트 등이 함께한 캠페인

화재 이후 4개월여 뒤. 추운 날씨 탓에 도색을 마치지 못해 집 외부에는 아직 화재 당시 그을음이 그대로 남았지만, 집 내부는 수리를 마치고 깨끗한 새집이 되었습니다. 설 연휴를 하루 앞둔 지난 20일. 이날은 '손 없는 날'. 화마에 집을 잃었던 70대 노부부는 다시는 화재의 아픔을 겪지 않기를 바라며 들뜬 마음으로 이사했습니다. 설 명절에는 자녀들도 찾아와 짐 정리를 거들었습니다. 발품을 팔아 저렴하면서도 멀끔한 중고 가구와 가전들을 하나 둘씩 들였습니다. 이제 70대 부부는 점차 안정을 되찾아가고 있습니다.

지난해 9월 화재 이후 수리를 마친 집 내부지난해 9월 화재 이후 수리를 마친 집 내부

김 모 씨 / 화재 피해 집주인
"정말 집이 새까맣게 다 타 버렸었어요. 쓸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어요. 이대로 (이 집을) 놔둬 버리고 그냥 방이라도 구해서 살아야 하나 생각했는데 이렇게 (수리)해 주시니까 이루 말할 수가 없죠. 저는 복권 맞았다고 생각해요. 얼마나 고마운 줄 모릅니다. 앞으로 항상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야죠."

화마 속 생명을 지켰던 소방관들의 방화복에 시민들의 따뜻한 마음이 더해져, 일상을 되찾아가고 있는 화재 이재민들. 사력으로 불을 끄고도, 못다 구한 시민의 집을 수리하는 데까지 팔을 걷어붙인 소방관들과 그 마음에 기꺼이 동참한 이웃들의 이야기가 한겨울 동장군도 뜨겁게 녹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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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방관 폐방화복’이 화재 이재민 새 집 돼
    • 입력 2023-01-26 10:49:57
    • 수정2023-01-26 15:09:52
    취재K
대구 소방관 폐방화복
지난해 9월 중순, 대구 달성군 화원읍 한 단독 주택 2층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불이 났습니다. 불은 20여 분만에 꺼졌지만, 화염이 빠르게 번져나가며 60제곱미터 집 내부가 상당 부분 불에 탔습니다. 불이 났을 당시 부인은 이웃집에 가느라 잠시 집을 비웠고, 거실에서 잠들었던 남편은 곧바로 대피했습니다.

화마 속 부부 모두 목숨을 건졌다는 다행스러움도 잠시. 새까맣게 잿더미로 변해버린 집 내부와 가재도구들을 보며 망연자실했습니다. 게다가 70대 남편은 대피 도중 화상을 입어 두 달 넘게 화상 치료를 받아야 했습니다. 이후 거처를 잃은 70대 노부부는 병원과 자녀들의 집을 전전했습니다.

지난해 9월 화재 피해를 본 대구 달성군 한 주택 내부
소방관들은 이런 화재 이재민들의 안타까운 사연을 자주 접합니다. '이들에게 현실적인 도움을 줄 수는 없을까?' 이런 생각이 계기가 돼 대구 달서소방서 소방관들이 아이디어를 냈습니다. 달서소방서를 포함해 대구 8개 소방서에서 매년 버려지고 있던 폐방화복을 활용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소방관들이 화재 현장에서 입는 방화복의 내구 연한은 3년. 1년에 2번 전문 수거업체를 통해 폐기하는 폐방화복은 3백여 벌에 달했습니다. 달서소방서는 폐방화복으로 가방, 액세서리 등을 만드는 업사이클링 업체에 연락해 업무협약을 제의했습니다. 업사이클링 제품 판매 수익금 일부를 화재 피해를 본 집 수리에 보태자는 거였습니다. 여기에 재난재해 이재민들의 주거 개선 사업을 진행하고 있던 비영리단체도 힘을 보탰습니다. 그동안 폐방화복 재활용 사례는 몇몇 있었지만, 화재 피해 주민들의 집을 고쳐주는 사업과 연계한 건 처음입니다.

채성현/한국해비타트 개인후원팀 매니져
"소방관분들이 불을 끄다 보니 어려운 분들이 화재에 더 많이 노출되는 점이 안타까우셨나 봐요. 본인들은 불을 끌 수는 있지만, 그 이후의 삶을 우리가 고쳐줄 수는 없다. 그러면서 저희가 함께 주거 지원을 해줄 수 있냐는 제안이 있으셨고. 많은 시민들한테 기금을 모으고 안전 취약 계층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전하기 위한 캠페인을 열게 됐습니다."


폐방화복을 수거하는 대구 달서소방서 직원들 모습.
사업 수혜 대상자 1호는 지난해 9월 화재 피해로 집을 잃었던 대구 달성군 70대 노부부가 됐습니다. 이들의 집 수리에는 모두 6천여만 원이 들었습니다. 대구 달서소방서가 대구지역 소방관들이 입던 폐방화복 330여 벌을 모아 업사이클링 업체에 전달했고, 재활용한 제품을 판매해 수익금 5백만 원을 기부했습니다. 달서소방서 직원들도 삼삼오오 마음을 모아 자체 기부금 100만 원도 마련했습니다. 나머지는 시민들의 성금으로 채워졌습니다. 비영리단체 한국해비타트가 지난 11월부터 진행해오고 있는 안전 취약 가정 돕기 성금 모금 캠페인을 통해서입니다. 소방관들의 헌신과 화재 이재민들의 사연에 많은 시민이 정기 후원 형태로 기부에 참여했습니다.

대구 달서소방서, 한국해비타트 등이 함께한 캠페인
화재 이후 4개월여 뒤. 추운 날씨 탓에 도색을 마치지 못해 집 외부에는 아직 화재 당시 그을음이 그대로 남았지만, 집 내부는 수리를 마치고 깨끗한 새집이 되었습니다. 설 연휴를 하루 앞둔 지난 20일. 이날은 '손 없는 날'. 화마에 집을 잃었던 70대 노부부는 다시는 화재의 아픔을 겪지 않기를 바라며 들뜬 마음으로 이사했습니다. 설 명절에는 자녀들도 찾아와 짐 정리를 거들었습니다. 발품을 팔아 저렴하면서도 멀끔한 중고 가구와 가전들을 하나 둘씩 들였습니다. 이제 70대 부부는 점차 안정을 되찾아가고 있습니다.

지난해 9월 화재 이후 수리를 마친 집 내부
김 모 씨 / 화재 피해 집주인
"정말 집이 새까맣게 다 타 버렸었어요. 쓸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어요. 이대로 (이 집을) 놔둬 버리고 그냥 방이라도 구해서 살아야 하나 생각했는데 이렇게 (수리)해 주시니까 이루 말할 수가 없죠. 저는 복권 맞았다고 생각해요. 얼마나 고마운 줄 모릅니다. 앞으로 항상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야죠."

화마 속 생명을 지켰던 소방관들의 방화복에 시민들의 따뜻한 마음이 더해져, 일상을 되찾아가고 있는 화재 이재민들. 사력으로 불을 끄고도, 못다 구한 시민의 집을 수리하는 데까지 팔을 걷어붙인 소방관들과 그 마음에 기꺼이 동참한 이웃들의 이야기가 한겨울 동장군도 뜨겁게 녹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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