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대’ 집착하던 가마솥·북·CD…자치단체 ‘실패 교과서’로

입력 2023.02.07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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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괴산군 고추유통센터에 있는 무게 43.5톤, 둘레 17.8m의 초대형 가마솥.충북 괴산군 고추유통센터에 있는 무게 43.5톤, 둘레 17.8m의 초대형 가마솥.

무게 43.5톤, 둘레 17.8m, 높이 2.2m의 초대형 가마솥.
지름 6.4m, 폭 6m, 무게 7.5톤의 세계에서 가장 큰 북.
63빌딩을 눕혀놓은 것과 맞먹는 폐 CD 48만 9천여 장의 외벽 장식.

충북의 지방자치단체가 저마다 '세계 최대' 기록을 노리고 만든 조형물들입니다. 수억 원씩 세금이 투입된 이 조형물들, 지금은 세계 최고의 관광자원으로 제 몫을 다하고 있을까요?

충북 괴산군 '초대형 가마솥'..."실패학 교과서로 남겨야"

충북 괴산군 괴산읍에 있는 고추유통센터. 한편에 거대한 조형물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괴산군이 2005년, 5억 천만 원을 들여 만든 초대형 가마솥입니다.

괴산군은 이 가마솥을 세계에서 가장 큰 그릇으로 기네스북 인증을 받으려 했지만, 호주의 질그릇에 밀려 실패했습니다.

세계 기록에만 실패한 게 아닙니다. 솥 바닥이 너무 두껍게 설계된 탓에 군민 화합 차원에서 밥을 짓거나, 옥수수를 삶는 것도 불가능했습니다. 그야말로 5억 원짜리 무용지물, 고철 덩어리가 된 셈입니다.

이후 이 가마솥은 18년째, 공무원과 주민들만 오가는 고추유통센터 한편에 쓸쓸하게 방치돼 있습니다. 취재진이 이곳을 찾은 날 가마솥 곳곳에는 먼지가 쌓이고, 바로 옆에는 오토바이까지 세워져 있었습니다. 아무도 신경을 쓰거나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 가마솥의 처량한 신세가 그대로 느껴졌습니다.

충북 괴산군 고추유통센터에 있는 초대형 가마솥. 호주 질그릇에 밀려 기네스북 등재에는 실패했습니다.충북 괴산군 고추유통센터에 있는 초대형 가마솥. 호주 질그릇에 밀려 기네스북 등재에는 실패했습니다.

송인헌 괴산군수는 최근, 이 가마솥을 지역 관광지인 산막이옛길로 옮겨 관광 자원으로 활용하는 것을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나마 조금 더 많은 사람이 볼 수 있게, 가마솥의 명예 회복을 제안한 겁니다.

하지만 이 가마솥을 옮기는 데만 2억 원가량의 예산이 추가로 들 것이라는 전망도 나옵니다. 세금 낭비 사례를 바로잡기 위해, 또다시 억대의 세금을 써야 하는 겁니다.

이렇다 보니 가마솥 이전에 반대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습니다. 특히 괴산 출신인 김영환 충북지사는 SNS 글을 통해 "예산의 거대한 낭비와 허위의식의 초라한 몰락을 보여준다"며 가마솥 이전을 공개적으로 반대했습니다. 김 지사는 또 "동양 최대, 세계 최초를 좋아하던 낡은 사고와 성과주의", "실패학 교과서의 빼놓을 수 없는 메뉴", "내가 벌일 정책과 성과가 미래의 눈을 가지지 못할 때 '지울 수 없는 치욕의 흔적'을 남긴다"며 초대형 조형물에 집착하는 자치단체의 행태를 비판했습니다.

충북 청주시가 2015년 국제공예비엔날레에서 선보인 ‘초대형 CD 파사드 프로젝트’. 청주시 옛 연초제조창 건물 외벽을 폐 CD 48만 9천여 장으로 장식했습니다.충북 청주시가 2015년 국제공예비엔날레에서 선보인 ‘초대형 CD 파사드 프로젝트’. 청주시 옛 연초제조창 건물 외벽을 폐 CD 48만 9천여 장으로 장식했습니다.

기네스북 기록 세웠지만...관리도 활용도 어려워

충북 청주시의 '초대형 CD 프로젝트'와 충북 영동군의 세계에서 가장 큰 북 '천고'의 사정은 다를까요? 어찌 됐든 기네스북 세계 기록으로 등재는 됐으니, 그렇다고 볼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후 애물단지로 전락했다는 점은 마찬가지입니다.

청주시는 2015년 국제공예비엔날레를 개최하면서 야심 찬 프로젝트를 준비했습니다. 행사가 열리는 청주시 옛 연초제조창 건물을 모두 반짝거리는 CD로 장식하겠다는 구상이었습니다.

결국, 시민들에게 수집한 48만 9천여 장의 폐 CD와 3억 7천만 원의 예산을 투입해 넉 달여 만에 'CD 파사드 프로젝트'를 선보였습니다.

63빌딩을 눕힌 것과 맞먹는 크기에 형형색색의 빛을 반사하는 초대형 CD 외벽 장식은 관람객의 눈길을 사로잡기 충분했습니다. CD를 활용한 세계 최대의 설치물로 기네스북 인증도 받았습니다.

하지만 공예비엔날레가 끝남과 동시에, CD 프로젝트는 빛을 잃었습니다. 장식을 유지하는데 해마다 억대의 관리 비용이 드는 데다, 강한 바람이 불면 CD 장식이 떨어질 수 있어 안전사고 우려도 제기됐습니다.

결국, 청주시는 2017년, 2천만 원을 추가로 들여 CD 장식을 모두 철거했습니다.

영동군도 2010년 2억 3천만 원을 들여 세계에서 가장 큰 북, '천고'를 만들었습니다. 천고 역시 기네스북 등재에 성공했지만, 이후 마땅한 활용 방안이나 관리할 방법을 찾지 못했습니다.

'천고'는 4년 동안 임시 보관소에 방치됐다가 2015년 영동군에 있는 국악체험촌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하지만 같은 충북 안에서도, 세계에서 가장 큰 북이 영동군에 있다는 사실을 아는 주민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충북 영동군 국악체험촌에 있는 세계에서 가장 큰 북 ‘천고’. 기네스북 등재에 성공했지만, 4년 동안 임시 보관소에 방치됐다가 국악체험촌에 자리 잡았습니다.충북 영동군 국악체험촌에 있는 세계에서 가장 큰 북 ‘천고’. 기네스북 등재에 성공했지만, 4년 동안 임시 보관소에 방치됐다가 국악체험촌에 자리 잡았습니다.

주민 삶의 질보다 기네스북 등재가 중요?

이처럼 기네스북 기록 등재나 '세계 최고', '세계 최대'에 집착하며 수억 원씩 세금을 투입한 자치단체들. 주민들의 삶은 잘 챙기고 있을까요?

통계청 자료를 보면 괴산군이 5억 천만 원을 들여 초대형 가마솥을 만들었던 2005년 재정자립도는 13%에 불과했습니다.

영동군이 세계에서 가장 큰 북을 만들었던 2010년 재정자립도 역시 14.5%에 그쳤습니다. 지방 살림을 운영하는 데 필요한 돈도 스스로 마련하기 어려운 처지에, 초대형 조형물을 만드는 데 수억 원의 세금을 펑펑 쓴 셈입니다.

시민단체 '세금도둑 잡아라'의 하승수 대표(변호사)는 "자치단체 예산이 가장 먼저 쓰여야 할 곳은 약자나 소수자를 비롯한 주민들의 삶의 질 개선"이라며 "이런 전시성, 일회성 사업에 예산을 쓰게 되면 그만큼 주민들을 위해 쓸 예산이 줄어든다"고 지적했습니다.

하 대표는 이어 "지금 우리나라 지방자치단체에 필요한 건 랜드마크(지역을 대표하는 표지)가 아니라 주민들의 행복도나 삶의 질을 높여서, 정말 우리 지역이 살기 좋은 곳이라는 걸 체감하도록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세계 기록에 도전했던 자치단체의 주민들. 과연 지금은 뿌듯하게 생각하고 있을까요? 초대형 조형물로 자치단체의 살림살이는 더 나아졌을까요?

'실패학 교과서'가 주고 있는 교훈, 더 이상은 복습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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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계 최대’ 집착하던 가마솥·북·CD…자치단체 ‘실패 교과서’로
    • 입력 2023-02-07 08:00:18
    취재K
충북 괴산군 고추유통센터에 있는 무게 43.5톤, 둘레 17.8m의 초대형 가마솥.
무게 43.5톤, 둘레 17.8m, 높이 2.2m의 초대형 가마솥.
지름 6.4m, 폭 6m, 무게 7.5톤의 세계에서 가장 큰 북.
63빌딩을 눕혀놓은 것과 맞먹는 폐 CD 48만 9천여 장의 외벽 장식.

충북의 지방자치단체가 저마다 '세계 최대' 기록을 노리고 만든 조형물들입니다. 수억 원씩 세금이 투입된 이 조형물들, 지금은 세계 최고의 관광자원으로 제 몫을 다하고 있을까요?

충북 괴산군 '초대형 가마솥'..."실패학 교과서로 남겨야"

충북 괴산군 괴산읍에 있는 고추유통센터. 한편에 거대한 조형물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괴산군이 2005년, 5억 천만 원을 들여 만든 초대형 가마솥입니다.

괴산군은 이 가마솥을 세계에서 가장 큰 그릇으로 기네스북 인증을 받으려 했지만, 호주의 질그릇에 밀려 실패했습니다.

세계 기록에만 실패한 게 아닙니다. 솥 바닥이 너무 두껍게 설계된 탓에 군민 화합 차원에서 밥을 짓거나, 옥수수를 삶는 것도 불가능했습니다. 그야말로 5억 원짜리 무용지물, 고철 덩어리가 된 셈입니다.

이후 이 가마솥은 18년째, 공무원과 주민들만 오가는 고추유통센터 한편에 쓸쓸하게 방치돼 있습니다. 취재진이 이곳을 찾은 날 가마솥 곳곳에는 먼지가 쌓이고, 바로 옆에는 오토바이까지 세워져 있었습니다. 아무도 신경을 쓰거나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 가마솥의 처량한 신세가 그대로 느껴졌습니다.

충북 괴산군 고추유통센터에 있는 초대형 가마솥. 호주 질그릇에 밀려 기네스북 등재에는 실패했습니다.
송인헌 괴산군수는 최근, 이 가마솥을 지역 관광지인 산막이옛길로 옮겨 관광 자원으로 활용하는 것을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나마 조금 더 많은 사람이 볼 수 있게, 가마솥의 명예 회복을 제안한 겁니다.

하지만 이 가마솥을 옮기는 데만 2억 원가량의 예산이 추가로 들 것이라는 전망도 나옵니다. 세금 낭비 사례를 바로잡기 위해, 또다시 억대의 세금을 써야 하는 겁니다.

이렇다 보니 가마솥 이전에 반대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습니다. 특히 괴산 출신인 김영환 충북지사는 SNS 글을 통해 "예산의 거대한 낭비와 허위의식의 초라한 몰락을 보여준다"며 가마솥 이전을 공개적으로 반대했습니다. 김 지사는 또 "동양 최대, 세계 최초를 좋아하던 낡은 사고와 성과주의", "실패학 교과서의 빼놓을 수 없는 메뉴", "내가 벌일 정책과 성과가 미래의 눈을 가지지 못할 때 '지울 수 없는 치욕의 흔적'을 남긴다"며 초대형 조형물에 집착하는 자치단체의 행태를 비판했습니다.

충북 청주시가 2015년 국제공예비엔날레에서 선보인 ‘초대형 CD 파사드 프로젝트’. 청주시 옛 연초제조창 건물 외벽을 폐 CD 48만 9천여 장으로 장식했습니다.
기네스북 기록 세웠지만...관리도 활용도 어려워

충북 청주시의 '초대형 CD 프로젝트'와 충북 영동군의 세계에서 가장 큰 북 '천고'의 사정은 다를까요? 어찌 됐든 기네스북 세계 기록으로 등재는 됐으니, 그렇다고 볼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후 애물단지로 전락했다는 점은 마찬가지입니다.

청주시는 2015년 국제공예비엔날레를 개최하면서 야심 찬 프로젝트를 준비했습니다. 행사가 열리는 청주시 옛 연초제조창 건물을 모두 반짝거리는 CD로 장식하겠다는 구상이었습니다.

결국, 시민들에게 수집한 48만 9천여 장의 폐 CD와 3억 7천만 원의 예산을 투입해 넉 달여 만에 'CD 파사드 프로젝트'를 선보였습니다.

63빌딩을 눕힌 것과 맞먹는 크기에 형형색색의 빛을 반사하는 초대형 CD 외벽 장식은 관람객의 눈길을 사로잡기 충분했습니다. CD를 활용한 세계 최대의 설치물로 기네스북 인증도 받았습니다.

하지만 공예비엔날레가 끝남과 동시에, CD 프로젝트는 빛을 잃었습니다. 장식을 유지하는데 해마다 억대의 관리 비용이 드는 데다, 강한 바람이 불면 CD 장식이 떨어질 수 있어 안전사고 우려도 제기됐습니다.

결국, 청주시는 2017년, 2천만 원을 추가로 들여 CD 장식을 모두 철거했습니다.

영동군도 2010년 2억 3천만 원을 들여 세계에서 가장 큰 북, '천고'를 만들었습니다. 천고 역시 기네스북 등재에 성공했지만, 이후 마땅한 활용 방안이나 관리할 방법을 찾지 못했습니다.

'천고'는 4년 동안 임시 보관소에 방치됐다가 2015년 영동군에 있는 국악체험촌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하지만 같은 충북 안에서도, 세계에서 가장 큰 북이 영동군에 있다는 사실을 아는 주민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충북 영동군 국악체험촌에 있는 세계에서 가장 큰 북 ‘천고’. 기네스북 등재에 성공했지만, 4년 동안 임시 보관소에 방치됐다가 국악체험촌에 자리 잡았습니다.
주민 삶의 질보다 기네스북 등재가 중요?

이처럼 기네스북 기록 등재나 '세계 최고', '세계 최대'에 집착하며 수억 원씩 세금을 투입한 자치단체들. 주민들의 삶은 잘 챙기고 있을까요?

통계청 자료를 보면 괴산군이 5억 천만 원을 들여 초대형 가마솥을 만들었던 2005년 재정자립도는 13%에 불과했습니다.

영동군이 세계에서 가장 큰 북을 만들었던 2010년 재정자립도 역시 14.5%에 그쳤습니다. 지방 살림을 운영하는 데 필요한 돈도 스스로 마련하기 어려운 처지에, 초대형 조형물을 만드는 데 수억 원의 세금을 펑펑 쓴 셈입니다.

시민단체 '세금도둑 잡아라'의 하승수 대표(변호사)는 "자치단체 예산이 가장 먼저 쓰여야 할 곳은 약자나 소수자를 비롯한 주민들의 삶의 질 개선"이라며 "이런 전시성, 일회성 사업에 예산을 쓰게 되면 그만큼 주민들을 위해 쓸 예산이 줄어든다"고 지적했습니다.

하 대표는 이어 "지금 우리나라 지방자치단체에 필요한 건 랜드마크(지역을 대표하는 표지)가 아니라 주민들의 행복도나 삶의 질을 높여서, 정말 우리 지역이 살기 좋은 곳이라는 걸 체감하도록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세계 기록에 도전했던 자치단체의 주민들. 과연 지금은 뿌듯하게 생각하고 있을까요? 초대형 조형물로 자치단체의 살림살이는 더 나아졌을까요?

'실패학 교과서'가 주고 있는 교훈, 더 이상은 복습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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