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 1만 2천 봉’은 가짜뉴스라네!”…‘조선의 팩트체커’ 성호 이익

입력 2023.02.07 (10:00) 수정 2023.02.07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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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 〈금강전도〉, 1734, 종이에 수묵담채, 30.7×94.1, 국보, 리움미술관정선 〈금강전도〉, 1734, 종이에 수묵담채, 30.7×94.1, 국보, 리움미술관

금강산 찾아가자 일만이천봉
볼수록 아름답고 신기하구나
철따라 고운 옷 갈아입는 산
이름도 아름다워 금강이라네 금강이라네

금강산의 봉우리는 몇 개일까요. 그걸 일일이 세어 본 사람이 있을까요? 유명한 동요 가사처럼, 우리는 금강산 하면 흔히 1만 2천 봉이라 말합니다. 물론 금강산 봉우리가 몇 개인지가 그리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1만 2천 봉'이란 표현에는 그만큼 봉우리가 '많다'는 뜻이 들어있다고 풀이하면 되니까요. 사실이냐 아니냐를 떠나 '1만 2천'이란 숫자가 지금은 가볼 수 없는 금강산에 신비감을 더해준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조선 후기의 실학자 성호 이익(李瀷, 1681~1763)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성호 선생은 생전에 금강산을 유람하면서 장안사(長安寺)에 있는 비석을 직접 보게 됩니다. 고려 말기 학자 가정 이곡(李穀, 1298~1351)이 지은 비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었다 합니다.

"금강산의 빼어난 경치는 천하에 이름이 났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불경에도 기록되어 있다. 『화엄경』에 '동북쪽 바다 가운데 금강산이 있는데, 담무갈보살이 1만 2천 보살과 더불어 항상 반야를 설법하였다'고 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 이하 인용문은 최석기 경상대 명예교수가 옮긴 『성호사설』(한길사, 1999)에서 가져왔습니다.

금강산이 왜 금강산으로 불리게 됐는지, 1만 2천이란 숫자의 유래가 뭔지 밝혀주는 내용이죠. 자, 여기서 성호 선생 팩트체크 들어갑니다.

여기서 말하는 '1만 2천'이란 보살의 숫자인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1만 2천 봉우리가 있다고 생각하여,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 따라 쓰기 때문에 변경할 수가 없다. 나도 일찍이 이 산을 유람한 적이 있는데, 봉우리가 아무리 많다고 하더라도 어찌 1만 2천 봉우리에 이를 수야 있겠는가?

생각건대, 예전의 풍속이 어리석고 우둔하여 불경에 '1만 2천'이란 글자가 있는 것만 보고, 그대로 봉우리의 숫자라고 여긴 것이다. 그리고 그 말이 나오는 서적을 찾아 확인하지 않고 무심히 들은 대로 말한 것이니, 가소로운 일이다.

성호 선생이 지적한 건 그 누구도 1만 2천이란 숫자에 관해 합리적인 의심을 해보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불경에 있는 보살 숫자가 어찌어찌해서 봉우리 숫자로 바뀌었다는 내용이 책에 있는 데도, 근거를 확인할 생각은 안 하고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였다는 거죠. 실제로 금강산 봉우리를 보살의 형상으로 그려놓은 조선 시대 그림도 있습니다.

〈금강산도 10폭 병풍〉 부분. 19세기, 종이에 수묵, 전체 236.7×616.5cm, 개인 소장〈금강산도 10폭 병풍〉 부분. 19세기, 종이에 수묵, 전체 236.7×616.5cm, 개인 소장

팩트체크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 산의 본 이름은 풍악이었는데, 승려들이 불경의 말을 따다 고의로 금강이란 이름을 붙여놓았다. 또 불경에 "금강산은 동쪽 바다 가운데 있는데, 거리가 8만 유순(由旬)이다"라고 하였는데, 하륜(河崙, 1347~1416)이 그 산이 풍악이 아님을 변론해놓았다.

내가 살펴보건대, 『만국전도(萬國全圖)』에 "지구의 둘레는 9만 리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어찌 8만 유순이 있을 수 있겠는가? 이는 불가(佛家)의 과장하는 말에 지나지 않으니, 반드시 근거하여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

여기서는 구체적인 숫자로 따집니다. 유순(由旬)이란 단위는 쉽게 말해 하루에 행군하는 일정을 뜻한다고 합니다. 30리라는 설과 40리라는 설이 있다는데요. 둘 중에서 30리를 기준으로 잡아도 8만 유순은 240만 리. 지구 둘레가 9만 리라면 인도에서 금강산까지 240리가 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거죠.

당시에 유행한 세계 지도인 『만국전도(萬國全圖)』까지 근거로 들어 사실 관계를 합리적으로 따져보는 것, 요즘 유행하는 팩트체크로 볼 수 있겠죠. 성호 선생은 과거로부터 내려오는 이론이나 학설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하나하나 근거를 찾아 옳고 그름을 가려냈습니다.

성리학을 집대성한 위대한 학자 주자(朱子)라고 해서 예외가 될 순 없었으니, '무지개의 원리'에 관한 다음 글도 무척이나 흥미롭습니다.

옛사람들은 "무지개가 물을 마신다"고 하는데, 내가 징험해본 바로는 그렇지 않은 듯하다. 습한 운무가 앞에 있을 때, 사람이 해를 등지고 그것을 바라보면 무지개가 보이는데, 습기가 멀고 가까운 데에 따라 무지개가 멀리 보이기도 하고 가깝게 보이기도 한다. 사람이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면 무지개도 한 걸음 멀어진다. 무지개는 애초 정해진 위치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습기가 다 없어진 곳까지 가면 무지개는 보이지 않는다. 무지개가 물을 마신다는 설은, 일시적인 이변일 것이다. 어찌 무지개가 일정한 한 곳에서 물을 마셔 다 빨아들일 리가 있겠는가?

주자(朱子)는 "무지개는 엷은 비에 해가 비춰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나 또한 형상이 있어 능히 물도 모시고 술도 마신다"고 하였고, 또 "능히 물을 마실 수 있는 것으로 보아 반드시 창자도 있을 것이다."라고 했는데, 이 한 대목은 더욱 이해할 수 없다.

여기에서는 예리한 관찰에 근거해 옛사람의 말을 반박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성호 선생은 '옛사람이 그렇다고 하더라'는 설을 그대로 믿지 않았습니다. 문헌을 근거로 하든, 경험을 근거로 하든, 무엇이고 믿을 만하지 않고 의문스러운 것이 있으면 합리적으로 의심하고, 고증하고, 추론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죠. 그런 자기 생각을 그때그때 적었다가 만년에 『성호사설(星湖僿說)』이란 책으로 묶습니다.

 성호 이익의 대표적 저술 『성호사설(星湖僿說)』(실학박물관 소장) 성호 이익의 대표적 저술 『성호사설(星湖僿說)』(실학박물관 소장)

이 책에서 특히 주목해봐야 할 대목은 '울릉도'에 관한 내용입니다. 분량도 상당할뿐 아니라 성호 선생의 주체적 역사관을 볼 수 있어 아주 귀중하죠. 지금도 일본은 하루가 멀다 하고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데, 조선시대에도 울릉도를 향한 왜인들의 도발은 끊이지 않았습니다.

특히 17세기에 왜인들의 도발로부터 울릉도와 독도를 지켜낸 어부 안용복(安龍福)의 활약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죠. 성호 선생은 안용복을 "영웅과 짝이 될 만한 사람"으로 높이 평가하면서도, 왜인들이 울릉도 문제로 따지고 들 때 이렇게 대답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진한 아쉬움을 토로했습니다.

울릉도가 신라에 예속된 것은 지증왕 때부터이다. 당시 귀국은 계체(繼體) 6년(512년)이었는데, 위덕이 멀리까지 미쳤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역사책에 살펴볼 만한 특별한 기록이 있는가? 고려시대에 이르러 그 지방 특산물을 바친 적이 있다거나 그 섬을 비운 일이 있다거나 하는 기사들이 역사책에 끊이지 않고 기록되어 있는데, 1천여 년을 내려온 오늘에 와서 무슨 이유로 갑자기 분쟁을 일으키는가?

우릉도라고 하든, 의죽도라고 하든 어느 칭호를 막론하고, 울릉도가 우리나라에 속한 섬이라는 사실은 너무나도 명백하다. 그리고 그 부근의 여러 섬도 울릉도에 부속된 섬에 불과하다. 이 섬은 귀국과 멀리 떨어져 있다. 그런데 틈을 타고 몰래 점거했으니 부끄러워할 일이지, 자랑할 것이 못 된다. 가령 중간에 귀국이 함부로 탈취했더라도 두 나라가 신의로 화친을 맺은 뒤에는 예전의 영토를 서둘러 돌려주어야 마땅하다. 하물며 귀국의 영역에 속한다는 기록이 전혀 보이지 않는데, 말해 무엇하겠는가? 이 섬이 우리나라의 강토였으니, 우리나라 사람들이 물고기를 잡기 위해 왕래하는 것은 참으로 당연한 일이다. 어찌 귀국에 관여된 일이겠는가?

이렇게 분명하게 대답해줬다면 왜인들도 찍소리 못했을 거란 얘기입니다. 지금 읽어도 그 명쾌함과 통렬함에 속이 다 시원해지죠. 진정 '조선의 팩트체커'라 불러도 손색이 없습니다.

성호 선생은 일찍이 세상에 나가는 것과는 인연이 없었습니다. 자신에게 글을 가르쳐준 둘째 형이 역적으로 몰려 죽임을 당한 뒤 출세하겠다는 뜻을 접고 평생 공부에 매진합니다. 역사책을 읽을 때도 늘 먼저 '의심'부터 했습니다. 옛사람이 그렇다고 하면 그런 줄 아는 태도를 버리고, 잘잘못을 하나하나 따지는 비판적인 독서를 한 거죠. 가령 다음과 같은 대목입니다.

나는 역사서를 읽을 때마다 늘 의심이 생긴다. 착한 자는 착한 쪽으로만 기록되어 있고, 악한 자는 악한 쪽으로만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그들이 살아 있을 때는 반드시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이는 역사를 서술할 때, 악한 것을 징계하고 착한 것을 권장하는 지극한 뜻에서 그렇게 기술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의 객관적인 입장에서 보면, 착한 자는 참으로 그렇더라도, 악한 자는 어찌 그토록 악하기만 하였단 말인가?

그래서 어떤 사람을 탄핵하거나 비난할 때도 반드시 확인할 수 있는 근거가 있어야 한다고 누누이 강조합니다. 그래야 그 사람도 혐의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는 거죠. 이런 내용을 읽다 보면,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별반 없구나, 하는 생각에 쓴웃음이 나오기도 합니다. 그래서 옛사람의 쓴소리가 그저 옛말로만 들리지 않습니다.

그것은 독서의 쓸모와 자연스럽게 연결되죠. 우리는 왜 책을 읽어야 하는가, 라는 물음에 성호 선생은 이런 사례를 들어줍니다.

어떤 학사 한 사람이 책을 보다가 절반도 보기 전에 내던지고 탄식하기를 "책을 덮으면 곧바로 잊어버리니, 책을 본들 무슨 유익함이 있겠는가?"라고 하자, 현곡이 "사람이 밥을 먹으면 그 밥이 항상 뱃속에 남아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영양분이 몸을 윤택하게 하네. 책을 읽다가 비록 그 내용을 잊어버리더라도, 저절로 길이 진보하는 효과가 있네"라고 하였다.

이 대목은 마치 『성호사설』을 읽고 있는 제게 건네는 말씀 같더군요. 사실 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읽기는 쉽지 않습니다. 특히 경전과 역사에 관한 생각을 모은 경사문(經史門)이나 시문에 관한 의견을 피력한 시문문(詩文門)은 충분한 배경지식 없이 읽으면 아무 도움이 안 되죠. 하지만 앞에서부터 천지문(天地門), 만물문(萬物門), 인사문(人事門)에 수록된 글들은 오늘날에도 깊이 음미할 대목이 많습니다.

 성호 이익 영정 (실학박물관 소장) 성호 이익 영정 (실학박물관 소장)

그중에서도 제가 가장 감명 깊게 읽은 것은 인사문(人事門)에 포함된 제노문(祭奴文)입니다. 말 그대로 종의 제사를 지내주면서 쓴 글입니다. 성호 선생은 노비를 사고팔거나 신분을 세습하는 폐단에 대단히 비판적이었습니다. 『성호사설』에도 그런 폐단을 지적하는 글이 여러 군데 나오죠.

어느 날 우연히 자기 땅을 돌봐주던 종의 무덤을 지나가다가, 몇 년 동안 아무도 제사를 지내준 적 없다는 말에 애잔함을 느낀 성호 선생은 직접 글을 지어 먼저 죽은 종의 넋을 기립니다. 공부하고 실천하지 않으면 배움에 아무 쓸모가 없다는 신념을 한평생 간직했던 위대한 실학자의 인간적인 면모가 가슴을 찡하게 합니다.

모년 모월 모일 초야에 묻혀 사는 성호(星湖)가, 옛 종 아무개의 무덤에 제사하노라. 아, 나라의 옛 풍속에 종과 주인의 관계를 임금과 신하에 비교했다. 임금이 어질면 신하가 반드시 은혜를 갚는 것은 당연하지만, 주인이 박대하면서 종에게 충성을 바라는 것이 어찌 이치이겠는가? 너는 평생 부지런히 윗사람을 받들었으니, 내 사실 네 덕을 많이 보았다. 그런데 어찌 차마 너를 잊겠는가? 너의 자식이 불초하기에 내 일찍 훈계한 적이 있었는데, 과연 파산하여 살 곳을 잃고 떠나버렸다. 네가 죽어 무덤에 풀이 우거졌는데도 벌초하기를 생각하는 자가 없구나. 살아서 고생이 심했는데 죽어 귀신이 되어서도 늘 굶주리니, 어찌 슬프지 않으랴?

내가 우연히 이곳을 지나다 너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에 약간의 떡과 과일을 갖추어 너의 외손을 시켜 무덤 앞에 술 한잔을 붓게 하고, 대충 지은 몇 마디 말로 너의 무덤 곁에서 향을 사르고 고하노라. 네 비록 문자를 모르지만, 귀신의 이치로 보면 통할 수 있는 법, 정성이 있으면 반드시 느끼리니, 너는 이 음식을 흠향하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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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강산 1만 2천 봉’은 가짜뉴스라네!”…‘조선의 팩트체커’ 성호 이익
    • 입력 2023-02-07 10:00:38
    • 수정2023-02-07 10:02:34
    취재K
정선 〈금강전도〉, 1734, 종이에 수묵담채, 30.7×94.1, 국보, 리움미술관
금강산 찾아가자 일만이천봉
볼수록 아름답고 신기하구나
철따라 고운 옷 갈아입는 산
이름도 아름다워 금강이라네 금강이라네

금강산의 봉우리는 몇 개일까요. 그걸 일일이 세어 본 사람이 있을까요? 유명한 동요 가사처럼, 우리는 금강산 하면 흔히 1만 2천 봉이라 말합니다. 물론 금강산 봉우리가 몇 개인지가 그리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1만 2천 봉'이란 표현에는 그만큼 봉우리가 '많다'는 뜻이 들어있다고 풀이하면 되니까요. 사실이냐 아니냐를 떠나 '1만 2천'이란 숫자가 지금은 가볼 수 없는 금강산에 신비감을 더해준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조선 후기의 실학자 성호 이익(李瀷, 1681~1763)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성호 선생은 생전에 금강산을 유람하면서 장안사(長安寺)에 있는 비석을 직접 보게 됩니다. 고려 말기 학자 가정 이곡(李穀, 1298~1351)이 지은 비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었다 합니다.

"금강산의 빼어난 경치는 천하에 이름이 났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불경에도 기록되어 있다. 『화엄경』에 '동북쪽 바다 가운데 금강산이 있는데, 담무갈보살이 1만 2천 보살과 더불어 항상 반야를 설법하였다'고 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 이하 인용문은 최석기 경상대 명예교수가 옮긴 『성호사설』(한길사, 1999)에서 가져왔습니다.

금강산이 왜 금강산으로 불리게 됐는지, 1만 2천이란 숫자의 유래가 뭔지 밝혀주는 내용이죠. 자, 여기서 성호 선생 팩트체크 들어갑니다.

여기서 말하는 '1만 2천'이란 보살의 숫자인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1만 2천 봉우리가 있다고 생각하여,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 따라 쓰기 때문에 변경할 수가 없다. 나도 일찍이 이 산을 유람한 적이 있는데, 봉우리가 아무리 많다고 하더라도 어찌 1만 2천 봉우리에 이를 수야 있겠는가?

생각건대, 예전의 풍속이 어리석고 우둔하여 불경에 '1만 2천'이란 글자가 있는 것만 보고, 그대로 봉우리의 숫자라고 여긴 것이다. 그리고 그 말이 나오는 서적을 찾아 확인하지 않고 무심히 들은 대로 말한 것이니, 가소로운 일이다.

성호 선생이 지적한 건 그 누구도 1만 2천이란 숫자에 관해 합리적인 의심을 해보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불경에 있는 보살 숫자가 어찌어찌해서 봉우리 숫자로 바뀌었다는 내용이 책에 있는 데도, 근거를 확인할 생각은 안 하고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였다는 거죠. 실제로 금강산 봉우리를 보살의 형상으로 그려놓은 조선 시대 그림도 있습니다.

〈금강산도 10폭 병풍〉 부분. 19세기, 종이에 수묵, 전체 236.7×616.5cm, 개인 소장
팩트체크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 산의 본 이름은 풍악이었는데, 승려들이 불경의 말을 따다 고의로 금강이란 이름을 붙여놓았다. 또 불경에 "금강산은 동쪽 바다 가운데 있는데, 거리가 8만 유순(由旬)이다"라고 하였는데, 하륜(河崙, 1347~1416)이 그 산이 풍악이 아님을 변론해놓았다.

내가 살펴보건대, 『만국전도(萬國全圖)』에 "지구의 둘레는 9만 리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어찌 8만 유순이 있을 수 있겠는가? 이는 불가(佛家)의 과장하는 말에 지나지 않으니, 반드시 근거하여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

여기서는 구체적인 숫자로 따집니다. 유순(由旬)이란 단위는 쉽게 말해 하루에 행군하는 일정을 뜻한다고 합니다. 30리라는 설과 40리라는 설이 있다는데요. 둘 중에서 30리를 기준으로 잡아도 8만 유순은 240만 리. 지구 둘레가 9만 리라면 인도에서 금강산까지 240리가 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거죠.

당시에 유행한 세계 지도인 『만국전도(萬國全圖)』까지 근거로 들어 사실 관계를 합리적으로 따져보는 것, 요즘 유행하는 팩트체크로 볼 수 있겠죠. 성호 선생은 과거로부터 내려오는 이론이나 학설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하나하나 근거를 찾아 옳고 그름을 가려냈습니다.

성리학을 집대성한 위대한 학자 주자(朱子)라고 해서 예외가 될 순 없었으니, '무지개의 원리'에 관한 다음 글도 무척이나 흥미롭습니다.

옛사람들은 "무지개가 물을 마신다"고 하는데, 내가 징험해본 바로는 그렇지 않은 듯하다. 습한 운무가 앞에 있을 때, 사람이 해를 등지고 그것을 바라보면 무지개가 보이는데, 습기가 멀고 가까운 데에 따라 무지개가 멀리 보이기도 하고 가깝게 보이기도 한다. 사람이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면 무지개도 한 걸음 멀어진다. 무지개는 애초 정해진 위치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습기가 다 없어진 곳까지 가면 무지개는 보이지 않는다. 무지개가 물을 마신다는 설은, 일시적인 이변일 것이다. 어찌 무지개가 일정한 한 곳에서 물을 마셔 다 빨아들일 리가 있겠는가?

주자(朱子)는 "무지개는 엷은 비에 해가 비춰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나 또한 형상이 있어 능히 물도 모시고 술도 마신다"고 하였고, 또 "능히 물을 마실 수 있는 것으로 보아 반드시 창자도 있을 것이다."라고 했는데, 이 한 대목은 더욱 이해할 수 없다.

여기에서는 예리한 관찰에 근거해 옛사람의 말을 반박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성호 선생은 '옛사람이 그렇다고 하더라'는 설을 그대로 믿지 않았습니다. 문헌을 근거로 하든, 경험을 근거로 하든, 무엇이고 믿을 만하지 않고 의문스러운 것이 있으면 합리적으로 의심하고, 고증하고, 추론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죠. 그런 자기 생각을 그때그때 적었다가 만년에 『성호사설(星湖僿說)』이란 책으로 묶습니다.

 성호 이익의 대표적 저술 『성호사설(星湖僿說)』(실학박물관 소장)
이 책에서 특히 주목해봐야 할 대목은 '울릉도'에 관한 내용입니다. 분량도 상당할뿐 아니라 성호 선생의 주체적 역사관을 볼 수 있어 아주 귀중하죠. 지금도 일본은 하루가 멀다 하고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데, 조선시대에도 울릉도를 향한 왜인들의 도발은 끊이지 않았습니다.

특히 17세기에 왜인들의 도발로부터 울릉도와 독도를 지켜낸 어부 안용복(安龍福)의 활약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죠. 성호 선생은 안용복을 "영웅과 짝이 될 만한 사람"으로 높이 평가하면서도, 왜인들이 울릉도 문제로 따지고 들 때 이렇게 대답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진한 아쉬움을 토로했습니다.

울릉도가 신라에 예속된 것은 지증왕 때부터이다. 당시 귀국은 계체(繼體) 6년(512년)이었는데, 위덕이 멀리까지 미쳤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역사책에 살펴볼 만한 특별한 기록이 있는가? 고려시대에 이르러 그 지방 특산물을 바친 적이 있다거나 그 섬을 비운 일이 있다거나 하는 기사들이 역사책에 끊이지 않고 기록되어 있는데, 1천여 년을 내려온 오늘에 와서 무슨 이유로 갑자기 분쟁을 일으키는가?

우릉도라고 하든, 의죽도라고 하든 어느 칭호를 막론하고, 울릉도가 우리나라에 속한 섬이라는 사실은 너무나도 명백하다. 그리고 그 부근의 여러 섬도 울릉도에 부속된 섬에 불과하다. 이 섬은 귀국과 멀리 떨어져 있다. 그런데 틈을 타고 몰래 점거했으니 부끄러워할 일이지, 자랑할 것이 못 된다. 가령 중간에 귀국이 함부로 탈취했더라도 두 나라가 신의로 화친을 맺은 뒤에는 예전의 영토를 서둘러 돌려주어야 마땅하다. 하물며 귀국의 영역에 속한다는 기록이 전혀 보이지 않는데, 말해 무엇하겠는가? 이 섬이 우리나라의 강토였으니, 우리나라 사람들이 물고기를 잡기 위해 왕래하는 것은 참으로 당연한 일이다. 어찌 귀국에 관여된 일이겠는가?

이렇게 분명하게 대답해줬다면 왜인들도 찍소리 못했을 거란 얘기입니다. 지금 읽어도 그 명쾌함과 통렬함에 속이 다 시원해지죠. 진정 '조선의 팩트체커'라 불러도 손색이 없습니다.

성호 선생은 일찍이 세상에 나가는 것과는 인연이 없었습니다. 자신에게 글을 가르쳐준 둘째 형이 역적으로 몰려 죽임을 당한 뒤 출세하겠다는 뜻을 접고 평생 공부에 매진합니다. 역사책을 읽을 때도 늘 먼저 '의심'부터 했습니다. 옛사람이 그렇다고 하면 그런 줄 아는 태도를 버리고, 잘잘못을 하나하나 따지는 비판적인 독서를 한 거죠. 가령 다음과 같은 대목입니다.

나는 역사서를 읽을 때마다 늘 의심이 생긴다. 착한 자는 착한 쪽으로만 기록되어 있고, 악한 자는 악한 쪽으로만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그들이 살아 있을 때는 반드시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이는 역사를 서술할 때, 악한 것을 징계하고 착한 것을 권장하는 지극한 뜻에서 그렇게 기술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의 객관적인 입장에서 보면, 착한 자는 참으로 그렇더라도, 악한 자는 어찌 그토록 악하기만 하였단 말인가?

그래서 어떤 사람을 탄핵하거나 비난할 때도 반드시 확인할 수 있는 근거가 있어야 한다고 누누이 강조합니다. 그래야 그 사람도 혐의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는 거죠. 이런 내용을 읽다 보면,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별반 없구나, 하는 생각에 쓴웃음이 나오기도 합니다. 그래서 옛사람의 쓴소리가 그저 옛말로만 들리지 않습니다.

그것은 독서의 쓸모와 자연스럽게 연결되죠. 우리는 왜 책을 읽어야 하는가, 라는 물음에 성호 선생은 이런 사례를 들어줍니다.

어떤 학사 한 사람이 책을 보다가 절반도 보기 전에 내던지고 탄식하기를 "책을 덮으면 곧바로 잊어버리니, 책을 본들 무슨 유익함이 있겠는가?"라고 하자, 현곡이 "사람이 밥을 먹으면 그 밥이 항상 뱃속에 남아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영양분이 몸을 윤택하게 하네. 책을 읽다가 비록 그 내용을 잊어버리더라도, 저절로 길이 진보하는 효과가 있네"라고 하였다.

이 대목은 마치 『성호사설』을 읽고 있는 제게 건네는 말씀 같더군요. 사실 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읽기는 쉽지 않습니다. 특히 경전과 역사에 관한 생각을 모은 경사문(經史門)이나 시문에 관한 의견을 피력한 시문문(詩文門)은 충분한 배경지식 없이 읽으면 아무 도움이 안 되죠. 하지만 앞에서부터 천지문(天地門), 만물문(萬物門), 인사문(人事門)에 수록된 글들은 오늘날에도 깊이 음미할 대목이 많습니다.

 성호 이익 영정 (실학박물관 소장)
그중에서도 제가 가장 감명 깊게 읽은 것은 인사문(人事門)에 포함된 제노문(祭奴文)입니다. 말 그대로 종의 제사를 지내주면서 쓴 글입니다. 성호 선생은 노비를 사고팔거나 신분을 세습하는 폐단에 대단히 비판적이었습니다. 『성호사설』에도 그런 폐단을 지적하는 글이 여러 군데 나오죠.

어느 날 우연히 자기 땅을 돌봐주던 종의 무덤을 지나가다가, 몇 년 동안 아무도 제사를 지내준 적 없다는 말에 애잔함을 느낀 성호 선생은 직접 글을 지어 먼저 죽은 종의 넋을 기립니다. 공부하고 실천하지 않으면 배움에 아무 쓸모가 없다는 신념을 한평생 간직했던 위대한 실학자의 인간적인 면모가 가슴을 찡하게 합니다.

모년 모월 모일 초야에 묻혀 사는 성호(星湖)가, 옛 종 아무개의 무덤에 제사하노라. 아, 나라의 옛 풍속에 종과 주인의 관계를 임금과 신하에 비교했다. 임금이 어질면 신하가 반드시 은혜를 갚는 것은 당연하지만, 주인이 박대하면서 종에게 충성을 바라는 것이 어찌 이치이겠는가? 너는 평생 부지런히 윗사람을 받들었으니, 내 사실 네 덕을 많이 보았다. 그런데 어찌 차마 너를 잊겠는가? 너의 자식이 불초하기에 내 일찍 훈계한 적이 있었는데, 과연 파산하여 살 곳을 잃고 떠나버렸다. 네가 죽어 무덤에 풀이 우거졌는데도 벌초하기를 생각하는 자가 없구나. 살아서 고생이 심했는데 죽어 귀신이 되어서도 늘 굶주리니, 어찌 슬프지 않으랴?

내가 우연히 이곳을 지나다 너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에 약간의 떡과 과일을 갖추어 너의 외손을 시켜 무덤 앞에 술 한잔을 붓게 하고, 대충 지은 몇 마디 말로 너의 무덤 곁에서 향을 사르고 고하노라. 네 비록 문자를 모르지만, 귀신의 이치로 보면 통할 수 있는 법, 정성이 있으면 반드시 느끼리니, 너는 이 음식을 흠향하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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