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리포트] 선함과 진실함을 그렸다…박수근 중국 전시회의 의미

입력 2023.02.10 (08:02) 수정 2023.02.10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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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서울 전농동 작업실에서 박수근1963년 서울 전농동 작업실에서 박수근

"나는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는 예술에 대한 대단히 평범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내가 그리는 인간상은 단순할 뿐 다채롭지 않다.
나는 그들의 가정에 있는 평범한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물론 어린 아이의 이미지를 가장 즐겨 그린다" - 박수근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리려 했다는 화가 박수근(1914~1965)에게는 많은 수식어가 따릅니다. 한국적인 화가, 국민 화가, 민중 화가, 또 한동안 가장 비싼 그림의 화가이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서민들의 삶을 투박한 질감으로 그려낸 그의 작품들을 보면 '가장 한국적인 화가'라는 표현이 잘 맞을 듯합니다.

■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린 작가' 박수근...중국에서 첫 전시회

갑자기 박수근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은 그의 작품 80여 점을 전시하는 행사가 중국 베이징에서 시작됐기 때문입니다. <박수근: 뿌리 깊은 나무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특별 전시회가 다음 달 말까지 주중 한국문화원에서 열립니다. 지난 해 한중 수교 30주년, 한중 문화 교류의 해 등을 계기로 전시회를 기획했지만, 지난 해 말 중국 코로나19 폭증으로 미뤄졌습니다.

박수근 특별 전시회가 열리고 있는 베이징의 주중 한국문화원 전경(사진: 조성원 기자)박수근 특별 전시회가 열리고 있는 베이징의 주중 한국문화원 전경(사진: 조성원 기자)

전시 작품들은 선의 미학이 잘 살아있는 드로잉 원화 작품들과 박수근 특유의 질감을 살린 옵셋 작품(인쇄판과 고무롤러를 이용한 정밀 인쇄 작품), 목판 원판을 작가 사후에 다시 찍어낸 사후 판화 등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박수근을 대표하는 유화들이 원화가 아닌 이유는 작품들이 워낙 고가이고 분산돼 있어 해외 전시가 어렵기 때문이라고 전시회 관계자는 설명했습니다. 아쉬움은 있지만 옵셋 작품이기에 대규모로 한자리에서 감상할 수 있는 장점도 있습니다.

〈박수근: 뿌리 깊은 나무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전시회 (사진: 주중 한국문화원 제공)〈박수근: 뿌리 깊은 나무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전시회 (사진: 주중 한국문화원 제공)

실제 전시회는 박수근의 작품 세계를 그의 삶과 함께 이해할 수 있도록 준비돼 있습니다. 연표와 함께, KBS 다큐멘터리도 상영해 이해를 돕습니다.

베이징 박수근 전시회는 작가의 작품 세계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그의 어록을 전시하고 KBS 다큐멘터리를 상영하고 있다.(사진: 조성원 기자)베이징 박수근 전시회는 작가의 작품 세계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그의 어록을 전시하고 KBS 다큐멘터리를 상영하고 있다.(사진: 조성원 기자)

■ "밀레 같은 화가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작품 세계 이해 위한 설명 자료도 전시

박수근 옵셋 작품 ‘빨래터’ (사진: 조성원 기자)박수근 옵셋 작품 ‘빨래터’ (사진: 조성원 기자)

전시회에서 박수근의 작품들을 보면 서민의 삶이 녹아 있는 점이 가장 눈에 띕니다. 거기엔 어린 시절 어려웠던 가정 형편이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유학을 떠나지 못하고 고향 양구의 산과 들을 다니며 스케치를 했다고 합니다. 장터와 빨래터에서 일하는 아낙네들, 어린 동생을 어른 대신 키우는 누나, 어슴푸레 나무가 뒤엉킨 숲... 그가 첫 입선의 기쁨을 맛본 작품도 이른 봄 농가를 그린 수채화 '봄이 오다'였습니다.

〈박수근: 뿌리 깊은 나무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전시회에서 전시 중인 옵셋 작품 ‘길가에서(아기 업은 소녀)’와 ‘나무’(오른쪽). (사진: 조성원 기자)〈박수근: 뿌리 깊은 나무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전시회에서 전시 중인 옵셋 작품 ‘길가에서(아기 업은 소녀)’와 ‘나무’(오른쪽). (사진: 조성원 기자)

특히 12살 때 밀레의 <만종>을 보고 큰 감명을 받아 그림에 열중하게 되었다고 전시회 연표는 설명합니다. 그는 훗날 당시의 마음을 이렇게 떠올렸습니다. "혼자서 밀레와 같은 훌륭한 화가가 되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 드리며 그림 그리는데 게을리 하지 않았어요." 한국의 농촌 풍경과 전원의 정서가 자연스레 그의 작품들에 자리하게 됐습니다.

박수근의 사후 판화 ‘호랑이’박수근의 사후 판화 ‘호랑이’

그의 작품들은 향토색을 띄지만 전통미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 배경에 대한 설명 역시 다음과 같은 내용의 전시회 자료를 통해 알 수 있었습니다.

"나는 우리나라의 옛 석물, 즉 석탑, 석불 같은 데서 말할 수 없는 아름다움의 원천을 느끼며 조형화에 도입하고자 애쓰고 있다" - 박수근

박수근의 작품과 삶은 중국인에게는 어떤 의미로 다가 올까요? 주로 1950년대에 그려진 박수근의 작품들을 보며 중국의 미술평론가 두시윈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벌거벗은 나무가 봄을 기다리고 있듯 첫 인상은 메마르고 암담한 모습이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그 속에 숨어있는 자잘한 생기들이 평범하고 보잘 것 없는 나날들을 인내하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만든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전시회 자료)

베이징 특별 전시회에 전시 중인 박수근의 사후 판화들(사진: 조성원 기자)베이징 특별 전시회에 전시 중인 박수근의 사후 판화들(사진: 조성원 기자)

■ 중국 미술 평론가 "벌거벗은 나무 속에 숨은 생기와 인내"

6.25 전쟁 이후 미군 부대에서 초상화를 그리던 박수근의 이야기를 픽션화한 작품이 바로 박완서의 장편 소설 <나목(裸木)>입니다. 중국인 평론가가 말한 '벌거벗은 나무'의 감정을 한중 양국 문화 예술인이 공통적으로 느꼈다니 국경을 뛰어넘는 공감이 느껴집니다.

"김장철 소스리 바람에 떠는 나목, 이제 막 마지막 낙엽을 끝낸 김장철 나목이기에 아직 멀건만 그 수심에 봄에의 향기가 애닯도록 절실하다." - 박완서 장편 소설 <나목>

K-Pop, K-드라마 등 한국의 최신 대중 문화가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이 때 중국에서 처음으로 열린 박수근 특별 전시회는 어떤 의미일까요? 사드 사태 이후 중국에서는 한국의 대중 문화 콘텐츠에 대한 경계와 규제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러한 시기 한국의 전통미와 자연, 한국인의 삶이 녹아있는 박수근의 작품 전시회는 정치 경제적 고민 없이 한국과 한국인의 정서에 대한 중국인들의 이해를 넓히는 계기가 되리라 생각됩니다.

박수근의 작품 활동은 1950년대가 절정이었습니다. 1950년대 한국 못지 않게 현대사의 풍파가 이어지며 서민들의 삶이 어려웠던 중국인들이 한국 사회와 문화에 대해 공감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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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특파원 리포트] 선함과 진실함을 그렸다…박수근 중국 전시회의 의미
    • 입력 2023-02-10 08:02:47
    • 수정2023-02-10 10:05:26
    특파원 리포트
1963년 서울 전농동 작업실에서 박수근
"나는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는 예술에 대한 대단히 평범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내가 그리는 인간상은 단순할 뿐 다채롭지 않다.
나는 그들의 가정에 있는 평범한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물론 어린 아이의 이미지를 가장 즐겨 그린다" - 박수근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리려 했다는 화가 박수근(1914~1965)에게는 많은 수식어가 따릅니다. 한국적인 화가, 국민 화가, 민중 화가, 또 한동안 가장 비싼 그림의 화가이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서민들의 삶을 투박한 질감으로 그려낸 그의 작품들을 보면 '가장 한국적인 화가'라는 표현이 잘 맞을 듯합니다.

■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린 작가' 박수근...중국에서 첫 전시회

갑자기 박수근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은 그의 작품 80여 점을 전시하는 행사가 중국 베이징에서 시작됐기 때문입니다. <박수근: 뿌리 깊은 나무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특별 전시회가 다음 달 말까지 주중 한국문화원에서 열립니다. 지난 해 한중 수교 30주년, 한중 문화 교류의 해 등을 계기로 전시회를 기획했지만, 지난 해 말 중국 코로나19 폭증으로 미뤄졌습니다.

박수근 특별 전시회가 열리고 있는 베이징의 주중 한국문화원 전경(사진: 조성원 기자)
전시 작품들은 선의 미학이 잘 살아있는 드로잉 원화 작품들과 박수근 특유의 질감을 살린 옵셋 작품(인쇄판과 고무롤러를 이용한 정밀 인쇄 작품), 목판 원판을 작가 사후에 다시 찍어낸 사후 판화 등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박수근을 대표하는 유화들이 원화가 아닌 이유는 작품들이 워낙 고가이고 분산돼 있어 해외 전시가 어렵기 때문이라고 전시회 관계자는 설명했습니다. 아쉬움은 있지만 옵셋 작품이기에 대규모로 한자리에서 감상할 수 있는 장점도 있습니다.

〈박수근: 뿌리 깊은 나무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전시회 (사진: 주중 한국문화원 제공)
실제 전시회는 박수근의 작품 세계를 그의 삶과 함께 이해할 수 있도록 준비돼 있습니다. 연표와 함께, KBS 다큐멘터리도 상영해 이해를 돕습니다.

베이징 박수근 전시회는 작가의 작품 세계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그의 어록을 전시하고 KBS 다큐멘터리를 상영하고 있다.(사진: 조성원 기자)
■ "밀레 같은 화가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작품 세계 이해 위한 설명 자료도 전시

박수근 옵셋 작품 ‘빨래터’ (사진: 조성원 기자)
전시회에서 박수근의 작품들을 보면 서민의 삶이 녹아 있는 점이 가장 눈에 띕니다. 거기엔 어린 시절 어려웠던 가정 형편이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유학을 떠나지 못하고 고향 양구의 산과 들을 다니며 스케치를 했다고 합니다. 장터와 빨래터에서 일하는 아낙네들, 어린 동생을 어른 대신 키우는 누나, 어슴푸레 나무가 뒤엉킨 숲... 그가 첫 입선의 기쁨을 맛본 작품도 이른 봄 농가를 그린 수채화 '봄이 오다'였습니다.

〈박수근: 뿌리 깊은 나무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전시회에서 전시 중인 옵셋 작품 ‘길가에서(아기 업은 소녀)’와 ‘나무’(오른쪽). (사진: 조성원 기자)
특히 12살 때 밀레의 <만종>을 보고 큰 감명을 받아 그림에 열중하게 되었다고 전시회 연표는 설명합니다. 그는 훗날 당시의 마음을 이렇게 떠올렸습니다. "혼자서 밀레와 같은 훌륭한 화가가 되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 드리며 그림 그리는데 게을리 하지 않았어요." 한국의 농촌 풍경과 전원의 정서가 자연스레 그의 작품들에 자리하게 됐습니다.

박수근의 사후 판화 ‘호랑이’
그의 작품들은 향토색을 띄지만 전통미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 배경에 대한 설명 역시 다음과 같은 내용의 전시회 자료를 통해 알 수 있었습니다.

"나는 우리나라의 옛 석물, 즉 석탑, 석불 같은 데서 말할 수 없는 아름다움의 원천을 느끼며 조형화에 도입하고자 애쓰고 있다" - 박수근

박수근의 작품과 삶은 중국인에게는 어떤 의미로 다가 올까요? 주로 1950년대에 그려진 박수근의 작품들을 보며 중국의 미술평론가 두시윈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벌거벗은 나무가 봄을 기다리고 있듯 첫 인상은 메마르고 암담한 모습이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그 속에 숨어있는 자잘한 생기들이 평범하고 보잘 것 없는 나날들을 인내하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만든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전시회 자료)

베이징 특별 전시회에 전시 중인 박수근의 사후 판화들(사진: 조성원 기자)
■ 중국 미술 평론가 "벌거벗은 나무 속에 숨은 생기와 인내"

6.25 전쟁 이후 미군 부대에서 초상화를 그리던 박수근의 이야기를 픽션화한 작품이 바로 박완서의 장편 소설 <나목(裸木)>입니다. 중국인 평론가가 말한 '벌거벗은 나무'의 감정을 한중 양국 문화 예술인이 공통적으로 느꼈다니 국경을 뛰어넘는 공감이 느껴집니다.

"김장철 소스리 바람에 떠는 나목, 이제 막 마지막 낙엽을 끝낸 김장철 나목이기에 아직 멀건만 그 수심에 봄에의 향기가 애닯도록 절실하다." - 박완서 장편 소설 <나목>

K-Pop, K-드라마 등 한국의 최신 대중 문화가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이 때 중국에서 처음으로 열린 박수근 특별 전시회는 어떤 의미일까요? 사드 사태 이후 중국에서는 한국의 대중 문화 콘텐츠에 대한 경계와 규제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러한 시기 한국의 전통미와 자연, 한국인의 삶이 녹아있는 박수근의 작품 전시회는 정치 경제적 고민 없이 한국과 한국인의 정서에 대한 중국인들의 이해를 넓히는 계기가 되리라 생각됩니다.

박수근의 작품 활동은 1950년대가 절정이었습니다. 1950년대 한국 못지 않게 현대사의 풍파가 이어지며 서민들의 삶이 어려웠던 중국인들이 한국 사회와 문화에 대해 공감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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