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는 뚱뚱했다?…편지에 담긴 ‘은밀한 이야기’

입력 2023.02.12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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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6년 정조가 조심태에게 보낸 편지1796년 정조가 조심태에게 보낸 편지

바야흐로 때는 1796년. 왕위에 오른지 꼭 20년이 되던 그해, 정조(正祖)는 자기 심복인 조심태(趙心泰, 1740~1799)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날이 덥기가 삼복더위보다 심하여 땀을 흘리고 헐떡이게 만든다. 경처럼 뚱뚱한 사람이 어떻게 견디겠는가. 실로 동병상련(同病相憐)이니 우습다.

땀이 줄줄 흐를 정도로 찌는 듯한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한여름이었나 봅니다. 자기도 더워서 견딜 수가 없는 지경이다 보니, 먼 곳에 나가서 수고하는 신하가 생각났던 거죠. 게다가 뚱뚱하니 더 참기 힘들겠구나, 하며 동병상련이라 우습다고 합니다. 정조 자신도 더위를 이기지 못할 만큼 뚱뚱했던 겁니다.

원문에는 비둔(肥鈍)이라 했습니다. 말 그대로 '뚱뚱해서 굼뜨다'는 뜻. 과문한 탓인지는 몰라도 정조가 생전에 뚱뚱했다는 기록을 저는 본 기억이 없습니다. 심지어 다른 사람의 관찰도 아니고 임금 스스로 뚱뚱하다고 했으니 의심할 여지 없는 사실이겠죠. 『조선왕조실록』을 만화로 그린 박시백 화백도 이건 꿈에도 몰랐을 겁니다.

그래서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정조 편을 다시 펼쳐봤더니…

박시백 화백이 그린 정조 (이미지 출처: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6』 휴머니스트, 2010)박시백 화백이 그린 정조 (이미지 출처: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6』 휴머니스트, 2010)

조선이라는 시대를 생각해 봤을 때, 임금이 뚱뚱하다는 기록이 어딘가에 남아 있을 가능성은 없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공식 기록이든, 개인 기록이든, 누가 감히 임금의 외모를 묘사하거나 평가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러니 우리는 지금까지 정조가 뚱뚱한지 어떤지 몰랐던 거고, 정조가 스스로 '나 뚱뚱하다'고 고백한 이 편지는 세상에 나와선 안 될 '비밀 편지'였던 셈이죠.

그런 편지가 어떻게 세상에 나왔느냐? 편지를 받은 사람이 안 버리고 모았기 때문이겠죠. 당시에 임금이 신하에게 보낸 편지를 고상한 말로 어찰(御札)이라 합니다. '어찰 정치'로 유명했던 정조의 편지는 지금까지 확인된 것만 무려 1천3백 편이 넘습니다. 그 중에서 정조가 조심태에게 보낸 편지는 수원화성박물관이 소장한 14편과 숙명여자대학교박물관이 소장한 20편을 더해 모두 34편이 확인됩니다.

『정조선황제어묵(正祖宣皇帝御墨)』(숙명여자대학교박물관 소장)『정조선황제어묵(正祖宣皇帝御墨)』(숙명여자대학교박물관 소장)

위에 소개해드린 편지는 숙명여대박물관이 소장한 『정조선황제어묵(正祖宣皇帝御墨)』에 수록된 것인데, 이 책에 더위와 관련한 정조의 편지가 한 편 더 있습니다.

근래는 잘 지내는가? (중략)
이처럼 무더우니 그 답답한 마음을 이루 말할 수 있겠는가. 비록 조만간 단비가 쏟아진다 해도, 보리는 소생하기 어렵겠는가? 늙은 농부는 무어라 말하는가? 모판은 어떠한가?

이 편지를 주고받은 시기는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해 여름도 몹시 더웠나 봅니다. 더워서 답답하다고 썼을 정도이니 말이죠. 그러면서 임금은 농사일을 걱정합니다. 보리는 다시 잘 자라겠는지, 모판은 어떤지, 경험 많은 늙은 농부는 대체 뭐라고 하는지, 답답하고 궁금한 임금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겼습니다.

그래서 임금을 만백성의 어버이라 했겠죠. 정조의 편지를 보면, 백성 걱정하는 마음 씀이 곳곳에서 확인됩니다. 대표적인 것이 수원화성박물관이 소장한 아래 편지입니다.

조 아무개를 불러다 보고서 일하는 사람들을 독촉해서는 안 된다고 대략 말하였다. 하지만 그의 잔재주는 사람을 가혹하게 다루는 것이니, 다시 엄하게 신칙하여 하루에 캐어서 바치는 나무는 절대 20그루를 넘지 않도록 하며, 큰 나무도 있고 작은 나무도 있으니 굳이 곳곳마다 큰 것일 필요는 없다고 하여라. 흙이 붙어 있으면 된다.

이게 어떤 상황이냐면, 조 씨 성을 가진 신하에게 공사 감독을 시켰더니 일하는 백성들을 지나치게 몰아붙이기에 그러지 말라고 주의를 줬는데도 또 그런다, 그러니 다시 단단히 주의를 주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하루에 벌채할 나무의 수량까지 언급하며 그 이상으로 넘지 않도록 하라고 지시하죠. 편지를 더 읽어봅니다.

평신진(平薪鎭)에서 세금을 45말씩 거두는 바람에 백성들이 매우 힘들어하니, 40말로 정하면 조금 편할 것이라고 서산군수가 승지에게 말했다고 한다. 앞으로 암행어사의 사목(事目)에 여기에 대한 일을 넣을 것이니, 잘 알아두라.

세금을 지나치게 많이 거둬 백성들이 괴로워한다며, 이번에도 백성의 부담을 덜어줄 징수량을 구체적인 숫자로 언급하며 앞으로 암행어사의 임무에 포함하겠다고 했습니다. 이 대목에서 저는 두 가지를 봤습니다. 첫째, 정조는 백성을 아끼는 어버이였다. 둘째, 정조는 '디테일'에 강한 통치자였다.

또 다른 편지에서 정조는 나무 심는 일을 언급하며 "이번 나무 심는 일은 백성들이 고통받은 뒤니 각별히 너그러운 쪽으로 한 뒤에야 백성을 위하는 뜻을 우러러 본받을 수 있다. 이 뜻은 예전에 천만 번 말하였다."고 거듭 거듭 강조했습니다. 백성을 위하는 임금의 마음을 보여주는 이런 글귀가 더 진정성 있게 다가오는 까닭은 신하에게 보낸 편지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편지들을 받은 조심태는 대체 어떤 인물일까요?

조심태 표준영정 (수원화성박물관 소장)조심태 표준영정 (수원화성박물관 소장)

조심태는 1789년(정조 13년)부터 1791년(정조 15년)까지 수원부사로 일하며 사도세자의 무덤인 현륭원(顯隆園) 조성 공사와 수원부 이전을 주도한 인물입니다. 이후 1794년(정조 18년)부터 1797년(정조 22년)까지 수원유수, 그러니까 지금의 수원시장으로 일하며 저 유명한 수원 화성 공사를 감독했습니다.

정리하면 조심태는 정조 시대의 가장 중요한 국책 사업이었던 수원 신도시 건설과 수원 화성 공사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맡은 심복이자 측근 중의 측근이었던 겁니다. 속마음까지도 허물없이 터놓고 말할 수 있는 '믿을맨'이었죠. 정조의 그런 믿음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 공사를 맡긴 데서도 알 수 있습니다.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 부부가 묻힌 융릉(隆陵)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 부부가 묻힌 융릉(隆陵)

정조가 얼마나 조심태를 아꼈는지는 편지 곳곳에서 확인됩니다. "간밤에 잘 있었는가?" "근래 잘 지내는가?" "요즘 편안한가?" "요사이 몸은 어떠한가?" 등등 안부를 묻는 건 기본. 일을 시켜놓고 걱정이 됐는지 "성역(공사)은 얼마나 되었는가? 날씨가 이렇게 추운데 힘들지 않은가?" 묻는가 하면,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 사이 몸은 깨끗이 나았는가?"하며 살뜰하게 챙깁니다.

보통 가까운 사이가 아니고는 이렇게까지 할 리가 없죠. 편지를 읽으면서 그 애정의 깊이가 느껴지더군요. 답장을 받고는 "편지를 받고 위안이 되었다."고 했고, 아파서 답장을 제때 못했다며 "병을 앓을 때 편지를 받아 즉시 답장을 못 하였으니 한탄스럽다."고도 씁니다.

그러면서 정조는 하루가 멀다 하고 조심태를 만날 날만 기다립니다. 40편이 채 안 되는 편지에 "언제 출입할 수 있겠는가?"라는 구절은 어찌 그리 많은지. "언제 서울로 올라올 것인가?" "언제 병영으로 돌아갈 것인가? 그 전에 한 번 만나고자 한다." "만나서 이야기하자." 등등. 심지어 "언제 출입할 것인지 자세히 말하는 것이 어떠한가?"라며 조바심을 내기도 합니다.

정조는 도대체 왜 이렇게 조심태를 기다렸을까. 그 답 또한 편지 안에 있습니다.

언제쯤 출입할 수 있는가? 나는 요사이 조금 나아졌다.
기(岐)는 이달 안에 올라올 것인가? 사람이 너무 부족하니 매우 답답하다. 하지만 여정이 천 리나 되니, 뜻대로 올 수 있을지 모르겠다.
요사이 소식은 들려줄 만한 것이 있는가? 삼남의 소문은 간혹 들었는가?

기(岐)는 조심태의 아들 조기를 뜻합니다. 조심태의 아들이 임금과 아버지, 정조와 조심태 사이에서 편지를 가지고 왔다 갔다 하며 연락책 역할을 했던 것 같습니다. 특히 "사람이 너무 부족하니 매우 답답하다."고 합니다. 그만큼 일을 믿고 맡길 사람이 많지 않았다는 뜻이겠죠.

정조가 조심태에게 보낸 편지를 묶은 『정조사조심태어찰첩(正祖賜趙心泰御札帖)』 (수원화성박물관 소장)정조가 조심태에게 보낸 편지를 묶은 『정조사조심태어찰첩(正祖賜趙心泰御札帖)』 (수원화성박물관 소장)

실제로 정보에 목말랐던 정조에게 조심태는 아주 중요한 정보원이었습니다. 정조는 조심태를 통해 끊임없이 관료 사회와 일반 백성들의 여론을 살피죠. 그래서 "요사이 들려줄 만한 소식이 있는가?" "요사이 소문은 들려줄 만한 것이 있는가?" "이번 정사(인사)한 뒤의 여론은 과연 어떠한가?" "어제 모임에서 들을 만한 이야기가 있었는가?"라고 끊임없이 묻고 또 묻습니다.

그러면서도 철저한 보안 유지를 강조하죠. "회양(淮陽)으로 내려보내는 사람은 언제 출발할 것이며, 누설되는 일은 없겠는가?" "이 종이는 즉시 찢어버리고 남기지 말라."는 얘기까지 합니다. 수많은 정적에 둘러싸인 채 살얼음판 같은 하루하루를 보내는 왕에게 조심태라는 신하는 든든한 수하이자 조력자였고 친구였으며 정치적 동반자였을 겁니다.

나는 연일 밤 재계하러 나가느라 병이 심해졌으니 이른바 증세가 참으로 형용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몹시 괴롭다. 사신을 만날 날이 다가왔으니 더욱 걱정스럽다. 이번에는 경이 어가를 따라와야 한다. 방해되는 혐의가 없겠는가? 대궐에 올라오면 여러 날 입직해야 하니 근력을 충분히 써야 할 것이다. 그 전에는 공적인 일에 절대로 나가지 않는 것이 어떠한가?

임금이 신하에게 되려 부탁하는 모습으로 읽히는 편지. 정조는 아마도 자신이 보낸 편지가 모두 불태워졌으리라 생각했겠지만, "즉시 찢어버리고 남기지 말라."는 임금의 말을 조심태가 거역한 덕분(?)에 편지는 살아남아 오늘날까지 전해졌습니다. 그리고 앞에서 본 것처럼 우리는 정조가 뚱뚱했다는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됐죠. 남의 은밀한 단톡방 대화를 몰래 훔쳐본 느낌이랄까.

수원화성박물관이 최근에 펴낸 『정조어찰첩 - 정조대왕이 수원유수 조심태에게 보낸 편지』는 지금까지 소개한 편지의 원문과 번역문을 해설과 함께 실었습니다. 편지와 만남을 기다리며 끊임없이 여론을 살피는 정조의 모습에서 보게 되는 건 '소통하려는 의지' 아닐까요. 편지라는 내밀한 수단을 통해 정조라는 한 인물의 초상을 어렴풋이나마 그려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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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조는 뚱뚱했다?…편지에 담긴 ‘은밀한 이야기’
    • 입력 2023-02-12 10:00:10
    취재K
1796년 정조가 조심태에게 보낸 편지
바야흐로 때는 1796년. 왕위에 오른지 꼭 20년이 되던 그해, 정조(正祖)는 자기 심복인 조심태(趙心泰, 1740~1799)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날이 덥기가 삼복더위보다 심하여 땀을 흘리고 헐떡이게 만든다. 경처럼 뚱뚱한 사람이 어떻게 견디겠는가. 실로 동병상련(同病相憐)이니 우습다.

땀이 줄줄 흐를 정도로 찌는 듯한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한여름이었나 봅니다. 자기도 더워서 견딜 수가 없는 지경이다 보니, 먼 곳에 나가서 수고하는 신하가 생각났던 거죠. 게다가 뚱뚱하니 더 참기 힘들겠구나, 하며 동병상련이라 우습다고 합니다. 정조 자신도 더위를 이기지 못할 만큼 뚱뚱했던 겁니다.

원문에는 비둔(肥鈍)이라 했습니다. 말 그대로 '뚱뚱해서 굼뜨다'는 뜻. 과문한 탓인지는 몰라도 정조가 생전에 뚱뚱했다는 기록을 저는 본 기억이 없습니다. 심지어 다른 사람의 관찰도 아니고 임금 스스로 뚱뚱하다고 했으니 의심할 여지 없는 사실이겠죠. 『조선왕조실록』을 만화로 그린 박시백 화백도 이건 꿈에도 몰랐을 겁니다.

그래서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정조 편을 다시 펼쳐봤더니…

박시백 화백이 그린 정조 (이미지 출처: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6』 휴머니스트, 2010)
조선이라는 시대를 생각해 봤을 때, 임금이 뚱뚱하다는 기록이 어딘가에 남아 있을 가능성은 없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공식 기록이든, 개인 기록이든, 누가 감히 임금의 외모를 묘사하거나 평가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러니 우리는 지금까지 정조가 뚱뚱한지 어떤지 몰랐던 거고, 정조가 스스로 '나 뚱뚱하다'고 고백한 이 편지는 세상에 나와선 안 될 '비밀 편지'였던 셈이죠.

그런 편지가 어떻게 세상에 나왔느냐? 편지를 받은 사람이 안 버리고 모았기 때문이겠죠. 당시에 임금이 신하에게 보낸 편지를 고상한 말로 어찰(御札)이라 합니다. '어찰 정치'로 유명했던 정조의 편지는 지금까지 확인된 것만 무려 1천3백 편이 넘습니다. 그 중에서 정조가 조심태에게 보낸 편지는 수원화성박물관이 소장한 14편과 숙명여자대학교박물관이 소장한 20편을 더해 모두 34편이 확인됩니다.

『정조선황제어묵(正祖宣皇帝御墨)』(숙명여자대학교박물관 소장)
위에 소개해드린 편지는 숙명여대박물관이 소장한 『정조선황제어묵(正祖宣皇帝御墨)』에 수록된 것인데, 이 책에 더위와 관련한 정조의 편지가 한 편 더 있습니다.

근래는 잘 지내는가? (중략)
이처럼 무더우니 그 답답한 마음을 이루 말할 수 있겠는가. 비록 조만간 단비가 쏟아진다 해도, 보리는 소생하기 어렵겠는가? 늙은 농부는 무어라 말하는가? 모판은 어떠한가?

이 편지를 주고받은 시기는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해 여름도 몹시 더웠나 봅니다. 더워서 답답하다고 썼을 정도이니 말이죠. 그러면서 임금은 농사일을 걱정합니다. 보리는 다시 잘 자라겠는지, 모판은 어떤지, 경험 많은 늙은 농부는 대체 뭐라고 하는지, 답답하고 궁금한 임금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겼습니다.

그래서 임금을 만백성의 어버이라 했겠죠. 정조의 편지를 보면, 백성 걱정하는 마음 씀이 곳곳에서 확인됩니다. 대표적인 것이 수원화성박물관이 소장한 아래 편지입니다.

조 아무개를 불러다 보고서 일하는 사람들을 독촉해서는 안 된다고 대략 말하였다. 하지만 그의 잔재주는 사람을 가혹하게 다루는 것이니, 다시 엄하게 신칙하여 하루에 캐어서 바치는 나무는 절대 20그루를 넘지 않도록 하며, 큰 나무도 있고 작은 나무도 있으니 굳이 곳곳마다 큰 것일 필요는 없다고 하여라. 흙이 붙어 있으면 된다.

이게 어떤 상황이냐면, 조 씨 성을 가진 신하에게 공사 감독을 시켰더니 일하는 백성들을 지나치게 몰아붙이기에 그러지 말라고 주의를 줬는데도 또 그런다, 그러니 다시 단단히 주의를 주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하루에 벌채할 나무의 수량까지 언급하며 그 이상으로 넘지 않도록 하라고 지시하죠. 편지를 더 읽어봅니다.

평신진(平薪鎭)에서 세금을 45말씩 거두는 바람에 백성들이 매우 힘들어하니, 40말로 정하면 조금 편할 것이라고 서산군수가 승지에게 말했다고 한다. 앞으로 암행어사의 사목(事目)에 여기에 대한 일을 넣을 것이니, 잘 알아두라.

세금을 지나치게 많이 거둬 백성들이 괴로워한다며, 이번에도 백성의 부담을 덜어줄 징수량을 구체적인 숫자로 언급하며 앞으로 암행어사의 임무에 포함하겠다고 했습니다. 이 대목에서 저는 두 가지를 봤습니다. 첫째, 정조는 백성을 아끼는 어버이였다. 둘째, 정조는 '디테일'에 강한 통치자였다.

또 다른 편지에서 정조는 나무 심는 일을 언급하며 "이번 나무 심는 일은 백성들이 고통받은 뒤니 각별히 너그러운 쪽으로 한 뒤에야 백성을 위하는 뜻을 우러러 본받을 수 있다. 이 뜻은 예전에 천만 번 말하였다."고 거듭 거듭 강조했습니다. 백성을 위하는 임금의 마음을 보여주는 이런 글귀가 더 진정성 있게 다가오는 까닭은 신하에게 보낸 편지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편지들을 받은 조심태는 대체 어떤 인물일까요?

조심태 표준영정 (수원화성박물관 소장)
조심태는 1789년(정조 13년)부터 1791년(정조 15년)까지 수원부사로 일하며 사도세자의 무덤인 현륭원(顯隆園) 조성 공사와 수원부 이전을 주도한 인물입니다. 이후 1794년(정조 18년)부터 1797년(정조 22년)까지 수원유수, 그러니까 지금의 수원시장으로 일하며 저 유명한 수원 화성 공사를 감독했습니다.

정리하면 조심태는 정조 시대의 가장 중요한 국책 사업이었던 수원 신도시 건설과 수원 화성 공사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맡은 심복이자 측근 중의 측근이었던 겁니다. 속마음까지도 허물없이 터놓고 말할 수 있는 '믿을맨'이었죠. 정조의 그런 믿음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 공사를 맡긴 데서도 알 수 있습니다.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 부부가 묻힌 융릉(隆陵)
정조가 얼마나 조심태를 아꼈는지는 편지 곳곳에서 확인됩니다. "간밤에 잘 있었는가?" "근래 잘 지내는가?" "요즘 편안한가?" "요사이 몸은 어떠한가?" 등등 안부를 묻는 건 기본. 일을 시켜놓고 걱정이 됐는지 "성역(공사)은 얼마나 되었는가? 날씨가 이렇게 추운데 힘들지 않은가?" 묻는가 하면,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 사이 몸은 깨끗이 나았는가?"하며 살뜰하게 챙깁니다.

보통 가까운 사이가 아니고는 이렇게까지 할 리가 없죠. 편지를 읽으면서 그 애정의 깊이가 느껴지더군요. 답장을 받고는 "편지를 받고 위안이 되었다."고 했고, 아파서 답장을 제때 못했다며 "병을 앓을 때 편지를 받아 즉시 답장을 못 하였으니 한탄스럽다."고도 씁니다.

그러면서 정조는 하루가 멀다 하고 조심태를 만날 날만 기다립니다. 40편이 채 안 되는 편지에 "언제 출입할 수 있겠는가?"라는 구절은 어찌 그리 많은지. "언제 서울로 올라올 것인가?" "언제 병영으로 돌아갈 것인가? 그 전에 한 번 만나고자 한다." "만나서 이야기하자." 등등. 심지어 "언제 출입할 것인지 자세히 말하는 것이 어떠한가?"라며 조바심을 내기도 합니다.

정조는 도대체 왜 이렇게 조심태를 기다렸을까. 그 답 또한 편지 안에 있습니다.

언제쯤 출입할 수 있는가? 나는 요사이 조금 나아졌다.
기(岐)는 이달 안에 올라올 것인가? 사람이 너무 부족하니 매우 답답하다. 하지만 여정이 천 리나 되니, 뜻대로 올 수 있을지 모르겠다.
요사이 소식은 들려줄 만한 것이 있는가? 삼남의 소문은 간혹 들었는가?

기(岐)는 조심태의 아들 조기를 뜻합니다. 조심태의 아들이 임금과 아버지, 정조와 조심태 사이에서 편지를 가지고 왔다 갔다 하며 연락책 역할을 했던 것 같습니다. 특히 "사람이 너무 부족하니 매우 답답하다."고 합니다. 그만큼 일을 믿고 맡길 사람이 많지 않았다는 뜻이겠죠.

정조가 조심태에게 보낸 편지를 묶은 『정조사조심태어찰첩(正祖賜趙心泰御札帖)』 (수원화성박물관 소장)
실제로 정보에 목말랐던 정조에게 조심태는 아주 중요한 정보원이었습니다. 정조는 조심태를 통해 끊임없이 관료 사회와 일반 백성들의 여론을 살피죠. 그래서 "요사이 들려줄 만한 소식이 있는가?" "요사이 소문은 들려줄 만한 것이 있는가?" "이번 정사(인사)한 뒤의 여론은 과연 어떠한가?" "어제 모임에서 들을 만한 이야기가 있었는가?"라고 끊임없이 묻고 또 묻습니다.

그러면서도 철저한 보안 유지를 강조하죠. "회양(淮陽)으로 내려보내는 사람은 언제 출발할 것이며, 누설되는 일은 없겠는가?" "이 종이는 즉시 찢어버리고 남기지 말라."는 얘기까지 합니다. 수많은 정적에 둘러싸인 채 살얼음판 같은 하루하루를 보내는 왕에게 조심태라는 신하는 든든한 수하이자 조력자였고 친구였으며 정치적 동반자였을 겁니다.

나는 연일 밤 재계하러 나가느라 병이 심해졌으니 이른바 증세가 참으로 형용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몹시 괴롭다. 사신을 만날 날이 다가왔으니 더욱 걱정스럽다. 이번에는 경이 어가를 따라와야 한다. 방해되는 혐의가 없겠는가? 대궐에 올라오면 여러 날 입직해야 하니 근력을 충분히 써야 할 것이다. 그 전에는 공적인 일에 절대로 나가지 않는 것이 어떠한가?

임금이 신하에게 되려 부탁하는 모습으로 읽히는 편지. 정조는 아마도 자신이 보낸 편지가 모두 불태워졌으리라 생각했겠지만, "즉시 찢어버리고 남기지 말라."는 임금의 말을 조심태가 거역한 덕분(?)에 편지는 살아남아 오늘날까지 전해졌습니다. 그리고 앞에서 본 것처럼 우리는 정조가 뚱뚱했다는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됐죠. 남의 은밀한 단톡방 대화를 몰래 훔쳐본 느낌이랄까.

수원화성박물관이 최근에 펴낸 『정조어찰첩 - 정조대왕이 수원유수 조심태에게 보낸 편지』는 지금까지 소개한 편지의 원문과 번역문을 해설과 함께 실었습니다. 편지와 만남을 기다리며 끊임없이 여론을 살피는 정조의 모습에서 보게 되는 건 '소통하려는 의지' 아닐까요. 편지라는 내밀한 수단을 통해 정조라는 한 인물의 초상을 어렴풋이나마 그려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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