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안화력 김용균 산재 항소심…현장을 몰랐다면 무죄

입력 2023.02.14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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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일  태안화력 고 김용균 씨의 항소심 선고가 끝난 뒤 법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는 유족과 노동계 관계자들.지난 9일 태안화력 고 김용균 씨의 항소심 선고가 끝난 뒤 법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는 유족과 노동계 관계자들.

“이번 항소심 판결은 기업과 노동자, 우리 사회에 위험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습니다. 책임자가 산업현장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면, 권한과 능력, 책임이 있어도 ‘나는 모른다. 보고하지 말아라’고 하면 처벌받지 않는다는 내용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산업현장에 관심을 가지고 한 번이라도 더 가보고, 한 번이라도 더 신경쓰면 재판에서 문제가 되겠구나, 그러니까 하지 말아야겠다. 이런 신호를 사업주와 경영책임자에게 알려주고 있었습니다. 사업주들에게 면죄부를 선고하는 자리였습니다.”
-김덕현 고 김용균 측 변호인

산업재해 사고로 숨지기 전 고 김용균 씨가 마지막으로 남긴 사진.산업재해 사고로 숨지기 전 고 김용균 씨가 마지막으로 남긴 사진.

태안화력발전소 비정규직 노동자로 일하다 숨진 24살 청년 고 김용균 씨에 대한 사고원인의 책임을 두고 1,500일 넘게 이어진 재판에서 2심인 항소심 법정의 결과가 지난 9일 나왔습니다.

지난해 2월 대전지방법원 서산지원에서 1심 판결이 나온 지 1년만입니다.

그런데 이번 항소심 선고에서 원청인 한국서부발전과 하청인 한국발전기술, 그리고 서부발전 태안화력발전본부장 권 모 씨 등 책임자들이 1심이 내린 유죄가 무죄로 뒤바뀌거나 줄줄이 감형됐습니다.

항소심 재판부는 “현장을 가지 않았고, 보고받지 않았고, 작업 내용을 몰랐고, 직접 관여하지 않았고, 누구 1명의 과오도 아니다”라는 이유를 들며, 기소된 13명의 사람 중 사장과 본부장 등 고위책임자들에게 무죄와 그리고 감형을 선고했습니다.

1시간여 이어진 선고 동안 “인정될 수 없다. 위반으로 볼 수 없다.”라는 말이 나올 때마다 법정 내부에서 신음과 한숨, 한탄이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선고가 모두 끝나자 오직 단 한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쳤습니다.

“재판관님, 저는 유족입니다. 어떻게 이런 판결이 나올 수 있습니까? 이런 판결이 노동자들을 죽이고 있습니다. 재판관님 말씀 좀 해주십시오!”

아들을 잃은 어머니는 법정을 나오자마자 주저앉은 채 한참을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항소심 선고가 끝나고 법정 앞에  앉아 오열하는 고 김용균 씨의 어머니, 김미숙 김용균재단 이사장.항소심 선고가 끝나고 법정 앞에 앉아 오열하는 고 김용균 씨의 어머니, 김미숙 김용균재단 이사장.

■아들의 죽음

2018년 12월 11일 새벽, 한국서부발전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일하던 하청업체 비정규직 노동자 고 김용균 씨가 작업 중 석탄 이송용 컨베이어에 끼여 숨지는 사고가 났습니다.

벨트와 롤러 사이에 몸이 말려 들어가 산산이 부서진 채 발견된 고 김용균 씨는 혼자 일하다 사고를 당했고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했습니다.

사고 당시 컨베이어는 운전 중이었고, 밀폐된 점검구 안으로 머리와 상체를 집어넣어 설비를 살피는 위험천만한 작업이 이뤄졌습니다.

어두컴컴한 공간 속에서 손전등 하나에 의존해 회사가 시킨 일을 하다 숨진 겁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설비 점검업무를 하고 있는 김용균 씨의 모습.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설비 점검업무를 하고 있는 김용균 씨의 모습.

사망사고 다음 날 고 김용균 씨의 어머니인 김미숙 씨는 “왜 우리가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지, 앞으로도 이런 일을 겪어야 시정이 되는 건지, 지금 바로 시정이 될 수 있는 건지, 그런 것 좀 말씀해 주세요.”라고 말하며 아들의 죽음에 대한 진상규명을 요구했습니다.

고용노동부는 특별근로감독에 착수했고, 경찰 또한 업무상과실치사 혐의에 대해 원청인 한국서부발전과 하청업체인 한국발전기술 관계자를 상대로 수사에 나섰습니다.

그리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위험의 외주화에 내몰리고 산재 사망사고에 노출된 점에 대해 여론이 들끓기 시작했고 김용균 특조위가 만들어져 진상조사에 나섰습니다.

국회 국정감사에선 날 선 질타가 오갔고, 산업안전보건법이 개정되고 더 나아가 중대 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이 지난해 1월 27일부터 시행에 들어갔습니다.

고용노동부가 발간한 ‘중대재해처벌법 해설집’에는 태안화력 김용균 사고가 이 법의 제정 이유라고 적혀있습니다.

그리고 경영책임자 사업주의 의무와 처벌 규정을 법에 담았다고도 나와 있습니다.


■양형의 이유

태안화력 고 김용균 사망사건의 항소심 재판부인 대전지방법원 제2형사부 최형철, 유제민, 김명수 판사는 사고 발생 1,522일만인 2월 10일, 산업안전보건법 위반과 업무상과실치사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13명과 원·하청 법인 2곳 대한 선고를 내렸습니다.

무죄는 그대로 무죄로, 그리고 1심에서 유죄가 나왔던 사람들에게는 무죄 혹은 감형되는 선고가 줄줄이 이어졌습니다.

재판부는 양형 이유에 대해 피고인들은 안전조치의무와 업무상 주의의무를 위반해 피해자가 숨지는 돌이킬 수 없는 중대한 결과를 발생시켜 죄책에 상응하는 처벌이 불가피하다고 봤습니다.

피고인들의 지위와 경력, 재직기간을 비롯해 그간 해왔던 업무 내용에 비춰봤을 때 사고를 미리 막지 못한 의무 정도가 가볍게 볼 수 없다고도 말했습니다.

특히 유가족들이 엄벌을 지속적으로 탄원한 점도 죄를 무겁게 볼 수밖에 없다고도 덧붙였습니다.

그러면서 피고인 중 누구 한 명의 결정적인 과오에 사고가 기인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재판부는 판단했습니다.

산업현장에서 안전보건조치를 간과하고 각자 업무상 주의의무를 태만한 결과가 경합 되고 중첩돼 중대한 결과에 이르렀다며, 개개인의 과실 정도가 매우 중하다고 할 수 없다고 판시했습니다.

1심에 이어 항소심에서도 무죄가 선고된 김병숙 전 한국서부발전 사장.1심에 이어 항소심에서도 무죄가 선고된 김병숙 전 한국서부발전 사장.

■무죄와 감형

그렇다면 기소된 13명은 각자 어떤 형이 내려지고, 또 무죄를 받았을까요?

앞서 검찰은 김병숙 전 서부발전 사장 등에 대해 죄가 무겁다며 구형량을 징역 2년에서 금고 1년 6개월 등을 재판부가 선고해달라며 요청했습니다.

항소심 재판부는 긴 심리 끝에 원청 책임자인 김병숙 전 한국서부발전 사장에 대해 무죄를 선고한 1심의 결정을 그대로 유지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원청 책임자, 서부발전 태안발전본부장 권 모 씨의 경우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내렸던 1심을 파기하고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서부발전 태안발전본부 기술지원처장 박 모 씨와 하청업체 대표인 백남호 한국발전기술 사장의 경우 각각 6개월이 감형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이 선고됐습니다.

한국서부발전 태안화력발전소.한국서부발전 태안화력발전소.

법인의 경우 원청인 한국서부발전 주식회사에 대해서도 벌금 1,000만 원이 선고된 1심의 결정을 깨고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하청인 한국발전기술 주식회사는 벌금 1,500만 원에서 ‘작업중지 등 안전조치 미이행, 작업중지명령 위반에 대한 죄’가 무죄로 판단돼 벌금 1,200만 원으로 낮아졌습니다.

반면 부장과 차장, 팀장 등 대다수 직원은 대부분 1심이 내린 징역형 집행유예나 벌금형이 유지됐습니다.

재판부의 선고에 대해 김덕현 고 김용균 측 변호인은 “사람이 죽고 다쳤을 때 현장 하급관리자 몇 명만 산업안전보건법과 업무상 과실치사상 혐의로 처벌받고 끝나는 행태가 반복됐다”며 “김용균의 죽음과 또 다른 수많은 김용균들의 죽음을 반복해서도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하고,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재판부에 되묻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김덕현 고 김용균 측 변호인.김덕현 고 김용균 측 변호인.

■항소심 판단

항소심 재판부가 어떻게 이 사건을 바라봤는지 판결문 속 ‘당심의 판단’을 살펴봤습니다.

먼저 고 김용균 씨 죽음 원인입니다.

설비점검을 하다 사고가 났다는 점은 항소심 재판부가 맞다고 봤습니다.

하지만 탄 처리작업을 하다 사고가 발생했는지는 현장 운전원의 진술을 그대로 믿기 어렵다며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1심에 이어 항소심에서도 무죄가 나온 김병순 전 한국서부발전 대표이사에 대해 항소심 재판부는 아래와 같은 이유로 죄가 없다고 봤습니다.

재판부는 ‘김 전 사장은 서부발전과 산하 발전본부를 총괄하는 대표이사, 최고경영자며 안전보건관리계획은 각 발전본부의 안전보건관리책임자에게 위임돼 있다’는 점을 주요하게 봤습니다.

이 같은 이유로 김 전 사장이 개별적 설비에 대해서까지 점검하고, 예방조치를 이행할 구체적 직접적 주의의무를 가진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습니다.

또 2인 1조 근무배치를 위반한 점에 대해서도 해당 업무가 2인 1조가 필요할 정도의 위험 작업임을 인식해야 하는데 김 전 사장은 벨트 설비 현황이나 운전원들의 작업 방식의 위험성에 관해 구체적으로 인식할 수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고 봤습니다.

컨베이어에 방호조치, 그러니까 덮개 등 안전조치가 없었다는 점에 대해서도 알면서 방치했거나 작업을 지시했다고 보기 부족하다고 덧붙였습니다.

지난 9일 법원 전광판에 나오고 있는 김용균 씨 사망사고의 피고인 명부.지난 9일 법원 전광판에 나오고 있는 김용균 씨 사망사고의 피고인 명부.

■이어진 죽음

태안화력 고 김용균 씨의 책임에 대한 감형과 무죄 선고가 있던 그 날, 발전노동자 1명이 또 목숨을 잃었습니다.

지난 8일 오후 1시쯤, 태안화력 인근의 한국중부발전이 운영하는 보령화력발전소에서 하청업체 소속 노동자 52살 이 모 씨가 하역기에서 낙탄을 치우다가 15 미터 아래로 떨어져 하루 만에 숨졌습니다.

하역기에 노동자들이 지나다닐 수 있도록 만들어놓은 철제 발판이 한쪽이 통째로 떨어져 나가면서 발판과 함께 추락한 겁니다.

발전소 노동자인 이태성 한국발전산업노동조합 간사는 “김용균 노동자가 숨진 지 4년이 지났지만, 또다시 하청업체 노동자가 숨졌습니다. 이게 발전소의 현실입니다. 수많은 안전장치와 수많은 노력을 발전사가 했다고 말하지만, 여전히 하청업체 노동자들은 현장에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한국중부발전이 운영하는 보령화력발전소는 상시노동자가 50인 이상으로 김용균 씨의 죽음을 계기로 만들어진 ‘중대해재처벌법’ 대상 사업장입니다.

앞서 김용균 씨의 죽음에 대해 한국서부발전 사장은 무죄가 나왔습니다.

하지만 이 모 씨의 죽음에 대해 한국중부발전 사장의 경우 김용균 씨 때는 없었던 ‘중대재해처벌법’이 적용됩니다.

고 김용균 씨 사고 후 현장을 살피고 있는 소방대원들.고 김용균 씨 사고 후 현장을 살피고 있는 소방대원들.

■ 대법원 상고

유족들은 항소심 판결을 인정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검찰에게 대법원에 상고해 책임자들의 죄를 다시 한번 물어달라고 촉구했습니다.

항소심 선고가 끝난 뒤 법원 앞에서 기자회견에 나선 고 김용균 씨의 어머니는 다시 싸우겠다고 말했습니다.

김미숙 김용균재단 이사장.김미숙 김용균재단 이사장.

“법원에 올 때 약간의 희망을 품고 왔습니다. 개정 전의 산업안전보건법을 적용해서 얼마나 그 효력을 발휘할지 너무 뻔한 사실이지만 그래도 조금은 나아질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재판이 노동자들을 죽이고 있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린 재판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이고 있는지 현장에 있을 때 정말 힘들었습니다. 사용자가 제대로 안전조치를 안 해서 죽음을 만들었다는 것을 각인시킬 때까지 끝까지 싸우겠습니다. 너무 억울하고 분통이 터지는 하루였습니다.”
-김미숙 김용균재단 이사장

특별조사위원회가 구성되고, 산업안전보건법이 개정되고, 중대재해처벌법이 제정되고, 해마다 국회 국정감사에서 산업안전의 이야기를 강하게 할 수 있도록 만들었던 고 김용균 씨의 사망사고에 대해 원청 대표에게는 무죄, 그리고 유죄였던 원청도 무죄가 선고됐습니다.

발전소에서는 또 하청업체노동자가 목숨을 또 잃었습니다.

태안화력 김용균 씨의 재판을 참석한 뒤 보령화력 동료의 사망 소식을 들은 발전소 노동자들도 ‘분노’를 참지 않았습니다.

발전소 노동자들은 우리들의 이야기를, 현장의 이야기를 법원에 제출해 끝까지 책임을 묻겠다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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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안화력 김용균 산재 항소심…현장을 몰랐다면 무죄
    • 입력 2023-02-14 10:48:36
    취재K
지난 9일  태안화력 고 김용균 씨의 항소심 선고가 끝난 뒤 법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는 유족과 노동계 관계자들.
“이번 항소심 판결은 기업과 노동자, 우리 사회에 위험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습니다. 책임자가 산업현장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면, 권한과 능력, 책임이 있어도 ‘나는 모른다. 보고하지 말아라’고 하면 처벌받지 않는다는 내용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산업현장에 관심을 가지고 한 번이라도 더 가보고, 한 번이라도 더 신경쓰면 재판에서 문제가 되겠구나, 그러니까 하지 말아야겠다. 이런 신호를 사업주와 경영책임자에게 알려주고 있었습니다. 사업주들에게 면죄부를 선고하는 자리였습니다.”
-김덕현 고 김용균 측 변호인

산업재해 사고로 숨지기 전 고 김용균 씨가 마지막으로 남긴 사진.
태안화력발전소 비정규직 노동자로 일하다 숨진 24살 청년 고 김용균 씨에 대한 사고원인의 책임을 두고 1,500일 넘게 이어진 재판에서 2심인 항소심 법정의 결과가 지난 9일 나왔습니다.

지난해 2월 대전지방법원 서산지원에서 1심 판결이 나온 지 1년만입니다.

그런데 이번 항소심 선고에서 원청인 한국서부발전과 하청인 한국발전기술, 그리고 서부발전 태안화력발전본부장 권 모 씨 등 책임자들이 1심이 내린 유죄가 무죄로 뒤바뀌거나 줄줄이 감형됐습니다.

항소심 재판부는 “현장을 가지 않았고, 보고받지 않았고, 작업 내용을 몰랐고, 직접 관여하지 않았고, 누구 1명의 과오도 아니다”라는 이유를 들며, 기소된 13명의 사람 중 사장과 본부장 등 고위책임자들에게 무죄와 그리고 감형을 선고했습니다.

1시간여 이어진 선고 동안 “인정될 수 없다. 위반으로 볼 수 없다.”라는 말이 나올 때마다 법정 내부에서 신음과 한숨, 한탄이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선고가 모두 끝나자 오직 단 한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쳤습니다.

“재판관님, 저는 유족입니다. 어떻게 이런 판결이 나올 수 있습니까? 이런 판결이 노동자들을 죽이고 있습니다. 재판관님 말씀 좀 해주십시오!”

아들을 잃은 어머니는 법정을 나오자마자 주저앉은 채 한참을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항소심 선고가 끝나고 법정 앞에  앉아 오열하는 고 김용균 씨의 어머니, 김미숙 김용균재단 이사장.
■아들의 죽음

2018년 12월 11일 새벽, 한국서부발전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일하던 하청업체 비정규직 노동자 고 김용균 씨가 작업 중 석탄 이송용 컨베이어에 끼여 숨지는 사고가 났습니다.

벨트와 롤러 사이에 몸이 말려 들어가 산산이 부서진 채 발견된 고 김용균 씨는 혼자 일하다 사고를 당했고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했습니다.

사고 당시 컨베이어는 운전 중이었고, 밀폐된 점검구 안으로 머리와 상체를 집어넣어 설비를 살피는 위험천만한 작업이 이뤄졌습니다.

어두컴컴한 공간 속에서 손전등 하나에 의존해 회사가 시킨 일을 하다 숨진 겁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설비 점검업무를 하고 있는 김용균 씨의 모습.
사망사고 다음 날 고 김용균 씨의 어머니인 김미숙 씨는 “왜 우리가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지, 앞으로도 이런 일을 겪어야 시정이 되는 건지, 지금 바로 시정이 될 수 있는 건지, 그런 것 좀 말씀해 주세요.”라고 말하며 아들의 죽음에 대한 진상규명을 요구했습니다.

고용노동부는 특별근로감독에 착수했고, 경찰 또한 업무상과실치사 혐의에 대해 원청인 한국서부발전과 하청업체인 한국발전기술 관계자를 상대로 수사에 나섰습니다.

그리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위험의 외주화에 내몰리고 산재 사망사고에 노출된 점에 대해 여론이 들끓기 시작했고 김용균 특조위가 만들어져 진상조사에 나섰습니다.

국회 국정감사에선 날 선 질타가 오갔고, 산업안전보건법이 개정되고 더 나아가 중대 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이 지난해 1월 27일부터 시행에 들어갔습니다.

고용노동부가 발간한 ‘중대재해처벌법 해설집’에는 태안화력 김용균 사고가 이 법의 제정 이유라고 적혀있습니다.

그리고 경영책임자 사업주의 의무와 처벌 규정을 법에 담았다고도 나와 있습니다.


■양형의 이유

태안화력 고 김용균 사망사건의 항소심 재판부인 대전지방법원 제2형사부 최형철, 유제민, 김명수 판사는 사고 발생 1,522일만인 2월 10일, 산업안전보건법 위반과 업무상과실치사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13명과 원·하청 법인 2곳 대한 선고를 내렸습니다.

무죄는 그대로 무죄로, 그리고 1심에서 유죄가 나왔던 사람들에게는 무죄 혹은 감형되는 선고가 줄줄이 이어졌습니다.

재판부는 양형 이유에 대해 피고인들은 안전조치의무와 업무상 주의의무를 위반해 피해자가 숨지는 돌이킬 수 없는 중대한 결과를 발생시켜 죄책에 상응하는 처벌이 불가피하다고 봤습니다.

피고인들의 지위와 경력, 재직기간을 비롯해 그간 해왔던 업무 내용에 비춰봤을 때 사고를 미리 막지 못한 의무 정도가 가볍게 볼 수 없다고도 말했습니다.

특히 유가족들이 엄벌을 지속적으로 탄원한 점도 죄를 무겁게 볼 수밖에 없다고도 덧붙였습니다.

그러면서 피고인 중 누구 한 명의 결정적인 과오에 사고가 기인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재판부는 판단했습니다.

산업현장에서 안전보건조치를 간과하고 각자 업무상 주의의무를 태만한 결과가 경합 되고 중첩돼 중대한 결과에 이르렀다며, 개개인의 과실 정도가 매우 중하다고 할 수 없다고 판시했습니다.

1심에 이어 항소심에서도 무죄가 선고된 김병숙 전 한국서부발전 사장.
■무죄와 감형

그렇다면 기소된 13명은 각자 어떤 형이 내려지고, 또 무죄를 받았을까요?

앞서 검찰은 김병숙 전 서부발전 사장 등에 대해 죄가 무겁다며 구형량을 징역 2년에서 금고 1년 6개월 등을 재판부가 선고해달라며 요청했습니다.

항소심 재판부는 긴 심리 끝에 원청 책임자인 김병숙 전 한국서부발전 사장에 대해 무죄를 선고한 1심의 결정을 그대로 유지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원청 책임자, 서부발전 태안발전본부장 권 모 씨의 경우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내렸던 1심을 파기하고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서부발전 태안발전본부 기술지원처장 박 모 씨와 하청업체 대표인 백남호 한국발전기술 사장의 경우 각각 6개월이 감형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이 선고됐습니다.

한국서부발전 태안화력발전소.
법인의 경우 원청인 한국서부발전 주식회사에 대해서도 벌금 1,000만 원이 선고된 1심의 결정을 깨고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하청인 한국발전기술 주식회사는 벌금 1,500만 원에서 ‘작업중지 등 안전조치 미이행, 작업중지명령 위반에 대한 죄’가 무죄로 판단돼 벌금 1,200만 원으로 낮아졌습니다.

반면 부장과 차장, 팀장 등 대다수 직원은 대부분 1심이 내린 징역형 집행유예나 벌금형이 유지됐습니다.

재판부의 선고에 대해 김덕현 고 김용균 측 변호인은 “사람이 죽고 다쳤을 때 현장 하급관리자 몇 명만 산업안전보건법과 업무상 과실치사상 혐의로 처벌받고 끝나는 행태가 반복됐다”며 “김용균의 죽음과 또 다른 수많은 김용균들의 죽음을 반복해서도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하고,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재판부에 되묻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김덕현 고 김용균 측 변호인.
■항소심 판단

항소심 재판부가 어떻게 이 사건을 바라봤는지 판결문 속 ‘당심의 판단’을 살펴봤습니다.

먼저 고 김용균 씨 죽음 원인입니다.

설비점검을 하다 사고가 났다는 점은 항소심 재판부가 맞다고 봤습니다.

하지만 탄 처리작업을 하다 사고가 발생했는지는 현장 운전원의 진술을 그대로 믿기 어렵다며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1심에 이어 항소심에서도 무죄가 나온 김병순 전 한국서부발전 대표이사에 대해 항소심 재판부는 아래와 같은 이유로 죄가 없다고 봤습니다.

재판부는 ‘김 전 사장은 서부발전과 산하 발전본부를 총괄하는 대표이사, 최고경영자며 안전보건관리계획은 각 발전본부의 안전보건관리책임자에게 위임돼 있다’는 점을 주요하게 봤습니다.

이 같은 이유로 김 전 사장이 개별적 설비에 대해서까지 점검하고, 예방조치를 이행할 구체적 직접적 주의의무를 가진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습니다.

또 2인 1조 근무배치를 위반한 점에 대해서도 해당 업무가 2인 1조가 필요할 정도의 위험 작업임을 인식해야 하는데 김 전 사장은 벨트 설비 현황이나 운전원들의 작업 방식의 위험성에 관해 구체적으로 인식할 수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고 봤습니다.

컨베이어에 방호조치, 그러니까 덮개 등 안전조치가 없었다는 점에 대해서도 알면서 방치했거나 작업을 지시했다고 보기 부족하다고 덧붙였습니다.

지난 9일 법원 전광판에 나오고 있는 김용균 씨 사망사고의 피고인 명부.
■이어진 죽음

태안화력 고 김용균 씨의 책임에 대한 감형과 무죄 선고가 있던 그 날, 발전노동자 1명이 또 목숨을 잃었습니다.

지난 8일 오후 1시쯤, 태안화력 인근의 한국중부발전이 운영하는 보령화력발전소에서 하청업체 소속 노동자 52살 이 모 씨가 하역기에서 낙탄을 치우다가 15 미터 아래로 떨어져 하루 만에 숨졌습니다.

하역기에 노동자들이 지나다닐 수 있도록 만들어놓은 철제 발판이 한쪽이 통째로 떨어져 나가면서 발판과 함께 추락한 겁니다.

발전소 노동자인 이태성 한국발전산업노동조합 간사는 “김용균 노동자가 숨진 지 4년이 지났지만, 또다시 하청업체 노동자가 숨졌습니다. 이게 발전소의 현실입니다. 수많은 안전장치와 수많은 노력을 발전사가 했다고 말하지만, 여전히 하청업체 노동자들은 현장에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한국중부발전이 운영하는 보령화력발전소는 상시노동자가 50인 이상으로 김용균 씨의 죽음을 계기로 만들어진 ‘중대해재처벌법’ 대상 사업장입니다.

앞서 김용균 씨의 죽음에 대해 한국서부발전 사장은 무죄가 나왔습니다.

하지만 이 모 씨의 죽음에 대해 한국중부발전 사장의 경우 김용균 씨 때는 없었던 ‘중대재해처벌법’이 적용됩니다.

고 김용균 씨 사고 후 현장을 살피고 있는 소방대원들.
■ 대법원 상고

유족들은 항소심 판결을 인정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검찰에게 대법원에 상고해 책임자들의 죄를 다시 한번 물어달라고 촉구했습니다.

항소심 선고가 끝난 뒤 법원 앞에서 기자회견에 나선 고 김용균 씨의 어머니는 다시 싸우겠다고 말했습니다.

김미숙 김용균재단 이사장.
“법원에 올 때 약간의 희망을 품고 왔습니다. 개정 전의 산업안전보건법을 적용해서 얼마나 그 효력을 발휘할지 너무 뻔한 사실이지만 그래도 조금은 나아질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재판이 노동자들을 죽이고 있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린 재판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이고 있는지 현장에 있을 때 정말 힘들었습니다. 사용자가 제대로 안전조치를 안 해서 죽음을 만들었다는 것을 각인시킬 때까지 끝까지 싸우겠습니다. 너무 억울하고 분통이 터지는 하루였습니다.”
-김미숙 김용균재단 이사장

특별조사위원회가 구성되고, 산업안전보건법이 개정되고, 중대재해처벌법이 제정되고, 해마다 국회 국정감사에서 산업안전의 이야기를 강하게 할 수 있도록 만들었던 고 김용균 씨의 사망사고에 대해 원청 대표에게는 무죄, 그리고 유죄였던 원청도 무죄가 선고됐습니다.

발전소에서는 또 하청업체노동자가 목숨을 또 잃었습니다.

태안화력 김용균 씨의 재판을 참석한 뒤 보령화력 동료의 사망 소식을 들은 발전소 노동자들도 ‘분노’를 참지 않았습니다.

발전소 노동자들은 우리들의 이야기를, 현장의 이야기를 법원에 제출해 끝까지 책임을 묻겠다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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