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채록 5·18] 투항하려 두손 들었지만…가슴 관통한 계엄군의 총알

입력 2023.02.15 (16:29) 수정 2023.02.15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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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기억은 시간이 지날수록 선명해집니다. 올해 환갑을 넘긴 김병용 씨에게도 그런 기억이 있습니다. 1980년 5월, 산에 매복해 있던 계엄군에 총을 맞았던 그 순간입니다. 투항하겠다며 두 손을 머리 위로 올렸지만, 계엄군의 총알은 김 씨의 가슴을 관통했습니다. 김병용 씨가 열여덟, 고등학생일 때의 일이었습니다.

그 뒤로 김 씨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평생을 총상 후유증에 시달렸고, 취업의 문턱마다 신원조회에 발목이 잡혔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공무원이 되겠다던 열여덟 김병용의 꿈은 그렇게 멀어져갔습니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위대에 합류해 활동했던 김병용 씨를 KBS광주「영상채록 5·18」취재진이 만났습니다.

■ 시위대 버스를 얻어 타고 고향 해남으로

광주에서 온 시민군들과 지역민들이 합세해 진도, 목포, 완도 등 인근 지역으로 떠나고 있다. (1980년 5월 21일 당시)광주에서 온 시민군들과 지역민들이 합세해 진도, 목포, 완도 등 인근 지역으로 떠나고 있다. (1980년 5월 21일 당시)

항쟁 나흘째, 5.18민주화운동은 전남 곳곳으로 퍼져나갔습니다. 나주와 화순, 목포를 넘어 땅끝 해남으로까지 이어졌습니다. 해남이 고향인 김병용 씨는 해남고등학교에 다니다 전남 강진 성전고등학교로 전학을 갔습니다. 1980년 5월, 부처님오신날을 앞두고 해남에 가려 하니 버스가 다니지 않았습니다. 5.18로 모조리 끊긴 겁니다.

강진과 해남의 경계를 넘어갈 때쯤 시위대를 만났습니다. 버스와 트럭 여러 대가 줄지어 마을로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시위대 차를 얻어타곤, 참혹한 현실을 전해 들으며 고향에 왔습니다.

"당시 공수부대원들이 일반 대학생들, 민간인들을 사살하고 총으로 쏘고 때리고 칼로 찢는다는 말을 들었죠. "

광주에서 온 시위 버스들이 해남 읍내를 돌며 광주 소식을 전하자 해남 군민광장이 순식간에 가득 찼다. 해남군민들은 버스와 트럭 등을 확보해 완도, 강진, 목포 등지로 항쟁의 불씨를 옮겼다. (1980년 5월 21일 당시)광주에서 온 시위 버스들이 해남 읍내를 돌며 광주 소식을 전하자 해남 군민광장이 순식간에 가득 찼다. 해남군민들은 버스와 트럭 등을 확보해 완도, 강진, 목포 등지로 항쟁의 불씨를 옮겼다. (1980년 5월 21일 당시)

해남에 도착한 시위대는 해남군청 앞 광장에서 광주의 상황을 알렸습니다. 순식간에 해남군민 수백 명이 우르르 모였습니다. 군중 속에 서 있던 김병용 씨의 가슴은 정의감으로 가득 찼습니다. 김 씨는 아무 죄가 없는 대학생들을 향해 총을 쏘고 폭력을 행사하는 군인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마을 주민들이 모두 100% 호응했죠. 부녀회에서는 자기 자식같은 사람들이 다치고 형제 부모가 다쳤기 때문에 아침저녁으로 김밥 싸주고, 밥해줬어요."

그렇게 시위대에 합류한 김병용 씨는 버스를 타고 전남 진도와 완도 등 곳곳을 누비며 진실을 알렸습니다. 가는 곳마다 환대받았다고 김 씨는 기억합니다. 마을 사람들은 시위대에게 잠자리를 내어주고, 먹을 것을 만들어주었습니다.

■ 투항했지만 무차별 총격


사고는 버스를 타고 해남으로 돌아오던 길에 났습니다.

“(해남) 마산면 상등리라는 마을이 있습니다. 약간 고갯길이 하나 있거든요. 거기를 넘어오는데 마을 사람들이 전부 손을 흔들면서 막 손을 이렇게 그래요. 그래서 알고 봤더니 정지하라는 소리였어요. 군인들이 저기 있다고. 산에 매복해 있다고. 주민들 지나쳐서 한 50m 가니까 막 콩 볶는 소리가 난 거야 팡팡팡”

급한 대로 몸을 낮춰 숨겼습니다. 옆에 있던 고향 친구 정상덕의 팔이 피범벅이었습니다. 겁이 났습니다. 군인들의 총격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한참 총격이 이어지다 '투항하고 나오라'는 말소리가 들렸습니다.

"우리가 투항하고 나간다. 총을 쏘지 마라고 몇 번을 소리 질렀어요. 그러니까 총을 안 쏘더라고요. 그래서 한 대여섯명이 차에서 뛰어내렸어요. 뛰어내렸다고 사격을 하더라고요. 그래서 타이어 밑으로 숨었습니다."

그날 그곳에서 한 명이 숨지고, 김병용 씨와 친구 정상덕 씨가 상처를 입었습니다. 당시 버스에는 10명 넘게 타고 있었습니다. 나머지 사람들은 어떻게 됐는지 기억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순식간이었습니다. 김 씨는 어디에 총상을 입었는지 모른 채 한참을 비포장 도로에 누워있었습니다.

"우리가 길에 누워있다 보니까 총을 또 맞을 것 같더라고. 그래서 보리밭으로 기어갔죠. 옆으로 굴러갔어요. 어디가 부상을 당했는지 아파서... 우리 친구는 막 피가 흘러요."

조금 기어가니 청보리밭이 나왔습니다. 김병용 씨와 정상덕 씨는 점점 의식이 희미해지는 걸 느꼈습니다. 이대로 죽는구나 생각했습니다. 한참 시간이 흐른 뒤, 군인들 몇몇이 개머리판으로 김 씨와 정 씨를 흔들어 깨웠습니다. 그렇게 군부대 의무실로 끌려갔습니다.

그날 새벽, 또 다른 곳에서 상처를 입은 두 명이 더 있었습니다. 한 명은 수류탄 파편상을 입었고, 또 다른 한 명도 총상을 입은 상태였습니다. 그렇게 오후가 되어서야 총상환자를 치료할 수 있는 병원으로 옮겨졌습니다.

■ 묻혀버린 총격의 진실...친구 정상덕의 죽음


하지만 총격의 진실은 묻혔습니다. 당시 매복해있던 군부대의 책임자는 '정당방위'라고 주장했습니다. 자위권 발동에 의해서 사격을 했다는 겁니다. 하지만 김 씨는 "총을 쏠 줄도 몰랐고, 총도 가지고 있지 않았는데 무슨 자위권이 있었겠느냐"고 항변합니다.

김병용 씨는 평생을 총상 후유증에 시달려 왔습니다. 날씨가 흐리기라도 하면 쑤시고, 아프고, 저렸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욱 고통스러웠던 건 친구 정상덕의 죽음이었습니다. 정 씨는 김 씨보다 부상 정도가 훨씬 심해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술에 의지하다 몇 해 지나지 않아 숨졌습니다.

"날씨가 흐리면 쑤시고 아파서 절리고 저도 그러거든요. 근데 그 친구(정상덕)는 사실 속 창자까지 여러 번 다 꿰매고 잘라냈기 때문에 그 후유증이 심했어요. 그 친구는 그 집안의 외동아들이었는데 어머니 생각만 하면 내가 그때 그 우리 상덕이 어머니 생각만 하면 지금도 눈물 나”

김 씨의 왼쪽 가슴엔 총상 흔적이 문신처럼 남아있습니다. 신군부 세력은 사죄 한마디 없이 책임을 회피하고 있지만, 투항하는 시민들을 향한 고의적이고 잔인한 진압에 있었음을 김병용 씨가 살아서 증언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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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상채록 5·18] 투항하려 두손 들었지만…가슴 관통한 계엄군의 총알
    • 입력 2023-02-15 16:29:30
    • 수정2023-02-15 16:29:50
    취재K

어떤 기억은 시간이 지날수록 선명해집니다. 올해 환갑을 넘긴 김병용 씨에게도 그런 기억이 있습니다. 1980년 5월, 산에 매복해 있던 계엄군에 총을 맞았던 그 순간입니다. 투항하겠다며 두 손을 머리 위로 올렸지만, 계엄군의 총알은 김 씨의 가슴을 관통했습니다. 김병용 씨가 열여덟, 고등학생일 때의 일이었습니다.

그 뒤로 김 씨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평생을 총상 후유증에 시달렸고, 취업의 문턱마다 신원조회에 발목이 잡혔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공무원이 되겠다던 열여덟 김병용의 꿈은 그렇게 멀어져갔습니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위대에 합류해 활동했던 김병용 씨를 KBS광주「영상채록 5·18」취재진이 만났습니다.

■ 시위대 버스를 얻어 타고 고향 해남으로

광주에서 온 시민군들과 지역민들이 합세해 진도, 목포, 완도 등 인근 지역으로 떠나고 있다. (1980년 5월 21일 당시)
항쟁 나흘째, 5.18민주화운동은 전남 곳곳으로 퍼져나갔습니다. 나주와 화순, 목포를 넘어 땅끝 해남으로까지 이어졌습니다. 해남이 고향인 김병용 씨는 해남고등학교에 다니다 전남 강진 성전고등학교로 전학을 갔습니다. 1980년 5월, 부처님오신날을 앞두고 해남에 가려 하니 버스가 다니지 않았습니다. 5.18로 모조리 끊긴 겁니다.

강진과 해남의 경계를 넘어갈 때쯤 시위대를 만났습니다. 버스와 트럭 여러 대가 줄지어 마을로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시위대 차를 얻어타곤, 참혹한 현실을 전해 들으며 고향에 왔습니다.

"당시 공수부대원들이 일반 대학생들, 민간인들을 사살하고 총으로 쏘고 때리고 칼로 찢는다는 말을 들었죠. "

광주에서 온 시위 버스들이 해남 읍내를 돌며 광주 소식을 전하자 해남 군민광장이 순식간에 가득 찼다. 해남군민들은 버스와 트럭 등을 확보해 완도, 강진, 목포 등지로 항쟁의 불씨를 옮겼다. (1980년 5월 21일 당시)
해남에 도착한 시위대는 해남군청 앞 광장에서 광주의 상황을 알렸습니다. 순식간에 해남군민 수백 명이 우르르 모였습니다. 군중 속에 서 있던 김병용 씨의 가슴은 정의감으로 가득 찼습니다. 김 씨는 아무 죄가 없는 대학생들을 향해 총을 쏘고 폭력을 행사하는 군인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마을 주민들이 모두 100% 호응했죠. 부녀회에서는 자기 자식같은 사람들이 다치고 형제 부모가 다쳤기 때문에 아침저녁으로 김밥 싸주고, 밥해줬어요."

그렇게 시위대에 합류한 김병용 씨는 버스를 타고 전남 진도와 완도 등 곳곳을 누비며 진실을 알렸습니다. 가는 곳마다 환대받았다고 김 씨는 기억합니다. 마을 사람들은 시위대에게 잠자리를 내어주고, 먹을 것을 만들어주었습니다.

■ 투항했지만 무차별 총격


사고는 버스를 타고 해남으로 돌아오던 길에 났습니다.

“(해남) 마산면 상등리라는 마을이 있습니다. 약간 고갯길이 하나 있거든요. 거기를 넘어오는데 마을 사람들이 전부 손을 흔들면서 막 손을 이렇게 그래요. 그래서 알고 봤더니 정지하라는 소리였어요. 군인들이 저기 있다고. 산에 매복해 있다고. 주민들 지나쳐서 한 50m 가니까 막 콩 볶는 소리가 난 거야 팡팡팡”

급한 대로 몸을 낮춰 숨겼습니다. 옆에 있던 고향 친구 정상덕의 팔이 피범벅이었습니다. 겁이 났습니다. 군인들의 총격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한참 총격이 이어지다 '투항하고 나오라'는 말소리가 들렸습니다.

"우리가 투항하고 나간다. 총을 쏘지 마라고 몇 번을 소리 질렀어요. 그러니까 총을 안 쏘더라고요. 그래서 한 대여섯명이 차에서 뛰어내렸어요. 뛰어내렸다고 사격을 하더라고요. 그래서 타이어 밑으로 숨었습니다."

그날 그곳에서 한 명이 숨지고, 김병용 씨와 친구 정상덕 씨가 상처를 입었습니다. 당시 버스에는 10명 넘게 타고 있었습니다. 나머지 사람들은 어떻게 됐는지 기억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순식간이었습니다. 김 씨는 어디에 총상을 입었는지 모른 채 한참을 비포장 도로에 누워있었습니다.

"우리가 길에 누워있다 보니까 총을 또 맞을 것 같더라고. 그래서 보리밭으로 기어갔죠. 옆으로 굴러갔어요. 어디가 부상을 당했는지 아파서... 우리 친구는 막 피가 흘러요."

조금 기어가니 청보리밭이 나왔습니다. 김병용 씨와 정상덕 씨는 점점 의식이 희미해지는 걸 느꼈습니다. 이대로 죽는구나 생각했습니다. 한참 시간이 흐른 뒤, 군인들 몇몇이 개머리판으로 김 씨와 정 씨를 흔들어 깨웠습니다. 그렇게 군부대 의무실로 끌려갔습니다.

그날 새벽, 또 다른 곳에서 상처를 입은 두 명이 더 있었습니다. 한 명은 수류탄 파편상을 입었고, 또 다른 한 명도 총상을 입은 상태였습니다. 그렇게 오후가 되어서야 총상환자를 치료할 수 있는 병원으로 옮겨졌습니다.

■ 묻혀버린 총격의 진실...친구 정상덕의 죽음


하지만 총격의 진실은 묻혔습니다. 당시 매복해있던 군부대의 책임자는 '정당방위'라고 주장했습니다. 자위권 발동에 의해서 사격을 했다는 겁니다. 하지만 김 씨는 "총을 쏠 줄도 몰랐고, 총도 가지고 있지 않았는데 무슨 자위권이 있었겠느냐"고 항변합니다.

김병용 씨는 평생을 총상 후유증에 시달려 왔습니다. 날씨가 흐리기라도 하면 쑤시고, 아프고, 저렸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욱 고통스러웠던 건 친구 정상덕의 죽음이었습니다. 정 씨는 김 씨보다 부상 정도가 훨씬 심해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술에 의지하다 몇 해 지나지 않아 숨졌습니다.

"날씨가 흐리면 쑤시고 아파서 절리고 저도 그러거든요. 근데 그 친구(정상덕)는 사실 속 창자까지 여러 번 다 꿰매고 잘라냈기 때문에 그 후유증이 심했어요. 그 친구는 그 집안의 외동아들이었는데 어머니 생각만 하면 내가 그때 그 우리 상덕이 어머니 생각만 하면 지금도 눈물 나”

김 씨의 왼쪽 가슴엔 총상 흔적이 문신처럼 남아있습니다. 신군부 세력은 사죄 한마디 없이 책임을 회피하고 있지만, 투항하는 시민들을 향한 고의적이고 잔인한 진압에 있었음을 김병용 씨가 살아서 증언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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