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정’의 특허 도둑질, 51년 만에 드러났다

입력 2023.02.16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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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수출에 지장을 주니 특허권을 포기해라"

해외 수출을 늘리겠다며, 정부가 강제로 개인의 특허권을 빼앗았습니다.

'그게 말이 돼?'라는 말이 절로 나올 일이 실제로 있었습니다.

때는 1972년. 주인공은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던 중앙정보부입니다. 현 국가정보원의 전신입니다.

■ 홀치기 염색, 당시엔 첨단기술

신경식 씨는 1960년대에 특수염색 기법인 '홀치기'를 발명했습니다.

염색하기 전 옷감의 일부를 실로 묶습니다. 실로 묶은 자리에는 염색 물감이 스며들지 못합니다. 반대로 실로 묶이지 않은 자리는 물감이 스며듭니다. 실을 풀면 묶은 모양에 따라 자연스레 무늬가 생깁니다.

지금으로선 새로울 게 없지만, 당시로써는 혁신적인 염색법이었습니다. 신 씨는 특허등록까지 마쳤습니다.

그런데 홀치기 기법이 일본에서 큰 인기를 끌자, 다른 업체들이 앞다워 기술을 베껴 쓰기 시작했습니다. 특허권자의 동의를 구하거나 사용료를 내는 절차는 당연히 생략됐습니다. 무단 침해였습니다.

신 씨는 업체 26곳을 상대로 특허권침해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수년간의 소송 끝에 1972년 5월 18일, 법원은 신 씨의 손을 들어줬습니다. 특허권을 지킬 수 있게 된 겁니다.

■ 가둬놓고 "특허권 포기" 강요


법원 판결이 난지 2주 뒤. 자신을 KBS 기자라고 사칭한 한 인물이 신 씨를 찾아왔습니다.

이 인물의 손에 이끌려 신 씨는 중앙정보부 남산 분실로 끌려갔습니다. 그곳에서 엿새 동안 강제 구금된 채 두들겨 맞았습니다.

도대체 왜 때리는 건지 영문도 몰랐습니다. 뒤늦게서야 자신이 서슬 퍼런 중앙정보부에 끌려왔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중정 수사관들은 놀랍게도 '특허권 포기''특허권 침해 소송 취하'를 요구했습니다.

국가 폭력의 공포 앞에서 결국 신 씨는 결국 '특허권을 포기한다'는 자필 각서를 쓰고 소송을 취하했습니다.

■ 특허 침해 기업 편든 정보기관

그리고 51년이 지난 오늘(16일). 진실화해위원회 조사 결과 사건의 자초지종이 드러났습니다.

신 씨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기 하루 전, 박정희 대통령과 상공부 장관 등이 참석한 '제5차 수출진행 확대회의'가 열렸습니다.

그 자리에는 신 씨의 '홀치기' 기술을 모방해 특허권 침해 소송을 당했던 26개 업체의 대표로 '홀치기 수출조합 이사장'도 참석했습니다.


그날의 회의록을 보면...

이사장은 "특허손해배상 판결 때문에, 업계가 마비되어 수출에 지장을 초래하고 있다"며 수습을 요청합니다.

그러자 상공부 장관은 "법원 판결을 구제할 수 있으니, 수출에 전념하라"고 말합니다.

박 대통령 역시 홀치기 특허권이 부당하다고 판단하며, 특허권 제도를 개선하겠다고 발언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그 회의가 진행된 다음 날, 신 씨는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특허권 포기를 강요당한 겁니다.

■ 특허 담당 공무원은 '직위해제'

당시 상공부 특허 담당 공무원 4명은 비위자로 몰려 직위 해제됐습니다.

중앙정보부장은 1972년 '홀치기 특허 심판관 비위 통보'라는 제목의 문건을 상공부 장관에게 전달한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신 씨는 특허권을 포기한 직후 허위공문서 작성죄로 기소됐고, 결국 징역 6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았습니다.

국가가 개인의 특허권을 강탈한 것도 모자라, 범죄자로까지 몰아붙인 겁니다.

진실화해위는 "국가가 건실한 발명가의 재산권을 강압적으로 탈취했다"며 "피해자에 대한 명예회복과 피해회복을 위한 실질적인 조처를 해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 삼성물산은 사과할까

신 씨의 특허기술을 무단으로 베껴다 제품을 판매하고, 정부에 수습을 요청했던 기업은 26곳입니다.

26개 기업에는 '삼성물산', 코오롱의 전신인 '삼경물산'처럼 지금까지 후신이 남아있는 기업들도 포함돼 있었습니다.

진실화해위는 26개 기업에 대해 "사익을 위해 국가 공권력 남용을 부추겨 피해자의 재산권을 침해했다"며 "해당 기업들과 법적 승계자들은 공식으로 사과해야 한다"고 권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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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정’의 특허 도둑질, 51년 만에 드러났다
    • 입력 2023-02-16 15:56:49
    취재K

"국가 수출에 지장을 주니 특허권을 포기해라"

해외 수출을 늘리겠다며, 정부가 강제로 개인의 특허권을 빼앗았습니다.

'그게 말이 돼?'라는 말이 절로 나올 일이 실제로 있었습니다.

때는 1972년. 주인공은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던 중앙정보부입니다. 현 국가정보원의 전신입니다.

■ 홀치기 염색, 당시엔 첨단기술

신경식 씨는 1960년대에 특수염색 기법인 '홀치기'를 발명했습니다.

염색하기 전 옷감의 일부를 실로 묶습니다. 실로 묶은 자리에는 염색 물감이 스며들지 못합니다. 반대로 실로 묶이지 않은 자리는 물감이 스며듭니다. 실을 풀면 묶은 모양에 따라 자연스레 무늬가 생깁니다.

지금으로선 새로울 게 없지만, 당시로써는 혁신적인 염색법이었습니다. 신 씨는 특허등록까지 마쳤습니다.

그런데 홀치기 기법이 일본에서 큰 인기를 끌자, 다른 업체들이 앞다워 기술을 베껴 쓰기 시작했습니다. 특허권자의 동의를 구하거나 사용료를 내는 절차는 당연히 생략됐습니다. 무단 침해였습니다.

신 씨는 업체 26곳을 상대로 특허권침해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수년간의 소송 끝에 1972년 5월 18일, 법원은 신 씨의 손을 들어줬습니다. 특허권을 지킬 수 있게 된 겁니다.

■ 가둬놓고 "특허권 포기" 강요


법원 판결이 난지 2주 뒤. 자신을 KBS 기자라고 사칭한 한 인물이 신 씨를 찾아왔습니다.

이 인물의 손에 이끌려 신 씨는 중앙정보부 남산 분실로 끌려갔습니다. 그곳에서 엿새 동안 강제 구금된 채 두들겨 맞았습니다.

도대체 왜 때리는 건지 영문도 몰랐습니다. 뒤늦게서야 자신이 서슬 퍼런 중앙정보부에 끌려왔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중정 수사관들은 놀랍게도 '특허권 포기''특허권 침해 소송 취하'를 요구했습니다.

국가 폭력의 공포 앞에서 결국 신 씨는 결국 '특허권을 포기한다'는 자필 각서를 쓰고 소송을 취하했습니다.

■ 특허 침해 기업 편든 정보기관

그리고 51년이 지난 오늘(16일). 진실화해위원회 조사 결과 사건의 자초지종이 드러났습니다.

신 씨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기 하루 전, 박정희 대통령과 상공부 장관 등이 참석한 '제5차 수출진행 확대회의'가 열렸습니다.

그 자리에는 신 씨의 '홀치기' 기술을 모방해 특허권 침해 소송을 당했던 26개 업체의 대표로 '홀치기 수출조합 이사장'도 참석했습니다.


그날의 회의록을 보면...

이사장은 "특허손해배상 판결 때문에, 업계가 마비되어 수출에 지장을 초래하고 있다"며 수습을 요청합니다.

그러자 상공부 장관은 "법원 판결을 구제할 수 있으니, 수출에 전념하라"고 말합니다.

박 대통령 역시 홀치기 특허권이 부당하다고 판단하며, 특허권 제도를 개선하겠다고 발언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그 회의가 진행된 다음 날, 신 씨는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특허권 포기를 강요당한 겁니다.

■ 특허 담당 공무원은 '직위해제'

당시 상공부 특허 담당 공무원 4명은 비위자로 몰려 직위 해제됐습니다.

중앙정보부장은 1972년 '홀치기 특허 심판관 비위 통보'라는 제목의 문건을 상공부 장관에게 전달한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신 씨는 특허권을 포기한 직후 허위공문서 작성죄로 기소됐고, 결국 징역 6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았습니다.

국가가 개인의 특허권을 강탈한 것도 모자라, 범죄자로까지 몰아붙인 겁니다.

진실화해위는 "국가가 건실한 발명가의 재산권을 강압적으로 탈취했다"며 "피해자에 대한 명예회복과 피해회복을 위한 실질적인 조처를 해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 삼성물산은 사과할까

신 씨의 특허기술을 무단으로 베껴다 제품을 판매하고, 정부에 수습을 요청했던 기업은 26곳입니다.

26개 기업에는 '삼성물산', 코오롱의 전신인 '삼경물산'처럼 지금까지 후신이 남아있는 기업들도 포함돼 있었습니다.

진실화해위는 26개 기업에 대해 "사익을 위해 국가 공권력 남용을 부추겨 피해자의 재산권을 침해했다"며 "해당 기업들과 법적 승계자들은 공식으로 사과해야 한다"고 권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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