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화]된 푸틴, 이 인플레를 완성하다

입력 2023.02.24 (07:00) 수정 2023.02.24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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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틴은 악당으로 태어나지 않았다

처음부터 악당은 아니었다. 집권 직후인 2000년, 푸틴은 NATO 가입을 언급했다. 2002년에는 나토-러시아 위원회도 만들었다. 친서방 노선을 표방했다. 2001년 푸틴의 독일 의회 연설은 상징적인 장면이다. “괴테, 쉴러, 칸트를 빌어 러시아는 유럽 우호 국가”라고 선언했다. 독일어로 “유럽의 항구적 평화가 러시아의 최우선 목표”라고 말했다. “확고하게, 그리고 최종적으로 냉전이 끝났다고 선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독일 의원들은 박수를 선사했다. 첫 줄 앞에 앉은 당시 슈뢰더 총리와 둘째 줄에 앉아있던 (젊은) 메르켈이 함께 박수를 친다. 지금은 상상도 하지 못할 장면이다. (스티븐 리 마이어스, 《뉴 차르》)

뉴욕타임스,  2017.3.12 [Putin and Merkel: A Rivalry of History, Distrust and Power]뉴욕타임스, 2017.3.12 [Putin and Merkel: A Rivalry of History, Distrust and Power]

■흑화의 이유① 부국강병

“지난 200~300년 사이에 처음으로 2류 내지 3류 국가로 전락할 처지에 놓여 있다. 이 난국을 벗어나기 위해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1999년 국정 과제를 담은 공약집(러시아 정부 웹사이트에 올라왔다.) 속 푸틴은 애국심으로 가득하다. 소련 붕괴 이후 나락으로 떨어진 러시아를 다시 1류 국가로 만들겠다는 포부다. 경제를 개혁했다. 운 좋게 국제유가도 올랐다. 상황이 도왔다.

실제로 1999년부터 2008년까지, 친서방 행보 속에 에너지 강국으로 거듭난 러시아의 GDP는 94% 성장했다. 인당 1인당 GDP는 갑절이 됐다. 이 때까지 푸틴의 애국심은 순조로웠다. (마이크 헤인스, 《다시 보는 러시아 현대사》)

문제는 '사람이 잘사는 것'보다 '부강한 국가'가 중요하다는 신념이었다. 푸틴은 “사회를 분열시키는 개인의 욕망보다 국가의 권위를 우선시하는 자발적인 사회적 협약이 필요하다”고 했다. 1류 국가가 되기 전까지는 단결해야 하니, 반대파 강경 진압 같은 권위주의 통치 체계가 정당하다고 믿었다. 체첸 반군을 잔혹하게 진압했다. 질서를 위해 소수를 희생시켰다. 애국심은 이렇게 때때로 독재의 시작이다.

상징적인 일은 2002년에 일어났다. 체첸 반군이 모스크바 오페라 극장에서 인질극을 벌였다. 푸틴은 700명을 인질로 잡은 반군 진압을 위해 펜타닐(마약성 진통제)계 수면 가스를 극장에 투입했다. 반군은 전원 사살했다. 그 과정에서 민간인도 무려 100명 이상 사망했다. 세계는 푸틴의 진압 방식을 일제히 비판했다.

2002년 10월 26일, 모스크바 극장 인질극 당시. 체첸 반군 전원과 인질 129명이 숨졌다.2002년 10월 26일, 모스크바 극장 인질극 당시. 체첸 반군 전원과 인질 129명이 숨졌다.

■흑화의 이유② 리비아

사실 '흑화' 전의 푸틴은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묵인했다.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은 그런 푸틴을 비난했다.) 9·11 이후 아프간 침공은 지원까지 했다. 친서방 협력에 러시아의 부국강병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랬던 푸틴이 리비아를 바라보며 흑화했다.

아랍의 봄을 거치며 리비아의 지도자 카다피는 하수구에서 체포되어 비참하게 숨졌다. 푸틴은 거대한 충격을 받았다. 푸틴과 카다피는 일정 부분 닮은 지도자였기 때문이다. 카다피도 친서방이었다. 2003년 핵 프로그램을 포기하고, 미국과 국교를 회복했다. 서방의 자본으로 수도 트리폴리를 개발했다. 산유국의 지위를 십분 활용해 유럽과 협력했다. 그런데 한순간 서방은 카다피를 버렸다. NATO군의 이름으로 반군을 지원해, 사실상 카다피를 축출했다.

푸틴의 입장에서 이제 서방은 믿을 수 없는 존재가 됐다. 협력하다가도 작은 국내 불씨만 생기면 돌아선다. 인권이나 민주주의를 빌미로 배신한다. 부국강병을 위한 '강력한 지도'를 민주주의가 아니라며 물어뜯는다. '나의 정치적 생존은 물론, 생물학적 생존과 서방은 대척점에 있다'는 생각했을 것이다.

'서방을 믿는 것은 바보짓이다.' (애덤 투즈, 《붕괴》)

부국강병의 소망과 서방에 대한 배신감 속에서 푸틴은 흑화했다.

2011년 10월 20일. 카다피 사망2011년 10월 20일. 카다피 사망

■ 우크라이나 침공 1년, 생각지 못한 인플레의 시대

흑화된 푸틴은 먼저 2014년 크림 반도를 병합했다. 그리고 8년 뒤, 우크라이나 본토로 진격했다. 그리고 1년, 전쟁은 인플레이션이 되었다.

오판과 오판이 합쳐져 전례 없는 인플레를 만들었다. 우선 전문가 대부분은 이 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도 전쟁이 시작된다면 빠르게 러시아가 승리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유럽이 40%에 달한 러시아산 에너지(천연가스) 의존도를 낮출 수 있다고 믿지도 않았다.

생각하지 못했던 그 모든 일이 일어났다. 전쟁이 일어나며 국제 에너지 가격이 들썩였고, 끝나지 않으면서 인플레는 로케트처럼 튀어 올랐고, 유럽이 러시아 에너지 보이콧을 실천에 옮기면서 에너지 가격은 그야말로 공포감을 줄 정도로 솟아올랐다.

세계적인 인플레 속에 가장 망신살이 뻗친 것은 연준이었다. 안 그래도 빗나간 물가 예측은 푸틴이 만든 전쟁을 겪으며 완전히 궤도를 이탈해버렸다.

"양적완화가 인플레이션를 부르지는 않을 거예요(2021년 1분기)"라고 했던 파월 의장은 "인플레가 급격한데 곧 지나갈 것이예요(2021년 2분기)"라고 했다가, "인플레를 잡기위해 확실한 한방이 필요해보여요(2022년 1분기)라고 했다가, "그래도 경기 침체까지는 가지 않을 거예요(2022년 2분기)"라고 했다가 결국 "우리가 인플레이션에 대해 얼마나 잘 모르고 있었는지 이제 알게됐어요(지난해 7월 1일)"고 했다.
(KBS, 2023.2.22 [특파원 리포트]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인플레이션”)

■ 푸틴 발 인플레 압력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유럽 천연가스 가격의 기준점이 되는 TTF 천연가스 선물가격이 2021년 12월 초 수준까지 떨어졌다.유럽 천연가스 가격의 기준점이 되는 TTF 천연가스 선물가격이 2021년 12월 초 수준까지 떨어졌다.

유럽 천연가스 가격은 과거로 돌아간 듯 보인다. 그러나 국제 에너지 가격이 한국에 미치는 압력은 여전하다. 2월에도 20일까지 20일간의 무역수지는 60억 달러 적자다. 이 적자는 딱 두 가지 요인으로 설명할 수 있다. 반도체 수출 침체(전년동기 대비 43%, 48억 달러 감소)와 액화천연가스 수입 급증(전년동기 대비 81%, 18억 달러 증가)이다.

그러니까 푸틴이 초래한 인플레이션이 수출과 수입 양면에서 대한민국을 압박하고 있다. 인플레이션 때문에 전 세계가 긴축에 들어가면서 수출로 먹고사는 대한민국의 수출이 최대 위기에 봉착했다. 유럽의 천연가스 선물 가격은 1년 전으로 돌아갔지만, 우리가 실제로 들여오는 액화천연가스 LNG 가격은 여전히 높다. 그래서 한국의 무역수지 적자는 오늘도 눈덩이처럼 불어가고 있다.

이제는 아무도 이 인플레이션의 경로를 말하지 않는다. 중앙은행장들은 앞으로 나올 통계수치를 보고 그에 맞춰 다음 금리 정책을 결정하겠다고 말한다. 학자들은 물가 경로, 나아가 세계 경제 경로의 불확실성이 너무 크다고 말한다.

그렇다. 불확실성의 시대다. 모두 흑화한 푸틴이 만들어낸 세계다.


악마로 만든다고 푸틴이 사라지진 않는다

“그러나 푸틴을 악마로 만드는 것은 전략이 아니다. 그것은 전략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알리바이일 뿐이다.”

미국 외교정책의 거인, 헨리 키신저의 말이다. (후베르트 자이펠,《푸틴》) 중요한 것은 현실이라는 의미다. 악마로 만든다고 푸틴이 사라지지 않는다. 푸틴이 지배하는 러시아도 마찬가지다.

전쟁 1년을 맞아 이코노미스트지는 최신호에서 러시아에 '우크라이나 침공이 없었을 때'와는 다른 미래가 찾아왔다고 썼다. 러시아에서 전쟁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사라졌다. 공론장에서 전쟁 반대는 없고, '이 정도면 충분히 잔인한가, 그렇지 않은가'만 남았다고 했다. 교육받은 러시아인 50만 명이 징집을 피해, 억압을 피해 러시아를 떠났다. 군대는 100만 명에서 150만 명으로 확대된다. 의회(두마)에서 군인의 비율을 높인다. 문화, 교육의 전시 동원체제가 펼쳐졌다.

그러면서 반체제 운동가 키릴 로고프를 인용해 "지금 푸틴이 이 전쟁으로 얻으려는 것은 서방으로부터의 확고한 단절입니다. 그렇게 러시아를 영구 투쟁과 동원 국가로 만들어 통제력을 확보하는 것입니다."라고 전했다. 스탈린 이후 전례 없던 사회가 러시아에 펼쳐지고 있다. 이코노미스트는 이 사실이 전쟁 경로와 무관하고, 그래서 지속될 것으로 본다.

훗날의 역사는 2022년에 시작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2023년에도 세계를 괴롭혔다고 기록할 것이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돌아온 권위주의 국가들'이 민주주의 국가들의 정치와 경제를 고통스럽게 했다고 볼 것이다.

■ 푸틴, 시진핑… 글로벌 경제 질서에 돌아온 권위주의

세계의 지각은 갈라지고 있다. 거대한 변동 때문이다. 푸틴은 그 한 조각이다. 근본적으로는 중국의 부상이 가장 큰 요소다. 사람들은 이 변화를 '권위주의의 귀환'이라고 부른다.

지구촌은 더는 민주화되고 있지 않다. 2022년, 이코노미스트지는 세계가 덜 민주적인 방향으로 바뀌고 있다고 했다. 또 민주주의 국가보다 그렇지 않은 국가가 더 많다고 했다. 세계정치 경제가 다수결이라면 권위주의 세력이 이긴다는 얘기다. 세계에서 가장 민주적인 국가 가운데 하나에 살고 있기에 우리가 잊고 있을 뿐이다.


중국은 막강한 경제력으로, 러시아는 자원을 무기로 중요한 플레이어로 부상했다. 친환경 신재생 에너지 전환 과정에서 광물 등 자원은 한층 더 중요한 전략 자산으로 재평가되고 있다. 전기차도, 수소차도, 풍력 발전도, 태양광도, 모두 에너지 저장 수단이 필요하고 이 모든 게 자원의 함수가 되었다. 한물간 줄 알았던 자원 확보 전쟁이 시작됐다. 주도권 전쟁도 시작됐다. 미국의 IRA는 그 싸움의 일환이다. 천연가스와 리튬, 코발트, 알루미늄, 니켈... 거의 대부분의 광물이 아프리카나 남아메리카의 권위주의 국가나 혼합체제 국가에 묻혀있다. 러시아는 그 중의 별에 해당하는 나라다.

향후 글로벌 경제 지각 변동은 이 권위주의 블록을 상수로 한 채 벌어질 것이다. 푸틴과 시진핑은 악마가 아닌 현실이다.

■ 전쟁 1년, 그래서 인플레는 어떻게 될 것인가

여전히 전쟁 경로와 인플레의 관계는 밀접하다. 유럽이 군비 증강의 길로 들어서고 있다. 러시아 없는 세계에서 친환경 전환을 하려고 한다. 아무런 불확실성이 추가로 발생하지 않아도 최소한 몇 년간 천연가스는 지정학적 위험 아래 있을 것이다. 푸틴은 앞으로도 인플레에 불확실성이 될 것이다.

인플레이션은 저절로 푹 꺼질 수도 있다. 그러나 동시에 치솟을 수도 있다. 우리는 모른다. 그저 앞으로 일어날 일을 보고 판단해야 하는 상황이니까.

그리고 지금까지의 인플레를 결정해왔고, 최대 불확실성으로 작용해 온 푸틴이 아직은 건재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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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흑화]된 푸틴, 이 인플레를 완성하다
    • 입력 2023-02-24 07:00:46
    • 수정2023-02-24 07:0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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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틴은 악당으로 태어나지 않았다

처음부터 악당은 아니었다. 집권 직후인 2000년, 푸틴은 NATO 가입을 언급했다. 2002년에는 나토-러시아 위원회도 만들었다. 친서방 노선을 표방했다. 2001년 푸틴의 독일 의회 연설은 상징적인 장면이다. “괴테, 쉴러, 칸트를 빌어 러시아는 유럽 우호 국가”라고 선언했다. 독일어로 “유럽의 항구적 평화가 러시아의 최우선 목표”라고 말했다. “확고하게, 그리고 최종적으로 냉전이 끝났다고 선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독일 의원들은 박수를 선사했다. 첫 줄 앞에 앉은 당시 슈뢰더 총리와 둘째 줄에 앉아있던 (젊은) 메르켈이 함께 박수를 친다. 지금은 상상도 하지 못할 장면이다. (스티븐 리 마이어스, 《뉴 차르》)

뉴욕타임스,  2017.3.12 [Putin and Merkel: A Rivalry of History, Distrust and Power]
■흑화의 이유① 부국강병

“지난 200~300년 사이에 처음으로 2류 내지 3류 국가로 전락할 처지에 놓여 있다. 이 난국을 벗어나기 위해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1999년 국정 과제를 담은 공약집(러시아 정부 웹사이트에 올라왔다.) 속 푸틴은 애국심으로 가득하다. 소련 붕괴 이후 나락으로 떨어진 러시아를 다시 1류 국가로 만들겠다는 포부다. 경제를 개혁했다. 운 좋게 국제유가도 올랐다. 상황이 도왔다.

실제로 1999년부터 2008년까지, 친서방 행보 속에 에너지 강국으로 거듭난 러시아의 GDP는 94% 성장했다. 인당 1인당 GDP는 갑절이 됐다. 이 때까지 푸틴의 애국심은 순조로웠다. (마이크 헤인스, 《다시 보는 러시아 현대사》)

문제는 '사람이 잘사는 것'보다 '부강한 국가'가 중요하다는 신념이었다. 푸틴은 “사회를 분열시키는 개인의 욕망보다 국가의 권위를 우선시하는 자발적인 사회적 협약이 필요하다”고 했다. 1류 국가가 되기 전까지는 단결해야 하니, 반대파 강경 진압 같은 권위주의 통치 체계가 정당하다고 믿었다. 체첸 반군을 잔혹하게 진압했다. 질서를 위해 소수를 희생시켰다. 애국심은 이렇게 때때로 독재의 시작이다.

상징적인 일은 2002년에 일어났다. 체첸 반군이 모스크바 오페라 극장에서 인질극을 벌였다. 푸틴은 700명을 인질로 잡은 반군 진압을 위해 펜타닐(마약성 진통제)계 수면 가스를 극장에 투입했다. 반군은 전원 사살했다. 그 과정에서 민간인도 무려 100명 이상 사망했다. 세계는 푸틴의 진압 방식을 일제히 비판했다.

2002년 10월 26일, 모스크바 극장 인질극 당시. 체첸 반군 전원과 인질 129명이 숨졌다.
■흑화의 이유② 리비아

사실 '흑화' 전의 푸틴은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묵인했다.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은 그런 푸틴을 비난했다.) 9·11 이후 아프간 침공은 지원까지 했다. 친서방 협력에 러시아의 부국강병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랬던 푸틴이 리비아를 바라보며 흑화했다.

아랍의 봄을 거치며 리비아의 지도자 카다피는 하수구에서 체포되어 비참하게 숨졌다. 푸틴은 거대한 충격을 받았다. 푸틴과 카다피는 일정 부분 닮은 지도자였기 때문이다. 카다피도 친서방이었다. 2003년 핵 프로그램을 포기하고, 미국과 국교를 회복했다. 서방의 자본으로 수도 트리폴리를 개발했다. 산유국의 지위를 십분 활용해 유럽과 협력했다. 그런데 한순간 서방은 카다피를 버렸다. NATO군의 이름으로 반군을 지원해, 사실상 카다피를 축출했다.

푸틴의 입장에서 이제 서방은 믿을 수 없는 존재가 됐다. 협력하다가도 작은 국내 불씨만 생기면 돌아선다. 인권이나 민주주의를 빌미로 배신한다. 부국강병을 위한 '강력한 지도'를 민주주의가 아니라며 물어뜯는다. '나의 정치적 생존은 물론, 생물학적 생존과 서방은 대척점에 있다'는 생각했을 것이다.

'서방을 믿는 것은 바보짓이다.' (애덤 투즈, 《붕괴》)

부국강병의 소망과 서방에 대한 배신감 속에서 푸틴은 흑화했다.

2011년 10월 20일. 카다피 사망
■ 우크라이나 침공 1년, 생각지 못한 인플레의 시대

흑화된 푸틴은 먼저 2014년 크림 반도를 병합했다. 그리고 8년 뒤, 우크라이나 본토로 진격했다. 그리고 1년, 전쟁은 인플레이션이 되었다.

오판과 오판이 합쳐져 전례 없는 인플레를 만들었다. 우선 전문가 대부분은 이 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도 전쟁이 시작된다면 빠르게 러시아가 승리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유럽이 40%에 달한 러시아산 에너지(천연가스) 의존도를 낮출 수 있다고 믿지도 않았다.

생각하지 못했던 그 모든 일이 일어났다. 전쟁이 일어나며 국제 에너지 가격이 들썩였고, 끝나지 않으면서 인플레는 로케트처럼 튀어 올랐고, 유럽이 러시아 에너지 보이콧을 실천에 옮기면서 에너지 가격은 그야말로 공포감을 줄 정도로 솟아올랐다.

세계적인 인플레 속에 가장 망신살이 뻗친 것은 연준이었다. 안 그래도 빗나간 물가 예측은 푸틴이 만든 전쟁을 겪으며 완전히 궤도를 이탈해버렸다.

"양적완화가 인플레이션를 부르지는 않을 거예요(2021년 1분기)"라고 했던 파월 의장은 "인플레가 급격한데 곧 지나갈 것이예요(2021년 2분기)"라고 했다가, "인플레를 잡기위해 확실한 한방이 필요해보여요(2022년 1분기)라고 했다가, "그래도 경기 침체까지는 가지 않을 거예요(2022년 2분기)"라고 했다가 결국 "우리가 인플레이션에 대해 얼마나 잘 모르고 있었는지 이제 알게됐어요(지난해 7월 1일)"고 했다.
(KBS, 2023.2.22 [특파원 리포트]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인플레이션”)

■ 푸틴 발 인플레 압력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유럽 천연가스 가격의 기준점이 되는 TTF 천연가스 선물가격이 2021년 12월 초 수준까지 떨어졌다.
유럽 천연가스 가격은 과거로 돌아간 듯 보인다. 그러나 국제 에너지 가격이 한국에 미치는 압력은 여전하다. 2월에도 20일까지 20일간의 무역수지는 60억 달러 적자다. 이 적자는 딱 두 가지 요인으로 설명할 수 있다. 반도체 수출 침체(전년동기 대비 43%, 48억 달러 감소)와 액화천연가스 수입 급증(전년동기 대비 81%, 18억 달러 증가)이다.

그러니까 푸틴이 초래한 인플레이션이 수출과 수입 양면에서 대한민국을 압박하고 있다. 인플레이션 때문에 전 세계가 긴축에 들어가면서 수출로 먹고사는 대한민국의 수출이 최대 위기에 봉착했다. 유럽의 천연가스 선물 가격은 1년 전으로 돌아갔지만, 우리가 실제로 들여오는 액화천연가스 LNG 가격은 여전히 높다. 그래서 한국의 무역수지 적자는 오늘도 눈덩이처럼 불어가고 있다.

이제는 아무도 이 인플레이션의 경로를 말하지 않는다. 중앙은행장들은 앞으로 나올 통계수치를 보고 그에 맞춰 다음 금리 정책을 결정하겠다고 말한다. 학자들은 물가 경로, 나아가 세계 경제 경로의 불확실성이 너무 크다고 말한다.

그렇다. 불확실성의 시대다. 모두 흑화한 푸틴이 만들어낸 세계다.


악마로 만든다고 푸틴이 사라지진 않는다

“그러나 푸틴을 악마로 만드는 것은 전략이 아니다. 그것은 전략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알리바이일 뿐이다.”

미국 외교정책의 거인, 헨리 키신저의 말이다. (후베르트 자이펠,《푸틴》) 중요한 것은 현실이라는 의미다. 악마로 만든다고 푸틴이 사라지지 않는다. 푸틴이 지배하는 러시아도 마찬가지다.

전쟁 1년을 맞아 이코노미스트지는 최신호에서 러시아에 '우크라이나 침공이 없었을 때'와는 다른 미래가 찾아왔다고 썼다. 러시아에서 전쟁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사라졌다. 공론장에서 전쟁 반대는 없고, '이 정도면 충분히 잔인한가, 그렇지 않은가'만 남았다고 했다. 교육받은 러시아인 50만 명이 징집을 피해, 억압을 피해 러시아를 떠났다. 군대는 100만 명에서 150만 명으로 확대된다. 의회(두마)에서 군인의 비율을 높인다. 문화, 교육의 전시 동원체제가 펼쳐졌다.

그러면서 반체제 운동가 키릴 로고프를 인용해 "지금 푸틴이 이 전쟁으로 얻으려는 것은 서방으로부터의 확고한 단절입니다. 그렇게 러시아를 영구 투쟁과 동원 국가로 만들어 통제력을 확보하는 것입니다."라고 전했다. 스탈린 이후 전례 없던 사회가 러시아에 펼쳐지고 있다. 이코노미스트는 이 사실이 전쟁 경로와 무관하고, 그래서 지속될 것으로 본다.

훗날의 역사는 2022년에 시작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2023년에도 세계를 괴롭혔다고 기록할 것이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돌아온 권위주의 국가들'이 민주주의 국가들의 정치와 경제를 고통스럽게 했다고 볼 것이다.

■ 푸틴, 시진핑… 글로벌 경제 질서에 돌아온 권위주의

세계의 지각은 갈라지고 있다. 거대한 변동 때문이다. 푸틴은 그 한 조각이다. 근본적으로는 중국의 부상이 가장 큰 요소다. 사람들은 이 변화를 '권위주의의 귀환'이라고 부른다.

지구촌은 더는 민주화되고 있지 않다. 2022년, 이코노미스트지는 세계가 덜 민주적인 방향으로 바뀌고 있다고 했다. 또 민주주의 국가보다 그렇지 않은 국가가 더 많다고 했다. 세계정치 경제가 다수결이라면 권위주의 세력이 이긴다는 얘기다. 세계에서 가장 민주적인 국가 가운데 하나에 살고 있기에 우리가 잊고 있을 뿐이다.


중국은 막강한 경제력으로, 러시아는 자원을 무기로 중요한 플레이어로 부상했다. 친환경 신재생 에너지 전환 과정에서 광물 등 자원은 한층 더 중요한 전략 자산으로 재평가되고 있다. 전기차도, 수소차도, 풍력 발전도, 태양광도, 모두 에너지 저장 수단이 필요하고 이 모든 게 자원의 함수가 되었다. 한물간 줄 알았던 자원 확보 전쟁이 시작됐다. 주도권 전쟁도 시작됐다. 미국의 IRA는 그 싸움의 일환이다. 천연가스와 리튬, 코발트, 알루미늄, 니켈... 거의 대부분의 광물이 아프리카나 남아메리카의 권위주의 국가나 혼합체제 국가에 묻혀있다. 러시아는 그 중의 별에 해당하는 나라다.

향후 글로벌 경제 지각 변동은 이 권위주의 블록을 상수로 한 채 벌어질 것이다. 푸틴과 시진핑은 악마가 아닌 현실이다.

■ 전쟁 1년, 그래서 인플레는 어떻게 될 것인가

여전히 전쟁 경로와 인플레의 관계는 밀접하다. 유럽이 군비 증강의 길로 들어서고 있다. 러시아 없는 세계에서 친환경 전환을 하려고 한다. 아무런 불확실성이 추가로 발생하지 않아도 최소한 몇 년간 천연가스는 지정학적 위험 아래 있을 것이다. 푸틴은 앞으로도 인플레에 불확실성이 될 것이다.

인플레이션은 저절로 푹 꺼질 수도 있다. 그러나 동시에 치솟을 수도 있다. 우리는 모른다. 그저 앞으로 일어날 일을 보고 판단해야 하는 상황이니까.

그리고 지금까지의 인플레를 결정해왔고, 최대 불확실성으로 작용해 온 푸틴이 아직은 건재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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