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장에 향긋한 내음이 솔솔…신미경 작가의 ‘비누 예술’

입력 2023.02.28 (10:23) 수정 2023.02.28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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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반응하는 건 후각입니다. 아로마 향기처럼 전시장을 감싸도는 향긋한 내음이 코끝을 간지럽히죠. 사진에 보이는 작품의 재료가 '비누'이기 때문입니다. 비누 작업으로 유명한 신미경 작가의 작품은 향기를 내뿜습니다. 재료의 특성이 주는 또 다른 효과라고 할까요. 작품에서 향기가 난다니, 그것 자체로 꽤 매력적입니다.

서울 강남구 신사동에 있는 전시공간 스페이스 씨가 개관 20주년을 맞아 아주 특별한 전시를 마련했습니다. 이 건물의 지하 1층과 2층에는 코리아나미술관, 지상 5층과 6층에는 코리아나 화장박물관이 있는데요. 미술관과 박물관, 지하와 지상의 공간을 모두 활용해서 신미경 작가의 작품 120여 점을 선보이는 자리입니다.

신미경, 라지 페인팅 시리즈, 2023신미경, 라지 페인팅 시리즈, 2023

이번 전시에서 처음 선보이는 신미경 작가의 <라지 페인팅> 연작 가운데 하나입니다. 사진에 보이는 얼룩 같은 흔적들은 물감이 아니라 여러 색상의 비누가 어울려 빚어낸 형상입니다. 이 한 작품에 들어간 비누만 무려 0.1톤에 이른다고 합니다. 비누를 녹여서 캔버스 틀에 부으면 서로 다른 색의 비누 용액이 서로 섞이고 엉키고 스미면서 이렇게 독특한 무늬를 만들어냅니다. 노동과 시간이 응축된 작품이죠.

지하 1층 첫 번째 전시장에는 자그마치 무게가 200kg이나 되는 비누 회화 신작 5점이 걸렸습니다. 사실 비누라는 재료의 특성상 작가가 완벽하게 계산하고 의도한 색채와 무늬가 나오지는 않는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신미경 작가는 "절반만 개입한다."는 생각으로 작업에 임한다고 했습니다. 나머지는 우연한 자연스러움에 내맡긴다는 거죠. 사진으로 자세히 보여드리긴 어렵지만,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비누라는 재료가 만들어낸 특유의 질감이 도드라집니다. 물론 향기는 덤이고요.

신미경, 풍화 프로젝트: 레진, 2023신미경, 풍화 프로젝트: 레진, 2023

재료의 특성상 신미경 작가의 작업은 입체 작품으로 더 유명하죠. 첫 번째 전시장에서 볼 수 있는 건 역시 이번에 새롭게 선보이는 <풍화 프로젝트>인데요. 사실 비누로 만든 조형물은 시간이 지나면 필연적으로 변형될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로 작가도 그런 변화까지 염두에 두고 작품을 야외에 설치해 비를 맞게 하거나 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풍화'라는 제목에는 바람에 쓸리고 깎여 모습이 바뀐다는 의미가 담겨 있죠. 하지만 제목과는 반대로 이번에는 비누 대신 합성수지 소재의 하나인 레진을 이용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하면 비누로 만들었을 때처럼 변형이 생기지 않죠.

지하 2층 전시장으로 내려가면 완전히 다른 세상이 눈 앞에 펼쳐집니다. 유럽의 유명 미술관에 와 있는 기분이랄까. 이 전시공간의 개념은 이렇습니다. 실제로 코리아나미술관이 소장한 서양의 유명 회화와 조각 사이사이로 신미경 작가의 작품을 모자이크하듯 군데군데 배치했습니다. 미술관의 소장품과 작가의 작품을 나란히 전시한 거죠.

지하 2층 전시장 모습지하 2층 전시장 모습

이 특별한 작품 배치가 주는 묘한 느낌이 있습니다. 프랑스 로코코 미술을 대표하는 화가 프랑수아 부셰의 <버터 파는 소녀>(18세기)와 신미경 작가의 <페인팅 시리즈>가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모습을 볼 수 있죠. 저 유명한 초현실주의 작가 살바도르 달리의 조각 <스페이스 비너스>(1984)와 비누 회화의 만남은 또 어떻고요.

오른쪽 위가 프랑수아 부셰의〈버터 파는 소녀〉, 왼쪽이 신미경의 작품.오른쪽 위가 프랑수아 부셰의〈버터 파는 소녀〉, 왼쪽이 신미경의 작품.

게다가 신미경 작가의 지난 페인팅 시리즈 작품은 시간을 이기지 못하고 굳어서 갈라진 곳이 많습니다. 작가도 처음부터 의도했던 것은 아니라고 해요. 오래 가지고 있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이곳저곳이 갈라져 금이 생겼다고 합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그 갈라진 흔적들이 마치 오래된 유화 물감이 갈라진 것 같은 느낌을 줍니다. 그래서 옛 그림과 신미경 작가의 작품은 전혀 불화를 일으키지 않습니다.

가운데가 살바도르 달리의 〈스페이스 비너스〉(1984), 좌우로 신미경 작가의 작품.가운데가 살바도르 달리의 〈스페이스 비너스〉(1984), 좌우로 신미경 작가의 작품.

하지만 이 전시실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코리아나미술관 소장품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했다는 신미경 작가의 신작 <낭만주의 조각 시리즈>입니다. 전시실 중앙에 서 있는 커다란 조각은 작가의 <번역 시리즈> 초창기 작업인데요.

신미경, 트렌스레이션-그리스 조각상, 1998신미경, 트렌스레이션-그리스 조각상, 1998

그중에서 1988년 작 <트랜스레이션-그리스 조각상>이라는 제목의 작품은 작가가 런던에서 대학원을 졸업한 뒤 헤이워드갤러리 기획전에서 처음 선보인 작품이자, 2004년 영국박물관에서 작가가 퍼포먼스를 선보였을 때도 활용한 작품입니다. 비누로 만들었다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작품 자체가 '유물화'된 모습을 보여주죠.

발길을 돌려 지상 5층과 6층에 있는 코리아나 화장박물관으로 올라가면 또 다른 공간이 펼쳐집니다. 박물관의 전시품 일부를 잠시 빼고, 유물과 작품을 한 공간에서 보여줍니다. 5층 전시장에서 눈에 띄는 건 작가가 <화석화된 시간 시리즈>라 이름 붙인 그릇들입니다. 역시 비누를 이용해서 만든 작품들인데, 질감은 유리의 그것을 떠올리게 합니다. 게다가 속을 일일이 손으로 다 파냈다고 하더군요.

신미경, 고스트 시리즈, 2007~2013신미경, 고스트 시리즈, 2007~2013

그 옆으로 진열장 안에 마치 옛 도자기처럼 전시된 작품들도 실은 신미경 작가의 작품들이었습니다. 박물관의 소장품과 나란히 있어서 아무 설명 없이 보면 옛 유물인지 요즘 작품인지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죠. 그리고 마지막으로 보게 될 6층 전시장에 다다르면, 신미경 작가를 유명하게 해준 아주 특별한 작품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신미경, 화장실 프로젝트, 2022~2023신미경, 화장실 프로젝트, 2022~2023

마치 외계인 같은 머리를 한 조각상들이 보이죠. 원래는 저런 모습이 아니라 비너스 상처럼 긴 머리숱이 있었는데, 작가가 일부러 비누로 만든 이 작품들을 한 백화점 화장실에 설치해놓고 사람들에게 직접 사용하게 했답니다. 그래서 사람의 손이 닿은 머리 부분이 닳아서 마치 외계에서 온 여인 같은 모습이 된 거죠. 실제로 사용됐던 것들을 '작품'으로 전시한다. 작가가 무엇을 보여주려 했는지 알 것 같습니다.

실제로 전시장 각 층에 있는 화장실에 가시면 이런 조각상이 놓여 있는 걸 볼 수 있으실 텐데요. 작품이라고 해서 부담을 느낄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그것조차도 작품의 일부니까요.

■전시 정보
제목: 시간/물질: 생동하는 뮤지엄
기간: 2023년 3월 2일(목)~6월 10일(토)
장소: 코리아나미술관 & 코리아나 화장박물관
작품: 회화, 조각 등 120여 점

신미경, 낭만주의 조각 시리즈, 2023신미경, 낭만주의 조각 시리즈,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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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시장에 향긋한 내음이 솔솔…신미경 작가의 ‘비누 예술’
    • 입력 2023-02-28 10:23:00
    • 수정2023-02-28 16:07:11
    취재K

전시장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반응하는 건 후각입니다. 아로마 향기처럼 전시장을 감싸도는 향긋한 내음이 코끝을 간지럽히죠. 사진에 보이는 작품의 재료가 '비누'이기 때문입니다. 비누 작업으로 유명한 신미경 작가의 작품은 향기를 내뿜습니다. 재료의 특성이 주는 또 다른 효과라고 할까요. 작품에서 향기가 난다니, 그것 자체로 꽤 매력적입니다.

서울 강남구 신사동에 있는 전시공간 스페이스 씨가 개관 20주년을 맞아 아주 특별한 전시를 마련했습니다. 이 건물의 지하 1층과 2층에는 코리아나미술관, 지상 5층과 6층에는 코리아나 화장박물관이 있는데요. 미술관과 박물관, 지하와 지상의 공간을 모두 활용해서 신미경 작가의 작품 120여 점을 선보이는 자리입니다.

신미경, 라지 페인팅 시리즈, 2023
이번 전시에서 처음 선보이는 신미경 작가의 <라지 페인팅> 연작 가운데 하나입니다. 사진에 보이는 얼룩 같은 흔적들은 물감이 아니라 여러 색상의 비누가 어울려 빚어낸 형상입니다. 이 한 작품에 들어간 비누만 무려 0.1톤에 이른다고 합니다. 비누를 녹여서 캔버스 틀에 부으면 서로 다른 색의 비누 용액이 서로 섞이고 엉키고 스미면서 이렇게 독특한 무늬를 만들어냅니다. 노동과 시간이 응축된 작품이죠.

지하 1층 첫 번째 전시장에는 자그마치 무게가 200kg이나 되는 비누 회화 신작 5점이 걸렸습니다. 사실 비누라는 재료의 특성상 작가가 완벽하게 계산하고 의도한 색채와 무늬가 나오지는 않는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신미경 작가는 "절반만 개입한다."는 생각으로 작업에 임한다고 했습니다. 나머지는 우연한 자연스러움에 내맡긴다는 거죠. 사진으로 자세히 보여드리긴 어렵지만,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비누라는 재료가 만들어낸 특유의 질감이 도드라집니다. 물론 향기는 덤이고요.

신미경, 풍화 프로젝트: 레진, 2023
재료의 특성상 신미경 작가의 작업은 입체 작품으로 더 유명하죠. 첫 번째 전시장에서 볼 수 있는 건 역시 이번에 새롭게 선보이는 <풍화 프로젝트>인데요. 사실 비누로 만든 조형물은 시간이 지나면 필연적으로 변형될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로 작가도 그런 변화까지 염두에 두고 작품을 야외에 설치해 비를 맞게 하거나 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풍화'라는 제목에는 바람에 쓸리고 깎여 모습이 바뀐다는 의미가 담겨 있죠. 하지만 제목과는 반대로 이번에는 비누 대신 합성수지 소재의 하나인 레진을 이용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하면 비누로 만들었을 때처럼 변형이 생기지 않죠.

지하 2층 전시장으로 내려가면 완전히 다른 세상이 눈 앞에 펼쳐집니다. 유럽의 유명 미술관에 와 있는 기분이랄까. 이 전시공간의 개념은 이렇습니다. 실제로 코리아나미술관이 소장한 서양의 유명 회화와 조각 사이사이로 신미경 작가의 작품을 모자이크하듯 군데군데 배치했습니다. 미술관의 소장품과 작가의 작품을 나란히 전시한 거죠.

지하 2층 전시장 모습
이 특별한 작품 배치가 주는 묘한 느낌이 있습니다. 프랑스 로코코 미술을 대표하는 화가 프랑수아 부셰의 <버터 파는 소녀>(18세기)와 신미경 작가의 <페인팅 시리즈>가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모습을 볼 수 있죠. 저 유명한 초현실주의 작가 살바도르 달리의 조각 <스페이스 비너스>(1984)와 비누 회화의 만남은 또 어떻고요.

오른쪽 위가 프랑수아 부셰의〈버터 파는 소녀〉, 왼쪽이 신미경의 작품.
게다가 신미경 작가의 지난 페인팅 시리즈 작품은 시간을 이기지 못하고 굳어서 갈라진 곳이 많습니다. 작가도 처음부터 의도했던 것은 아니라고 해요. 오래 가지고 있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이곳저곳이 갈라져 금이 생겼다고 합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그 갈라진 흔적들이 마치 오래된 유화 물감이 갈라진 것 같은 느낌을 줍니다. 그래서 옛 그림과 신미경 작가의 작품은 전혀 불화를 일으키지 않습니다.

가운데가 살바도르 달리의 〈스페이스 비너스〉(1984), 좌우로 신미경 작가의 작품.
하지만 이 전시실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코리아나미술관 소장품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했다는 신미경 작가의 신작 <낭만주의 조각 시리즈>입니다. 전시실 중앙에 서 있는 커다란 조각은 작가의 <번역 시리즈> 초창기 작업인데요.

신미경, 트렌스레이션-그리스 조각상, 1998
그중에서 1988년 작 <트랜스레이션-그리스 조각상>이라는 제목의 작품은 작가가 런던에서 대학원을 졸업한 뒤 헤이워드갤러리 기획전에서 처음 선보인 작품이자, 2004년 영국박물관에서 작가가 퍼포먼스를 선보였을 때도 활용한 작품입니다. 비누로 만들었다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작품 자체가 '유물화'된 모습을 보여주죠.

발길을 돌려 지상 5층과 6층에 있는 코리아나 화장박물관으로 올라가면 또 다른 공간이 펼쳐집니다. 박물관의 전시품 일부를 잠시 빼고, 유물과 작품을 한 공간에서 보여줍니다. 5층 전시장에서 눈에 띄는 건 작가가 <화석화된 시간 시리즈>라 이름 붙인 그릇들입니다. 역시 비누를 이용해서 만든 작품들인데, 질감은 유리의 그것을 떠올리게 합니다. 게다가 속을 일일이 손으로 다 파냈다고 하더군요.

신미경, 고스트 시리즈, 2007~2013
그 옆으로 진열장 안에 마치 옛 도자기처럼 전시된 작품들도 실은 신미경 작가의 작품들이었습니다. 박물관의 소장품과 나란히 있어서 아무 설명 없이 보면 옛 유물인지 요즘 작품인지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죠. 그리고 마지막으로 보게 될 6층 전시장에 다다르면, 신미경 작가를 유명하게 해준 아주 특별한 작품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신미경, 화장실 프로젝트, 2022~2023
마치 외계인 같은 머리를 한 조각상들이 보이죠. 원래는 저런 모습이 아니라 비너스 상처럼 긴 머리숱이 있었는데, 작가가 일부러 비누로 만든 이 작품들을 한 백화점 화장실에 설치해놓고 사람들에게 직접 사용하게 했답니다. 그래서 사람의 손이 닿은 머리 부분이 닳아서 마치 외계에서 온 여인 같은 모습이 된 거죠. 실제로 사용됐던 것들을 '작품'으로 전시한다. 작가가 무엇을 보여주려 했는지 알 것 같습니다.

실제로 전시장 각 층에 있는 화장실에 가시면 이런 조각상이 놓여 있는 걸 볼 수 있으실 텐데요. 작품이라고 해서 부담을 느낄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그것조차도 작품의 일부니까요.

■전시 정보
제목: 시간/물질: 생동하는 뮤지엄
기간: 2023년 3월 2일(목)~6월 10일(토)
장소: 코리아나미술관 & 코리아나 화장박물관
작품: 회화, 조각 등 120여 점

신미경, 낭만주의 조각 시리즈,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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