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의 아침] “독립을 계획하는 것은 조선인의 의무…전라도 출신 양한묵을 아시나요?”

입력 2023.03.01 (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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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104주년 3.1절...민족대표 33인 중 유일하게 옥중 순국한 양한묵 선생은 전라도 출신"
"3.1 만세 시위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공화제 전환 계기 3.1 혁명으로 불려야"
"양한묵 선생 1862년 해남 옥천에서 출생...1895년 화순 도곡에서 세무관 근무"
"동학에 입교해 천도교 교리서 '대종정의' 등 저술...'인내천' 용어 정립·사용"
"독립을 계획하는 것은 조선인의 의무이다...일제 검사에 당당히 맞서다 옥중 사망"


■ 프로그램명 : [출발! 무등의 아침]
■ 방송시간 : 08:30~09:00 KBS광주 1R FM 90.5 MHZ
■ 진행 : 윤주성 앵커
■ 출연 : 노성태 남도역사연구원 원장
■ 구성 : 정유라 작가
■ 기술 : 김영조 감독


▶유튜브 영상 바로가기 주소 https://www.youtube.com/watch?v=FMim57q9Lyw


윤주성 (이하 윤주성): 남도의 역사를 재미있게 들어보는 시간 노성태의 스토리로 듣는 남도역사, 오늘도 남도역사 연구원 노성태 원장과 함께합니다. 안녕하십니까?


◆ 남도역사연구원 노성태 원장 (이하 노성태): 안녕하십니까?

◇ 윤주성: 오늘 3.1절인데 이야기 주제가 무엇일까요?

◆ 노성태: 일제의 무단 통치에 항거해서 일어났던 최대 독립만세운동이잖아요. 말씀하셨던 것처럼 오늘이 꼭 3.1 만세운동이 일어난 지 104년이 되는 날입니다. 3.1 만세 시위를 모의하고 준비했던 분들은 교과서에 나오는 분들이지요. 손병희, 이승훈, 한용운 등 33인이었는데 이를 우리는 민족 대표 33인 이렇게 부르지요. 민족 대표 33인 중에 유일한 전라도 분이 한 분 계시는데 이분 지강 양한묵 선생이지요.

 사진 출처: 남도역사연구원 사진 출처: 남도역사연구원

오늘은 3.1혁명 104주년을 맞아서 33인 중 유일한 전라도 출신 지강 양한묵 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습니다.

◇ 윤주성: 원장님께서는 방금 3.1운동이라는 표현 대신에 3.1혁명이라고 이렇게 말씀을 하셨는데 이렇게 부른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 노성태: 혁명이라고 하는 용어는 프랑스 혁명, 러시아 혁명 등 유럽에서 시민들이 중심이 되어서 전제군주제를 타도하고 시민의 정부를 구성한 사건에 붙여진 역사적 용어인데요. 1919년 한반도에서 일어났던 3.1운동 또한 운동보다는 혁명으로 불러야 한다 이런 주장이 제기됐고 저 또한 동의를 합니다. 3.1운동 100주년이었던 2019년, 당시 국무총리 이낙연 총리가 운동 대신 혁명이라고 부르자 이렇게 제안을 했고 당시 100주년 기념 사업회에서도 이러한 국무총리의 제안을 받아들여서 3.1혁명 100주년 기념사업회라고 해서 3.1혁명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 윤주성: 3.1혁명은 3.1만세운동 100주년 당시 불렸던 용어군요. 이렇게 혁명이라고 불리는 근거가 더 있을 것 같은데요.

◆ 노성태: 3.1운동을 3.1혁명이라고 부르자, 근거 중 하나로 제시한 것이 3.1만세 시위 이후에 조선왕조의 연장선상에 있었던 나라가 대한제국이잖아요. 1896년. 그 대한제국 대신 그러니까 전제군주제 국가였던 대한제국을 대신해서 상하이, 프랑스 초기에 주권이 국민에게 있는 민주공화제 국가인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됩니다. 아직 학자들 사이에서 논란은 있지만 저는 군주제 국가에서 민주공화제 국가로의 전환을 가져온 3.1운동 3.1혁명으로 불러야 한다고 생각하고요. 아무튼 제국에서 민국으로, 황제에게 있던 주권이 백성에게 전환되었다고 하는 것은 혁명적 상황일 수밖에 없는 것이고 그래서 혁명으로 부를 수 있다. 아무튼 역사는 당시의 시대정신에 따라서 늘 달리 해석되기 때문이지요.

◇ 윤주성: 이제 민족 대표 33인 가운데 유일하게 전라도 출신인 양한묵 선생에 대해서 이야기 나눠보지요. 어디에서 태어나신 분인가요?

◆ 노성태: 민족 대표 33인 중에 전라도 출신의 유일한 분, 계속 말씀을 드립니다만 지강 양한묵 선생이고요. 양한묵 선생은 역사적 사건이었지요. 진주민란이 일어났던 해, 철종 2년 1862년 4월 29일 전라남도 해남군 옥천면 영신리에서 아버지 양상태, 어머니 낭주 최 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납니다. 본가는 제주, 제주 양씨고요. 아호 호는 지강이기 때문에 지강 양한묵 이렇게 불리는 분이시지요.

◇ 윤주성: 양한묵 선생 유일한 전라도 출신의 33인 지도자임에도 저희에게 조금 낯선 분 같아요. 젊은 시절 모습은 어땠습니까?

◆ 노성태: 어린 시절부터 굉장히 총명했다고 합니다. 어린 시절에 사서삼경, 주로 유학 공부를 하셨고 나이가 들면서 18세부터는 불교라든가 성교, 천주교, 동학 등 종교 관련 서적을 두루 접하게 됩니다. 성인이 되어서 전국을 이리저리 돌아다녔는데 이때 최제우가 1860년에 창시했던 종교가 동학이잖아요. 많은 농민들이 동학에 입교하게 되는데 농민들이 동학의 지지를 받는 모습을 직접 목격하기도 하지요. 고종 32년인 1895년 이때가 을미년인데요. 선생의 나이 33살 때 탁지부 주사에 임명되었고 그해 11월부터 1896년 그러니까 다음 해 7월까지 9개월 동안 전남 화순군 능주면에서 세무 관리가 되어서 근무하게 되는데 이때 해남에서 화순군 도곡면 신덕리로 이주해서 정착하게 됩니다. 양한묵이 도곡면 신덕 마을에 정착했던 이유는 이곳 마을이 제주 양씨 종가가 있는 곳이고 또 양씨들 친척들이 다수 거주했던 지역이었기 때문에 이주를 하게 된 것이지요.

◇ 윤주성: 젊은 시절 탁지부 주사에 임명되고 화순 능주에서 세무관리가 되었군요. 탁지부라는 말이 조금 낯선데 어떤 일을 하는 관청이었습니까?

◆ 노성태: 1894년이 갑오년이잖아요. 그리고 95년이 을미년, 갑오개혁, 을미개혁이라고 많이 들으셨을 것인데 이때 개혁 관청 중 1위 관청 중 하나입니다. 탁지부는 대한제국 당시 존재했던 관청, 국가의 재무를 담당했던 부서 그러니까 조선시대 육조 관청 중에는 호조의 기능을 계승한 관청이고요. 이호예병할 때 호조. 오늘날로 치면 기획재정부에 해당되는 관청이지요. 탁지부 관원에는 대신 한 명을 포함해서 협판, 국장, 참서관, 주사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양한묵이 주사였으니까 말단 직원인 셈이고 근무지가 제주 양씨들이 많이 살았던 화순 능주였습니다. 지강 양한묵 선생의 무덤이 자기가 태어났던 고향인 해남에 있지 않고 화순에 있었던 이유는 화순에서 근무했었던 경력과 관련이 있어 보입니다.

◇윤주성: 능주에서 세무 공무원으로 근무한 기간이 길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이후 활동도 궁금합니다.

◆ 노성태: 말씀하셨던 것처럼 능주에서 세무 공무원으로 근무했던 것은 7개월, 1년이 채 못 되는 기간이었지요. 양한묵 선생은 1896년 그러니까 바로 세무 공무원을 그만두고 서울에 올라오셨고 그리고 이듬해인 1897년에는 중국에 건너가셨고, 그리고 1898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서 국제 정세를 살피는 등 견문을 넓히게 되는데 일본에서 동학의 핵심 인물, 후에 천도교 교주가 되는 분이 손병희인데 이분을 만나게 되고 그리고 1904년 동학에 입교해서 동학 교도가 됩니다. 동학은 1905년 3대 교주였던 손병희에 의해서 이름을 천도교로 바꾸게 되는데 오늘 3.1운동을 주도했던 핵심 종교가 천도교였고 핵심 인물이 지강 양한묵 선생이 교류했던 손병희였습니다. 하나 더 말씀을 드리면 동학에 입교한 후 국내에서 헌정연구회라고 하는 애국계몽운동 단체를 조직해서 애국계몽운동에 앞장서게 되지요.

◇ 윤주성: 양한묵 선생이 천도교에서 대단한 역할을 수행했다고 하던데 어떤 역할이었나요?

◆ 노성태: 1904년에 동학에 입교했다는 말씀을 드렸고 5년 후인 1909년에는 천도교 법도사에 양한묵 선생이 임명됩니다. 그래서 천도교 교리서인 '대종정의' 등 20권의 교리서를 저술하신 분이 양한묵이지요. 양한묵은 '대종정의'에서 동학의 핵심 교리가 인간이 곧 하늘님이다, 이것을 '인내천'이라고 하는 용어로 정립하신 분이 양한묵 선생이세요. 그래서 '인내천'은 많이 아시겠지만 양반이든 천민이든 그리고 남자든 여자든 어른이든 아이든 다 하늘님처럼 존귀하다고 하는 선언으로 동학의 핵심 교리가 되는 것이지요. 양한묵 선생은 1912년 교리 강습소를 개설해서 천도교인들을 상대로 민족 의식을 고취했는데 이 교리강습소 활동은 3.1혁명 당시 각지 천도교인들이 적극적으로 만세 독립 운동을 전개했었던 기반이 됩니다.

◇ 윤주성: 동학의 교리를 정리하고 교리강습소에서 애국계몽 활동을 펼치다 3.1혁명의 그야말로 한복판에 서게 되는군요.

◆ 노성태: 그렇습니다. 1919년 2월 20일 만세 운동 10여 일 전이지요. 함께 활동했던 천도교 지도자 권동진이라고 하는 분이 계십니다. 권동진으로부터 독립선언 계획을 전해 듣고 곧바로 참여를 결심하지요. 그래서 2월 27일 천도교 교주였던 손병희 등과 함께 독립선언문에 민족대표 한 사람으로 서명을 하고 그리고 3월 1일 오후 2시 태화관이라고 하는 음식점에서 하는 독립선언식에 참석해서 독립 만세를 외치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고 그리고 체포된 후 혹독한 고문을 동반한 신문을 받게 됩니다.

사진 출처: 남도역사연구원사진 출처: 남도역사연구원

당시 손병희 등 민족 대표 33인들이 받았던 형량은 대부분 3년이었고요. 이분들은 옥고를 치른 뒤에 다 풀려났지만 지강 양한묵 선생만 옥중에서 유일하게 순국을 합니다. 이때 양한묵의 나이가 56세였습니다.

◇ 윤주성: 민족 대표 33인 중 유일한 옥중 순국자가 해남 출신의 양한묵 선생이네요. 일제 검사의 신문 내용이 남아있다고 하던데 그 내용 알려주실 수 있나요?

◆ 노성태: 그때 재판을 받았던 데가 경성지방법원인데요. 1심 담당 검사가 일본인 검사 영도웅장이라고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영도웅장이 묻습니다. 조선이 독립이 될 줄 알았는가? 이렇게 질의를 하자 양한묵 선생은 반드시 될 것이라고 생각은 안 했지만 독립을 계획하는 것은 조선인의 의무라고 당당하게 대답을 하지요. 일본 검사가 또 묻습니다. 다시 금후에도 독립 운동을 할 것인가 이렇게 신문하자 금후에도 기회만 있으면 할 예정이라고 답을 하게 되지요.

사진 출처: 남도역사연구원사진 출처: 남도역사연구원

양한묵 선생은 독립을 계획하는 것은 조선인의 의무이고 금후에도 기회만 오면 또 할 것이다 이렇게 당당하게 맞섰던 독립 투사였습니다.

◇ 윤주성: 일본인에게 당당하게 맞선 결과는 더욱 혹독한 고문이었고 이것이 옥중 사망으로 이어졌을 것 같은데 양한묵 선생은 지금 어디에 잠들어 계십니까?

◆ 노성태: 양한묵 선생이 옥중에서 순국한 날이 1919년 5월 26일 그러니까 3.1혁명이 일어난 지 불과 석 달도 채 되지 않았던 시기에 순국을 하게 됩니다. 순국 후에 동지들의 주선으로 서울 수유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가 3년 후인 1925년 5월 화순군 앵남리 126번지로 옮겨서 반장이 됩니다.

사진 출처: 남도역사연구원사진 출처: 남도역사연구원

손병희, 권동진 등의 조장을 비롯해서 200여 개의 만장 행렬이, 송정리 그러니까 그때 당시 경부선이 호남선이 있었기 때문에 기차로 시신이 송정리까지 운반이 되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송정리에서 시신이 화순으로 이렇게 이동할 때 200여 개의 만장 행렬이 뒤를 따랐고 수천 명의 남녀노소가 행렬을 뒤따르게 되는데 이 행렬을 저는 '어두운 조국'을 통곡했던 행렬이었다 이렇게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 윤주성: 일본과 맞선 민족 대표 33인 중 유일한 전라도 출신의 양한묵 선생, 어디에 가면 만날 수 있을까요?

◆ 노성태: 양한묵 선생이 태어났던 데는 해남군 옥천면 영신리라고 했잖아요. 영신리에 가면 1991년도 지강 양한묵 선생 순국비가 세워지고요. 2019년도에는 양한묵 선생 기념관이 건립됩니다. 세무공무원으로 일했고 이사 왔던 화순, 여기에는 1965년 양한묵 선생 추모비가 세워지는데 현재 화순 남산공원에 위치를 하고 있습니다. 그의 무덤은 말씀드렸던 것처럼 화순 앵남역 가까운 야산에 있는데 묘비에는 지강 거사 양공 한묵지묘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 윤주성: 3.1절인 오늘 전라도 출신 양한묵 선생 이야기 잘 들었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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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등의 아침] “독립을 계획하는 것은 조선인의 의무…전라도 출신 양한묵을 아시나요?”
    • 입력 2023-03-01 13:0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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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주년 3.1절...민족대표 33인 중 유일하게 옥중 순국한 양한묵 선생은 전라도 출신"<br />"3.1 만세 시위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공화제 전환 계기 3.1 혁명으로 불려야"<br />"양한묵 선생 1862년 해남 옥천에서 출생...1895년 화순 도곡에서 세무관 근무"<br />"동학에 입교해 천도교 교리서 '대종정의' 등 저술...'인내천' 용어 정립·사용"<br />"독립을 계획하는 것은 조선인의 의무이다...일제 검사에 당당히 맞서다 옥중 사망"

■ 프로그램명 : [출발! 무등의 아침]
■ 방송시간 : 08:30~09:00 KBS광주 1R FM 90.5 MHZ
■ 진행 : 윤주성 앵커
■ 출연 : 노성태 남도역사연구원 원장
■ 구성 : 정유라 작가
■ 기술 : 김영조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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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주성 (이하 윤주성): 남도의 역사를 재미있게 들어보는 시간 노성태의 스토리로 듣는 남도역사, 오늘도 남도역사 연구원 노성태 원장과 함께합니다. 안녕하십니까?


◆ 남도역사연구원 노성태 원장 (이하 노성태): 안녕하십니까?

◇ 윤주성: 오늘 3.1절인데 이야기 주제가 무엇일까요?

◆ 노성태: 일제의 무단 통치에 항거해서 일어났던 최대 독립만세운동이잖아요. 말씀하셨던 것처럼 오늘이 꼭 3.1 만세운동이 일어난 지 104년이 되는 날입니다. 3.1 만세 시위를 모의하고 준비했던 분들은 교과서에 나오는 분들이지요. 손병희, 이승훈, 한용운 등 33인이었는데 이를 우리는 민족 대표 33인 이렇게 부르지요. 민족 대표 33인 중에 유일한 전라도 분이 한 분 계시는데 이분 지강 양한묵 선생이지요.

 사진 출처: 남도역사연구원
오늘은 3.1혁명 104주년을 맞아서 33인 중 유일한 전라도 출신 지강 양한묵 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습니다.

◇ 윤주성: 원장님께서는 방금 3.1운동이라는 표현 대신에 3.1혁명이라고 이렇게 말씀을 하셨는데 이렇게 부른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 노성태: 혁명이라고 하는 용어는 프랑스 혁명, 러시아 혁명 등 유럽에서 시민들이 중심이 되어서 전제군주제를 타도하고 시민의 정부를 구성한 사건에 붙여진 역사적 용어인데요. 1919년 한반도에서 일어났던 3.1운동 또한 운동보다는 혁명으로 불러야 한다 이런 주장이 제기됐고 저 또한 동의를 합니다. 3.1운동 100주년이었던 2019년, 당시 국무총리 이낙연 총리가 운동 대신 혁명이라고 부르자 이렇게 제안을 했고 당시 100주년 기념 사업회에서도 이러한 국무총리의 제안을 받아들여서 3.1혁명 100주년 기념사업회라고 해서 3.1혁명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 윤주성: 3.1혁명은 3.1만세운동 100주년 당시 불렸던 용어군요. 이렇게 혁명이라고 불리는 근거가 더 있을 것 같은데요.

◆ 노성태: 3.1운동을 3.1혁명이라고 부르자, 근거 중 하나로 제시한 것이 3.1만세 시위 이후에 조선왕조의 연장선상에 있었던 나라가 대한제국이잖아요. 1896년. 그 대한제국 대신 그러니까 전제군주제 국가였던 대한제국을 대신해서 상하이, 프랑스 초기에 주권이 국민에게 있는 민주공화제 국가인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됩니다. 아직 학자들 사이에서 논란은 있지만 저는 군주제 국가에서 민주공화제 국가로의 전환을 가져온 3.1운동 3.1혁명으로 불러야 한다고 생각하고요. 아무튼 제국에서 민국으로, 황제에게 있던 주권이 백성에게 전환되었다고 하는 것은 혁명적 상황일 수밖에 없는 것이고 그래서 혁명으로 부를 수 있다. 아무튼 역사는 당시의 시대정신에 따라서 늘 달리 해석되기 때문이지요.

◇ 윤주성: 이제 민족 대표 33인 가운데 유일하게 전라도 출신인 양한묵 선생에 대해서 이야기 나눠보지요. 어디에서 태어나신 분인가요?

◆ 노성태: 민족 대표 33인 중에 전라도 출신의 유일한 분, 계속 말씀을 드립니다만 지강 양한묵 선생이고요. 양한묵 선생은 역사적 사건이었지요. 진주민란이 일어났던 해, 철종 2년 1862년 4월 29일 전라남도 해남군 옥천면 영신리에서 아버지 양상태, 어머니 낭주 최 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납니다. 본가는 제주, 제주 양씨고요. 아호 호는 지강이기 때문에 지강 양한묵 이렇게 불리는 분이시지요.

◇ 윤주성: 양한묵 선생 유일한 전라도 출신의 33인 지도자임에도 저희에게 조금 낯선 분 같아요. 젊은 시절 모습은 어땠습니까?

◆ 노성태: 어린 시절부터 굉장히 총명했다고 합니다. 어린 시절에 사서삼경, 주로 유학 공부를 하셨고 나이가 들면서 18세부터는 불교라든가 성교, 천주교, 동학 등 종교 관련 서적을 두루 접하게 됩니다. 성인이 되어서 전국을 이리저리 돌아다녔는데 이때 최제우가 1860년에 창시했던 종교가 동학이잖아요. 많은 농민들이 동학에 입교하게 되는데 농민들이 동학의 지지를 받는 모습을 직접 목격하기도 하지요. 고종 32년인 1895년 이때가 을미년인데요. 선생의 나이 33살 때 탁지부 주사에 임명되었고 그해 11월부터 1896년 그러니까 다음 해 7월까지 9개월 동안 전남 화순군 능주면에서 세무 관리가 되어서 근무하게 되는데 이때 해남에서 화순군 도곡면 신덕리로 이주해서 정착하게 됩니다. 양한묵이 도곡면 신덕 마을에 정착했던 이유는 이곳 마을이 제주 양씨 종가가 있는 곳이고 또 양씨들 친척들이 다수 거주했던 지역이었기 때문에 이주를 하게 된 것이지요.

◇ 윤주성: 젊은 시절 탁지부 주사에 임명되고 화순 능주에서 세무관리가 되었군요. 탁지부라는 말이 조금 낯선데 어떤 일을 하는 관청이었습니까?

◆ 노성태: 1894년이 갑오년이잖아요. 그리고 95년이 을미년, 갑오개혁, 을미개혁이라고 많이 들으셨을 것인데 이때 개혁 관청 중 1위 관청 중 하나입니다. 탁지부는 대한제국 당시 존재했던 관청, 국가의 재무를 담당했던 부서 그러니까 조선시대 육조 관청 중에는 호조의 기능을 계승한 관청이고요. 이호예병할 때 호조. 오늘날로 치면 기획재정부에 해당되는 관청이지요. 탁지부 관원에는 대신 한 명을 포함해서 협판, 국장, 참서관, 주사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양한묵이 주사였으니까 말단 직원인 셈이고 근무지가 제주 양씨들이 많이 살았던 화순 능주였습니다. 지강 양한묵 선생의 무덤이 자기가 태어났던 고향인 해남에 있지 않고 화순에 있었던 이유는 화순에서 근무했었던 경력과 관련이 있어 보입니다.

◇윤주성: 능주에서 세무 공무원으로 근무한 기간이 길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이후 활동도 궁금합니다.

◆ 노성태: 말씀하셨던 것처럼 능주에서 세무 공무원으로 근무했던 것은 7개월, 1년이 채 못 되는 기간이었지요. 양한묵 선생은 1896년 그러니까 바로 세무 공무원을 그만두고 서울에 올라오셨고 그리고 이듬해인 1897년에는 중국에 건너가셨고, 그리고 1898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서 국제 정세를 살피는 등 견문을 넓히게 되는데 일본에서 동학의 핵심 인물, 후에 천도교 교주가 되는 분이 손병희인데 이분을 만나게 되고 그리고 1904년 동학에 입교해서 동학 교도가 됩니다. 동학은 1905년 3대 교주였던 손병희에 의해서 이름을 천도교로 바꾸게 되는데 오늘 3.1운동을 주도했던 핵심 종교가 천도교였고 핵심 인물이 지강 양한묵 선생이 교류했던 손병희였습니다. 하나 더 말씀을 드리면 동학에 입교한 후 국내에서 헌정연구회라고 하는 애국계몽운동 단체를 조직해서 애국계몽운동에 앞장서게 되지요.

◇ 윤주성: 양한묵 선생이 천도교에서 대단한 역할을 수행했다고 하던데 어떤 역할이었나요?

◆ 노성태: 1904년에 동학에 입교했다는 말씀을 드렸고 5년 후인 1909년에는 천도교 법도사에 양한묵 선생이 임명됩니다. 그래서 천도교 교리서인 '대종정의' 등 20권의 교리서를 저술하신 분이 양한묵이지요. 양한묵은 '대종정의'에서 동학의 핵심 교리가 인간이 곧 하늘님이다, 이것을 '인내천'이라고 하는 용어로 정립하신 분이 양한묵 선생이세요. 그래서 '인내천'은 많이 아시겠지만 양반이든 천민이든 그리고 남자든 여자든 어른이든 아이든 다 하늘님처럼 존귀하다고 하는 선언으로 동학의 핵심 교리가 되는 것이지요. 양한묵 선생은 1912년 교리 강습소를 개설해서 천도교인들을 상대로 민족 의식을 고취했는데 이 교리강습소 활동은 3.1혁명 당시 각지 천도교인들이 적극적으로 만세 독립 운동을 전개했었던 기반이 됩니다.

◇ 윤주성: 동학의 교리를 정리하고 교리강습소에서 애국계몽 활동을 펼치다 3.1혁명의 그야말로 한복판에 서게 되는군요.

◆ 노성태: 그렇습니다. 1919년 2월 20일 만세 운동 10여 일 전이지요. 함께 활동했던 천도교 지도자 권동진이라고 하는 분이 계십니다. 권동진으로부터 독립선언 계획을 전해 듣고 곧바로 참여를 결심하지요. 그래서 2월 27일 천도교 교주였던 손병희 등과 함께 독립선언문에 민족대표 한 사람으로 서명을 하고 그리고 3월 1일 오후 2시 태화관이라고 하는 음식점에서 하는 독립선언식에 참석해서 독립 만세를 외치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고 그리고 체포된 후 혹독한 고문을 동반한 신문을 받게 됩니다.

사진 출처: 남도역사연구원
당시 손병희 등 민족 대표 33인들이 받았던 형량은 대부분 3년이었고요. 이분들은 옥고를 치른 뒤에 다 풀려났지만 지강 양한묵 선생만 옥중에서 유일하게 순국을 합니다. 이때 양한묵의 나이가 56세였습니다.

◇ 윤주성: 민족 대표 33인 중 유일한 옥중 순국자가 해남 출신의 양한묵 선생이네요. 일제 검사의 신문 내용이 남아있다고 하던데 그 내용 알려주실 수 있나요?

◆ 노성태: 그때 재판을 받았던 데가 경성지방법원인데요. 1심 담당 검사가 일본인 검사 영도웅장이라고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영도웅장이 묻습니다. 조선이 독립이 될 줄 알았는가? 이렇게 질의를 하자 양한묵 선생은 반드시 될 것이라고 생각은 안 했지만 독립을 계획하는 것은 조선인의 의무라고 당당하게 대답을 하지요. 일본 검사가 또 묻습니다. 다시 금후에도 독립 운동을 할 것인가 이렇게 신문하자 금후에도 기회만 있으면 할 예정이라고 답을 하게 되지요.

사진 출처: 남도역사연구원
양한묵 선생은 독립을 계획하는 것은 조선인의 의무이고 금후에도 기회만 오면 또 할 것이다 이렇게 당당하게 맞섰던 독립 투사였습니다.

◇ 윤주성: 일본인에게 당당하게 맞선 결과는 더욱 혹독한 고문이었고 이것이 옥중 사망으로 이어졌을 것 같은데 양한묵 선생은 지금 어디에 잠들어 계십니까?

◆ 노성태: 양한묵 선생이 옥중에서 순국한 날이 1919년 5월 26일 그러니까 3.1혁명이 일어난 지 불과 석 달도 채 되지 않았던 시기에 순국을 하게 됩니다. 순국 후에 동지들의 주선으로 서울 수유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가 3년 후인 1925년 5월 화순군 앵남리 126번지로 옮겨서 반장이 됩니다.

사진 출처: 남도역사연구원
손병희, 권동진 등의 조장을 비롯해서 200여 개의 만장 행렬이, 송정리 그러니까 그때 당시 경부선이 호남선이 있었기 때문에 기차로 시신이 송정리까지 운반이 되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송정리에서 시신이 화순으로 이렇게 이동할 때 200여 개의 만장 행렬이 뒤를 따랐고 수천 명의 남녀노소가 행렬을 뒤따르게 되는데 이 행렬을 저는 '어두운 조국'을 통곡했던 행렬이었다 이렇게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 윤주성: 일본과 맞선 민족 대표 33인 중 유일한 전라도 출신의 양한묵 선생, 어디에 가면 만날 수 있을까요?

◆ 노성태: 양한묵 선생이 태어났던 데는 해남군 옥천면 영신리라고 했잖아요. 영신리에 가면 1991년도 지강 양한묵 선생 순국비가 세워지고요. 2019년도에는 양한묵 선생 기념관이 건립됩니다. 세무공무원으로 일했고 이사 왔던 화순, 여기에는 1965년 양한묵 선생 추모비가 세워지는데 현재 화순 남산공원에 위치를 하고 있습니다. 그의 무덤은 말씀드렸던 것처럼 화순 앵남역 가까운 야산에 있는데 묘비에는 지강 거사 양공 한묵지묘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 윤주성: 3.1절인 오늘 전라도 출신 양한묵 선생 이야기 잘 들었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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