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마진국] 내 아들은 아닐 거라고?…영화 ‘니 부모 얼굴이 보고 싶다’

입력 2023.03.05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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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폭력을 다룬 영화 ‘니 부모 얼굴이 보고 싶다’(2022)의 한 장면. 출처 다음영화.학교폭력을 다룬 영화 ‘니 부모 얼굴이 보고 싶다’(2022)의 한 장면. 출처 다음영화.

※일요일 아침, 그 주의 시사 이슈와 관련된 영화를 소개합니다. 영화 내용이 일부 포함돼 있습니다.

정순신 변호사가 쏘아 올린 '학폭'(학교 폭력) 관련 논의가 잦아들지 않고 있습니다. 정 변호사는 지난달 25일, 경찰청 국가수사본부장 임명 하루 만에 아들의 학교 폭력 문제로 자리에서 물러났는데요. KBS 단독 보도 등을 통해 사건의 면면이 전해지면서 소송전으로 폭력을 무마하는 ‘학폭 로펌 산업' 등이 꼬리를 물고 여론의 주목을 받았고, 교육부는 대학 입시제도 손질을 검토하겠다고 밝히는 등 이달 말까지 대책을 내놓겠다고 나섰습니다. 이처럼 가해자들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드높은 가운데, 이번 주에는 '만약 내 자식이 가해자면 어떡하지?'라는 질문에서 출발한 영화 한 편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배우 설경구가 가해 학생 아버지로 등장하는, 제목부터 화끈한 '니 부모 얼굴이 보고 싶다'는 작품입니다.

주인공 호창은 어느 날 명문 국제중에 다니는 아들 관련 연락을 받고 학교로 향합니다. 안내받은 자리에는 다른 학부모들도 여럿 모여 있지요. 아이들끼리 싸우기라도 했나 보다 넘겨짚는 호창의 예상과 달리, 이들이 알게 되는 건 동급생 건우를 집단 괴롭힘 끝에 자살로 내몬 가해자가 바로 자기 아들이라는 사실입니다. 또박또박 가해자 4명의 이름을 적은 유서와 함께 호수에 빠진 건우가 발견되면서 학교가 이들을 불러 모은 거지요. 그러나 부모들의 첫 반응은 '그럴 리 없다'를 넘어 '우리 애 무서워서 어떡하느냐'에 이를 만큼 뻔뻔합니다. 가해 학생들을 다른 교실에 모아둔 것만으로도 "우리 애들만 안 보이면 다른 학생들이 뭐라 생각하겠느냐"며 발끈하기도 하죠. 호창 역시 다를 바 없습니다.

건우가 아직 의식 불명 상태라는 이야기를 들은 부모들은 유서 내용을 비밀에 부치는 한편, 사건을 무마하기 위해 움직입니다. '내 아들은 그럴 리 없다'는 믿음을 뒷받침할 증거를 찾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학폭이 사실이라도 문제만 되지 않으면 된다는 주의지요. 한편 아이들의 임시 담임이었던 기간제 교사 정욱(천우희)도 건우가 호수에 몸을 던진 그 날, CCTV에 담기지 않은 3시간여의 진상을 찾아 나섭니다. 변호사인 호창이 직업 특기를 살려 여기저기 목격자와 주변인들을 만나고 다니는 사이 '한 배를 탔다'며 힘을 모으던 부모들은 반목하기 시작하고, 영화는 일종의 수사물에서 법정으로 무대를 옮겨 반전이 기다리는 결말로 달려갑니다.

영화 ‘니 부모 얼굴이 보고 싶다’(2022)의 한 장면. 출처 다음영화.영화 ‘니 부모 얼굴이 보고 싶다’(2022)의 한 장면. 출처 다음영화.

실제 고교 교사였던 일본 작가의 희곡을 각색한 2022년 작 '니 부모 얼굴이 보고 싶다'(이하 '니 부모')는 끔찍한 인간성을 포착해 내는 순간과 진부한 설정이 발목을 잡는 장면 사이를 오갑니다. 괴롭힘을 당하는 건우가 엄마 밑에서 혼자 큰 '사회적 배려 대상자' 전형 입학생이라는 설정과, 정교사 채용이나 해외 연수 등 학교의 회유에도 굴하지 않고 유일하게 양심선언에 나서는 기간제 교사 정욱의 캐릭터 등은 너무 뻔해서 입체감이 떨어져요. 영화에 담긴 비정한 묘사가 크게 마음을 흔들지 못하는 건, 이미 매일 '마라 맛' 현실을 살고 있는 한국인들의 눈높이가 너무 높아진 탓도 있겠지만요.

'니 부모'는 보는 이의 윤리관을 있는 대로 들쑤시며 치열한 도덕적 고민을 하게 만드는 작품은 아닙니다. 전개와 결말, 묘사까지 일반 장르물에 가까워요. 대신 영화의 장점은 의외의 장소에 있습니다. 언제나 자신을 정당화할 준비가 돼 있는 주인공 호창의 비열함이죠. 영화 후반부 호창은 아들을 변호하러 법정에 서 짐짓 정의로운 변호사인 척 포효합니다. 그가 뻔뻔하게 증거를 인멸하고 사건을 몰아갔던 순간들을 관객이 똑똑히 기억하는데도요. 영화 내내 파렴치한 다른 악당들에 비해, 상식인과 보편성을 자처하는 이들의 합리화는 한층 흥미로운 악취를 풍깁니다. 그리고 이걸 들여다 보는 일은, 원수의 얼굴을 보려 집어 든 거울에서 내 얼굴을 마주하는 것과 비슷한 경험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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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씨네마진국] 내 아들은 아닐 거라고?…영화 ‘니 부모 얼굴이 보고 싶다’
    • 입력 2023-03-05 08:00:02
    씨네마진국
학교폭력을 다룬 영화 ‘니 부모 얼굴이 보고 싶다’(2022)의 한 장면. 출처 다음영화.
※일요일 아침, 그 주의 시사 이슈와 관련된 영화를 소개합니다. 영화 내용이 일부 포함돼 있습니다.

정순신 변호사가 쏘아 올린 '학폭'(학교 폭력) 관련 논의가 잦아들지 않고 있습니다. 정 변호사는 지난달 25일, 경찰청 국가수사본부장 임명 하루 만에 아들의 학교 폭력 문제로 자리에서 물러났는데요. KBS 단독 보도 등을 통해 사건의 면면이 전해지면서 소송전으로 폭력을 무마하는 ‘학폭 로펌 산업' 등이 꼬리를 물고 여론의 주목을 받았고, 교육부는 대학 입시제도 손질을 검토하겠다고 밝히는 등 이달 말까지 대책을 내놓겠다고 나섰습니다. 이처럼 가해자들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드높은 가운데, 이번 주에는 '만약 내 자식이 가해자면 어떡하지?'라는 질문에서 출발한 영화 한 편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배우 설경구가 가해 학생 아버지로 등장하는, 제목부터 화끈한 '니 부모 얼굴이 보고 싶다'는 작품입니다.

주인공 호창은 어느 날 명문 국제중에 다니는 아들 관련 연락을 받고 학교로 향합니다. 안내받은 자리에는 다른 학부모들도 여럿 모여 있지요. 아이들끼리 싸우기라도 했나 보다 넘겨짚는 호창의 예상과 달리, 이들이 알게 되는 건 동급생 건우를 집단 괴롭힘 끝에 자살로 내몬 가해자가 바로 자기 아들이라는 사실입니다. 또박또박 가해자 4명의 이름을 적은 유서와 함께 호수에 빠진 건우가 발견되면서 학교가 이들을 불러 모은 거지요. 그러나 부모들의 첫 반응은 '그럴 리 없다'를 넘어 '우리 애 무서워서 어떡하느냐'에 이를 만큼 뻔뻔합니다. 가해 학생들을 다른 교실에 모아둔 것만으로도 "우리 애들만 안 보이면 다른 학생들이 뭐라 생각하겠느냐"며 발끈하기도 하죠. 호창 역시 다를 바 없습니다.

건우가 아직 의식 불명 상태라는 이야기를 들은 부모들은 유서 내용을 비밀에 부치는 한편, 사건을 무마하기 위해 움직입니다. '내 아들은 그럴 리 없다'는 믿음을 뒷받침할 증거를 찾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학폭이 사실이라도 문제만 되지 않으면 된다는 주의지요. 한편 아이들의 임시 담임이었던 기간제 교사 정욱(천우희)도 건우가 호수에 몸을 던진 그 날, CCTV에 담기지 않은 3시간여의 진상을 찾아 나섭니다. 변호사인 호창이 직업 특기를 살려 여기저기 목격자와 주변인들을 만나고 다니는 사이 '한 배를 탔다'며 힘을 모으던 부모들은 반목하기 시작하고, 영화는 일종의 수사물에서 법정으로 무대를 옮겨 반전이 기다리는 결말로 달려갑니다.

영화 ‘니 부모 얼굴이 보고 싶다’(2022)의 한 장면. 출처 다음영화.
실제 고교 교사였던 일본 작가의 희곡을 각색한 2022년 작 '니 부모 얼굴이 보고 싶다'(이하 '니 부모')는 끔찍한 인간성을 포착해 내는 순간과 진부한 설정이 발목을 잡는 장면 사이를 오갑니다. 괴롭힘을 당하는 건우가 엄마 밑에서 혼자 큰 '사회적 배려 대상자' 전형 입학생이라는 설정과, 정교사 채용이나 해외 연수 등 학교의 회유에도 굴하지 않고 유일하게 양심선언에 나서는 기간제 교사 정욱의 캐릭터 등은 너무 뻔해서 입체감이 떨어져요. 영화에 담긴 비정한 묘사가 크게 마음을 흔들지 못하는 건, 이미 매일 '마라 맛' 현실을 살고 있는 한국인들의 눈높이가 너무 높아진 탓도 있겠지만요.

'니 부모'는 보는 이의 윤리관을 있는 대로 들쑤시며 치열한 도덕적 고민을 하게 만드는 작품은 아닙니다. 전개와 결말, 묘사까지 일반 장르물에 가까워요. 대신 영화의 장점은 의외의 장소에 있습니다. 언제나 자신을 정당화할 준비가 돼 있는 주인공 호창의 비열함이죠. 영화 후반부 호창은 아들을 변호하러 법정에 서 짐짓 정의로운 변호사인 척 포효합니다. 그가 뻔뻔하게 증거를 인멸하고 사건을 몰아갔던 순간들을 관객이 똑똑히 기억하는데도요. 영화 내내 파렴치한 다른 악당들에 비해, 상식인과 보편성을 자처하는 이들의 합리화는 한층 흥미로운 악취를 풍깁니다. 그리고 이걸 들여다 보는 일은, 원수의 얼굴을 보려 집어 든 거울에서 내 얼굴을 마주하는 것과 비슷한 경험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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