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지나도 ‘알박기’는 안 변한다…현대차 “문제 없다”

입력 2023.03.06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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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노사 문화, 글로벌 최고 기업"

언뜻 보면 캠페인 구호나 공익광고 카피 같기도 합니다.

실은 '집회' 피켓의 문구입니다. 경찰에도 집회로 신고돼 있습니다. 집회 이름이 독특합니다.

- 집회 명 : 기업·국가 경쟁력 강화를 위한 집회 문화 정착 촉구 대회
- 집회 장소 : 서울 양재동 현대차그룹 본사 앞


■ 구호도 발언도 없는 집회

실제로 현대차 본사 주변에서 위 사진과 같은 피켓을 든 남성들을 가끔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뭔가 어색합니다. 흔히 아는 집회의 모습과 크게 다릅니다.

구호도 없고, 노래도 없습니다. 발언도 없습니다.

취재진이 방문한 지난 2월 어느 날에는 20대로 보이는 남성 5명이 피켓만 들고 있었습니다. 한결같이 입을 꾹 다물고 있었습니다. 묘한 '침묵' 시위였습니다.

집회 열기도 차갑기 그지없었습니다. 집회자들은 멀뚱멀뚱 휴대전화만 하면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취재진이 다가가 무슨 집회냐고 물어도, 아무 답이 없었습니다.

정말 집회가 맞나? 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

■ 1년 365일 내내 집회?

집회 형태보다 더 이상한 점은 집회의 빈도입니다.

현대차는 이런 류의 집회를 사실상 1년 365일 신고해뒀습니다. 올해만 그런 게 아닙니다.


KBS는 서울 서초경찰서에 2013년부터 2023년 1월까지의 현대차 본사 앞 집회신고 현황을 정보공개 청구했습니다.

일단, 집회 신고는 5130건입니다. 10년 1개월 동안 매일 1.4건 꼴로 신고한 셈입니다. 다른 기관의 집회 신고를 압도합니다.


집회 주최 기간을 모두 더하면, 6491일이었습니다. 10년이면 3,650일인데? 날짜를 마구 겹쳐서 신고했기 때문입니다. '물샐 틈 없는' 겹치기 집회 신고입니다.

준비성도 철저했습니다. 현대차는 평균 29.6일 앞서서 집회를 신고했습니다. 보통 현안에 대응해서 집회를 조직하는 것임을 생각하면, 놀라운 이슈 예측력입니다.

반면, 다른 노조나 시민단체들은 개최일 5일 전쯤에 집회를 신고했습니다.

■ 무엇을 위해 이렇게까지?

상식적으로 납득 하기 힘든 집회 신고입니다. 현대차는 왜 이렇게까지 집회 신고에 집착하는 걸까요.

만약, 시계를 10년 전으로 돌린다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기는 했습니다.

당시에는 누군가 집회 장소를 선점하면, 같은 장소에서 다른 집회가 열리는 걸 막을 수 있었습니다. 속칭 '알박기 집회'라고 불렀습니다.

집회의 자유를 해치는 꼼수였지만, 내로라하는 여러 대기업이 너나 할 것 없이 자주 동원했습니다. 2011년 KBS는 이 진풍경을 아래처럼 보도했습니다.

[연관 기사] 밤마다 웃지 못할 진풍경…‘유령집회’ 기승

비판이 쌓이면서 법이 바뀌었습니다. 2016년 집회시위법이 개정됐고, 중복 집회도 허용하기로 했습니다. 즉, 집회 장소를 선점해도, 다른 집회를 원천 차단할 수는 없게 된 것입니다.

그 이후 이른바 '알박기' 집회는 거의 사라졌습니다. 유독 눈에 띄게 남아 있는 곳이 현대차그룹 앞입니다.

현대차는 왜? 라는 의문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 현대차 "성숙한 집회 문화 위해"

현대차가 KBS에 보내온 공식 답변은 아래와 같습니다.

"사옥 주변에서 다른 집회가 반복되는 상황에서 성숙한 집회문화 정착을 요구하는 집회"
"정해진 절차와 방법에 따라 합법 진행하고 있으며, 타인의 집회를 방해할 목적은 없다"
- 현대차그룹 공식 답변

요약하면, 성숙한 집회가 무엇인지를 몸소 '시연'하려는 것이고, 다른 집회를 방해할 의도는 없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나 현대차의 의도가 무색하게도, 다른 집회들은 명백하게 방해받고 있었습니다.

개정된 집시법에 따라, 집회 자체가 원천 금지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다른 단체는 현대차 본사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밀려나서' 집회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집회신고를 하면, 자연스럽게 본사가 아니라 옆에 있는 하나로마트 인근으로 안내를 한다" - 노조 관계자

취재진은 실제로 현대차 본사 인근에 집회를 신고하러 갔습니다. 서초경찰서 담당자는 난감하다는 표정과 함께 아래와 같이 설명했습니다.

"본사 인근에 현대차가 집회를 늘 개최하고 있어, 최대 50명밖에 집회를 할 수 없다"
"여러 단체가 집회를 참여하게 되면, 현장에서 '조율'이 필요하다"
- 서초경찰서 집회 담당자

현대차 측의 초장기 집회 신고 때문에, 다른 집회는 인원을 제한받으며, 장소도 양보해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본사에서 최대한 떨어져서 집회를 열리게 하려고 이렇게까지? 라는 의심을 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 "미개최율 82%"

신고한 집회를 실제로 개최했는지를 따져보면, 그런 의심은 더 강해집니다.

KBS가 정보공개청구로 확보한 자료를 분석해보면, 2013년부터 2023년 1월까지 현대차 측 집회의 미개최율은 82%였습니다.

특히, 코로나가 계속됐던 최근 3년은 미개최율이 99%를 웃돌았습니다.

열지도 않을 집회를 계속 신고했다는 뜻으로 이해됩니다. 성숙한 집회문화를 '시연'하고자 했다는 현대차의 해명이 무색해집니다.

현대차는 경찰의 집계 오류라고 반박했습니다. "명백하게 집회를 열고 있는데, 경찰관이 현장에 오지 않아서 개최 사실을 파악하지 못한 것"이라고 해명했습니다.

이 해명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 힘든 이유가 있습니다. 현대차의 이른바 '전력' 때문입니다. 2018년과 2019년 KBS는 이런 현장을 고발했습니다.

[연관 기사]
인권위 권고 무시?…경찰, ‘알박기 집회’ 수수방관
현대차 10년 넘게 ‘알박기 갑질’…법도 인권도 무시

위 보도가 나올 당시였던 2018년 대법원은 현대차의 이런 집회를 두고, "법이 보장해야 할 집회가 아니다"라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인권위는 지난 1월 현대차의 집회를 '알박기'라고 판단했습니다. 사실 지난 10년간 여러 번 나온 판단을 다시 한번 반복한 셈입니다.

KBS는 최근 한 번 더 현대차의 이상한 집회를 지적했습니다.

[연관 기사] 강산은 변해도 ‘알박기’는 그대로?…‘세계 톱3’ 기업의 민낯

현대차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글로벌 기업입니다. 지난해 완성차 업체 판매량에서 세계 TOP3에 들었습니다. 굴지의 기업 규모에 걸맞은 사회적 책임을 바라는 것은 과한 기대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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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년 지나도 ‘알박기’는 안 변한다…현대차 “문제 없다”
    • 입력 2023-03-06 17:57:42
    취재K

"새로운 노사 문화, 글로벌 최고 기업"

언뜻 보면 캠페인 구호나 공익광고 카피 같기도 합니다.

실은 '집회' 피켓의 문구입니다. 경찰에도 집회로 신고돼 있습니다. 집회 이름이 독특합니다.

- 집회 명 : 기업·국가 경쟁력 강화를 위한 집회 문화 정착 촉구 대회
- 집회 장소 : 서울 양재동 현대차그룹 본사 앞


■ 구호도 발언도 없는 집회

실제로 현대차 본사 주변에서 위 사진과 같은 피켓을 든 남성들을 가끔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뭔가 어색합니다. 흔히 아는 집회의 모습과 크게 다릅니다.

구호도 없고, 노래도 없습니다. 발언도 없습니다.

취재진이 방문한 지난 2월 어느 날에는 20대로 보이는 남성 5명이 피켓만 들고 있었습니다. 한결같이 입을 꾹 다물고 있었습니다. 묘한 '침묵' 시위였습니다.

집회 열기도 차갑기 그지없었습니다. 집회자들은 멀뚱멀뚱 휴대전화만 하면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취재진이 다가가 무슨 집회냐고 물어도, 아무 답이 없었습니다.

정말 집회가 맞나? 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

■ 1년 365일 내내 집회?

집회 형태보다 더 이상한 점은 집회의 빈도입니다.

현대차는 이런 류의 집회를 사실상 1년 365일 신고해뒀습니다. 올해만 그런 게 아닙니다.


KBS는 서울 서초경찰서에 2013년부터 2023년 1월까지의 현대차 본사 앞 집회신고 현황을 정보공개 청구했습니다.

일단, 집회 신고는 5130건입니다. 10년 1개월 동안 매일 1.4건 꼴로 신고한 셈입니다. 다른 기관의 집회 신고를 압도합니다.


집회 주최 기간을 모두 더하면, 6491일이었습니다. 10년이면 3,650일인데? 날짜를 마구 겹쳐서 신고했기 때문입니다. '물샐 틈 없는' 겹치기 집회 신고입니다.

준비성도 철저했습니다. 현대차는 평균 29.6일 앞서서 집회를 신고했습니다. 보통 현안에 대응해서 집회를 조직하는 것임을 생각하면, 놀라운 이슈 예측력입니다.

반면, 다른 노조나 시민단체들은 개최일 5일 전쯤에 집회를 신고했습니다.

■ 무엇을 위해 이렇게까지?

상식적으로 납득 하기 힘든 집회 신고입니다. 현대차는 왜 이렇게까지 집회 신고에 집착하는 걸까요.

만약, 시계를 10년 전으로 돌린다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기는 했습니다.

당시에는 누군가 집회 장소를 선점하면, 같은 장소에서 다른 집회가 열리는 걸 막을 수 있었습니다. 속칭 '알박기 집회'라고 불렀습니다.

집회의 자유를 해치는 꼼수였지만, 내로라하는 여러 대기업이 너나 할 것 없이 자주 동원했습니다. 2011년 KBS는 이 진풍경을 아래처럼 보도했습니다.

[연관 기사] 밤마다 웃지 못할 진풍경…‘유령집회’ 기승

비판이 쌓이면서 법이 바뀌었습니다. 2016년 집회시위법이 개정됐고, 중복 집회도 허용하기로 했습니다. 즉, 집회 장소를 선점해도, 다른 집회를 원천 차단할 수는 없게 된 것입니다.

그 이후 이른바 '알박기' 집회는 거의 사라졌습니다. 유독 눈에 띄게 남아 있는 곳이 현대차그룹 앞입니다.

현대차는 왜? 라는 의문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 현대차 "성숙한 집회 문화 위해"

현대차가 KBS에 보내온 공식 답변은 아래와 같습니다.

"사옥 주변에서 다른 집회가 반복되는 상황에서 성숙한 집회문화 정착을 요구하는 집회"
"정해진 절차와 방법에 따라 합법 진행하고 있으며, 타인의 집회를 방해할 목적은 없다"
- 현대차그룹 공식 답변

요약하면, 성숙한 집회가 무엇인지를 몸소 '시연'하려는 것이고, 다른 집회를 방해할 의도는 없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나 현대차의 의도가 무색하게도, 다른 집회들은 명백하게 방해받고 있었습니다.

개정된 집시법에 따라, 집회 자체가 원천 금지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다른 단체는 현대차 본사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밀려나서' 집회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집회신고를 하면, 자연스럽게 본사가 아니라 옆에 있는 하나로마트 인근으로 안내를 한다" - 노조 관계자

취재진은 실제로 현대차 본사 인근에 집회를 신고하러 갔습니다. 서초경찰서 담당자는 난감하다는 표정과 함께 아래와 같이 설명했습니다.

"본사 인근에 현대차가 집회를 늘 개최하고 있어, 최대 50명밖에 집회를 할 수 없다"
"여러 단체가 집회를 참여하게 되면, 현장에서 '조율'이 필요하다"
- 서초경찰서 집회 담당자

현대차 측의 초장기 집회 신고 때문에, 다른 집회는 인원을 제한받으며, 장소도 양보해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본사에서 최대한 떨어져서 집회를 열리게 하려고 이렇게까지? 라는 의심을 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 "미개최율 82%"

신고한 집회를 실제로 개최했는지를 따져보면, 그런 의심은 더 강해집니다.

KBS가 정보공개청구로 확보한 자료를 분석해보면, 2013년부터 2023년 1월까지 현대차 측 집회의 미개최율은 82%였습니다.

특히, 코로나가 계속됐던 최근 3년은 미개최율이 99%를 웃돌았습니다.

열지도 않을 집회를 계속 신고했다는 뜻으로 이해됩니다. 성숙한 집회문화를 '시연'하고자 했다는 현대차의 해명이 무색해집니다.

현대차는 경찰의 집계 오류라고 반박했습니다. "명백하게 집회를 열고 있는데, 경찰관이 현장에 오지 않아서 개최 사실을 파악하지 못한 것"이라고 해명했습니다.

이 해명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 힘든 이유가 있습니다. 현대차의 이른바 '전력' 때문입니다. 2018년과 2019년 KBS는 이런 현장을 고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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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위는 지난 1월 현대차의 집회를 '알박기'라고 판단했습니다. 사실 지난 10년간 여러 번 나온 판단을 다시 한번 반복한 셈입니다.

KBS는 최근 한 번 더 현대차의 이상한 집회를 지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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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차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글로벌 기업입니다. 지난해 완성차 업체 판매량에서 세계 TOP3에 들었습니다. 굴지의 기업 규모에 걸맞은 사회적 책임을 바라는 것은 과한 기대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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