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자해’와 미국의 ‘환영’, 한국의 ‘국익’

입력 2023.03.08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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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자해'한 일본

권석준의 [반도체 삼국지]의 주요 대목으로 일본이 단행한 2019년 수출규제의 귀결을 음미해보자.

"고순도 불화수소 업계의 최강자인 스텔라케미파는 전 세계 불화수소 시장의 70% 이상, 99.999% 이상의 고순도 불화수소 시장의 95% 이상을 일본의 모리타 화학과 양분하고 있다. 이 회사는 한국에 대한 수출 규제 조치가 발표되자 영업이익이 전년 대비 31.7% 급감했다. 고순도 불화수소가 규제조치에 포함되자 한국 반도체 업체들은 솔브레인, 램테크놀로지, 이엔에프테크놀로지 같은 한국 회사들로 빠르게 대체했고, 이 업체들의 영업이익은 전년 대비 각각 61.5%, 111.1%, 67.4% 상승했다."

"포토리지스트 전문 기업 JSR 역시 영업이익이 전년 대비 27.4% 줄어들었다. 플렉시블 반도체 기판의 핵심 재료이기도 한 고분자 소재 폴리이미드 전문기업인 스미토모화학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 회사의 경우 2019년 1,426억 엔에서 2020년 1,277억 엔으로 영업이익이 10.5% 급감했다. 한국 수출규제가 주원인이었다. 한국 반도체 업계는 대일본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공급망을 미국의 듀폰, 반도체 화학 소재 스타트업인 인프리아 등으로, 폴리이미드는 한국의 코오롱인더스트리와 SKC 등으로 다변화하고 있다."

"일본이 노렸던 한국 반도체 산업, 특히 그 뿌리부터 흔들려고 했던 소재, 부품, 장비 산업에 대한 공격은 오히려 일본 입장에서는 자국 기업들의 신뢰도 저하와 수익률 급감으로 이어지는 자충수가 되었다. 그 과정에서 한국은 오히려 이를 기회로 반도체 소재의 안정적 공급망을 단기에 회복하여 성공적으로 일본에 대한 반도체 소재 의존도를 낮추고 있는 형국이 이뤄지고 있다."

"한국으로 직접 수출을 못 하게 된 일본의 반도체 소재, 부품, 장비 회사들이 한국 진출을 추진하고 있다. 이미 2019년에는 간토덴카 공업 같은 중소규모 소재 회사가 한국 공장에서 생산을 개시했다. 다이요 홀딩스 같은 부품회사는 2020년 5월 한국에 신규로 400만 제곱미터 규모의 솔더 레지스트 공장을 세우기 위해 자회사 ‘다이요어드밴스트머티리얼’을 설립하겠다고 발표했다. 다이요는 반도체 초미세 패터닝 공정의 핵심 소재인 솔더 레지스트 분야에서 80~90%를 점유하는 세계적인 기업이다. …중략… 일본의 소재나 부품 업체들 입장에서는 비단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 같은 반도체 업체만이 아니라 향후 현대-기아차 그룹의 자율주행 자동차나 사물 인터넷 등 한국 시장이 더 성장할 여지가 크기 때문에 포기하기 어려울 것이다."

"2012년 일본 전자 반도체 대붕괴의 교훈이라는 책을 펴낸 유노가미 다카시 미세가공연구소 소장은 지난 2019년 8월의 대한국 수출 규제, 특히 반도체 산업 관련 소재, 부품, 장비 수출 규제정책은 그렇지 않아도 그 영향력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 일본의 반도체 산업이 아예 빠르면 5년 이내로 소멸할 위기를 자초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다."

정리하자면 2019년, 일본은 스스로 국익을 해치는 결정을 내렸었다.

■ 2023, 두 팔 벌려 환영하는 미국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대법원 판결과 관련한 우리 정부 해법에 미국은 분명한 환영의 의사를 표현했다. 그냥 환영이 아니고 두 팔 벌린 환영이다. '한일관계의 새로운 장을 여는 획기적인 사건(a groundbreaking new chapter)'이라고도 표현했다. 정작 한국 내에선 여론 지형이 양분돼 논란이 큰 점을 고려하면 선뜻 이해하기 힘들 정도의 격한 환영이다.


이유는 단순하다. 미국의 국익이란 렌즈로 아시아의 역사 문제를 바라봐서다. 대중국 전략에서 차지하는 이해관계의 틀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즉, 미국은 한·일 협력이 절실한 나라다. 동아시아의 동맹국들이 긴밀히 협력할 때, 국익이 극대화되는 전략 수립이 가능해서다.

과거에는 이 질서가 실제로 '윈윈', 한·미 ·일 모두가 행복한 결과로 이어졌다. 실제로 한국은 미국이 만든 질서에 순응해서 부강해진 나라다. 한국만이 아니다. 일본도 그렇다. 전쟁에선 미국에 패했지만, 이후 미국의 동아시아 질서 핵심 동맹국이 되었다. 그리고 미국의 지원 아래 세계적인 경제 대국이 되었다. 한국전쟁 중에 체결된 샌프란시스코 조약(1951)이 그 기틀이 되었다. 미국 동아시아 전략의 기본이 된 '일본 모델'이다.

미국은 한국도 이 질서의 하위 파트너로 초대했다. 그 과정에서 한·일 수교(1965)를 촉진했다. 한일 수교가 일종의 '맞선'이라면, 그 주선자가 미국이었다. 그리고 여기에 지금 논란의 한 가운데에 있는 한일 청구권협정(1965)이라는 협의가 등장한다.

식민지배를 명확히 사과하지 않는 국가와 맺은 협정이다. '과거에 대한 책임은 여기까지'라고 국가 간에 합의하면서, 5억 달러에 달하는 유·무상 지원을 받았다. 이 돈은 한국 경제의 산업 기반을 다지는 자금이 되었다.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한국 경제성장의 한 시발점이다. 세계 질서의 판을 짜고 싶어 하는 미국이 원했고, 한국에는 경제적 이익이 되었다. 여기까지는 가치 판단이 결부되지 않는 사실의 영역에 속한다.

사실 타이완도 한국과 유사한 위상에서 이 지역 질서의 하위 파트너가 되었다. 바츨라프 스밀은 [대전환]에서 '타이완은 초반에 비싸지 않은 소비재에 집중한 뒤 빠르게 고부가가치 전자제품으로 눈을 돌렸고, 한국은 대규모 선박 건조와 자동차 제조 그리고 대기업들(삼성, 현대, LG)을 통한 전기 전자 제품 생산에 집중했다'고 정리했다. 그러니까 일본과 한국과 타이완의 경제적 성공은 미국이 짠 동아시아 질서 판 아래에서 벌어진 일이다. 싱가포르와 태국, 말레이시아도, 최근에는 인도네시아, 베트남에도 이 모델의 영향권에 있다.

미국은 지금도 똑같은 질서를 요청한다. 냉전기 소련에 대항하는 전선을 짤 때나, 지금 중국에 대항하는 전선을 짤 때나 단결을 요구하기는 마찬가지다. 쿼드나 IPEF가 그 대표적 틀이다. 그리고 이 질서에서 가장 중요한 나라는 그때도 지금도 일본이다. 그러니 한국의 '구체제 복귀' 결정은 미국의 국익 차원에서 얼마나 환영할 만한 일인가.

'미국의 우선순위는 확실했다. 전쟁은 철저히 과거의 일, 일본이 전쟁 배상 요구에 모두 응할 필요도 없다고 봤다. 타이완은 일본과의 국교수립(1952)을 논의하면 전쟁 배상을 요구했으나 미국의 압박으로 결국 뜻을 철회했다.'
[미국, 새로운 동아시아 질서를 꿈꾸는가], 리처드 맥그레거

■ 2023, 한국의 국익

산업화 이전 한국의 국익은 미국이나 일본의 국익과 대체로 일치했다. 명확한 사과보다 당장의 경제 지원이 급했다. 미국의 안보 지원도 절실했다. 약간 못마땅한 점이 있더라도 그들의 이익에 따라주는 것이 나았다. 우리의 국익 차원에서 그랬다.

강제징용 대법원 판결에 대한 우리 정부 해법 앞에서 되물어야 할 것도 그런 국익이다. 지금도 우리의 국익이 미국이나 일본의 그것과 큰 틀에서 일치하는가.

당장 일본이 수출규제를 해제하니 국익이라는 평가가 있다. KBS와의 인터뷰에서 박재근 한국 반도체 디스플레이 기술 학회장도 "일본 정부가 관여하거나 정치가 관여를 해서 또 공급을 못 하는 불상사가 생길 수 있는 위험이 있다. 그 위험을 완전히 제거했다는 건 큰 의미가 있다."고 평가했다. 작지만, 성과라면 성과일 수 있다. 그러나 앞서 음미했듯, 수출규제는 일본의 자해로 귀결됐다. 같은 조치가 반복될 가능성은 일본의 국익 차원에서 크지 않다. 오히려 일본이 아무런 양보를 하지 않은 가운데, WTO 제소를 통해 국제법적 판단을 받아보는 절차를 중단한 점이 향후 우리에게 불확실성이 될 수 있다는 비판도 있다.

미국이 원하는 동아시아 경제 안보의 틀이 우리 국익과 일치하는지도 물어야 한다. 반도체나 전기차, 배터리 공급망 분리 정책을 생각해보면 된다. 첨단 반도체나 주력 제품은 중국에서 만들지 말고, 미국에 첨단 공장을 지으라는 요구(미국의 CHIPS 법안이 요구하는 사항이다)가 생산한 반도체의 절반을 중국에 팔아 살아가는 한국의 국익과 일치하나. 중국산 부품과 소재를 사용한 배터리를 장착한 전기차에는 보조금을 지급하지 않는다며, 기존의 공급망을 바꾸고 미국이나 북미에서 최종 조립하라는 요구(미국의 IRA법안이 요구하는 사항이다)는 한국의 국익과 일치하나. 나아가 한·일을 최전선으로 하는 '대결적 대중 정책'에 적극 호응하는 것이 정부 당국이 나서서 "반도체 수출 회복 없이는 올해 경제 회복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2023년 한국의 국익과 일치하는지 물어야 한다.


답은 쉽지 않다.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과거에는 단순했던 국익 방정식이 복잡해진 것이다.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한국이 큰 나라가 됐기 때문이다.

경제는 인구 5,000만 이상인 나라 가운데 일 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 이상을 달성한 손에 꼽을만한 나라가 됐다. 1인당 국민소득은 이미 일본에 근접했고(실질 기준이나 근로자 임금 기준으로는 이미 추월했다.), 첨단산업 분야의 존재감은 일본을 능가한다. 음악과 영화, 그 외 문화적 존재감에서는 그보다 더 강렬하다. 제국주의 시기를 식민지로 경험한 국가 가운데 한국처럼 성장한 나라는 없다.

게다가 한국은 제도적 민주화에서도 거대한 진전을 거뒀다. 엄격한 서구적 잣대를 들이대도 '제도적 민주주의'를 제대로 실현하는 몇 안 되는 국가다. 국민들의 공정과 상식, 정의에 대한 열망은 연이은 정권 교체로 이어질 정도로 강력하다. 정리되지 못한 과거사의 잘못을 바로잡는 법적 조치 역시 피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반면 장기 경기 침체 속에서 자신감을 잃은 일본은 자민당 장기 집권을 반복하며 우경화로 나아가고 있다. “중국이 요구할 때마다 사과하자. 돈이 드는 것도 아니고, 나중에 가면 중국이 제풀에 지쳐 사과를 요구하지 않을 것이다(타케시타 노보루)”던 90년대의 일본과 “앞으로 우리의 자녀와 손주, 이후에 이어질 세대가 전쟁과 아무런 관련이 없음에도 사과하도록 강요받아서는 안 된다. (아베 신조)”는 지금의 일본은 다른 나라다. (맥그레거, 같은 책)

이 우경화된 나라는 성장한 한국을 보며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 타이완 반도체 업체에 막대한 지원을 하면서까지, 자국의 반도체 산업을 추월한 한국 견제에 나서고 있다. 실패로 끝나 허울만 남은 2019년의 수출규제 조치를 철회하지도 않았다. 미국의 보호 아래 제대로 반성하지 않고 흘려 보냈던 과거사 숙제가 돌아올 때마다 더 강하게 반발한다. 다 한국을 향한 위기감과 무관치 않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의 일방적 양보로 맺어진 화해가 호혜적인 협력, 나아가 우리의 국익으로 이어질지 가늠하기는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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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의 ‘자해’와 미국의 ‘환영’, 한국의 ‘국익’
    • 입력 2023-03-08 08:00:12
    취재K

■ 2019년 '자해'한 일본

권석준의 [반도체 삼국지]의 주요 대목으로 일본이 단행한 2019년 수출규제의 귀결을 음미해보자.

"고순도 불화수소 업계의 최강자인 스텔라케미파는 전 세계 불화수소 시장의 70% 이상, 99.999% 이상의 고순도 불화수소 시장의 95% 이상을 일본의 모리타 화학과 양분하고 있다. 이 회사는 한국에 대한 수출 규제 조치가 발표되자 영업이익이 전년 대비 31.7% 급감했다. 고순도 불화수소가 규제조치에 포함되자 한국 반도체 업체들은 솔브레인, 램테크놀로지, 이엔에프테크놀로지 같은 한국 회사들로 빠르게 대체했고, 이 업체들의 영업이익은 전년 대비 각각 61.5%, 111.1%, 67.4% 상승했다."

"포토리지스트 전문 기업 JSR 역시 영업이익이 전년 대비 27.4% 줄어들었다. 플렉시블 반도체 기판의 핵심 재료이기도 한 고분자 소재 폴리이미드 전문기업인 스미토모화학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 회사의 경우 2019년 1,426억 엔에서 2020년 1,277억 엔으로 영업이익이 10.5% 급감했다. 한국 수출규제가 주원인이었다. 한국 반도체 업계는 대일본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공급망을 미국의 듀폰, 반도체 화학 소재 스타트업인 인프리아 등으로, 폴리이미드는 한국의 코오롱인더스트리와 SKC 등으로 다변화하고 있다."

"일본이 노렸던 한국 반도체 산업, 특히 그 뿌리부터 흔들려고 했던 소재, 부품, 장비 산업에 대한 공격은 오히려 일본 입장에서는 자국 기업들의 신뢰도 저하와 수익률 급감으로 이어지는 자충수가 되었다. 그 과정에서 한국은 오히려 이를 기회로 반도체 소재의 안정적 공급망을 단기에 회복하여 성공적으로 일본에 대한 반도체 소재 의존도를 낮추고 있는 형국이 이뤄지고 있다."

"한국으로 직접 수출을 못 하게 된 일본의 반도체 소재, 부품, 장비 회사들이 한국 진출을 추진하고 있다. 이미 2019년에는 간토덴카 공업 같은 중소규모 소재 회사가 한국 공장에서 생산을 개시했다. 다이요 홀딩스 같은 부품회사는 2020년 5월 한국에 신규로 400만 제곱미터 규모의 솔더 레지스트 공장을 세우기 위해 자회사 ‘다이요어드밴스트머티리얼’을 설립하겠다고 발표했다. 다이요는 반도체 초미세 패터닝 공정의 핵심 소재인 솔더 레지스트 분야에서 80~90%를 점유하는 세계적인 기업이다. …중략… 일본의 소재나 부품 업체들 입장에서는 비단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 같은 반도체 업체만이 아니라 향후 현대-기아차 그룹의 자율주행 자동차나 사물 인터넷 등 한국 시장이 더 성장할 여지가 크기 때문에 포기하기 어려울 것이다."

"2012년 일본 전자 반도체 대붕괴의 교훈이라는 책을 펴낸 유노가미 다카시 미세가공연구소 소장은 지난 2019년 8월의 대한국 수출 규제, 특히 반도체 산업 관련 소재, 부품, 장비 수출 규제정책은 그렇지 않아도 그 영향력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 일본의 반도체 산업이 아예 빠르면 5년 이내로 소멸할 위기를 자초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다."

정리하자면 2019년, 일본은 스스로 국익을 해치는 결정을 내렸었다.

■ 2023, 두 팔 벌려 환영하는 미국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대법원 판결과 관련한 우리 정부 해법에 미국은 분명한 환영의 의사를 표현했다. 그냥 환영이 아니고 두 팔 벌린 환영이다. '한일관계의 새로운 장을 여는 획기적인 사건(a groundbreaking new chapter)'이라고도 표현했다. 정작 한국 내에선 여론 지형이 양분돼 논란이 큰 점을 고려하면 선뜻 이해하기 힘들 정도의 격한 환영이다.


이유는 단순하다. 미국의 국익이란 렌즈로 아시아의 역사 문제를 바라봐서다. 대중국 전략에서 차지하는 이해관계의 틀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즉, 미국은 한·일 협력이 절실한 나라다. 동아시아의 동맹국들이 긴밀히 협력할 때, 국익이 극대화되는 전략 수립이 가능해서다.

과거에는 이 질서가 실제로 '윈윈', 한·미 ·일 모두가 행복한 결과로 이어졌다. 실제로 한국은 미국이 만든 질서에 순응해서 부강해진 나라다. 한국만이 아니다. 일본도 그렇다. 전쟁에선 미국에 패했지만, 이후 미국의 동아시아 질서 핵심 동맹국이 되었다. 그리고 미국의 지원 아래 세계적인 경제 대국이 되었다. 한국전쟁 중에 체결된 샌프란시스코 조약(1951)이 그 기틀이 되었다. 미국 동아시아 전략의 기본이 된 '일본 모델'이다.

미국은 한국도 이 질서의 하위 파트너로 초대했다. 그 과정에서 한·일 수교(1965)를 촉진했다. 한일 수교가 일종의 '맞선'이라면, 그 주선자가 미국이었다. 그리고 여기에 지금 논란의 한 가운데에 있는 한일 청구권협정(1965)이라는 협의가 등장한다.

식민지배를 명확히 사과하지 않는 국가와 맺은 협정이다. '과거에 대한 책임은 여기까지'라고 국가 간에 합의하면서, 5억 달러에 달하는 유·무상 지원을 받았다. 이 돈은 한국 경제의 산업 기반을 다지는 자금이 되었다.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한국 경제성장의 한 시발점이다. 세계 질서의 판을 짜고 싶어 하는 미국이 원했고, 한국에는 경제적 이익이 되었다. 여기까지는 가치 판단이 결부되지 않는 사실의 영역에 속한다.

사실 타이완도 한국과 유사한 위상에서 이 지역 질서의 하위 파트너가 되었다. 바츨라프 스밀은 [대전환]에서 '타이완은 초반에 비싸지 않은 소비재에 집중한 뒤 빠르게 고부가가치 전자제품으로 눈을 돌렸고, 한국은 대규모 선박 건조와 자동차 제조 그리고 대기업들(삼성, 현대, LG)을 통한 전기 전자 제품 생산에 집중했다'고 정리했다. 그러니까 일본과 한국과 타이완의 경제적 성공은 미국이 짠 동아시아 질서 판 아래에서 벌어진 일이다. 싱가포르와 태국, 말레이시아도, 최근에는 인도네시아, 베트남에도 이 모델의 영향권에 있다.

미국은 지금도 똑같은 질서를 요청한다. 냉전기 소련에 대항하는 전선을 짤 때나, 지금 중국에 대항하는 전선을 짤 때나 단결을 요구하기는 마찬가지다. 쿼드나 IPEF가 그 대표적 틀이다. 그리고 이 질서에서 가장 중요한 나라는 그때도 지금도 일본이다. 그러니 한국의 '구체제 복귀' 결정은 미국의 국익 차원에서 얼마나 환영할 만한 일인가.

'미국의 우선순위는 확실했다. 전쟁은 철저히 과거의 일, 일본이 전쟁 배상 요구에 모두 응할 필요도 없다고 봤다. 타이완은 일본과의 국교수립(1952)을 논의하면 전쟁 배상을 요구했으나 미국의 압박으로 결국 뜻을 철회했다.'
[미국, 새로운 동아시아 질서를 꿈꾸는가], 리처드 맥그레거

■ 2023, 한국의 국익

산업화 이전 한국의 국익은 미국이나 일본의 국익과 대체로 일치했다. 명확한 사과보다 당장의 경제 지원이 급했다. 미국의 안보 지원도 절실했다. 약간 못마땅한 점이 있더라도 그들의 이익에 따라주는 것이 나았다. 우리의 국익 차원에서 그랬다.

강제징용 대법원 판결에 대한 우리 정부 해법 앞에서 되물어야 할 것도 그런 국익이다. 지금도 우리의 국익이 미국이나 일본의 그것과 큰 틀에서 일치하는가.

당장 일본이 수출규제를 해제하니 국익이라는 평가가 있다. KBS와의 인터뷰에서 박재근 한국 반도체 디스플레이 기술 학회장도 "일본 정부가 관여하거나 정치가 관여를 해서 또 공급을 못 하는 불상사가 생길 수 있는 위험이 있다. 그 위험을 완전히 제거했다는 건 큰 의미가 있다."고 평가했다. 작지만, 성과라면 성과일 수 있다. 그러나 앞서 음미했듯, 수출규제는 일본의 자해로 귀결됐다. 같은 조치가 반복될 가능성은 일본의 국익 차원에서 크지 않다. 오히려 일본이 아무런 양보를 하지 않은 가운데, WTO 제소를 통해 국제법적 판단을 받아보는 절차를 중단한 점이 향후 우리에게 불확실성이 될 수 있다는 비판도 있다.

미국이 원하는 동아시아 경제 안보의 틀이 우리 국익과 일치하는지도 물어야 한다. 반도체나 전기차, 배터리 공급망 분리 정책을 생각해보면 된다. 첨단 반도체나 주력 제품은 중국에서 만들지 말고, 미국에 첨단 공장을 지으라는 요구(미국의 CHIPS 법안이 요구하는 사항이다)가 생산한 반도체의 절반을 중국에 팔아 살아가는 한국의 국익과 일치하나. 중국산 부품과 소재를 사용한 배터리를 장착한 전기차에는 보조금을 지급하지 않는다며, 기존의 공급망을 바꾸고 미국이나 북미에서 최종 조립하라는 요구(미국의 IRA법안이 요구하는 사항이다)는 한국의 국익과 일치하나. 나아가 한·일을 최전선으로 하는 '대결적 대중 정책'에 적극 호응하는 것이 정부 당국이 나서서 "반도체 수출 회복 없이는 올해 경제 회복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2023년 한국의 국익과 일치하는지 물어야 한다.


답은 쉽지 않다.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과거에는 단순했던 국익 방정식이 복잡해진 것이다.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한국이 큰 나라가 됐기 때문이다.

경제는 인구 5,000만 이상인 나라 가운데 일 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 이상을 달성한 손에 꼽을만한 나라가 됐다. 1인당 국민소득은 이미 일본에 근접했고(실질 기준이나 근로자 임금 기준으로는 이미 추월했다.), 첨단산업 분야의 존재감은 일본을 능가한다. 음악과 영화, 그 외 문화적 존재감에서는 그보다 더 강렬하다. 제국주의 시기를 식민지로 경험한 국가 가운데 한국처럼 성장한 나라는 없다.

게다가 한국은 제도적 민주화에서도 거대한 진전을 거뒀다. 엄격한 서구적 잣대를 들이대도 '제도적 민주주의'를 제대로 실현하는 몇 안 되는 국가다. 국민들의 공정과 상식, 정의에 대한 열망은 연이은 정권 교체로 이어질 정도로 강력하다. 정리되지 못한 과거사의 잘못을 바로잡는 법적 조치 역시 피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반면 장기 경기 침체 속에서 자신감을 잃은 일본은 자민당 장기 집권을 반복하며 우경화로 나아가고 있다. “중국이 요구할 때마다 사과하자. 돈이 드는 것도 아니고, 나중에 가면 중국이 제풀에 지쳐 사과를 요구하지 않을 것이다(타케시타 노보루)”던 90년대의 일본과 “앞으로 우리의 자녀와 손주, 이후에 이어질 세대가 전쟁과 아무런 관련이 없음에도 사과하도록 강요받아서는 안 된다. (아베 신조)”는 지금의 일본은 다른 나라다. (맥그레거, 같은 책)

이 우경화된 나라는 성장한 한국을 보며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 타이완 반도체 업체에 막대한 지원을 하면서까지, 자국의 반도체 산업을 추월한 한국 견제에 나서고 있다. 실패로 끝나 허울만 남은 2019년의 수출규제 조치를 철회하지도 않았다. 미국의 보호 아래 제대로 반성하지 않고 흘려 보냈던 과거사 숙제가 돌아올 때마다 더 강하게 반발한다. 다 한국을 향한 위기감과 무관치 않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의 일방적 양보로 맺어진 화해가 호혜적인 협력, 나아가 우리의 국익으로 이어질지 가늠하기는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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